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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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되어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했습니다. 로마 제국 공인 후 국교가 되었으나 동서 교회의 분열 서임권 투쟁 등 내부 갈등을 겪었습니다. 종교 개혁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로 교파를 나누고 끔찍한 종교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대항해 시대와 함께 전 세계로 확산되었으며 과학 혁명 정치 혁명 등 근현대 사회 변화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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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

[초대교회 형성]

예수의 죽음 이후 사도들이 교회를 이끌며 초기 기독교 공동체인 초대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사도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파하라는 '대사명'을 받았다고 믿었으며,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신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1절에 따르면 성령강림 사건 당일에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아 교회에 소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 기독교는 다양한 견해를 갖는 집단들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64

[로마 제국의 박해 시작]

로마 제국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역사가 타키투스는 네로 황제가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며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초기 기독교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기존 도시의 수호신에게 경배하지 않아 '무신론자'로 여겨지며 민중으로부터도 공격을 받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는 일시적이었으나, 3세기 무렵부터 사회적 문제 심화와 함께 새로운 사상을 찾던 민중에게 '신 앞에 인간 평등'을 가르친 기독교가 위로가 되며 점차 확산되었습니다.

70

[마르코 복음서 최초 제작]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다양한 복음서들이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성서 연구자들은 이 시기 마르코 복음서가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고 추측합니다.이후 이를 바탕으로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가 만들어져 '공관 복음서'라 불리게 됩니다.

초기 기독교는 특별한 교단이나 교리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다양한 관점에서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이 기록되었습니다. 복음서들은 당시 근동의 공용어였던 고대 그리스어 방언인 '코이네'로 쓰였습니다.

150

[신약성경 정경 형성]

다양한 예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서신이 담긴 문헌 중, 중요한 7개를 정경으로 인정하는 목록이 만들어지면서 신약성경이 형성되었습니다.이는 마르키온의 구약 제거 및 일부 문헌 사용 주장 대두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그러나 신구약 정경에 어떠한 문헌을 수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교파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301

[아르메니아, 기독교 국교 채택]

아르메니아 아르사시드 왕조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습니다.이는 세계 역사상 최초로 국가가 기독교를 공인한 기록적인 사건으로, 기독교가 종교적 박해를 넘어 국가적 위상을 획득하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313

[콘스탄티누스, 기독교 공인]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고 신앙의 자유를 공인했습니다.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기독교 신자였고, 밀비우스 다리 전투 승리 후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 공인은 기독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통해 정치력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319

[캅카스 이베리아, 국교 채택]

캅카스 이베리아 왕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습니다.이는 아르메니아에 이어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초기 국가 중 하나로, 기독교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넘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는 추세를 보여줍니다.

325

[악숨 왕국, 국교 채택]

악숨 왕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했습니다.이는 기독교가 아르메니아, 캅카스 이베리아에 이어 또 다른 국가의 국교로 자리 잡으며, 중동 및 아프리카 지역으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개최]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 다양한 사상으로 분화되어 있던 기독교 교리를 정리하도록 했습니다.이 공의회에서 '단성설'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규정되고,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형성하는 '니케아 신경'이 채택되면서 삼위일체론이 공인되었습니다.

이 공의회는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신학적 결정을 내린 첫 번째 보편 공의회로, 교회의 통일성과 정통 교리 확립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380

[테살로니카 칙령 선포]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테살로니카 칙령'을 선포하며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았습니다.이는 이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공인에서 한 단계 나아가, 기독교가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음을 의미하며, 로마 제국 내 이교적 행위는 점차 금지되었습니다.

이후 391년에 이교적 행위가 전면 금지되고, 392년에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기독교가 국교로 채택되며 기독교가 제국 전역의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381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열려 니케아 신경을 개정했습니다.이 공의회는 삼위일체론을 더욱 확고히 하고, 초기 기독교 교리의 정립에 기여했습니다.

