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니 미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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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니 미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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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니 미노루(木谷實)는 20세기 일본 바둑계의 거장으로, 뛰어난 기력뿐만 아니라 현대 바둑의 초석을 다진 인물입니다. 오청원과 함께 기존의 정석과 틀을 깨는 혁신적인 '신포석'을 창안하여 바둑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기타니 도장'을 열어 오오타케 히데오, 가토 마사오, 이시다 요시오, 조치훈 등 수많은 대기사들을 배출했습니다. 비록 생전 최고 권위의 타이틀인 본인방 획득에는 실패했으나, 그가 길러낸 제자들이 쇼와 후반기 바둑계를 석권함으로써 지도자로서 전무후무한 위대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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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17

[바둑 입문]

8세의 어린 나이에 토리이 나베지로에게 처음으로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코하라 마사히로, 쿠보마츠 카츠키요 등에게 사사하며 기력을 키웠습니다.
같은 해에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는 기타니 미노루를 정식 바둑 기사로 대성시키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이는 훗날 그가 바둑에 전념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1

[도쿄 상경 및 스즈키 다메지로 문하 입문]

12세의 나이로 본격적인 제자 입문을 위해 도쿄로 상경하여 스즈키 다메지로의 문하생이 되었습니다.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스모 도장인 니쇼노세키 방에 얹혀살며 바둑을 배웠습니다.
당시 스승인 쿠보마츠 카츠키요가 니쇼노세키 오야카타에게 부탁하여 스모 도장에서 지내게 되었으며, 도장에 있던 스모 선수 타마니시키로부터 동생처럼 귀여움을 받으며 대식가로 성장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1922

[첫 내제자 등극]

스승인 스즈키 다메지로의 첫 내제자가 되어 스승의 집에서 기거하며 바둑 수련에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엄격한 지도 아래 프로 기사로서의 기틀을 다지는 시기였습니다.
스승과 숙식을 함께하며 바둑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고, 이 시기의 가르침은 훗날 그가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내는 '기타니 도장' 시스템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습니다.

1924

[프로 입단]

15세의 어린 나이로 정식으로 입단하여 프로 초단이 되었습니다. 천재 소년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그해 7월에는 새롭게 창설된 일본기원 설립에 초단 기사로서 당당히 참여하게 됩니다. 일본기원 소속의 기대주로서 활동을 시작하며 바둑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1926

[원사 대항전 8연승]

봄에 일본기원 정식 승단 대회를 통해 2단으로 승단한 후, 여름에는 추천으로 3단까지 파격 승단했습니다. 일본기원과 독립된 기정사(棋正社) 간의 대항전에 일본기원 대표로 출전하여 무승부를 끼고 8연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단숨에 단위를 뛰어넘는 성과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치열한 파벌 경쟁 속에서 소속 단체인 일본기원의 명예를 지켜내며 젊은 실력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7

[4단 승단 및 '괴동환'의 탄생]

3월에 4단으로 승단하였으며, 4월부터 시작된 일본기원 대수합(大手合)에 참가하였습니다. 1월부터 5월까지 도쿄일일신문이 주최한 신진타절기전에서 무려 10명을 연달아 꺾으며 '괴동환(怪童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선배 기사들을 상대로 압도적이고 전투적인 기풍을 선보여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시기 그의 저돌적인 바둑 스타일은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1928

[대수합 2등 입상]

일본기원의 주요 승단 대회인 춘기 대수합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2등에 입상했습니다. 점진적으로 정상급 기사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동년배 기사들 중에서도 군계일학의 기량을 뽐냈으며,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정규 리그에서 상위권 성적을 안정적으로 기록하며 다음 단계로 도약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1929

[오청원과의 첫 대국 및 춘기 대수합 우승]

훗날 필생의 라이벌이자 벗이 되는 중국 출신의 천재 기사 오청원 3단과 역사적인 첫 대국을 가졌습니다. 이 대국에서 흑을 잡고 첫 수를 천원에 두는 흉내바둑(마네고)을 선보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오청원과의 첫 만남은 이후 두 천재가 바둑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끄는 동반자가 되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해 춘기 대수합에서는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기량을 만개했습니다.

