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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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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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 국회의원, 민주화 운동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 + 카테고리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으로 평생을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며 행동하는 양심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군부 독재 시절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투옥 가택연금 망명 등의 고난을 겪었으나 끈질긴 투쟁으로 민주주의 회복에 기여했습니다. 대통령 재임 중 외환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IT 산업을 육성하며 대한민국을 정보 강국으로 이끌었습니다. 대북 포용 정책인 햇볕정책을 추진하여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이 공로로 한국인 최초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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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24

[전남 신안에서 출생]

김대중은 전라남도 무안군(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자로 태어나 하의도와 목포를 오가며 자랐으며, 어린 시절부터 신문 읽기를 즐겼다. 어머니의 교육열 덕분에 목포로 유학,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수석 졸업하며 총명함을 보였다.

김대중은 1924년 1월 6일 전라남도 무안군 하의면 후광리(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원후광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본처가 따로 있었고, 김대중은 서자였다. 1750년경 8대조 김광성(金光聲)이 신안 하의도 대리에 입도했다. 고조부 김익조(金益祚)는 가선대부, 증조부 김태현(金台鉉)는 한성부 좌윤, 조부 김제호(金濟浩)는 오위장과 통훈대부를 지냈다. 아버지 김운식은 마을 구장을 맡았다. 김대중의 어머니 장수금은 두 번의 사별 후 김운식의 첩이 되었으며, 1960년에 김운식이 본처와 이혼하고 장수금을 본처로 삼았다. 그가 태어날 당시 하의도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로 주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1935년 4월 하의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했고, 1938년 4월 목포북교공립심상소학교로 전학했다. 어머니는 집과 농토를 팔아 목포로 유학시켰고, 김대중은 소학교를 수석 졸업했다. 이후 목포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 때까지 반장을 지냈고, 독서와 정치, 영어에 관심이 많았으며 웅변에 소질을 보였다. 고교 시절 학적부에는 "언변은 늘 정확, 명료하다"고 기재되어 있다. 15세가 되던 1938년에 토요타 다이주(豊田大中)로 창씨개명했다.

1944

[해방 후 청년 사업가 활동과 정치 입문]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김대중은 일본 징집을 피하기 위해 목포상선회사에 입사했다. 해방 후에는 종업원 대표로 회사 경영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 선전부원으로 활동했으며, 1946년 초에는 공산 계열 정당인 조선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했으나 소련 추종 세력과 갈등을 빚고 탈당했다. 이후 해운업을 시작하고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사장을 역임했다.

1944년 봄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징집을 피하기 위해 목포상선회사 경리사원으로 입사했다. 1945년 해방 후 종업원 대표로 회사 경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전남도 목포지부 선전부원으로 활동했고, 목포청년동맹에도 가담했다. 그해 9월 건준 해체 후, 1946년 2월 김두봉이 창당한 조선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했으나 소련 추종 세력과의 갈등으로 여름에 탈당했다.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 부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1946년 하반기 건준 명의의 벽보를 붙이다 미 군정 경찰에 체포되어 이틀간 구금되었다. 같은 해 차용애와 결혼했다. 1946년 10월 전국 총파업 관련 목포 파출소 습격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로 20일간 경찰서에 구속되었다가 장인의 신원보증으로 훈계 방면되었다. 1947년 장인의 권고로 한국민주당 목포지부 당무위원으로 입당했다. 동양해운이라는 해운회사를 설립하여 해운업을 시작했고, 1948년 10월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1950년 10월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1949년 2월 유재식에게 서울행 여비를 보조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1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1950

[한국 전쟁 경험과 국회의원 첫 도전]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서울에 있다가 인민재판을 목격하고 목포로 귀향했으나 인민군에 투옥되었다. 인천 상륙 작전 후 인민군 철수 과정에서 가까스로 탈옥했다. 이후 국군 보조기관인 전남지구 목포해상방위대에 자진 입대하여 부사령관에 임명, 인민군 게릴라 소탕에 참전했다. 전쟁 후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하며 정치적 좌절을 맛봤다.

