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디스 펄 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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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디스 펄 베이커
필름 커터, 배우의 어머니 + 카테고리
글래디스 펄 베이커(본명 글래디스 펄 먼로)는 세계적인 할리우드 아이콘 마릴린 먼로(본명 노마 진 모텐슨)의 어머니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멕시코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란 그녀의 삶은 20세기 초 불안정한 가정 환경과 정신 질환이 얽힌 비극적인 여정이었습니다. 알코올 중독과 신경매독을 앓던 아버지, 우울증을 겪은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어린 나이에 첫 결혼을 했으나, 남편의 폭력과 자녀 납치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후 할리우드로 이주해 네거티브 필름 커터로 일하며 독립적인 삶을 살고자 했고, 찰스 스탠리 기퍼드와의 관계에서 딸 노마 진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생활고와 극심한 산후 우울증으로 딸을 위탁 가정에 맡겨야만 했습니다. 1930년대 초, 아들의 죽음과 조부의 자살, 어머니의 사망 등 연이은 비극을 견디지 못하고 심각한 신경 쇠약에 빠졌으며, 결국 편집성 조현병 진단을 받아 생의 대부분을 여러 정신 병원과 요양 시설에 수용된 채 보냈습니다. 글래디스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화려한 할리우드의 이면에 가려진 당대 노동계급 여성들의 사회적, 정신적 고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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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02

[멕시코 피에드라스 네그라스 출생]

글래디스 펄 먼로라는 이름으로 멕시코 코아우일라주의 포르피리오 디아스(현재의 피에드라스 네그라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오티스 엘머 먼로는 멕시코 국립 철도에서 기차 객차를 칠하는 화가로 일하고 있었으며, 어머니 델라 메이 먼로는 조산사 겸 비공식 교사로 활동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계 혈통을 지닌 가족은 국경을 넘나들며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1903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이주]

봄 무렵, 가족과 함께 멕시코를 떠나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로 이주했습니다.
이주 후 아버지는 퍼시픽 전기 철도 회사에 취직하여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심각한 알코올 중독과 잦은 분노 발작을 보이며 부모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글래디스는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유년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1909

[아버지 오티스 엘머 먼로 사망]

심각한 정신 질환과 신경매독으로 샌버너디노 카운티의 패튼 주립 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아버지가 사망했습니다.
아버지는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 신경매독으로 인해 반신마비와 치매 증상을 앓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 델라는 가사도우미 일을 하고 방을 세놓으며 힘겹게 글래디스와 오빠 매리언을 부양했습니다.

1916

[베니스 거주 및 학창 시절]

로스앤젤레스의 베니스 지역에서 어머니, 오빠와 함께 거주하며 십 대 시절을 보냈습니다.
학교에서 글래디스는 사교적인 성격을 가진 십 대 소녀였으며, 어머니처럼 나이가 많은 남성들에게 호감을 느꼈습니다. 당시 어머니 델라는 여러 남성들과 불안정한 만남과 이혼을 반복하고 있었고, 이는 글래디스의 정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17

[재스퍼 뉴턴 베이커와 첫 번째 결혼]

14세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관리하던 아파트의 건물주이자 켄터키 출신의 사업가인 재스퍼 뉴턴 베이커와 결혼했습니다.
어머니 델라의 허락을 받고 글래디스의 나이를 18세로 속인 진술서에 서명한 뒤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들 로버트 커밋 '재키' 베이커와 딸 버니스 베이커가 태어났습니다.

1921

[이혼 소송 제기 및 자녀 납치 사건]

남편 재스퍼의 심각한 음주와 폭력적인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신청하여 자녀 양육권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앙심을 품은 재스퍼는 글래디스 몰래 두 아이를 납치하여 자신의 고향인 켄터키주로 도주해 버렸습니다. 이 사건은 글래디스에게 자녀를 잃었다는 극심한 상실감과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1922

[아이들을 찾기 위한 켄터키 이주 및 귀환]

20세가 된 글래디스는 납치된 아이들 가까이에 살기 위해 켄터키로 이주하여 청소 및 보모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재스퍼의 폭력적인 위협과 양육권을 되찾을 법적 조력자의 부재로 인해 한계를 느꼈습니다. 결국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한 채 4개월 만에 아이들을 남겨두고 홀로 캘리포니아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1923

[할리우드 이주 및 필름 커터 취업]

할리우드로 이주하여 영화 산업에 발을 들이고 'Consolidated Film Industries'에서 네거티브 필름 커터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튜디오 편집자들이 잘라내라고 표시한 필름 부분을 오려내는 고된 수작업을 주 6일 동안 수행했습니다. 이후 컬럼비아 픽처스와 RKO 픽처스 등 굵직한 영화사에서도 필름 커터로 활약하며 전문성을 키웠습니다.

