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연표
1568
[의병장 김덕령 출생]
임진왜란 시기 의병장 김덕령이 전라도 광주 무등산 아래 석저촌에서 김붕섭과 남평 반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집안에서 어려서부터 글공부와 함께 무등산에서 무예를 익혔다.
김덕령은 1568년(선조 원년) 음력 12월 29일(양력 1569년 1월 15일) 전라도 광주 무등산 아래 석저촌(현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성안마을에서 아버지 김붕섭과 직장 반계종의 딸인 어머니 남평 반씨의 3남 3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덕홍과 누나 3명이, 아래로는 아우 덕보가 있다. 집안이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여 유업에 종사했으며, 어려서부터 종조부 사촌 김윤제의 별장인 환벽당에서 글공부하며 유아를 쌓기 시작했고, 무등산에서 말타기와 칼쓰기 등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1589
[기축옥사 발생과 서인 세력 연루]
조정에서 서인과 동인의 정권 싸움이 치열한 가운데 정여립의 난이 일어났다. 서인의 좌의정 정철이 재판장으로서 동인의 과격파 이발 등 1천여 명을 숙청하는 기축옥사를 일으켰다. 김덕령은 스승 성혼의 제자로서 서인 계열에 속했으며, 정철과는 동향이어서 훗날 동인 출신 대간들로부터 탄핵받는 빌미가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서인과 동인의 정권 싸움이 치열하였는데, 이런 가운데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서인의 좌의정 정철이 위관으로서 동인의 과격파 이발 등 1천여 명을 숙청하는 기축옥사를 일으키며, 이로 말미암아 동인의 원망을 크게 샀다. 김덕령은 성혼의 제자로서 서인 계열에 속하였고, 정철과는 동향이었으므로, 뒷날 동인 출신 대간들로부터 의병장 김덕령이 군율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여 군사를 죽였다고 탄핵받기도 하였다.
1592
[임진왜란 발발 및 의병 활동 시작]
김덕령이 25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형 김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을 찾아갔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로 고향 광주로 귀향했다. 이후 무등산에서 무예를 닦고 무기를 만들어 후방에서 관병과 의병 활동을 지원했다.
1592년(선조 25년)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3일) 김덕령이 25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6월에 김덕령은 형 김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을 찾아가서 박광옥 등과 함께 그의 막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며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고향 광주로 귀향하였다. 무등산에서 무예를 닦고, 주검동에서 무기를 만들어 전쟁터로 보급하는 등 후방에서 관병·의병 활동을 지원하였다.
[형 김덕홍, 금산전투에서 전사]
임진왜란 중 형 김덕홍이 제1차 금산전투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나라의 수치와 형의 원수를 생각하며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굳혔다.
다음 달 음력 7월 10일(양력 8월 16일) 형 김덕홍이 제1차 금산전투에서 호남을 침범하려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형 덕홍이 전사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자, 나라의 수치와 형의 원수를 생각하며 날을 지내었다. 마침내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의병을 모아 거병하였다.
1593
[노모 사망 후 의병 재거병 결심]
노모마저 세상을 떠나자 매형 김응회와 송제민의 권유, 아우 김덕보가 삼년상을 치르기로 하며 김덕령은 의병 재거병을 결심했다. 이정암 전라도 관찰사의 권면도 이어졌다.
그해 8월 노모마저 세상을 떠났다. 상중임에도 그의 매형인 김응회와 종조부 김윤경의 외손자인 송제민이 의병을 일으키라 권하고, 아우 김덕보가 대신 삼년상을 치르기로 하자 거병을 결심한다. 10월에는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 등이 천거하여 그에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이 직접 찾아와서 국가의 위급함을 구제하도록 권면하였다.