1950년 6월 15일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서울에 상경했다가 인민재판을 목격하고 목포로 귀향했다. 도착 3일 만에 목포를 점령한 인민군에 붙잡혀 강당에서 처형을 기다렸다.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가까스로 처형을 모면했으나 다시 투옥되었다. 같이 투옥되었던 사람들을 부추겨 탈옥에 성공했다. 연말에는 국군 보조기관이었던 전남지구 목포해상방위대에 자진 입대, 전라도 지구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자신이 경영하던 해운회사 소속 선박을 동원해 인민군 게릴라 소탕에 참전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목포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1955

[야당 민주당 입당 및 장면과의 인연]

낙선 후 상경하여 잡지 발행, 웅변학원 운영 등 활동을 이어가며 정계 진출의 꿈을 키웠다. 소설가 박화성의 소개로 야당 인사들을 만나 민주당에 입당했다. 1956년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장면 저격 사건을 목격하며 장면과 인연을 맺고, 1957년 장면을 대부로 천주교 영세를 받으며 '토마스 모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낙선 후 해운회사를 처분하고 상경하여 잡지 《태양》을 발행하며 웅변학원을 운영했다. 1955년 10월 《사상계》에 '한국노동운동의 진로' 등 노동문제 글을 기고하며 정계 진출을 모색했다. 김철 등 정치인들과 교류하며 장택상 전 총리의 참모로 활동했다. 1955년 소설가 박화성의 소개로 박순천, 조재천 등 야당 인사들을 알게 되어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듬해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장면 저격 사건을 목격하며 장면과 인연을 맺었다. 1957년 장면을 대부로 노기남 대주교 집무실에서 천주교 영세를 받고 '토마스 모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같은 해 8월 민주당 중앙상임위원 및 노농부 차장이 되었다. 1957년 대한웅변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김상현을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1964

[국회 최장 필리버스터로 정치적 존재감 각인]

여러 번의 낙선 끝에 1961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5.16 쿠데타로 의원 활동을 못했다. 이후 1963년 고향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었고, 이듬해 국회에서 5시간 19분 동안 세계 최장 필리버스터를 펼쳐 한일기본조약 협상 문제와 김준연 의원 구속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정치적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1958년, 1959년, 196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이어 낙선했다. 1961년 5월 14일 강원도 인제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민의원에 당선되었지만, 이틀 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의원 활동은 하지 못했다. 5.16 쿠데타 이후 민주당 선전부장, 당 대변인 등을 역임했다. 1963년 이희호와 재혼했고, 같은 해 민주당 소속으로 고향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1964년 야당 초선 의원으로서 본회의 연설에서 5시간 19분간 필리버스터를 진행, 한일기본조약 협상 과정의 문제점과 김준연 의원 구속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구속동의안 처리를 무산시켰다. 이 기록은 세계 최장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1970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및 반유신 투쟁]

1967년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정무위원 겸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1970년 신민당 내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을 꺾고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아깝게 패배했으며,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일본 정계 순방 중 미국 망명을 결심하고 워싱턴에서 국민투표 무효선언을 주장하는 등 반유신 투쟁을 벌였다.

1967년 2월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신민당 정무위원 겸 대변인으로 발탁되었다.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68년 6월 3일 당수 유진오로부터 원내총무 후보자로 지명되었으나 김영삼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1970년 신민당 내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이철승, 김재광 등과 제휴하여 김영삼을 꺾고 과반수선을 얻어 대통령 후보자에 지명되었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박정희에게 패배했다. 당시 대선에서 김대중과 신민당은 100만표 이상 조작된 부정선거라고 주장했다.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로 당선되었다. 1972년 10월 11일 일본 정계 순방을 위해 도쿄에 체류하던 중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미국 망명을 결심했다. 유신 선포 직후 일본 언론을 통해 비상계엄령과 유신 체제를 비판했으며,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국민투표 무효선언을 주장하는 연설과 기자회견을 하는 등 반유신 투쟁을 벌였다.

