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 9번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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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9번 (베토벤)
클래식 음악, 교향곡, 합창곡, 세계 기록 유산 + 카테고리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작곡한 마지막 교향곡입니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에 붙임을 가사로 사용한 제4악장 합창은 인류 화합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당대 교향곡의 상식을 깬 파격적인 구성과 대규모 편성으로 후대 음악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럽 연합의 공식 상징가이자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된 인류 최고의 걸작 중 하나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연말 행사 및 중요 기념일에 연주되며 대중에게 깊은 감동과 흥미를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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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792

[실러의 시 '환희에 붙임'과의 첫 만남]

22세의 베토벤이 실러의 시 '환희에 붙임'에 깊은 감명을 받아 언젠가 곡을 붙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는 그의 첫 교향곡이 작곡되기 한참 전의 일로, 이 작품에 대한 오랜 구상의 시작을 알립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792년 22세의 젊은 나이에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에 붙임'을 접하고 큰 감동을 받아 곡을 붙이려는 의지를 품었습니다. 당시 그는 아직 첫 교향곡도 작곡하지 않은 시기였지만, 이 시에 대한 강한 열망은 그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간직되었습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이 시를 교향곡에 활용할 계획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815

[교향곡 9번 작곡의 시작]

베토벤은 일곱 번째 교향곡을 완성한 지 3년쯤 지난 시점부터 아홉 번째 교향곡의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구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때입니다.

베토벤은 《교향곡 7번》 작곡 이후 약 3년이 지난 1815년경부터 《교향곡 9번》의 작곡에 착수했습니다. 이 시기에 작품의 기본적인 틀과 아이디어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나, 다른 작품들에 집중하며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817

[런던 필하모닉 협회의 작곡 위촉]

런던 필하모닉 협회로부터 새로운 교향곡을 위촉받으면서 베토벤은 《교향곡 9번》 작곡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는 그의 창작 활동에 중요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1817년 '런던 필하모닉 협회'(현재의 왕립 필하모닉 협회)가 베토벤에게 교향곡 작곡을 공식적으로 위촉했습니다. 이 위촉은 베토벤이 《교향곡 9번》의 작곡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진행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818

[베토벤의 완전한 청력 상실과 창작 의지]

48세가 되던 해, 베토벤은 청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노트에 의존하며 소통하고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불굴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위대한 작품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베토벤은 48세(1818년)부터 청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오로지 노트에만 의존하여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음악적 영감을 잃지 않고 《교향곡 9번》을 포함한 여러 걸작을 완성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1822

['환희의 송가' 선율 탄생]

인류애와 자유의 상징인 '환희의 송가'의 아름다운 선율이 약 1822년경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선율은 교향곡 9번의 마지막 악장을 빛내는 핵심적인 부분이 됩니다.

《교향곡 9번》의 가장 유명한 부분이자 핵심 주제인 '환희의 송가' 선율이 1822년경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선율은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에 붙임'에 곡을 붙인 것으로, 작품의 전체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824

[교향곡 9번 초고 완성]

오랜 구상과 노력 끝에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의 초고가 드디어 완성되었습니다. 이는 이 위대한 작품이 세상에 나올 준비를 마쳤음을 의미합니다.

1824년에 《교향곡 9번》의 초고가 완성되었습니다. 이 초고는 이후 초연까지 몇 차례의 개정을 거쳤으며, 초연 이후에도 계속적인 수정을 통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감격적인 초연]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9번 '합창'이 빈의 케른트너토르 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청력을 완전히 잃은 베토벤은 지휘대에 섰지만, 관객의 뜨거운 박수 소리를 듣지 못해 알토 가수 카롤리네 웅거의 도움으로 비로소 환호를 볼 수 있었습니다.

1824년 5월 7일, 빈의 케른트너토르 극장에서 《교향곡 9번》의 초연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베토벤은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미하엘 움라우프가 공식 지휘를 맡았고 베토벤은 템포를 지시하는 역할로 참여했습니다. 초연은 리허설 부족으로 다소 불완전했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베토벤은 박수 소리를 듣지 못해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알토 가수 카롤리네 웅거가 그의 손을 잡아 관객들을 돌아보게 한 후에야 열광적인 환호를 보았다는 감동적인 일화가 전해집니다.