[담양에서 의병 재조직]
친구 최담령 등 수십 명과 함께 담양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논밭을 팔아 무기를 마련하고 격문을 띄워 정병 1천여 명을 모았다.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 등 현직 관료와 지역 유지들도 적극 도왔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그해 음력 11월 4일(양력 12월 6일) 친구 최담령 등 수십 명과 함께 다시 의병을 담양에서 일으키고, 논밭을 팔아 무기를 마련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군사를 모집하니, 정병이 1천여 명이 모였다. 현직 관료인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도 김덕령을 적극 도와주었다. 관내의 병역기피자들을 색출하여 의병에 편입시키었고, 전쟁 물자를 많이 지원하여 주었다. 지역 유지들도 적극 도왔다. 송제민은 제주도까지 가서 말을 가져왔으며, 고봉 기대승의 아들 함재 기효증은 김덕령 의병의 도유사가 되어 각 지방에 통문을 보내어 양곡을 모았다. 김덕령의 친척인 김응회, 이인경,김언욱, 김존경, 김덕후 등도 큰 역할을 하였다.
1594
[선조에게 '충용장' 군호 수여]
비변사의 건의를 통해 선조는 김덕령에게 '충용장' 및 '충용군'의 군호를 내렸고, 이틀 뒤 선전관과 좌랑 벼슬까지 제수했다. 이는 김덕령에 대한 선조의 큰 기대를 보여주는 조치였다.
비변사는 급히 선조에게 김덕령의 군대에 초승군이라 칭하고 기치를 내리기를 청하나, 선조는 아직 김덕령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큰 공이 없으니, 기치를 내리는 일은 신중히 하라고 명한다. 이틀 뒤, 1594년 음력 1월 1일(양력 1월 21일) 선조는 충용장(忠勇將) 및 충용군(忠勇軍)의 군호를 내리지만, 기치를 내리는 일은 보류한다. 1594년 음력 1월 5일 선조는 김덕령을 선전관과 좌랑의 벼슬을 내린다. 이때 아직 군공이 없다는 이유로 고관에 제수하지는 못하였다. 당시 사정이 급박하다고는 하나, 선조가 직접 군호를 내리고 교지까지 남겼다는 것은 김덕령에 대한 선조의 기대가 컸음을 뜻한다.
[세자 광해군에게 '익호장' 군호 수여]
담양부사 이경린의 주선으로 전라도 삼례에서 세자 광해군을 만나 무예 시범을 보였다. 흡족해한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이라는 칭호와 함께 군기를 수여받았다. 이후 도원수 권율에게서 '초승장' 군호도 받았다.
1593년 음력 12월 22일(양력 1594년 1월 22일) 김덕령은 담양부사 이경린의 주선으로 전라도 삼례에서 세자 광해군을 만나게 된다. 당시 세자는 무군사를 이끌고 군인과 백성들을 위로하고 장수를 모집하려고 전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음력 12월 27일 분조의 광해군은 전주 과거시험장에서 주재하였다. 김덕령은 수많은 수험생 앞에서 무예 시범을 보임으로써 국가와 백성들이 인정하는 장수가 되었다. 김덕령이 보인 무술 시범을 보고 흡족한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이라는 칭호와 함께 군기를 수여받았다. 이후 김덕령은 도원수 권율에게도 그간의 경과와 군사상황을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권율은 김덕령에게 초승장(超乘將)의 군호와 초승군이란 표장을 내린다.
[3천 의병 이끌고 경상도로 출병]
충용장 군호를 받은 김덕령은 선조의 소명 대신 무군사의 명을 받아 경상도로 떠났다. 3천여 명의 전라도 의병을 거느리고 담양에서 출발하여 순창, 남원을 거쳐 경상도 함양으로 향했다.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일본군 토벌 계책을 논의했다.
1594년(선조 27년) 1월초 충용장 군호를 받은 김덕령은 곧바로 서울로 가서 선조의 소명을 받아야 했으나, 사정이 급박하여 김덕령은 무군사의 명을 받아 경상도로 떠난다. 음력 1월 5일 선조는 김덕령을 선전관과 정6품 좌랑의 벼슬을 내린다. 음력 1월 6일 김덕령은 장성 임암산성과 담양 금성산성에서 훈련하고 있는 군사들을 모두 담양 추성관으로 모이게 하였다. 격문을 띄우고 김덕령은 담양에서 대기하며 추가로 모병하여 병력이 3천에 이르렀다. 음력 1월 22일(양력 2월 10일) 김덕령의 충용군은 3천여 명의 전라도 의병을 거느리고 군량미 3천 석을 실은 후 전라도 담양에서 출발하여 순창을 거쳐 남원을 머문다. 충용군은 경상도 함양에 도착하여 도원수 권율 막하에 가서 도착 보고를 하고 일본군을 토벌할 계책을 논의했다.