1973

[도쿄에서 중앙정보부에 납치되다]

일본 도쿄에서 반유신 활동 중이던 김대중은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5일 만에 서울 자택 근처에서 풀려나는 사건을 겪었다. 이 사건은 한일 관계를 급격히 냉각시켰으며, 이후 가택연금과 정치활동 금지 조치를 받았다. 1977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증언으로 중앙정보부의 소행임이 밝혀져 국제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일본 도쿄 그랜드팰리스 호텔 2210호 앞 복도에서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 6명에게 피랍되었다. 비어있던 2210호실에 감금되었고, 마취제에 적신 손수건으로 의식을 잃은 채 온몸이 결박당했다. 괴한들은 김대중을 바닷가로 이동시킨 후 중앙정보부 공작선인 용금호에 강제로 태웠다. 수장 시도가 있었으나 계획 변경으로 납치된 지 5일 만인 8월 13일 밤 10시경 서울 동교동 자택 부근 주유소 뒷골목에서 풀려났다. 일본 경찰청은 현장에서 주일 한국대사관 김동운 일등서기관의 지문을 채취하고 관련자 출두를 요구했으나 한국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일본 정부의 강력한 항의와 미국의 조정으로 김동운 해임, 김대중의 해외 체류 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국무총리의 진사방일(陳謝訪日)에 합의하며 양국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귀국 후 김대중은 가택연금과 동시에 정치활동을 일절 금지당했다. 1977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이 한국 중앙정보부의 범행이라고 발언하며 사건은 다시 세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2006년 외교통상부의 비공개 외교문서 공개로 사건의 많은 내용이 알려졌다.

1976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주도 및 투옥]

1976년 윤보선, 함석헌 등 재야 민주 지도자들과 함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하며 유신 체제에 저항했다. 이로 인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1심에서 징역 8년, 1977년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형을 확정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진주교도소와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수감 생활을 이어가며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74년 11월 27일 가택연금 속에서 재야 반유신 투쟁 결집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했다. 1976년 3월 1일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 지도자들과 함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하며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고, 1977년 3월 23일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형을 확정받아 옥고를 치렀다. 1977년 5월 7일 진주교도소에서 수감 중 접견 제한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했다. 같은 해 10월 31일 진주교도소 수감 중 김수환 추기경과 면담했고, 12월 22일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었다. 1978년 9월 6일 서울대병원 이송 후 더욱 심해진 제한에 항의하며 단식했다. 1978년 12월 27일 옥고를 치르면서 2년 9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된 후 장기 가택연금을 당했다.

1979

[가택연금 해제 및 정치 재도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된 후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면서 1979년 12월 8일 가택연금에서 해제되었다. 이후 재야 인사들과 함께 신민당에 재입당하려 했으나 김영삼 총재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12·12 군사 반란 이후 강원룡 목사의 대통령 불출마 권고를 거절하며 정치적 재기를 모색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암살된 후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1979년 12월 8일 가택연금에서 해제 되었다. 그 뒤 재야인사들과 함께 신민당에 재입당하려 했으나 김영삼 총재는 입당 때 심사하겠다며 사실상 받아들이지 않았고, 재입당을 포기한다. 김대중은 1979년 12·12 군사 반란 발생 이후 12월 14일 아침에 강원룡 목사와 만났다. 강원룡은 김대중에게 당신 이번에 대통령 할 생각 절대로 하지 마라며 대통령을 김영삼에게 양보할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강원룡에게 "이미 끝났다. 강 목사님이 군(軍)이란 세계를 모르고 하는 말씀인데, 군은 통수권자에게 절대 복종한다. 박정희가 (살아) 있을 때는 박정희가 통수권자니까 차라리 거기에 충성을 했지만 이제 박정희는 죽었다. 장군들이 그 다음엔 내가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내게 충성하고 들어올 것이다"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듬해 1980년 5월 13일에 김대중은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 공산집단이 우리의 과도기를 이용하여 남한에 대해 폭력에 의한 그들의 야욕을 성취하려는 음모를 획책하려는 일이 절대 없기를 엄중 경고한다"면서 "국민과 학생, 근로자들은 질서를 지키고 사회 안정을 유지하여 북한공산집단이 오판할 계기를 주지 말하야 한다"라고 발표하였다. 다음날인 5월 14일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한창 가열될 때 동아일보가 김대중을 인터뷰했다. 김대중은 "학생 시위가 계속되면 군부에 빌미를 줄 수 있으니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신군부의 검열에 걸려 기사화되지 못했다.