423

[성 파트리치오, 아일랜드 전파]

기독교 전례에 따르면 성 파트리치오가 아일랜드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것으로 전해집니다.이는 기독교가 서유럽과 북유럽으로 확장되는 중세 초기 전파 지역을 넓히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431

[에페소스 공의회 개최]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사람으로서의 예수와 신으로서의 예수를 구분한 '네스토리안주의'가 배격되었습니다.특히 마리아의 위상에 있어서 성모, 즉 신성이 있다고 공인하며 마리아 숭배의 신학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451

[칼케돈 공의회 개최]

칼케돈 공의회에서 예수에게 신성 밖에 없었다는 '단성설'이 배격되고, 예수는 완전한 하느님이자 완전한 사람이라는 '칼케돈 신조'가 작성되었습니다.이는 기독론 논쟁을 정리하고 보편교회의 중요한 신학적 기준을 세웠습니다.

이 공의회를 통해 보편교회주의가 만들어짐에 따라 단성설을 주창한 콥트 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등은 가톨릭주의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교단을 형성하게 됩니다.

496

[클로비스 1세, 가톨릭 개종]

5세기 후반, 프랑크 왕국의 시조 클로비스 1세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며 서유럽 기독교 전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그는 다른 게르만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기독교도 함께 전파시켰습니다.

530

[베네딕토 수도원 설립]

누르시아의 베네딕토가 몬테카시노에 수도원을 만들며 서유럽 수도원 운동의 중요한 시작을 알렸습니다.수도원은 세속에서 독립하여 노동과 묵상을 통해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로 발전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도원은 봉건제에 편입되어 권력 기구로 변질되기도 했으나, 클뤼니 수도원 등 개혁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553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기존 공의회 결정들이 재확인되고, 새로운 형태의 아리안주의, 네스토리안주의, 단성설이 정죄되었습니다.이는 교리적 혼란을 수습하고 정통 교리를 강화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598

[아우구스티누스, 캔터베리 파견]

로마 가톨릭은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로 파견하여 앵글로색슨 칠왕국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이는 켈트족의 기독교 전파와 함께 영국 지역의 기독교화를 이끌었습니다.

680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의론'이 배격되고, 그리스도에게 사람과 신으로서의 뜻이 모두 있었다고 정하며 기독론을 최종적으로 확립했습니다.

692

[트룰로 공의회, 교회법 공포]

트룰로 공의회에서 제2·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 관련된 교리가 아닌, 구체적인 교회법 102개조가 공포되었습니다.이는 교회의 행정 및 전례를 정비하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787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성화상 부활]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화상에 그려진 성인들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 부활되었습니다.이는 성화상 논쟁을 종결하고 동서 교회 간의 문화적, 신학적 차이를 조절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첫 일곱 공의회 이후 동서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 동방 정교회는 이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최한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820

[안스가르, 북유럽 선교 시작]

브레멘과 함부르크의 대주교였던 안스가르의 선교 사업으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바이킹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북유럽의 기독교 전파는 비교적 느렸지만, 1,000년 무렵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개종했습니다.

850

[키릴로스·메토디오스, 동유럽 선교]

동방정교회의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가 동유럽 슬라브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했습니다.이들은 선교를 위해 '옛 교회 슬라브 문자'를 만들어 성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했으며, 이 문자는 '키릴 문자'의 기원이 되는 중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들의 선교 활동은 동로마 제국 미카엘 3세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으며, 불가리아 제국과 대모라바 왕국 등 동유럽 국가들의 기독교 개종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867

[포티우스 분란 발생]

비잔틴 황제 미카엘 3세가 포티우스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임명했으나, 로마 교황이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포티우스 분란'이 발생했습니다.이는 동서 교회의 분열이 공식적으로 표출된 최초의 사건으로, 심화되던 갈등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910

[클뤼니 수도원 설립]

아퀴텐 공 기욤이 클뤼니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이 수도원은 교황 직속 수도원으로, 수도원장 자율 선거와 교구 주교로부터의 독립을 통해 타락했던 수도원 개혁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각국 국왕들이 수도원장 임명권을 행사하며 교회를 영향력 아래 두려던 시기에, 클뤼니 수도원은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고 교회의 자율성을 회복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054

[동서 교회의 상호 파문]