[팔도 의병 총사령관 임명]
선조는 각도의 모든 의병을 혁파하는 정책을 시행하며 임계영, 변사정, 정인홍의 의병을 충용군에 소속시켰다. 이에 김덕령은 28세(만 26세)의 나이로 팔도 의병 총대장에 임명되어 곽재우와 함께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 경상도 서부 지방 방어 임무를 맡았다.
그 무렵 1594년 4월에 선조는 각도의 모든 의병을 혁파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임계영의 전라좌의병, 변사정의 적개의병 그리고 정인홍의 경상도 의병들을 해산하거나 그 일부를 모두 충용군에 소속시키었고, 그에 따라 김덕령은 나이 28세(만26세)에 의병 총대장에 임명되어, 조방장 곽재우와 함께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 경상도 서부 지방 방어 임무를 맡았다.
[장문포 해전 참전, 부진한 활약으로 실망 안김]
이순신, 원균, 곽재우 등과 장문포 수륙 연합전에 참가했다. 도원수 권율의 명령을 받아 선봉장으로 참전했으나, 각기증(脚氣症)으로 인해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이 전투의 실패로 조정의 기대와 신망을 잃게 되었다.
1594년(선조 27년)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장문포에서 충무공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 육병장 곽재우 등과 수륙 연합전에 참가했다. 김덕령은 도원수 권율로부터 9월 27일까지 견내량으로 모여 장문포 전투에 참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26일에 8백여 병사를 거느리고 도착한다. 당시 충용장 김덕령은 선봉장으로 장문포 전투에 참전하였으나, 10월에는 각기증(다리 힘이 약해지는 질환)에 들어 전투에서 그다지 활약하지 못하였다. 장문포 전투에서 수륙합동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도체찰사 윤두수가 체직되고, 김덕령도 조정과 여러 사람으로부터 기대를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고성 전투에서 50여 명 구출]
권율 휘하에서 경상도 고성 지방 일본군 2백여 명과 맞섰다. 직접적인 적살은 없었으나, 잡혀가던 조선인 50여 명을 성공적으로 구출하는 공을 세웠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김덕령의 유일한 전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뒤에 김덕령과 충용군은 음력 9월 2일(양력 10월 14일) 권율 휘하에서 경상도 고성 지방에서 일본군 2백여 명과 맞서, 김덕령을 비롯한 2백여 명이 매복하여 싸워 단 한 명도 베지 못하였으나, 잡혀가던 사람 50여 명을 남김없이 구하여 데려오는 공을 세운다. 이것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유일한 전공이다.
1595
[군율 적용 과실로 살인죄 투옥 (1차 옥사)]
강화 추진으로 전투 기회가 적고 군율 해이가 심해지자, 도망친 부하 몇 명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노복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윤근수가 이를 문제 삼아 김덕령을 진주 옥에 가두었다. 이에 진주 유생들은 선처를 호소하며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
1595년(선조 28년) 말까지 김덕령은 진주에 둔전의 설치 등 전쟁에 대비했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적었고, 의병 진영에서 장기전의 대비에 따른 피로의 누적으로 군율의 기강 해이되는 사건이 빈발하였다. 그 해이해진 군사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군율을 엄하게 시행하여 도망치는 부하 몇 사람을 붙잡아 처벌하자, 막료와 군사들 사이에서는 불평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9월에 윤근수는 특산물 조달의 현지 조사를 위하여 체방사가 되어 다시 진주를 방문했는데, 그가 석방을 부탁한 노복이 김덕령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음력 10월 17일자(양력 11월 17일) 윤근수는 분노하여 김덕령을 진주 옥에 가둔다.
1596
[옥살이 4개월 만에 석방]
진주옥에 갇힌 지 3개월 만에 의금부로 옮겨 국문을 당했으나, 우의정 정탁 등의 탄원으로 선조는 특명으로 김덕령을 풀어주고 내구마 한 필을 하사했다. 선조는 그를 대장감보다는 돌격 장령에 적합하다고 평가했다.