1980

[신군부의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사형 선고]

1980년 5월 17일, 12·12 군사 반란으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로 전격 연행되어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등 세계 각국 지도자와 인권단체들의 구명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79년 12월 8일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후 재야인사들과 함께 신민당 재입당을 시도했으나 김영삼 총재의 반대로 포기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 발생 이후 12월 14일 강원룡 목사의 대통령직 불출마 권고를 거절했다. 1980년 5월 13일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 공산집단의 남한 폭력 음모를 경고하고 국민과 학생의 질서 유지를 당부했다. 5월 14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학생 시위 자제를 요청했으나 신군부 검열로 기사화되지 못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 및 포고령10호 발표와 함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김대중을 포함한 재야인사 20여 명이 사회혼란 및 학생, 노조 배후 조종 혐의로 전격 연행되었다.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지미 카터, 도널드 그레그,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세계 각국 지도자와 인권단체들의 구명운동이 일어났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편지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2

[사형 감형 후 미국 망명길에 오르다]

국제사회의 압력과 구명운동으로 전두환은 김대중의 형을 감형해 주었고, 1982년 12월 김대중은 구속된 지 2년 7개월 만에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유니언신학대 고문, 하버드 대학교 객원연구원 등으로 활동하며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해 한국 민주화 운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전두환은 김대중의 형을 감형해 주는 대신 자신을 레이건의 취임식에 초청해달라는 제안을 했고, 이를 미국이 받아들였다. 1981년 1월 23일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김대중의 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이후 20년형으로 다시 감형되었으며, 신병 치료를 위한 형집행정지 처분과 해외여행이 허용되었다. 김대중은 1982년 12월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훗날 탄원서는 자의가 아니었다고 밝혔다. 1983년 1월 31일 뉴스위크 회견에서 한국 민주화와 인권 상황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미국에서 유니언신학대 구제위원회 고문, 국제고문희생자구원위원회 고문, 하버드 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해 미주 지역에서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1985

[민주화 열망 속에 귀국했으나 가택연금]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85년 2월 8일 민주화를 위한 조국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다며 귀국을 강행했다. 전두환 정부는 가택연금 외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김포공항에서 안기부 요원들에게 강제 연행되어 동교동 자택에 연금되었다. 이후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하며 민주화 운동을 지속했다.

필리핀의 베니그노 아키노 암살 사건에도 불구하고 1985년 2월 8일 귀국을 강행했다. 전두환 정부는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교도소에 재수감하겠다고 경고했으나,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가택연금 외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토머스 폴리에타, 에드워드 페이언 등 미국 의원들의 동행 덕분에 별다른 불상사 없이 김포공항에 도착했으나, 입국장에서 안기부 요원들과 경찰들에게 강제 연행되어 동교동 자택에 연금되었다. 1985년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했고, 1986년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되었으나 당국에 의해 취임이 저지되었다. 1995년 광주 민주화 운동 특별법 제정 후 2003년 재심을 청구하여 2004년 1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1987

[사면복권 후 대선 출마, 야권 단일화 실패로 낙선]

1987년 7월 9일 사면복권된 후, 대통령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대통령 선거 출마 의사를 밝혔다.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고문에 취임했으나,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 협상에 실패하며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노태우와 김영삼 후보에게 밀려 3위로 낙선하며 또다시 좌절을 맛봤다.

1986년 11월 5일 조건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했다. 1987년 7월 9일 사면복권되었다. 7월 10일 동교동 자택 기자회견에서 불출마 선언은 변함이 없다고 발표했으나, 하루 만에 번복했다. 7월 17일 김대중 지지단체인 민권회가 불출마 선언 백지화를 결의했다. 8월 6일 김영삼과 만나 입당 문제를 합의했고, 8월 8일 통일민주당사에서 입당식을 갖고 고문에 취임했다. 8월 11일 김영삼과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결렬되었다. 9월 14일 김영삼에게 36개 미창당 지구당 결성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9월 29일 김영삼 총재와의 후보단일화 회담이 결렬되었다. 10월 10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했다. 11월 12일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표 겸 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노태우(36.6%)와 김영삼(28.0%)에게 밀려 611만 표(27.04%)를 얻고 3위로 낙선했다.

1990

[3당 합당에 반대하며 단식 투쟁]

1988년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을 '3당 야합'이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단식 투쟁을 선언했다. 이후 평화민주당을 신민주연합당으로 확대 개편하고, 민주당과 합당하여 통합 민주당을 출범시키며 정치적 재기를 모색했다.