로마 가톨릭의 서방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의 동방교회가 서로를 상호 파문하며 '동서 교회의 분열'이 완성되었습니다.이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 주장, 신학적 논쟁(필리오케 문제), 정치적 갈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교황 레오 1세는 자신이 베드로의 직접적인 계승자로서 모든 사도들의 머리라고 선언하며 서유럽과 북유럽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주교를 임명했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교회 조직과 주도권 다툼이 결국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1075

[그레고리오 개혁 발표]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그레고리오 개혁'을 발표하며 세속인의 교회 고위직 서임을 엄격히 규제하고 교회의 모든 권리를 세속 군주로부터 되찾아 올 것을 천명했습니다.이는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고 교회 개혁을 추진하려는 강력한 의지였습니다.

이 개혁은 곧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의 '서임권 투쟁'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077

[카노사의 굴욕]

서임권 투쟁 중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파문당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알프스의 카노사 성에서 거친 옷을 입고 이틀간 기다리며 용서를 구했습니다.이 사건은 '카노사의 굴욕'으로 불리며 교황권이 황제권에 대해 우위를 점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교황의 파문은 황제의 지위에 대한 부정과 같았기에, 선제후들의 반란 움직임에 직면한 하인리히 4세는 굴욕적인 회개 끝에 간신히 파문을 철회받았습니다.

1095

[십자군 전쟁 시작]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소집으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표면적으로는 이슬람에게 점령된 성지 예루살렘 탈환이 명분이었으나, 실제로는 로마 가톨릭의 주도권 확보, 동방 교회의 정복 등 다양한 목적이 얽혀 있었습니다.

지중해를 둘러싼 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는 이슬람의 등장 이후 큰 격랑에 놓여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유한 동방에서 한몫 잡기 위해 십자군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1122

[보름스 협약 체결]

교황 갈리스토 2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가 '보름스 협약'을 체결하여 성직 임명권을 둘러싼 '서임권 투쟁'에 대한 타협을 이루었습니다.국왕은 종교적 의식을 포기하고 주교가 통치하는 지역에 대한 정치적 권리만 부여하기로 하면서, 교황의 승리로 평가됩니다.

1204

[제4차 십자군,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제4차 십자군은 목표였던 이집트 대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동로마 제국을 점령하여 '라틴 제국'을 세웠습니다.이는 십자군 전쟁이 본래 목적을 벗어나 정치적 야욕으로 변질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1261

[동로마 제국 재건]

니케아 제국의 미카엘 8세가 동방정교회 성직자들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고 동로마 제국의 재건을 선포했습니다.십자군 전쟁 이후 분할되었던 제국이 다시 통합되는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1294

[교황-군주 갈등 심화]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가 전쟁을 하며 성직자에게 과세하자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이를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했습니다.두 군주는 교황의 주장에 반발하며 교황청과 세속 군주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필리프 4세는 1302년 프랑스 최초의 삼부회를 열어 교황의 주장에 반대하고 자국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이 갈등은 교황의 권위가 점차 실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303

[보니파시오 8세, 폭행 사망]

프랑스의 필리프 4세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이단 혐의와 성직 매매를 이유로 공의회 출석을 요구했습니다.교황이 거절하자 필리프 4세의 부하들은 교황을 구금하고 폭행했으며, 이 일로 보니파시오 8세가 사망했습니다.이는 교황권의 큰 상실을 의미했습니다.

1307

[아비뇽 유수 시작]

보르도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된 후 로마로 가지 못하고 아비뇽에 머무르게 되면서, 로마 가톨릭은 1377년까지 약 70년간 '아비뇽 유수'라 불리는 시기를 맞았습니다.이는 교황청이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아비뇽 유수 동안 교황청의 세속적 권위와 독립성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이는 훗날 서방 교회의 분열로 이어지는 배경이 됩니다.

1374

[존 위클리프, 교황청 부패 탄핵]

영국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가 로마 교황청의 부패를 탄핵하기 시작했습니다.그는 교황의 권력과 로마 가톨릭 교리에 공격을 가했으며, 그의 교설은 '롤라드'라 불리는 추종자들에 의해 각지에 퍼졌습니다.

