김득신 (시인)
백곡 김득신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문신으로, '지독한 노력'의 화신으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임진왜란의 영웅 김시민 장군의 손자이자 경상도 관찰사 김치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아 지각이 발달하지 못해 둔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한 권의 책을 수만 번에서 수십만 번씩 반복해서 읽는 유례없는 노력을 통해 59세의 늦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는 집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시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로부터 격찬을 받았으며, 머리가 나빠도 끝까지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교훈을 후세에 남긴 전설적인 노력파 지식인입니다.
연표
1604
본관은 안동이며 부친은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김치입니다.
명문가 자제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천연두를 심하게 앓아 지적 발달이 매우 늦었습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자신의 우둔함을 인정하면서도 노력의 가치를 증명하기 시작했습니다.
1613
주변에서는 그의 우둔함을 비웃었으나 부친 김치는 그를 다그치지 않고 기다려 주었습니다.
부친은 '너는 늦게 이루어질 것이니 실망하지 말고 부지런히 읽으라'고 격려했습니다.
이러한 부친의 믿음은 김득신이 평생에 걸쳐 독서에 매진하게 된 정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1630
그는 사기(史記)의 '백이전'을 무려 11만 3천 번이나 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책을 읽은 횟수를 기록하는 '독수기(讀數記)'를 남길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했습니다.
1만 번 이상 읽은 책만 해도 수십 권에 달하며 이는 조선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기록입니다.
1642
보통 사람이라면 포기했을 나이에 첫 관문을 통과하며 끈기를 증명했습니다.
생원이 된 후에도 그는 만족하지 않고 대과를 향한 학업과 시 짓기에 더욱 매진했습니다.
이 시기 이미 그의 시문은 학계에서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1650
이식, 택당 이정구 등 대문장가들로부터 그의 시가 매우 신선하고 맑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의 시는 인위적인 기교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감정을 담았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남들보다 느린 만큼 사물을 깊게 관찰하는 능력이 탁월하여 남다른 시적 경지를 보여주었습니다.
1659
환갑을 앞둔 나이에 대과에 합격한 사건은 당시 선비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우둔한 사람도 끝까지 노력하면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산증인이 된 순간입니다.
효종 임금은 그의 급제 소식을 듣고 그의 노력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1661
과거 급제 후 능력을 인정받아 청요직이라 불리는 주요 관직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나이는 많았으나 성품이 겸손하고 학문이 깊어 동료 관리들의 신망이 두터웠습니다.
그는 관직 생활 중에도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습관을 유지했습니다.
1662
자신이 겪었던 배움의 어려움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인내와 반복의 미학을 전수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그의 전설적인 독서 일화에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1665
학문뿐만 아니라 실무 능력에 있어서도 성실함을 바탕으로 공무를 수행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관직 생활이었으나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귀감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도 틈틈이 시를 지으며 관직 생활의 소회를 문학으로 승화시켰습니다.
1668
왕의 잘못을 간하고 정치의 잘잘못을 가리는 자리에서 강직한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글은 명료하고 논리적이어서 상소문이나 간언에서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당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선비 정신을 유지했습니다.
1671
역사학적 지식이 방대하여 국가적 학술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반복 독서를 통해 얻은 깊은 식견은 임금의 질문에 답할 때 빛을 발했습니다.
학자로서의 명성이 최고조에 달하며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은 시기입니다.
1673
현종 시대에 중용되어 국가의 기밀을 다루고 어명을 전달하는 요직을 거쳤습니다.
비록 시작은 늦었으나 관직 생활의 정점에 도달하며 대기만성의 전형을 보여주었습니다.
임금과 직접 대면하며 국정 현안을 논의하는 중책을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1675
숙종 초기에 임명되어 왕실의 각종 의례와 행정 업무를 매끄럽게 처리했습니다.
관직이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품은 더욱 겸손해져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성실한 업무 태도는 젊은 관리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1678
임금의 명령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각 부처 간의 조율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복잡한 국정 현안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원칙을 지키는 관료로서의 자세를 보였습니다.
이 시기에도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 문학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681
실무 행정의 책임자로서 국가의 주요 건설 사업들을 꼼꼼하게 관리했습니다.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직접 챙기는 등 열정적인 공직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의 성실함은 관직 생활 내내 변치 않는 그의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1682
평생에 걸쳐 지은 수천 수의 시 중에서 정수를 뽑아 수록했습니다.
조선 후기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그의 작품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습니다.
후대 문인들은 이 문집을 통해 그의 시 세계와 지독한 노력의 과정을 연구하게 됩니다.
1683
평생을 노력과 성실로 살아온 그에게 국가가 내린 최고의 예우였습니다.
80세의 고령에 이른 그는 명예직으로서 국가의 자문 역할을 지속했습니다.
그의 가문은 그를 통해 다시금 조선의 명문가로서 위상을 확고히 했습니다.
1684
충청북도 증평군 괴산 근처에 안치되었으며, 임금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죽기 전에도 후손들에게 공부는 끝이 없으니 게을리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그가 생전에 남긴 유명한 독서의 글귀들이 새겨져 후세에 교훈을 줍니다.
1720
임금은 '김득신은 문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 정성이 실로 가상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이후 김득신은 단순한 시인을 넘어 조선 최고의 노력하는 지식인의 표상으로 각인되었습니다.
그의 일화는 조선 후기 수많은 선비들에게 학문의 자세를 가르치는 교재가 되었습니다.
2013
증평군에서는 그를 기리는 '독서왕 김득신 문학관'을 건립하여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매년 독서 관련 축제와 행사들이 열리며 그의 지독한 노력의 가치를 현대인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학습 부진아나 늦깎이 공부를 시작한 사람들에게 그는 여전히 최고의 멘토로 추앙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