1988년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제13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89년 1월 9일 쇼와 천황 사망 시 주한 일본 대사관저 분향소에서 조문했다. 1989년 8월 2일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으로 중부경찰서에 강제 구인되어 14시간 동안 수사를 받았다. 19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을 3당 야합이라며 반대하고 투쟁을 선언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10월 29일 김영삼 대표와 만나 내각제 합의 폐기와 지방자치제 실시에 대한 약속을 받고 단식투쟁을 중단했다. 1991년 4월 15일 평화민주당을 신민주연합당으로 확대, 재개편한 후 당 총재에 취임했고, 이기택이 총재로 있던 민주당과 합당하여 통합 민주당을 출범시켰다. 노태우 정부 하에서 국군 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 되어 감시당했다.

1992

[14대 대선에서 낙선하고 정계 은퇴 선언]

1992년 민주당의 14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출마했으나, 김영삼, 정주영과의 3파전 구도 속에서 800만 표를 얻고 낙선했다. 이에 김대중은 선거 결과에 승복하며 12월 19일 국회의원직 사퇴와 함께 "40년 파란 많았던 정치 생활에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1992년 5월 15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제14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듬날 출마를 선언했고, 5월 26일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번에는 바꿉시다'를 모토로 내걸었다. 1992년의 대통령 선거는 김영삼, 정주영과의 3파전 구도였다. 초원복집 사건 등 지역감정 조장 논란 속에서 선거를 치렀다. 12월 18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804만 1284표(33.82%)를 얻어 김영삼 후보에게 190여만 표 차이로 낙선했다. 그는 선거 결과에 승복하며 12월 19일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 성명을 발표했다.

1995

[정계 은퇴 번복,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으로 재기]

1993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객원교수로 출국했다가 1993년 7월 귀국했다. 1994년 아시아·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아태재단)를 설립하고 활동하며 정계 복귀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대승을 거두자 7월 18일 정계 복귀를 선언했고, 민주당 탈당파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며 다시 한번 정치 일선에 나섰다.

1993년 1월 영국으로 출국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1993년 7월 귀국했고, 1994년 12월 아시아·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FDL-AP, 통칭 아태재단)를 설립하고 상임공동의장에 취임했다. 김영삼 정부의 한계와 지방선거에서의 민주당 대승이 김대중의 정계 복귀를 수월하게 했다. 1995년 7월 18일, 김대중은 정계 복귀를 선언하였고, 민주당 탈당파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7

[IMF 위기 속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다]

1996년 총선 패배 후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과 연합을 추진했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 IMF 외환 위기 속에서 이회창, 이인제 후보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비자금 의혹 등 위기를 겪었으나, 김종필과의 단일화 합의로 10,326,275표를 획득, 이회창 후보를 약 39만 표 차이로 누르고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수십 년간 염원했던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비례대표 14번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강래의 조언으로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과 연합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전당대회에서 정대철을 꺾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회창 후보의 병역 기피 의혹과 이인제의 독자 출마로 여권이 분열되었고, 김대중 후보의 지지율이 9월에 1위에 올랐다. 10월 7일, 신한국당 강삼재 의원이 김대중 비자금 사건을 폭로하며 위기를 맞았으나, 검찰 수사가 대선 이후로 미뤄지며 한숨 돌렸다. 1997년 11월 3일, 국민회의는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며 자민련 총재 김종필, 박태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신한국당은 민주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으로 개명하고 조순 후보와 단일화했다.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 김대중 후보가 10,326,275표(40.3%)를 획득해 이회창 후보를 39만여 표 차로 누르고 다음날 오전 4시 12분경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인제 후보가 부산, 경남을 중심으로 4,925,591표(19.2%)를 얻어 김대중 당선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평가도 있다.

1998

[대북 포용정책 '햇볕정책' 본격 추진]

정부 출범 직후부터 대북 포용정책인 이른바 '햇볕정책'을 추진했다. 1998년 6월 북한과 금강산 관광 및 개발 사업에 합의했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경제협력에 대해 논의했다. 11월에는 첫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가 출항하며 남북 교류의 물꼬를 텄다.

대북 포용정책인 이른바 햇볕정책이 정부 출범 직후부터 추진되었다. 1998년 6월 북한과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에 합의했고 단독 사업자로 선정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경유해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경제협력에 대해 회의를 벌였다. 11월엔 첫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가 출항하게 되었고 1999년엔 대북 사업을 위해 현대아산을 설립, 평양에 체육관을 건설하는 등 대북 협력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러한 김대중의 노력은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1999년 5월엔 홍콩의 시사주간 아시아위크가 선정한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올랐다.