[초연 이후 두 번째 공연]

감격적인 초연 이후 16일 만에 교향곡 9번의 두 번째 공연이 열렸습니다. 초연의 열기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 작품은 서서히 대중에게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1824년 5월 23일, 《교향곡 9번》의 두 번째 공연이 초연으로부터 16일 후에 열렸습니다. 이 공연은 초연 때만큼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 위대한 작품이 대중에게 점차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26

[교향곡 9번 악보 초판 간행]

1826년 쇼트 사를 통해 교향곡 9번의 악보 초판이 출판되었습니다. 《교향곡 9번》의 초판 악보가 1826년에 마인츠의 쇼트 사를 통해 간행되었습니다. 《교향곡 9번》의 초판 악보가 마인츠의 쇼트 사를 통해 간행되었습니다. 해당 곡은 당초 러시아 황제에게 헌정될 예정이었으나 황제의 승하로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헌정되었습니다.

1828

[파리음악원 관현악단 창단]

세계 최초의 음악학교인 파리음악원 졸업생 프랑수아 앙투안 아브넥이 파리음악원 관현악단을 창단했습니다. 이 악단은 베토벤 교향곡 연주의 중요한 거점이 됩니다.

1828년, 파리음악원 졸업생이자 파리 오페라좌 관현악단 바이올린 주자였던 프랑수아 앙투안 아브넥이 모교에 파리음악원 관현악단을 창단했습니다. 이 악단은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은 멤버들로 구성되어 '비길 데 없는 관현악단', '유럽 최고 수준의 관현악단'이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베토벤 교향곡의 중요한 연주 단체가 되었습니다.

1831

[파리에서의 교향곡 9번 부분 초연]

프랑수아 앙투안 아브넥이 이끄는 파리음악원 관현악단이 3년간의 준비 끝에 《교향곡 9번》을 파리에서 처음으로 연주했습니다. 다만, 당시 여건상 제4악장은 제외한 채 1악장부터 3악장까지만 연주되었습니다.

1831년, 프랑수아 앙투안 아브넥은 3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자신이 지휘하는 파리음악원 관현악단과 함께 《교향곡 9번》을 파리에서 처음으로 연주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여건 때문에 제4악장은 제외하고 제1악장부터 제3악장까지만 연주되었습니다. 이 연주는 젊은 엑토르 베를리오즈와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1842

[바그너의 드레스덴 지휘자 임명]

오페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드레스덴에서 오페라 《리엔치》로 큰 성공을 거두며,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궁정악단)의 지휘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베토벤 교향곡 9번의 부활 연주를 꿈꾸는 계기가 됩니다.

파리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고향 독일로 돌아온 리하르트 바그너는 1842년 드레스덴에서 오페라 《리엔치》를 공연하여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 공적으로 그는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당시 작센왕국의 궁정악단)의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소년 시절부터 베토벤 작품에 열중했던 그는 이 기회를 통해 《교향곡 9번》의 전 악장 부활 연주라는 오랜 꿈을 실현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846

[바그너의 교향곡 9번 전 악장 부활 연주 성공]

리하르트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 전 악장의 부활 연주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당시 악보를 개정하고 철저한 리허설을 거친 이 공연은 《합창》이 '걸작'으로 평가받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846년, 리하르트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열리는 오케스트라 양로 연금 기금 적립 특별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전 악장을 연주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팜플렛과 해설서를 통해 반대파를 설득하고, 베토벤 시대의 악기 발달 부족을 보완하고자 악보를 가필 개정했습니다. 철저한 리허설 덕분에 이 연주회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 《합창》은 '걸작'으로 확고히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1872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 정초 기념 연주]

바이로이트에 축제 극장을 세울 당시, 그 정초를 기념하여 리하르트 바그너의 지휘로 《교향곡 9번》이 연주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합창》은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바그너 오페라 외 유일하게 연주되는 곡이 되었습니다.