[그레이스 맥키와의 동거 및 플래퍼 생활]

여름 무렵, 직장 상사이자 절친한 친구가 된 그레이스 맥키와 함께 로스앤젤레스 실버레이크 지역에 아파트를 얻어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두 여성은 1920년대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의 자유로운 문화를 받아들여 남성들이 누리던 사회적, 성적 자율성을 추구하는 플래퍼(Flapper)가 되었습니다. 그레이스의 영향으로 글래디스는 평범한 갈색 머리 여성에서 세련된 옷을 입는 매력적인 붉은 머리 여성으로 변신했습니다.

1924

[마틴 에드워드 모텐슨과 두 번째 결혼]

여름에 만난 노르웨이 이민자의 아들이자 남부 캘리포니아 가스 회사의 검침원인 마틴 에드워드 모텐슨과 두 번째로 결혼했습니다.
초기에는 모텐슨이 주는 안정감에 끌려 결혼을 결심했으나, 금세 결혼 생활에 지루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을 떠나 다시 친구 그레이스에게 돌아갔습니다.

1925

[찰스 스탠리 기퍼드와 불륜 시작]

RKO 픽처스에서 필름 커터로 일하던 중 직장 상사인 찰스 스탠리 기퍼드와 내연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기퍼드는 당시 아내와 별거 및 이혼 절차를 밟고 있던 바람둥이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글래디스는 모텐슨을 떠난 지 10개월이 지난 1925년 말, 자신이 기퍼드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틴 에드워드 모텐슨의 이혼 소송 제기]

아내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자, 남편 마틴 에드워드 모텐슨이 유기(desertion)를 사유로 법원에 이혼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는 아내인 글래디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 이혼 절차는 꽤 길어져 법적으로 완전히 남남이 되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1926

[딸 노마 진(마릴린 먼로) 출생]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병원에서 그녀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자녀인 노마 진(훗날의 마릴린 먼로)을 출산했습니다.
글래디스는 병원에 찾아온 기퍼드의 면회를 거부했으며, 법적으로 이혼 처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출생증명서에는 별거 중인 남편 모텐슨의 성을 기재했습니다. 훗날 2022년에 실시된 DNA 검사를 통해 찰스 스탠리 기퍼드가 노마 진의 생부임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노마 진을 위탁 가정에 맡김]

심각한 산후 우울증과 생업을 유지해야 하는 경제적 어려움 탓에, 출산 후 2주 만에 딸 노마 진을 캘리포니아 호손에 사는 볼렌더(Bolender) 부부의 위탁 가정에 맡겼습니다.
초기에는 딸과 같은 방을 쓰며 보살피려 했으나, 업무량이 늘어나자 할리우드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주말마다 정기적으로 양육비를 지불하고 아이와 시간을 보냈지만, 점차 딸의 삶에서 불규칙적이고 희미한 존재로 남게 되었습니다.

1927

[어머니 델라 메이 먼로 사망]

심각한 심장 질환과 조울증에 시달리던 어머니 델라가 노워크 주립 병원(Norwalk State Hospital)에 강제 수용된 상태에서 조증 발작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어머니는 사망하기 직전 갑작스러운 환각을 보며 아무 이유 없이 손녀인 노마 진을 베개로 질식시키려 하는 등 극도의 정신적 불안 상태를 보였습니다.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은 글래디스의 정신 건강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1928

[마틴 에드워드 모텐슨과 법적 이혼 성립]

오랜 별거 기간과 소송 절차 끝에 두 번째 남편인 마틴 에드워드 모텐슨과의 이혼이 법적으로 최종 성립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녀는 법적으로 완전한 미혼 상태가 되었습니다. 서류상 노마 진의 아버지로 기록된 모텐슨과의 연결 고리가 공식적으로 끊어지게 된 시점입니다.

1929

[영화사 대형 화재 시 인명 구조]

그녀가 일하던 'Consolidated Film Industry' 건물에 수백만 개의 필름을 파괴하는 대형 화재가 발생했을 때 침착하게 동료들을 밖으로 대피시켜 인명을 구조했습니다.
같은 해 10월에는 유일한 혈육인 오빠 매리언이 갑자기 실종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까지는 직장 생활을 무사히 영위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1933

[할리우드 주택 구입 및 노마 진과 동거]

주택 소유주 대출 공사(Home Owners' Loan Corporation)에서 대출을 받아 할리우드에 작은 집을 구입하고 위탁 가정에 있던 딸 노마 진을 데려와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대출금과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영국 출신의 배우 부부인 앳킨슨(Atkinson) 가족을 세입자로 들여 집을 공유했습니다. 글래디스가 영화 현상소에서 일하는 동안 노마 진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낮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들 재키 사망 및 조부 자살 소식]

재스퍼에게 납치당해 떨어져 살던 아들 재키가 신장 질환으로 십 대 후반의 나이에 사망했다는 비보와 함께, 조부인 틸포드 호건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연이어 접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비극적인 죽음이 겹치면서 글래디스의 정신 상태는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딸 노마 진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탓하는 등 심각한 신경 쇠약 증세를 보였습니다.