[일본과 미래지향적 관계 구축 선언]

1998년 10월 일본을 공식 방문하여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일본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 최초의 공식 문서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포함한 양국 간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8년 10월 일본에 공식 방문하여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30억불 상당의 일본 수출입은행 금융지원, 공과대학 학부 유학생 상호 파견, 일본 대중문화 개방, 한일간 국회의원 교류, 한일 안보정책 협의회 및 국방 당국간 방위교류, 대북정책에 관한 한·일 정책협의 강화, 북한 핵·미사일 문제 협력 등을 약속했다. 오부치 총리는 일본이 과거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최초로 한국을 지칭한 사과, 공식 문서화, 자민당 보수정권의 사과라는 점에서 진일보한 사과로 평가받는다. 김대중 대통령은 양국이 과거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임을 표명했다.

[제15대 대통령 취임, IMF 위기 극복 및 정부 개혁 추진]

김대중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국난극복과 국민화합·햇볕정책·제2의 건국"을 국정 방향으로 제시했다.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 분야 개혁을 단행했으며, 정부조직을 작고 효율적으로 개편하고 여성부 신설, 안기부를 국가정보원으로 개명하는 등 대대적인 행정 개혁에 착수했다.

1998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취임 직후부터 차기 국민의 정부를 작고 효율적인 정부로 만들어 나갈 것임을 천명했다. 내무부, 공보처가 폐지되었고 안기부, 검찰, 경찰의 기능을 재조정했다. 통상대표부가 설치되고 정보통신부는 과학기술처를 흡수하여 기능을 강화시켰다. 여성의 인권 강화를 지원하기 위해 세계에서 열세 번째로 여성부를 신설하고, 안기부는 국가정보원으로 개명하고 부훈도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에서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꾸는 등 대대적인 행정 개혁에 착수했다.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강도 높은 기업 구조조정, 기업 투명성 강화, 부채비율 축소 정책을 추진하여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 분야에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1999

[서해 북방한계선서 제1연평해전 발생]

1999년 6월 15일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북한 경비정의 침범으로 대한민국 해군과의 교전이 발생, '제1연평해전'으로 불린다. 김대중 정부는 이후 7월 4일 제1연평해전에 참가했던 해군 유공장병 7명을 1계급씩 특진시켰다. 이 사건은 햇볕정책 추진 중 북한의 도발로 인해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비판을 낳았다.

1999년 7월 4일 제 1차 연평해전에 참가했던 해군 유공장병 7명을 1계급씩 특진시켰다. (참고: 실제 교전일은 6월 15일이지만, 여기서 기록된 날짜는 포상일이다. 문맥상 포상 자체를 사건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2000

[분단 55년 만에 남북 정상회담 개최, 노벨 평화상 수상]

2000년 6월 15일, 분단 이후 최초로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정상 회담을 개최하고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골자로 하는 통일 방향에 합의하고 개성공단 설립에 합의하는 등 남북 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같은 해, 한반도 평화 조성과 민주화 및 인권에 헌신한 공로로 한국인 최초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햇볕정책은 2000년 6월 15일 있었던 남북 정상 회담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으로, 이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골자로 하는 통일 방향에 합의한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개성공단 설립에 합의한다. 6.15 남북 공동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통일 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 2)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공통성 인정, 3) 8·15 계기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 교환 및 비전향장기수 문제 해결 등 인도적 문제 해결, 4) 경제협력을 통한 민족경제 균형 발전,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 협력과 교류 활성화, 5) 합의사항 조속 실천을 위한 당국 사이의 대화 개최.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서울에 초청했으며 김정일은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했다. 같은 해 말,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간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독재 정권 시절 한국의 인권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대북 불법 송금 사건 등 비판도 뒤따랐다.