1872년, 바이로이트에 축제 극장을 건립할 때 그 정초(定礎)를 기념하는 행사로 선제후 극장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지휘 아래 《교향곡 9번》이 연주되었습니다. 이 특별한 인연으로 《합창》은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바그너의 오페라와 악극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연주되는 곡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18

[라이프치히의 평화 기원 연말 연주 전통 시작]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라이프치히에서는 실러의 고향이라는 인연을 기념하며 100명의 연주가와 300명의 가수들이 '모두가 형제가 된다'는 평화의 염원을 담아 《합창》을 연주했습니다.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라이프치히의 연말 연주 전통의 시작이었습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평화에 대한 염원이 유럽 전역에 퍼졌습니다. 특히 라이프치히 교외의 고리스 마을이 실러가 '환희에 붙임'을 썼던 곳이라는 인연으로, 12월 31일 오후 100명의 연주가와 300명의 가수들이 노동자 교양 협회 주도로 베토벤의 《합창》을 연주했습니다. '인류는 모두가 형제가 된다'는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이 연주는 라이프치히의 연말 연주 전통으로 자리 잡아, 매년 새해 평화를 기원하며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에 의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1942

[푸르트벵글러, 히틀러 생일 전날 《합창》 지휘 (나치 선전 이용)]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히틀러의 생일 전날 《합창》을 지휘했으며, 이 모습은 괴벨스와 악수하는 장면과 함께 나치의 정치 선전에 이용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전후 나치와의 관계를 비난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4월 19일, 독일에서 활동하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나치 독일 총통 히틀러의 생일 전날 《합창》을 지휘했습니다. 이 공연은 요제프 괴벨스와 악수하는 모습과 함께 영화로 촬영되어 나치의 정치 선전에 이용되었습니다. 푸르트벵글러는 본래 히틀러의 생일 연주를 피하려 했으나 괴벨스의 강압적인 일정 변경으로 인해 기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사건으로 전후 연합국으로부터 나치와의 관계를 비난받아 한때 활동 기회를 잃게 되었습니다.

1944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전쟁으로 전소]

제2차 세계대전의 공습으로 라이프치히의 유서 깊은 공연홀 게반트하우스가 불타 전소되었습니다. 이는 유럽 문화유산에 큰 손실을 안겼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본토가 거센 공습에 시달리면서, 1944년 라이프치히의 공연홀 게반트하우스가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불탔습니다. 이로 인해 유서 깊은 음악의 전당이 파괴되는 비극을 겪게 되었습니다.

1948

[국내 교향곡 9번 '합창' 최초 연주]

서울시립교향악단 창단 1주년 기념 공연에서 롤프 자코비 지휘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습니다. 300여 명의 대규모 출연진이 함께한 역사적인 무대였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초연은 1948년 11월, 서울시립교향악단(당시 서울교향악단) 창단 1주년 기념 공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서울시향의 지휘자는 김생려였으나, 이 날 공연의 지휘는 중앙방송국 고문으로 한국에 와 있던 롤프 자코비가 맡았습니다. 합창단 200명을 포함하여 총 300여 명의 출연진이 참여한 대규모 공연으로, 국내 클래식 음악사에 중요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1949

[김생려 지휘의 교향곡 9번 연주]

국내 초연 이듬해인 1949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지휘자 김생려가 직접 《교향곡 9번》을 지휘하며 이 작품이 국내 음악계에 점차 자리 잡는 데 기여했습니다.

1948년 국내 초연된 이듬해인 1949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였던 김생려가 직접 《교향곡 9번》을 지휘하여 다시 한번 연주했습니다. 이는 한국 음악계에 이 대작이 꾸준히 소개되고 뿌리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51

[바이로이트 축제 재개와 푸르트벵글러의 《합창》 지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첫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합창》을 지휘하며 축제의 재개를 축하했습니다. 이 연주는 녹음 기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명연으로 손꼽힙니다.

1951년 7월 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처음 열린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교향곡 9번 '합창'》을 지휘하며 축제의 성공적인 재개를 기념했습니다. 이 공연은 당시 녹음 기술의 한계로 선명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었으나, 푸르트벵글러 사후 EMI를 통해 레코드로 발매되어 많은 평론가들에게 극찬받았으며, 현재까지도 '합창'의 최고 연주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1955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재건 기념 연주]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이 재건되자 브루노 발터 지휘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합창》을 연주하며 극장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습니다.

1955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되었던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이 재건되었을 때, 브루노 발터의 지휘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교향곡 9번 '합창'》이 연주되었습니다. 이는 극장의 재건을 축하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의미 깊은 공연이었습니다.