1930

[5단 승단 및 독립]

5단으로 승진하며 스승 스즈키 다메지로의 품을 떠나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여동생과 함께 아오야마 지역에 거처를 마련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스승으로부터의 독립은 프로 기사로서 온전한 홀로서기를 의미했으며, 마에다 진지로부터 '사상 최강의 5단'이라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습니다.

1931

[미하루 부인과 결혼]

나가노현 지고쿠다니 온천의 여관 '코라쿠칸' 경영자의 장녀인 미하루 여사와 결혼하여 고지마치에 신접살림을 차렸습니다.
이 해 초에 열린 신진타절기전에서는 오청원 4단과의 빅(무승부)을 포함해 또다시 5인 빼기를 달성하는 등 성적도 호조를 보였습니다. 든든한 내조자인 아내를 맞이하여 훗날 도장 운영의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1933

[신포석 발표]

아내의 본가인 지고쿠다니 온천 코라쿠칸에 오청원과 함께 머물며 심도 있는 연구를 거듭한 끝에, 기존의 낡은 정석을 타파하는 '신포석'을 발표했습니다.
기존 바둑이 귀와 변에 집착하던 것에서 벗어나 중앙의 세력을 중시하는 파격적인 이론이었습니다. 이 혁신적인 발상은 바둑계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으며 수많은 프로와 아마추어들에게 거대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1934

[6단 승단 및 제1차 10번기]

6단으로 승단하였으며, 라이벌 오청원 5단과의 제1차 10번기 대결을 개시했습니다. 치열한 승부 끝에 제6국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3승 3패를 기록하며 중단되었습니다.
당대 최고를 다투는 두 천재의 대결은 팬들의 엄청난 관심을 모았습니다. 비록 끝까지 승부를 가리지는 못했지만, 서로의 실력을 확인하고 존중하게 되는 중요한 시합이었습니다.

[저서 '포석과 정석의 통합' 출판]

자신의 첫 번째 바둑 저서인 '포석과 정석의 통합'을 출판하여 자신의 바둑 이론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또한 이 달에 둘째 딸이 태어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신포석 이론을 비롯하여 그가 연구해 온 독창적인 정석과 포석의 개념을 정리한 책으로, 바둑의 학문적 체계화에 기여했습니다. 오청원과의 공동 연구가 집대성된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1936

[7단 승단 및 연승 행진]

1월 1일 자로 7단 면장을 수여받으며 고단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4월에는 승발 3번기전에서 1934년 이후 누적된 성적으로 10인 빼기를 다시 한번 달성했습니다.
이 성과로 현상금 3천 엔을 획득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전의 전투적인 기풍에서 실리를 중시하는 기풍으로 서서히 변화를 꾀하며 안정감을 더해가던 시기였습니다.

1937

[혼인보 명인 은퇴기 도전자 결정 리그 개시]

바둑계의 절대 권력자였던 혼인보 슈사이 명인의 은퇴를 기념하는 대국 상대를 가리기 위한 6인 결정 리그전에 참가했습니다.
최고의 명예가 걸린 은퇴 대국 상대로 낙점되기 위해 당대의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모두 참여한 치열한 리그전이 시작되었으며, 그는 이 무대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938

[혼인보 슈사이 명인과의 은퇴기 개시]

도전자 결정 리그에서 5전 전승을 거두고 혼인보 슈사이 명인의 은퇴기 상대로 최종 선정되어 역사적인 대국을 시작했습니다.
이 대국은 명인의 건강 악화 등으로 인해 무려 15번이나 휴식과 재개를 반복하는 등 긴 호흡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당대 바둑계의 신구 세대가 교체되는 매우 상징적인 이벤트였습니다.