2001

[인권 증진을 위한 국가인권위원회 설치]

김대중 정부는 인권 존중 및 증진을 위해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법을 공포하고 국가인권위원회를 설치했다. 이는 국가 인권 정책 수립 및 인권 침해에 대한 조사와 구제를 담당하는 독립적인 국가 기관으로, 인권 신장에 중요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법을 공포하였다. 그 소관 법률은 국가인권위원회법(위원회 구성과 운영, 업무와 권한, 인권침해 및 차별행위의 조사와 구제 등 규정),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차별 금지 및 시정권고, 시정명령),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연령을 이유로 한 고용차별 금지 및 시정권고, 시정명령) 등이다.

[IMF 구제금융 차입금 전액 상환]

강도 높은 구조조정, IT·벤처기업 육성 등 경제 개혁 노력을 통해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받은 차입금 195억 달러를 전액 상환하며 IMF 관리체제에서 벗어났다. 이는 국민의 정부 최대 치적으로 평가되며, 대한민국 경제 회복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국민의 정부는 문민정부 말년에 발생한 IMF 외환위기 사태를 극복해야 하는 숙제를 떠안았다.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는 대가로 강도 높은 기업 구조조정 실시를 요구받았고, 국제 수준의 기업 투명성 강화와 부채비율 축소정책을 추진하여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분야에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IMF 차입금을 전액 상환했다. 이는 한국 전쟁 이래 최대 국난이라는 촌평답게 외환위기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명예퇴직으로 인해 수많은 중산층 가정이 몰락하는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2002

[최규선 게이트 연루로 새천년민주당 탈당]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김홍걸이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되어 이권 개입 및 금품 수수 혐의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2002년 5월 6일 김대중은 당시 집권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는 등 정치적 부담을 겪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던 최규선이 김홍걸씨와 함께 이권에 개입하고 이를 대가로 홍걸씨에게 3억원을 건넨 혐의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2002년 5월 6일 김대중은 당시 집권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다. 김대중의 아들인 김홍업은 1998년 한국전력 석탄 납품 관련 이권 청탁 명목으로 3억원의 금품을 수수했다 돌려준 혐의로 2004년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3남 김홍걸은 2000년 최규선과 체육복표사업자 선정 및 각종 이권에 개입해 금품을 수수한 이른바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되어 파문이 일었다. 2002년 최규선의 운전기사가 이 일을 폭로하면서 수사가 진행되었고 결국 같은 해 11월 김홍걸은 징역 1년 6월의 판결을 받았다. 최규선 게이트로 인해 김대중은 대국민 사과 성명까지 발표하게 되었다.

[제2연평해전 발발, 월드컵 폐막식 참석 논란]

2002년 6월 29일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북한 경비정의 침범으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여 국군 6명이 전사했다. 이는 햇볕정책과 군통수권자의 책임론을 둘러싼 논란을 증폭시켰다. 이날 교전 사태 발생 직후 임성준 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보고받고 NSC 소집과 함께 대응책을 마련했다. 이날 저녁 국무위원들과 함께 청와대 본관에서 월드컵 3∼4위전 경기를 시청하려던 계획도 취소했다. 정부는 6월 30일 전사 또는 실종된 해군 장병 5명에게 1계급 특진과 함께 훈장을 추서했다. 7월 2일 일본에서 귀국한 김대중은 국군수도병원을 방문하여 부상 장병들을 위로했다. 7월 23일 김대중은 서해교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장병 5명의 가족 12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북한의 불법적이고 무도한 도발행위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2003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임기 마치고 퇴임]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된 후, 김대중은 2003년 2월 24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퇴임했다. 퇴임 직후에는 동교동 사저 옆에 김대중 도서관을 개관하여 자신의 생전 유품과 저서, 관련 자료들을 보관, 전시하며 후세에 남겼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되었다. 2003년 2월 24일, 김대중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대통령직 퇴임 직후인 2003년에는 동교동 사저 옆에 김대중 도서관을 개관했다. 김대중 도서관에는 김대중의 생전 유품과 저서 등을 비롯한 많은 관련 자료들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2004

[박근혜 대표의 정치 탄압 사과에 화답]

2004년 8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박정희 시절의 정치 탄압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하자, 김대중은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박 대표의 사과에 "마음 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고 회상하며 화답했다. 이는 과거의 정치적 갈등을 넘어선 화해의 제스처로 평가받았다.