1934

[극심한 신경 쇠약으로 정신 병원 입원]

가족들의 죽음과 다니던 스튜디오가 폐쇄된다는 소식 등 악재가 겹치며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려 로스앤젤레스 종합 병원 정신과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칼을 들고 딸을 찌르려다 친구 그레이스에게 제지당하는 등 심각한 위협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점부터 글래디스는 정상적인 사회생활과 양육을 영원히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1935

[편집성 조현병 진단 및 노워크 주립 병원 수용]

의료진으로부터 편집성 조현병(paranoid schizophrenia)이라는 공식 진단을 받고, 과거 그녀의 어머니가 사망했던 노워크 주립 병원(Norwalk State Hospital)에 수용되었습니다.
자신을 억압하려는 망상과 환각에 시달리며 오랜 시간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그녀가 병원에 입원함에 따라 어린 노마 진은 국가의 보호를 받는 고아 신세가 되어 여러 위탁 가정을 전전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1946

[10년 이상의 병원 생활 후 퇴원]

산호세에 위치한 애그뉴스 주립 병원(Agnews State Hospital)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던 중, 증세가 호전되어 약 10년이 넘는 기나긴 정신 병원 수용 생활을 마치고 퇴원했습니다.
오랜 병원 생활로 인해 그녀의 삶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지만, 세상 밖으로 나와 다시 자립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해 평범한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습니다.

1949

[존 스튜어트 일라이와 세 번째 결혼]

사회로 복귀한 후 전기 기술자로 일하던 존 스튜어트 일라이(John Stewart Eley)를 만나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녀는 새로운 가정을 통해 정서적 안정을 얻기를 갈망했으나, 남편인 존 스튜어트 일라이 역시 알코올 의존증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1952

[세 번째 남편 존 스튜어트 일라이 사망]

결혼한 지 3년 만에 세 번째 남편인 존 스튜어트 일라이가 심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나며 다시 홀로 남겨졌습니다.
남편의 죽음은 그녀에게 다시 한번 큰 상실감을 주었고, 겨우 유지하던 삶의 기반마저 흔들리게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 딸 마릴린 먼로는 할리우드의 주목받는 톱스타로 급성장하고 있었습니다.

1953

[마릴린 먼로의 재정적 지원 및 요양원 입원]

록헤드(Lockheed)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은 후, 큰 성공을 거둔 딸 마릴린 먼로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의 고급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마릴린 먼로는 언론에 어머니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해왔으나, 사실이 밝혀진 후 어머니의 치료비와 생활비를 전적으로 부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글래디스는 자신을 찾아오는 딸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증세가 깊었습니다.

1963

[락 크레스트 요양원에서 탈출 시도]

딸 먼로의 사후 그녀의 유산에서 지급되는 신탁 기금으로 로스앤젤레스의 락 크레스트 요양원(Rockhaven Sanitarium)에 머물던 중, 병원 담장을 넘어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그녀는 요양원 생활을 극도로 답답해하며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이 사건 당시 그녀는 병원에서 무려 15마일(약 24km)을 걸어가 레이크뷰 테라스 침례교회에서 발견되어 다시 병원으로 인계되었습니다.

1967

[카마릴로 주립 병원 퇴원 및 딸 버니스와 거주]

카마릴로 주립 정신 병원(Camarillo State Mental Hospital)에서 최종적으로 풀려나, 어릴 적 남편에게 빼앗겼던 첫째 딸 버니스 베이커의 집으로 들어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수십 년간의 병원 수용 생활을 완전히 마감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순간이었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첫딸과 재회하여 노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안식처를 얻게 되었습니다.

1984

[플로리다주 게인즈빌에서 사망]

말년을 보내던 플로리다주 게인즈빌의 은퇴자 요양 시설에서 81세의 나이로 심장 기능 상실로 인해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파란만장하고 고통스러웠던 삶의 무게를 모두 내려놓고 영면에 들었습니다. 세계 최고 스타의 어머니였으나 평생을 정신 질환과 고독 속에서 싸워야 했던 그녀의 비극적인 생애가 마침내 끝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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