이듬해인 1596년(선조 29년) 김덕령이 진주옥에 갇힌 지 3개월이 다 된 1월이 되어서야 의금부로 옮겨 국문을 당했으나, 우의정 정탁 등이 석방을 탄원하는 등 사면을 요청한다. 음력 1월 8일 김덕령이 증거를 들어 스스로 해명하고, 선조도 풀어주라 비변사에 명하였다. 음력 1월 15일 사헌부가 세 번째 청을 하자 그때야 의금부 압송을 허락한다. 감옥에 갇힌 지 4개월만인 1596년 음력 2월 28일(양력 3월 26일)에 선조는 특명으로 김덕령을 풀어주고 그에게 궁중에서 사용하는 내구마 한 필을 주라고 명한다. 그때 선조는 입시한 여러 신하에게 일러 평하기를, 대장을 삼기에는 알맞지 않고 돌격 장령을 시키기에 합당한 자라고 하였다.
[이몽학의 난 연루 및 재투옥 (2차 옥사)]
충청도 홍산 지역에서 왕족 이몽학이 난을 일으키며 김덕령이 내응한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권율의 명을 받아 난을 진압하려 출병했으나, 반란이 진압된 후 이몽학의 문서에 이름이 오르내린 것과 충청도 순찰사 신경행 등의 무고로 다시 체포되어 서울 옥에 갇혔다.
1596년(선조 29년) 음력 7월 6일(양력 7월 30일) 충청도 홍산 지역에서 왕족 이몽학이 난을 일으켰다(이몽학의 난). 이몽학은 “충용장 김덕령과 의병장 곽재우·홍계남 등이 모두 군대를 연합하여 도우며, 병조 판서 이덕형이 내응한다”라는 등 거짓말과 헛소문을 퍼뜨렸다. 음력 7월 14일 권율의 명을 받은 김덕령은 난을 진압하려고 진주를 떠나 충청도로 진군했으나, 난이 이미 진압되어 진소로 돌아갔다. 이몽학이 죽은 뒤 그가 지닌 문서를 보니 김·최·홍의 세 성이 적혀 있었고, 모속관 한현의 자백에 김덕령의 이름이 나왔다. 이에 충청도 순찰사 이정암의 종사관 신경행이 김덕령을 체포하라는 장계를 올렸고, 충청 병사 이시언과 경상 병사 김경서의 무고도 더해져 김덕령은 반역할 정황이 있다고 말하고, 영의정 유성룡이 이시언 등의 말에 동조하였다. 이러한 무고가 받아들여져, 선조는 즉시 동부승지 서성(徐渻)을 보내 김덕령을 잡아오도록 하였다. 음력 7월 27일 서성은 김덕령을 압송하도록 하여 서울의 옥에 가둔다.
[모함과 고문 끝에 옥중 사망]
선조는 8월 4일부터 21일까지 김덕령을 6회 친국하며 고문을 가했다. 그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결국 옥중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죽기 전 "충효로써 죽음을 삼은 죄밖에 없다"고 유언을 남겼다. 그의 죽음은 당시 남도 군민들에게 큰 슬픔과 좌절을 안겼다.
1596년(선조 29년) 음력 8월 4일(양력 8월 26일) 선조에게 친히 첫 국문을 받았다. 그 국문에서 그는 혐의를 승복하지 않고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1596년 음력 8월 21일(양력 9월 12일)까지 선조는 그에게 6회 친국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덕령은 수차례 고문을 당하여 겨우 목숨만 남아있었으나 행동거지는 평상시와 같았다. 정탁은 증거가 없음을 들어 여러 차례 김덕령을 구명하려 노력했으나, 유성룡은 김덕령을 살리는 데 소홀했다. 최후까지 김덕령은 자복하지 않다가 "충효로써 죽음을 삼은 죄밖에 없습니다"라는 말과 "다만 최담령 등이 죄 없이 옥에 갇혀 있으니 원컨대 죽이지 마시옵소서"라는 부탁을 남긴 채 죽으니, 향년 30세였다.
1661
[억울함 풀고 관직 복구]
김덕령이 죽은 지 65년 뒤, 현종 2년 가뭄으로 인한 신원 논의 과정에서 김시진의 요청으로 김덕령의 억울함이 풀리고 관작이 복구되었다.