[명인 은퇴기 승리]

장장 6개월에 걸친 대국 끝에 혼인보 슈사이 명인을 상대로 선번 5집승을 거두며 역사적인 승리를 장식했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이 대국의 관전기를 연재했으며, 훗날 이를 바탕으로 한 노벨문학상 수상작 소설 '명인(名人)'을 집필했습니다. 소설 속에서 그는 '오타케'라는 이름의 진지하고 철저한 젊은 기사로 묘사됩니다.

1939

[가마쿠라 10번기 개시]

오청원과 당대 최고수의 자리를 놓고 사활을 건 '기타니-오청원 10번기(일명 가마쿠라 10번기)'를 시작했습니다.
두 천재가 피를 말리는 진검승부를 펼친 이 매치는 세기의 대결로 불렸습니다. 이 해 12월에는 훗날 훌륭한 바둑 기사로 성장하는 셋째 딸 기타니 레이코가 태어났습니다.

1941

[가마쿠라 10번기 종료 및 패퇴]

오청원 7단과의 제2차 10번기 대결이 최종적으로 오청원의 6승 4패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초반 6국까지 1승 5패로 밀리며 치수(핸디캡)가 고쳐지는 치욕을 겪기도 했으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명승부를 펼쳤습니다. 이 대결 패배 이후 그는 타이틀전에서 유독 불운을 겪으며 '비극의 기사'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1942

[8단 승단 및 기타니회 발족]

전기 대수합에서 시노하라 마사미 6단을 꺾고 승단 점수를 채워 오청원과 함께 8단으로 승단했습니다. 7월에는 아마추어 지도를 위한 모임인 기타니회(木谷会)를 발족했습니다.
기타니회는 매주 토요일에 열렸으며, 후일 '인풍회(仁風会)'로 이름을 바꾸어 프로와 아마추어의 교류 및 바둑 대중화에 크게 이바지하는 단체로 성장하게 됩니다.

1944

[조선 파병 및 제대]

태평양 전쟁 막바지 군에 징집되어 조선에 주둔 중이던 제22부대(경성, 용산)로 파견되었습니다.
징집 직전인 6월에는 환송 대국으로 오청원 8단과 기념 대국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오랜 기간 복무하지 않고 그해 9월 29일에 제대하여 귀국했습니다.

1945

[전쟁으로 인한 자택 전소]

4월에 야마나시현으로 피난을 떠나 있는 동안, 미군의 공습으로 인해 히라츠카에 있던 그의 자택이 완전히 불타 없어지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삶의 터전을 잃었으나, 종전 후인 10월에 다시 히라츠카로 돌아와 폐허 위에서 제자들을 거두어들이며 전후 바둑계 재건에 헌신하기 시작했습니다.

1947

[제4기 혼인보전 도전]

하야시 유타로 7단과의 3번 승부에서 승리하여 제4기 혼인보전의 공식 도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모토 카오루 혼인보에게 2승 3패로 아깝게 패퇴했습니다.
생애 첫 혼인보 타이틀 획득의 절호의 기회였으나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습니다. 이후 1953년, 1959년에도 도전자가 되었으나 끝내 혼인보 타이틀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1954

[뇌일혈로 인한 요양]

극심한 고혈압으로 인한 뇌일혈(뇌출혈)로 쓰러져 모든 대국을 중단하고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힘든 투병 및 요양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의사와 가족들의 거듭된 휴식 권고에도 불구하고 바둑을 놓지 않으려 고집을 부려 '위대한 떼쟁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도 제자 양성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1956

[9단 승단]

건강을 회복하고 복귀한 후, 제2기 최고위전 리그에서 마에다 진지 8단을 꺾고 일본기원 최고 단위인 9단으로 당당히 승단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후에도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하며 최고단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복귀 이후에는 먼저 실리를 챙긴 뒤 상대의 거대한 모양에 침투하는 이른바 '기타니류의 도칸(폭발)' 전법을 자주 구사했습니다.