1961

[김만복 지휘의 교향곡 9번 연주]

1961년 12월, 김만복 지휘자가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이끌고 《교향곡 9번》을 연주했습니다. 이는 국내에서 이 작품의 연주가 점차 활발해지는 시기의 중요한 공연 중 하나였습니다.

1961년 12월, 지휘자 김만복이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지휘하여 《교향곡 9번》을 연주했습니다. 이는 1940년대 후반 국내 초연 이후 꾸준히 이루어진 《합창》 연주 활동의 일환으로, 국내 클래식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1962

[5.16 혁명 1주년 기념 연합 음악제 공연]

5.16 혁명 1주년 기념 국제 음악제 마지막 날, 서울시립교향악단과 KBS방송교향악단 등 800여 명의 연합 출연진이 안익태 지휘로 세종문화회관에서 《합창》을 성대하게 연주했습니다.

1962년 5월 16일, 5.16 혁명 1주년 기념 국제 음악제 마지막 날, 서울시립교향악단, KBS방송교향악단, 3군 군악대 300명과 500여 명의 연합합창단 등 총 800여 명의 대규모 출연진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안익태 지휘로 《교향곡 9번》을 연주했습니다. 안익태의 《한국환상곡》도 함께 연주된 이날 공연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1964

[도쿄 올림픽에서 동서독 통일선수단 상징가로 채택]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분단된 동독과 서독이 통일선수단을 구성했을 때, 국가 대신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환희의 송가'가 양국을 하나로 묶는 상징가로 울려 퍼졌습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당시 분단되었던 동서독이 통일선수단을 조직했을 때, 양국의 국가 대신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환희의 송가'가 공동의 상징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냉전 시대의 이념 갈등 속에서도 음악이 하나됨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970

[베토벤 탄생 200주년 기념 '합창의 밤']

베토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 시민회관에서 3000여 명의 관객이 모인 가운데 '베토벤 합창의 밤'이 열렸습니다. 김만복 지휘의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생동감 넘치는 연주로 깊은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1970년 6월 11일, 베토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베토벤 합창의 밤'이 경향신문사의 특별 후원으로 시민회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김만복 지휘의 서울시립교향악단 연주에 3000여 명의 관객이 모여들었으며, 당시 언론은 생동감 있고 장엄한 선율로 절정을 이끈 연주였다고 극찬했습니다.

1972

['환희의 송가', 유럽 공동체(EC)의 노래로 채택]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환희의 송가' 무가(無歌) 버전이 당시 유럽 공동체(EC, 현 유럽 연합)의 노래로 공식 채택되었습니다. 이는 유럽 통합의 이상을 상징하는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1972년,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환희의 송가' (가사 없는 연주 버전)가 당시 유럽 공동체(EC, 현재의 유럽 연합)의 노래로 공식 채택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유럽 전체를 기리는 공식 상징가로, 연합의 통일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1974

['환희의 송가', 로디지아의 국가로 제정]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옛 로디지아(현 짐바브웨)의 국가인 '로디지아의 목소리를 상승시키리'로 채택되어 1979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옛 로디지아(현재의 짐바브웨)의 국가인 '로디지아의 목소리를 상승시키리'로 제정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이 음악이 국경과 이념을 넘어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1981

[새 게반트하우스 오프닝 공연에 《합창》 선정]

전쟁으로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라이프치히의 새 게반트하우스 공연홀이 문을 열면서, 쿠르트 마주어 지휘자는 《교향곡 9번 '합창'》을 오프닝 공연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선택했습니다. 이는 평화와 재건의 염원을 담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습니다.

1968년 완전히 파괴된 후 1981년에 새로 지어진 라이프치히의 신 게반트하우스가 개관했을 때, 쿠르트 마주어 지휘자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오프닝 공연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선정했습니다. 이는 전쟁의 상흔을 딛고 다시 태어난 공간에서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지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1985