1661년(현종 2년) 음력 8월 30일(양력 9월 22일) 현종이 가뭄 때문에 도신에게 명하여 신설되지 않은 자들을 알아내 계문하도록 하였는데, 반고 김시진이 김덕령을 아뢰자, 특명으로 신원(伸寃)하여 관작을 복원해주었다.
1668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당상관 추증]
현종 9년 교리 이단하의 요청으로 김인후, 강항, 김덕령이 추증되었다. 김덕령은 정6품 좌랑에서 정3품 병조참의로 증직되며 당상관에 올랐다.
1668년(현종 9년)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4일) 교리 이단하가 요청하여 김인후ㆍ강항ㆍ김덕령을 추증하였는데, 정6품 좌랑 김덕령을 정3품 병조참의로서 당상관에 증직하고 시호를 내렸다.
1680
[병조판서 증직과 의열사 사액]
숙종 6년, 이민서의 청으로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킨 공로를 인정받아 정2품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박광옥과 함께 배향된 사원에 '의열'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1680년(숙종 6년) 윤8월 24일(양력 10월 16일)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킨 일에 대해 이민서가 청액상소를 올려 박광옥ㆍ김덕령을 배향한 사원에 “의열”이라는 사액을 받게 하였고, 김덕령은 특별히 정2품 병조판서에 증직하였다.
1785
[정조 대에 '충장' 시호 추증]
정조 9년, 전라도 유생 기석주의 상소에 따라 정조는 김덕령에게 '충장' 시호를 내리고, 부인 이씨에게 정경부인을 추증했다. 형 덕홍과 아우 덕보에게도 증직을 더하여 삼형제를 의열사에 함께 모시게 했다.
1785년(정조 9년) 음력 9월 5일(양력 10월 8일) 전라도 유생 기석주가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포장하여 증직하는 일도 지나치지 않다고 답한다. 그 뒤 정2품 증 병조판서 김덕령에게 충장(忠壯)의 시호가 내려졌고, 부인 이씨에게 종1품 정경부인을 추증하였고, 형 덕홍에게 증 지평 벼슬을, 아우 덕보에게 증 집의 벼슬을 더해, 삼형제를 의열사에 함께 모시게 하였다.
1789
[의정부 좌찬성으로 가자]
김덕령의 부인 직함이 종1품 정경부인인데 비해 김덕령의 증직이 정2품 병조판서로 자급이 어긋나자, 이조판서 이갑의 청으로 김덕령의 자급을 종1품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토록 했다.
1789년(정조 13년) 1월 11일 김덕령 부인의 직함은 종1품 정경부인이고, 김덕령의 증직은 정2품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서로 어긋남을 이조판서 이갑이 아뢰자, 그 청대로 자급을 종1품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토록 하비하였고, 김덕령 형제가 자란 마을에 이미 생계를 오두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영구히 제사를 지낼 부조특명 하달]
정조는 김덕령의 제사를 영구히 지내고 신주를 옮기지 말라는 부조특명(不祧特命)을 내렸다. 또한 방손 한 사람을 선택하여 공의 제사를 대대로 받들도록 했다.
1789년(정조 13년) 4월 6일(양력 5월 1일) 김덕령의 제사를 영구히 지내고 절대로 신주를 옮기지 말라는 부조특명(不祧特命)을 내렸다. 조정의 명령으로써 방손 한 사람을 선택하여 공의 제사를 받들어 대대로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는데, 그 사람은 김덕보의 아들 김거의 6세손 김치옥(또는 7세손 김홍기)이다.
1975
[충장사 건립 및 묘 이장]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던 광주 의열사가 복원되지 못하다가, 1971년 복원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정부 지원을 받아 광주 충효동에 1974년 가족묘를 이장한 후 1975년 2월 충장사가 건립되었다.
김덕령을 모시던 광주 의열사는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뒤 복원되지 못한 채 지내다가 1971년 각지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충장공 김덕령장군사우 복원사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빛을 보게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원 등 정부의 지원을 받아 광주 충효동에 자리를 잡고 1974년 11월 김덕령과 가족의 묘를 이장하고 1975년 2월 충장사(忠壯祠)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