1957

[제2기 최고위전 타이틀 획득]

제2기 최고위전에서 당대의 실력자 사카타 에이오 9단에게 도전하여 3승 1패의 성적으로 타이틀을 빼앗으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메이저 대회 우승에 목말라 있던 그에게 매우 값진 타이틀이었습니다. 1월에 열린 제1기 위기선수권에서 우승한 데 이은 성과로, 이듬해 제3기 최고위전에서도 방어에 성공하며 2연패를 달성했습니다.

1960

[제7기 NHK배 우승]

방송 속기전인 제7기 NHK배 바둑 토너먼트에서 뛰어난 순발력과 수읽기를 바탕으로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속기전에서 불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노익장을 과시한 결과였습니다. 이 무렵부터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기려 '대(大) 기타니'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1961

[기타니 도장 개설]

도쿄 신주쿠의 요츠야 산에이초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기타니 도장'의 문을 열고 전국 각지의 영재들을 모아 합숙시키며 후학을 양성했습니다.
도장의 살림과 학생들의 관리는 전적으로 아내인 미하루 여사가 헌신적으로 도맡았습니다. 이 도장에서 오오타케 히데오, 가토 마사오, 다케미야 마사키, 조치훈, 고바야시 고이치 등 훗날 바둑계를 평정하는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1962

[일본기원 기사회장 취임]

바둑계의 존경받는 원로로서 일본기원의 소속 프로 기사들을 대표하는 기사회장직에 추대되어 1964년 6월까지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같은 해 8월에는 도장 문하생들의 단위 합계가 100단을 돌파하는 경사를 맞아 '기타니 일문 백단 돌파 기념 축하회'가 성대하게 열리는 등 제자 양성의 결실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1963

[두 번째 뇌일혈 발작]

일본기원 내에서 두 번째 뇌일혈 발작을 일으켜 쓰러진 뒤 도쿄대 병원에 긴급 입원하여 다시 한번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겪었습니다.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정상적인 대국 소화가 불가능해졌고, 도장의 제자 양성은 수제자 격인 카지와라 다케오가 사범 대리를 맡아 엄격하게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1965

[일본기원 이사 선출 및 자수포장 수훈]

일본기원의 행정과 발전을 이끄는 이사로 선출되었습니다. 같은 해 10월에는 바둑계에 기여한 지대한 공로를 국가로부터 인정받아 자수포장(紫綬褒章)을 수훈했습니다.
선수로서의 황금기는 지났으나, 제자 육성과 바둑 행정을 통해 일본 바둑계의 내실을 다지는 데 헌신한 위대한 교육자로서의 업적을 공식적으로 치하받은 것입니다.

1968

[제3회 오쿠라상 수상]

기타니 도장을 통해 숱한 제자들을 길러내며 바둑 보급과 발전에 이바지한 부부의 헌신을 기려 아내 미하루 여사와 함께 공동으로 제3회 오쿠라상을 수상했습니다.
투병 중에도 바둑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그는, 이해 12월 24일 제6기 프로 십걸전에서 팬 투표로 출전하여 혼다 구니히사 7단과 대국을 가졌으며 이것이 그의 현역 마지막 공식 대국이 되었습니다.

1974

[기타니 도장 폐쇄 및 귀향]

건강 악화와 고령의 나이로 인해 십수 년간 수많은 천재들을 배출했던 요츠야의 기타니 도장을 공식적으로 폐쇄하고 고향인 히라츠카로 요양을 떠났습니다.
1971년 제자인 이시다 요시오가 스승의 숙원이었던 본인방 타이틀을 획득하는 등 제자들이 이미 일본 바둑계를 장악한 후였기에, 명예롭고 평안한 마음으로 교육자로서의 긴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1975

[기타니 미노루 타계]

심부전증으로 인해 히라츠카의 자택에서 향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을 바둑과 제자 양성에 바친 거목의 찬란한 생애가 막을 내렸습니다.
장례는 12월 28일 일본기원장으로 장엄하게 치러졌으며, 국가로부터 종4위 훈2등 서보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그가 남긴 50명이 넘는 제자들의 단수 합계는 현재 500단을 넘어서며 여전히 바둑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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