궈모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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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가, 정치인, 혁명가, 학자 + 카테고리

궈모뤄는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문학가, 사상가, 혁명가이자 정치가입니다. 그는 신문학 운동의 선구자로서 창조사를 이끌고 혁명 문학을 개척했으며,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서 중국 고대 사회를 탐구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는 마오쩌둥 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총리 등 요직을 역임하며 중국 문학과 사상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란만장한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낸 그의 삶은 곧 격동의 중국 현대사 그 자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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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92

[혁명가 궈모뤄의 탄생]

중국 신문학을 이끌었던 혁명가이자 극작가, 사상가인 궈모뤄가 쓰촨성 러산 시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카계 출신으로 쓰촨성 쟈딩 푸의 중류 지주 가문 셋째 아들로 태어난 궈모뤄는 중국 신문학 운동의 선구자이자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 마오쩌둥주의 문학 사상 공작자로 활동하게 됩니다. 본명은 카이전, 호는 딩탕이며, 모뤄는 자입니다.

1914

[일본 유학 및 문학 활동 시작]

궈모뤄는 일본 규슈대 의학부에 입학하여 근대적 학문 연구 방법을 익히며, 이 시기에 시 창작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쓰촨성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궈모뤄는 1914년 일본 제국의 규슈대 의학부에 입학하여 서구의 근대적인 연구 방법을 습득했습니다. 이 유학 기간 동안 그는 시 창작에 몰두하며 훗날 중국 신문학 운동을 이끌 중요한 문학적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1921

[혁명 문학 단체 '창조사' 결성]

궈모뤄는 혁명 문학 단체인 창조사를 결성하여 중국에서 반봉건 혁명 낭만주의 운동을 일으킨 초기 활동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일본 유학 중이던 궈모뤄는 1921년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혁명적인 문학 단체인 창조사(創造社)를 결성했습니다. 이 단체는 중국 사회의 봉건적 잔재에 저항하며 낭만주의적 혁명 문학을 주창하여, 중국 신문학 운동의 중요한 축을 형성했습니다. 같은 해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고 여성 해방을 주제로 한 극 <3인의 반역적 여성>을 발표했는데, 이는 중국 공산당 신문학 운동 시기의 본격적 사극으로 평가받습니다.

1927

[난창 봉기 가담과 공산당 입당]

국민혁명군 북벌에 참가하여 활동하던 궈모뤄는 난창 봉기에 가담한 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공산주의자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1926년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개시하자, 궈모뤄는 리다자오 등 마르크스-레닌주의 진영에 합류하여 우한과 상하이 등지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이듬해인 1927년 난창 봉기에 가담하며 중국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고, 이후 공산주의자에 대한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일본 망명 기간 동안 그는 유물사관을 바탕으로 중국 고대 사회를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중요한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1937

[중일 전쟁 시기 항일 선전 활동]

중일 전쟁 발발 후 충칭으로 귀국한 궈모뤄는 중국 공산당 측의 문학 평론을 이끌고 항일 전선에서 선전 활동을 펼치며 수많은 극작과 평론을 발표했습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궈모뤄는 일본에서 귀국하여 충칭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중국 공산당 측의 문학 평론 공작 책임자를 맡아 코민테른의 공산당 혁명 항일 전선에 참여하여 선전 활동에 적극적으로 종사했습니다. 이 시기에 희곡 <굴원>(1942년 발표)과 같은 많은 극작품과 평론을 발표하며 국민당의 부패를 비판하고 항쟁의 정신을 고취했습니다.

1949

[마오쩌둥 정권의 문학 사상 조타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궈모뤄는 마오쩌둥 정권의 핵심 문인 대표로 세계 평화 회의에 참석하고, 정무원 부총리 겸 과학원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마오쩌둥주의 문학 사상 노선의 조타수 역할을 했습니다.

1949년, 궈모뤄는 파리와 바르샤바에서 열린 세계 평화 회의에 마오쩌둥 측의 문인 대표로 참가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이후에는 정무원 부총리 겸 과학원장, 중앙인민정부 위원, 중국과기대 학장, 중국 공산당 문학예술계연합회 주석, 중국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주임 등 국가의 중요한 직책들을 맡았습니다. 그는 마오둔, 저우양, 천보다 등과 함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정권 아래에서 마오쩌둥주의 문학 사상 노선을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1978

[문화대혁명 이후의 삶과 사망]

문화대혁명 초기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마오쩌둥의 보호로 지위를 유지했으며, 마오쩌둥 사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화대혁명 초기, 궈모뤄는 사인방의 부상으로 정치적 어려움에 처했으나, 마오쩌둥의 특별한 보호 요청으로 그의 지위는 유지되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에는 화궈펑에 의해 당내 정치적 지위를 회복했습니다. 마오쩌둥이 사망했을 때 화궈펑 정권에서 마오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1978년 6월 12일, 마오쩌둥이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징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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