위클리프는 후에 종교 개혁 운동의 여러 원리를 싹틔웠다고 여겨지며, 화체설을 반대하고 수도원 제도를 비판하는 등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

1377

[그레고리오 11세, 로마 귀환]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귀환하면서 약 70년간 이어졌던 '아비뇽 유수'가 마침내 끝났습니다.이는 로마 교황청의 위상과 독립성을 회복하려는 중요한 시도였습니다.

1378

[서방 교회의 분열 시작]

그레고리오 11세 선종 후 로마에서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선출되었으나, 프랑스 추기경들이 이를 무효화하고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선출하면서 로마와 아비뇽 양쪽에서 교황이 존재하는 '서방 교회의 분열'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분열은 교황권의 위상을 더욱 실추시키고, 교회 내부의 심각한 혼란을 야기하며 1418년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1382

[존 위클리프, 성서 영어 번역]

존 위클리프가 민중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라틴어로 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마침내 완성했습니다.이는 일반 대중이 직접 성서를 읽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중요한 사건으로, 훗날 종교 개혁의 중요한 불씨가 됩니다.

그의 번역은 순교자 윌리암 틴데일의 영어 성경 번역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409

[피사 공의회, 세 교황 난립]

교회의 분열을 우려한 지식인들이 피사 공의회를 열어 아비뇽과 로마 양쪽 교황을 모두 폐위하고 제3의 교황을 세웠습니다.그러나 양측이 피사 공의회를 부정하면서 오히려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1411

[얀 후스, 대립교황에 파문]

체코의 신학자 얀 후스가 존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성서를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고 로마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대립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파문당했습니다.

1415

[얀 후스 화형]

신변 보장 약속을 받고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했던 얀 후스가 이단으로 몰려 결국 화형에 처해졌습니다.그의 순교는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보헤미안 공동체의 형성으로 이어지고, 마르틴 루터 등 알프스 이북의 종교개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후스는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고 성서를 기독교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418

[콘스탄츠 공의회, 분열 종결]

신성 로마 제국의 지기스문트 황제가 콘스탄츠 공의회를 열어 세 명의 교황을 모두 폐위하고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추대함으로써,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서방 교회의 분열'이 마침내 끝났습니다.그러나 교황의 권위는 이전보다 크게 실추되고 말았습니다.

1453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며 천년 역사의 동로마 제국이 멸망했습니다.술탄 메흐메트 2세는 도시를 이스탄불로 개명하고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으며,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 후 동방정교회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주교의 교회와 모스크바 공국에 의해 분리된 러시아정교회로 분화되었습니다.

1492

[대항해 시대 시작]

유럽인들이 선박을 이용하여 세계 곳곳을 탐험하기 시작한 '대항해 시대'가 열렸습니다.이는 유럽 중심의 세계사적 관점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유럽인들이 다른 대륙을 탐험하고 식민지를 만들면서 세계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만들어 막대한 은을 가져왔고, 이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국가가 해외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선교사를 파견하여 입지를 만회하고자 했습니다.

1517

[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

로마 가톨릭의 수도사 신부였던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여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했습니다.그는 '오직 성경과 믿음만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 사건은 '종교 개혁'의 결정적인 불씨가 되었습니다.

교황청은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발부했으며, 독일 지역에서 특히 부작용이 심했습니다. 루터의 반박문은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급속도로 퍼져나갔습니다.

1519

[츠빙글리, 스위스 종교개혁]

울리히 츠빙글리가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그는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성경의 배타적인 권위를 강조하며, 인간의 문헌보다 성경을 높게 두는 복음주의적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츠빙글리의 사상은 후에 '제1 헬베틱 신앙고백서'와 장 칼뱅이 참여한 '제2 헬베틱 신앙고백서'로 이어지며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 속하게 됩니다.

1520

[교황, 루터 주장 반박 칙서]

교황 레오 10세가 칙서 '주님,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를 통해 마르틴 루터의 주장을 41개 항목으로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이는 교황청이 루터의 종교 개혁 움직임을 공식적으로 비난하고 제압하려는 시도였습니다.