['환희의 송가', 유럽 연합의 공식 상징가 '유럽가'로 채택]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환희의 송가'가 유럽 연합(EU)의 통일성을 상징하는 '유럽가'로 공식 채택되었습니다. 이는 유럽 통합의 중요한 상징으로 전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1985년, 유럽 연합(EU)은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환희의 송가'를 연합의 통일성을 상징하는 공식 상징가인 '유럽가'로 채택했습니다. 이미 1972년에 유럽 공동체(EC)의 노래로 선정된 바 있으며, 이는 유럽 통합의 염원과 화합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1989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 '자유의 송가' 연주]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레너드 번스타인이 동서독 연합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합창》을 연주했습니다. 특히 'Freude(환희)' 가사를 'Freiheit(자유)'로 바꿔 불러 역사의 현장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1989년 연말,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자는 동서독과 베를린을 분할했던 연합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오케스트라 멤버들로 구성된 혼성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베를린에서 《교향곡 9번》을 연주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공연에서는 제4악장 가사의 'Freude'(환희)를 'Freiheit'(자유)로 바꿔 불러 전 세계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1990

[독일 재통일 전야 축전곡으로 《합창》 연주]

독일 재통일 전야 축전곡으로 쿠르트 마주어 지휘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이 《합창》을 연주했습니다. 이 작품은 분열된 독일이 하나로 합쳐지는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했습니다.

1990년 독일 재통일 때, 통일 전야 축전곡으로 쿠르트 마주어 지휘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이 라이프치히에서 《교향곡 9번》을 연주했습니다. 이는 분단되었던 독일이 다시 하나로 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는 감동적인 무대였습니다.

1991

[마이클 잭슨 곡에 '환희의 송가' 샘플링]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곡 'Will you be there' 도입부에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이 연주한 '환희의 송가' 합창 부분이 사용되어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는 고전 음악이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1991년에 발표된 마이클 잭슨의 곡 'Will you be there'(앨범 버전)의 도입부에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이 연주한 '환희의 송가' 합창 부분 67초가량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마이클 잭슨은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의 허락 없이 사용한 문제로 제소당했지만, 합의 중재 조건에 따라 나중에 사용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는 클래식 음악이 대중음악에 영향을 미친 독특한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1992

[중부독일방송협회, 연말 《합창》 동시 방영 시작]

독일 통일 후 재설립된 중부독일방송협회가 매년 12월 31일 연말에 '환희의 송가' 연주를 여러 나라에 TV와 라디오로 동시 방영하는 전통을 시작했습니다.

동독 붕괴 후 통일 독일에서 1992년에 재설립된 중부독일방송협회(MDR)는 매년 12월 31일 오후,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시간'에 실러와 베토벤이 세상과 인류에게 염원했던 평화를 노래하는 《합창》을 연주하고, 이 공연을 여러 나라에 MDR TV와 MDR 라디오 피가로를 통해 동시 방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라이프치히의 연말 연주 전통을 전 세계로 확대한 의미 있는 시도였습니다.

1998

[나가노 올림픽 개회식, '환희의 송가' 세계 연계 연주]

1998년 나가노 올림픽 개회식에서 '환희의 송가'가 세계 5대륙 7개국 7곳에서 동시에 연주되어 전 세계에 중계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인류 화합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엄한 무대였습니다.

1998년 2월 7일, 나가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세계 5대륙, 6개국, 7곳에서 동시에 '환희의 송가' 연계 연주가 시도되었고, 그 영상이 전 세계에 중계되었습니다. 오자와 세이지 지휘의 나가노현 현민 문화회관을 중심으로 중국 베이징 자금성, 호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희망봉, 미국 뉴욕 유엔 본부, 그리고 나가노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각기 다른 시각과 계절에 연주가 펼쳐져 인류 화합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엄하고 감동적인 무대가 되었습니다.

1999

[데이비드 진만, 교향곡 9번 최단 시간 CD 녹음]

데이비드 진만이 베렌 라이터 판 악보를 바탕으로 《교향곡 9번》을 58분 45초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빠른 시간으로 녹음한 첫 CD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베토벤의 템포 지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습니다.