8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에게 박정희 시절의 정치탄압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에 대해 한 방송과 인터뷰에서 박 대표의 사과에 "마음 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 우려 표명]

2004년 3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당하자 김대중은 이를 '심각한 사태'라며 우려를 표명하고 위기 국면 극복을 위한 노력을 주문했다. 이는 퇴임 후 국내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에 대한 원로로서의 책임감을 보인 행동이었다.

3월에는 대통령 노무현이 탄핵당하자 '심각한 사태'라며 우려를 표명하고 위기국면 극복을 위한 노력을 주문했다. 퇴임 직전인 2003년 1월 "퇴임 뒤 국내 정치문제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고, 실제로 퇴임후 열린우리당이나 새천년민주당에서 인사를 와도 덕담만 할뿐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는 하지 않았다.

[내란음모 조작 사건 재심에서 무죄 선고]

2004년 1월 29일,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신군부의 헌정파괴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헌법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으므로 범죄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는 그의 민주화 투쟁의 정당성을 법적으로 최종 인정받은 중요한 사건이다.

2004년 1월 29일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79년 12·12사태와 80년 5·18을 전후해 발생한 신군부의 헌정파괴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행한 정당한 행위이므로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에 해당, 범죄가 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김대중의 행위는 방법이나 실력으로 보아 국헌을 문란하게 할 아무런 위험성이 없었고 내란음모죄의 구성요건인 국헌문란의 목적과 범죄주체가 되는 집단이 특정되지 아니하는 등 공소는 부적법하다고 판결문을 통해 판시했다. 결국 원심은 범죄사실을 특정하지 않아 '이유 불비'의 모순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2007

[열린우리당 비판하며 민주 세력의 단결 강조]

2007년 열린우리당이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통합 되는 시기에, 김대중은 열린우리당을 비판하며 '민주당 분당사태', '대북송금 특검', '안기부 X파일 사건'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86세대 정치인들에게 국민들의 뜻에 부응하지 못했다며 반성과 대중 속으로 들어가 설득할 것을 조언했다.

자신이 지도자로 있었던 새천년민주당이 2004년을 기점으로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분열했고,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이후 2007년 열린우리당은 열린우리당 탈당파들이 결성한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통합 되었는데 이때 대통합민주신당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던 김대중은 열린우리당을 비판한 바 있다. '민주당 분당사태'(2003), '대북송금 특검'(2003), '안기부 X파일 사건'(2005)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면서 동시에 86세대 정치인들에게는 "국민들의 뜻에 부응하지 못했다.", "86정치인들이 정치를 계속하고 싶으면 가방을 메고 대중 속으로 뛰어들어가 국민에게 잘못한 것은 사과하고 직접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2009

[이명박 대통령을 '독재자'에 비유하며 강력 비판]

2009년 6월 11일,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행사 특별 강연에서 북한의 2차 핵실험으로 인한 한반도 위기와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민주주의의 위기 등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같은 '독재자'에 비유하며 이명박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2008년 10월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의 100억 원대 CD 비자금 의혹 제기에 대해 박지원 의원이 반박했으며, 검찰은 김 전 대통령과 무관하다고 밝혔다. 2009년 6월 11일 저녁 7시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행사에 특별 강연자로 참석해 북한의 2차 핵실험으로 시작된 한반도 위기와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민주주의의 위기 등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같은 ‘독재자’에 비유하며 이명박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북핵 위기와 관련해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을 동시에 비판했다.

[흡인성 폐렴으로 서거, 국장으로 장례]

2009년 7월 13일 흡인성 폐렴 증세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후 투병 생활을 했다. 이명박, 김영삼, 전두환 등 각계 인사들의 문병과 쾌유 기원 촛불 집회가 이어졌다. 결국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향년 86세의 나이에 서거했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8월 23일 여의도 국회광장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09년 7월 13일 흡인성 폐렴 증세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였다. 이명박, 김영삼, 전두환, 박근혜 등 각계의 인사들이 문병을 왔으며, 쾌유기원 촛불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초기엔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으나 점차 악화되어 결국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1달에 걸친 투병 끝에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향년 86세의 나이에 서거하였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정해졌으며, 영결식은 8월 23일 여의도 국회광장에서 거행되었다. 장의위원장은 한승수 국무총리가 단독으로 맡았다. 유족측과 이명박 정부는 서로 합의하여 국장으로 치루되 경제위기를 고려해 6일장으로 결정하였다.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결정되었으며, 2009년 10월 5일 비석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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