1521

[마르틴 루터 공식 파문]

교황 레오 10세가 칙서 '로마 교황의 선언(Decet Romanum Pontificem)'을 반포하여 마르틴 루터를 공식적으로 파문했습니다.이로써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그의 생명은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선제후들은 로마 교황청에 대한 불만으로 루터를 보호했고,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비밀리에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물게 하여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데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1533

[장 칼뱅, 신앙체계 확립]

장 칼뱅이 새로운 신앙체계를 확립하며 로마 가톨릭을 탈퇴하였습니다. 그는 이후 이중예정설을 포함한 칼뱅주의 신학을 정리하였습니다.

1534

[재세례파, 뮌스터 점령]

급진적 개혁을 추구한 개신교 종파인 재세례파가 독일 뮌스터를 점령하고 약 18개월간 신정정치를 시도했습니다.이들은 유아 세례를 부정하고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로마 가톨릭과 기타 개신교 양측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뮌스터 신정정치는 결국 진압되었으나, 재세례파의 사상은 아미시파, 후터라이트, 메노나이트 등 현대 교파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잉글랜드, 수장령 반포]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가 '수장령'을 반포하여 '잉글랜드 국왕만이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라고 선포했습니다.이는 왕권을 강화하고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로, 로마 가톨릭과의 단절을 공식화하며 '성공회'가 국교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을 비판하던 인문학자 토머스 모어는 수장령에 반대하다 처형되는 비극도 발생했습니다.

1536

[장 칼뱅, '기독교 강요' 출판]

장 칼뱅이 이중예정설 등 칼뱅주의 신학을 체계화한 저서 《기독교 강요》를 출판했습니다.

1541

[칼뱅, 제네바 개혁 교회 지도]

제네바 시의회가 칼뱅의 교회 제도 개혁안을 모두 수용하는 조건으로 칼뱅을 재초빙했습니다.이후 칼뱅은 죽을 때까지 제네바 개혁 교회의 목사이자 칼뱅주의 지도자로서 활동하며, 제네바를 신정일치 사회로 이끌었습니다.

칼뱅은 삼위일체를 부정하거나 간음죄를 저지른 자를 처벌하는 등 엄격한 교회법을 적용했으며, 미카엘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칼뱅주의는 위그노, 청교도, 장로교 등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545

[트리엔트 공의회 개최]

로마 가톨릭 내에서 종교 개혁에 대항하여 자성과 교회 혁신을 주장하는 '반종교 개혁'의 일환으로 트리엔트 공의회가 개최되었습니다.이 공의회는 로마 교회의 교의, 도덕, 행정 개혁을 논의하고, 개신교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며 가톨릭 교리를 재확인했습니다.

성서와 교회의 전통이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선언하고, 교회가 성서 해석의 유일한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대사의 남용을 금지하고 타락한 성직자를 징계하는 등 내부 문제 개선에도 노력했습니다.

1562

[프랑스 위그노 전쟁 시작]

프랑스 내 칼뱅주의 개신교도인 '위그노'가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로마 가톨릭과의 극심한 대립이 '위그노 전쟁'으로 번졌습니다.프랑스 정부의 탄압과 바시 학살과 같은 폭력 사태가 전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1572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프랑스 왕가의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위그노 지도자 앙리 4세의 결혼식 전날, 파리에 모여든 위그노 신도들이 로마 가톨릭 측에 의해 대규모로 학살당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벌어졌습니다.이 잔혹한 사건으로 위그노 전쟁은 다시금 격화되었습니다.

1582

[마테오 리치, 중국 선교 시작]

예수회 소속 사제 마테오 리치가 마카오에 도착하여 명나라에 대한 포교를 시작했습니다.그는 1601년 베이징에 도착하여 선무문 안에 천주당을 세우고 '천주실의' 등을 저술하여 기독교를 중국 대륙에 전파했습니다.

그가 소개한 '천주교'는 조선과 일본 등지에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1631년 정두원이 명나라에서 서양 문물과 함께 종교 서적을 가져온 기록이 최초로 확인됩니다.