1999년, 지휘자 데이비드 진만이 베렌 라이터 판 악보를 준수하여 《교향곡 9번》을 58분 45초 만에 연주하고 녹음한 첫 CD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베토벤이 직접 기록한 템포 지시를 최대한 따르려는 시도로, 당시 70분 안팎이 주류였던 전통적인 연주 시간에 비해 파격적으로 짧아 화제가 되었고, 이후 여러 지휘자들이 비슷한 쾌속 연주를 선보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0

[정명훈 지휘 서울시향, 국내 '합창' 붐 이끌다]

2000년대 들어 정명훈 전 예술감독이 이끌던 서울시립교향악단이 《합창》을 송년음악회 고정 레퍼토리로 선보이며 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후 국내 여러 오케스트라들이 연말마다 이 곡을 연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0년대부터 국내 송년음악회의 고정 메뉴가 되어가던 《교향곡 9번 '합창'》은, 2000년대 들어 정명훈 전 예술감독이 이끌던 서울시립교향악단 덕분에 국내에서 '합창' 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서울시향은 2008년 12월 《합창》을 선보인 이후 매년 12월 무대에 올리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를 계기로 국내 다른 오케스트라들도 연말에 《합창》을 앞다투어 연주하게 되면서 다른 계절에는 듣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2001

[교향곡 9번 자필 악보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 등재]

베를린 국립 도서관에 소장된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자필 악보가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 목록에 등록되었습니다. 이는 이 작품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세계적인 유산임을 의미합니다.

2001년에 베를린 국립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베토벤 《교향곡 9번 라단조, 작품 번호 125》의 자필 악보 자료가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의 세계 기록 유산 목록에 공식적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이로써 이 작품은 인류 공동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2003

[교향곡 9번 필사 악보, 경매에서 330만 달러에 낙찰]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초연 및 초판 판각에 사용된 필사 악보가 소더비 경매에서 330만 달러(약 42억 5천만 원)에 낙찰되며, 이 작품의 엄청난 가치를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교향곡 9번》의 초연과 초판 판각에 사용되었던 필사 악보가 2003년에 소더비 경매에 출품되었을 때, 3,300,000 미국 달러 (약 42억 5150만 원)라는 엄청난 금액에 낙찰되었습니다. 이 기록은 이 작품이 '인류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불리는 이유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그 가치를 입증했습니다.

2007

[루마니아, 불가리아 EU 가입 기념 《합창》 연주]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유럽 연합(EU)에 가입하던 2007년 1월 1일 자정, 이를 기념하여 베토벤 《합창》이 연주되었습니다. 이는 EU의 확장과 화합을 상징하는 의미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2007년 1월 1일 자정,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유럽 연합(EU)에 공식적으로 가입하는 순간을 기념하여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 연주되었습니다. 이는 EU의 확장과 새로운 회원국의 통합을 축하하며 유럽의 통일성과 화합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상징적인 행사였습니다.

2008

[서울시향, 연말 《합창》 공연으로 폭발적 인기]

2008년 12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합창》을 선보이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후 서울시향은 매년 12월 이 곡을 무대에 올리며 국내 연말 클래식 공연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2008년 12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교향곡 9번 '합창'》 공연을 선보이며 대중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 성공을 시작으로 서울시향은 매년 12월 이 작품을 연말 공연 레퍼토리로 정례화하였고, 이는 국내 다른 오케스트라들도 연말에 《합창》을 앞다투어 연주하게 되면서 다른 계절에는 듣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2010

[중부독일방송협회, 《합창》 전 세계 라이브 방영]

중부독일방송협회의 연말 《합창》 연주가 홍콩, 네덜란드, 미국 등 여러 나라에 라이브로 방영되었습니다. 이는 《합창》이 전 세계인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매체임을 보여줍니다.

중부독일방송협회(MDR)의 연말 《교향곡 9번 '합창'》 연주가 2010년에는 19번째 공연으로 홍콩, 네덜란드, 미합중국 등 여러 나라에 라이브로 동시 방영되었습니다. 이는 이 작품이 국경을 넘어 전 세계인에게 평화와 인류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국제적인 행사로 발전했음을 의미합니다.

2020

[중국 공산당, '환희의 송가' 학교 교육 교재에서 제외 지시]

중국 공산당이 '환희의 송가'를 종교 음악으로 규정하며 학교 교육 교재에서 제외하라고 지시하여 국제적인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예술의 자유와 정치적 통제의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2020년 10월, 중국 공산당은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환희의 송가'를 종교 음악으로 정의하고 학교 교육 교재에서 제외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 지시는 음악 관계자들 사이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재독 중국인 작곡가 왕시린은 '공산당은 예술을 당을 섬기는 것으로 간주해 그 외의 이데올로기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모든 좋은 작품을 봉쇄해 왔다'고 비판하며 예술의 자유에 대한 정치적 통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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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9번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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