1598

[낭트 칙령 발표, 위그노 전쟁 종결]

앙리 4세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위그노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길고 잔혹했던 위그노 전쟁을 끝냈습니다.이는 프랑스의 종교 갈등을 종식시키고 국가 통합을 이룬 중요한 정치적 결정이었습니다.

1616

[교황청, 코페르니쿠스 금서 지정]

로마 가톨릭 교황청이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금서 목록에 올렸습니다.이는 당시 교회에 의해 지지되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설에 반하는 태양 중심설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과학적 발견이 기독교와 충돌했던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 금서는 1758년에 해제되었지만, 과학 혁명 이후 과학의 새로운 발견은 종종 기독교와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1618

[30년 전쟁 발발]

신성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간의 '30년 전쟁'이 발발했습니다.이는 종교 전쟁이자 여러 국가의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국제전으로, 인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 중 하나였습니다.이 전쟁으로 독일 지역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기독교 내에서 발생한 신앙 형식과 내용의 차이가 전쟁과 죽음이라는 비극을 불렀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1642

[잉글랜드 내전 발발]

의회파와 왕당파로 나뉜 '잉글랜드 내전'(청교도 혁명)이 발발했습니다.이는 왕권과 의회권의 다툼뿐만 아니라, 성공회와 청교도 사이의 종교적 갈등이 큰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기독교 교파 간의 대립이 국가 내전으로 이어진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1648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30년 전쟁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결되었습니다.이 조약으로 각 제후와 국왕은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 내에서 로마 가톨릭, 루터교, 칼뱅주의 개혁교회 중 하나를 국가의 종교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이는 로마 가톨릭이 더 이상 국가 내 종교에 대해 참견할 수 없음을 뜻하는 획기적인 변화였습니다.

1652

[퀘이커 박해 중지]

조지 폭스에 의해 시작된 '퀘이커' 교도들은 악에 대한 무저항, 특정한 교단/전례/성직자 부정 등의 입장으로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그러나 이 시기 영국과 미국에서 퀘이커에 대한 박해가 중지되었습니다.

퀘이커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너'라고 부르며 국왕 앞에서도 경의를 표하지 않는 등 당시 사회 통념에 반하는 행동을 했습니다.

1738

[존 웨슬리, 감리교 창시]

영국의 성공회 성직자이자 신학자 존 웨슬리가 '감리교'를 창시했습니다.감리교는 전통적인 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이면서도 신자 개개인이 성령에 의해 감화되는 '성화'를 중요시했습니다.웨슬리 사후 성공회와 결별하며 독립적인 교파로 발전했습니다.

웨슬리 자신은 감리교를 성공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부흥 운동으로 여겼습니다.

1776

[미국 독립 선언]

미국 독립 전쟁 과정에서 '미국 독립 선언서'가 채택되었습니다.독립 선언서에서 말하는 '천부인권'은 개개인이 신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독립을 이끈 미국인들은 대부분 청교도와 같은 개신교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존 로크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종교와 정치가 엄격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미국 헌법 제1조에 '의회는 특정 종교를 국교로 삼을 수 없다'고 명문화되었습니다.

1789

[프랑스 혁명 발발]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혁명의 이념을 제공한 프랑스 계몽주의는 기독교 대신 '이성과 자유, 진보'를 강조하며 무신론과 유물론을 부각시켰습니다.앙시앵 레짐에서 로마 가톨릭이 지배 계급의 일부였기에, 자유주의는 구 체제를 거부하는 급진적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1810

[멕시코 독립 전쟁 시작]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멕시코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전쟁을 이끌었던 초기 지도자 미겔 이달고 코스티야 스스로가 로마 가톨릭 성직자였습니다.멕시코 역사에서 가톨릭은 큰 영향을 남겼으며, 국민 대다수가 여전히 로마 가톨릭 신자입니다.

1830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설립]

'회복된 기독교'를 표방하며 조지프 스미스 2세와 6명의 설립등기인이 미국 뉴욕주에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를 설립했습니다.이 교회는 초기 일부다처제 등으로 갈등을 겪었으나 현재는 엄금하고 있습니다.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에 본부가 있습니다.

1832

[그리스 독립 및 정교회 영향력 유지]

12년간의 그리스 독립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가 독립했습니다.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그리스 전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그리스 정교회는 독립 이후에도 그 영향력을 유지했습니다.20세기까지도 정교회 교회법에 따르지 않고는 결혼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1870

[여호와의 증인 연구 모임 조직]

찰스 테이즈 러셀에 의해 미국에서 성서 연구 모임이 조직되면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신흥 종교가 시작되었습니다.이들은 성서의 법과 원칙을 고수하며 정치에 불참하고, 평화를 위해 양심적 병역을 거부하는 독특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념 때문에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 등으로부터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1872

[국제성서연구자협회 설립]

여호와의 증인의 전신인 '국제성서연구자협회(International Bible Students Association)'가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설립되었습니다.이는 여호와의 증인 조직의 공식적인 출발점이 됩니다.

1880

[자유주의 신학 형성]

이성을 중시하던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자유주의 신학'이 형성되었습니다.19세기에 정점을 이룬 이 신학은 '역사적 예수'를 중시하고 기적을 역사적 사건의 상징으로 해석했습니다.알버트 슈바이처가 대표적인 신학자입니다.

1890

[기독교 근본주의 주창]

19세기 말 이후 미국의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며 '기독교 근본주의'를 주창했습니다.이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을 주장하며, 진화 이론이나 여성주의 등을 반대하고 정치적으로는 우파를 지지합니다.

현대의 기독교 근본주의는 1970년대 이후 더욱 명확한 형태로 형성되었습니다.

1905

[피의 일요일, 로마노프 몰락 계기]

러시아에서 불평등한 사회 체제 개선을 탄원하던 군중이 '자비로운 아버지 짜르' 니콜라이 2세의 황궁으로 향하다 유혈 진압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했습니다.이 사건은 로마노프 왕가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정교회는 총대교구좌를 부활시켰으나, 스탈린 집권 초기에는 구체제의 악습으로 취급되어 탄압받기도 했습니다.

1914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기독교 국가들이 서로 유례없는 대량 학살을 벌였습니다.각국의 교회는 자국의 승리를 신에게 갈구하며 신학자 마틴 로이드 존스로부터 '징병사무소 노릇'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현대의 시작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로 보는 관점이 있으며, 이 전쟁은 기독교 역사에도 많은 반성을 가져왔습니다.

[오순절교회 시작]

미국 아칸소 주에서 '오순절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이는 개신교의 한 교파로, 신에게서 직접 영감을 받는 '방언의 은사'와 같은 신비주의적인 체험을 중요시합니다.대한민국에서는 순복음교회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는 흑인 신자가 많은 교파이기도 합니다.

1917

[10월 혁명, 러시아 정교회 변화]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발생한 후, 러시아 정교회는 총대교구좌를 부활시켰습니다.그러나 스탈린 집권 초기에는 구체제의 악습으로 취급되어 탄압받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소비에트 정권의 애국주의 호소에 '정권의 동료'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미하일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 러시아 정교회는 다시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보장받고 총대교구좌를 복원했습니다.

196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

교황 요한 23세의 요청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어 현대 로마 가톨릭의 제반 사항을 결정했습니다.교황은 '교회의 가르침은 박물관의 보물이 아니라 시대에 맞게 탐구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이 공의회는 초대교회 정신으로 돌아가고, 미사를 각 지역 언어로 진행하며 가톨릭을 현지화하고, 신자의 사도직과 신앙의 자유를 확인하는 등 가톨릭 현대화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68

[해방 신학 시작]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콜롬비아 메데진 주교회의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서 '해방 신학'이라는 진보적인 신학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이 군부 독재와 빈부 격차 같은 현실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참여했습니다.

2010

[한국 정교회 110주년 심포지엄]

한국 정교회 전파 110주년을 맞아 세계 각지의 정교회가 한자리에 모여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했습니다.이는 오랫동안 독립적으로 유지되어 온 동방정교회 교구들이 서로 소통하고 일치를 모색하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21세기가 되면서 동방정교회는 부활절과 같은 전례일을 4월 15일로 통일하는 등 교파 간 협의를 통해 일치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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