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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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상훈
정치인, 독립운동가, 국회의원, 국회의장, 대통령 권한대행 + 카테고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곽상훈은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중요한 정치인이다. 5선 국회의원으로서 국회의장과 대통령 권한대행을 역임했으며, 반민특위 활동에도 참여했다. 민주당 신파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으나, 말년에 유신 체제에 참여하여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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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96

[곽상훈 탄생]

경상남도 동래군(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금정산 근처에서 무관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곽상훈은 1896년 10월 21일 경상남도 동래군 금정산 근처에서 무관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할아버지는 무관으로 여주군수와 오위장을 지냈으며, 마을에서는 중군영감으로 불렸다.

1910

[학창 시절 시작]

동래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동명학교로 전학, 동래사립고등보통학교 1회 입학생이 되었다.

1910년 동래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2학년 때 동명학교로 전학했다. 동명학교가 동래사립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자 제1회 입학생이 되었고, 학창시절 독서와 글짓기를 즐겼다.

[한일합방과 반일감정 형성]

조부가 한일 합방 조서를 보고 통곡하는 것을 보며 반일감정을 키웠고, 그 충격으로 조부가 사망했다.

1910년 10월, 곽상훈은 조부가 한일 합방 조서를 접하고 통곡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반일감정을 키워나갔다. 이후 그의 조부는 홧병으로 사망했다.

1917

[경성 유학]

동래사립고등보통학교를 수료하고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경성으로 유학했다.

1917년 동래사립고등보통학교를 수료한 후 경성으로 유학하여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경기도 인천부로 이주하여 미곡상을 하던 형 밑에서 지냈다.

1919

[3.1 운동 참여와 주도]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하여 인천과 부산에서 학생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3월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하여 탑골공원에서 시위에 참여했다. 이후 인천과 부산으로 내려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학생 만세운동을 조종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나, 일본인 학교장의 보증으로 풀려났다.

1920

[교육 활동 시작]

3.1 운동 이후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안동 오산학교 교사로 임용되어 활동했다.

3.1 운동 이후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유진태의 주선으로 안동 오산학교 교사로 임용되어 교편을 잡고 학교 행정 서무일도 맡았다. 재직 중에도 조선총독부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신간회 활동]

신간회 결성 후 가입하여 신간회 중앙간부 및 검찰위원으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1920년 가입하여 신간회 중앙간부로 활약했으며, 이후 신간회 검찰위원을 지냈다. 1920년 6월 16일 조선체육회 발기인회에 참여하고, 8월 한용단 단장으로 음악회를 후원했다. 1921년 원산총파업 당시 신간회 인천지부에서 활동하며 국민들에게 원산 인부 모집에 응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1923

[관동대지진 경험과 진상 규명 노력]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 재학 중 관동대지진을 겪고 조선인 학살 참상을 기록, 보존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23년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했으나, 9월 1일 관동대지진을 겪었다. 지진 이후 조선인 학살 참상을 호소하는 격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다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7개월간 수감되었다. 1924년에는 일본인에 의해 희생된 한국인 희생자 명단을 입수하고 학살 사건의 진상 기록을 수집, 보존하는 활동을 하였다.

1925

[상하이 망명과 독립운동]

이우구락부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 상해한국인청년동맹 간부로 활동했다.

1925년 '이우구락부'를 조직하여 하상훈, 서병훈 등과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조선총독부 경찰의 추적을 받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 '상해한국인청년동맹'의 간부로 활동하며 동경대지진 조선인 대량학살 소식을 전달하고 8월에는 희생자 2주기 추도식을 주관했다.

1927

[신정회 창립 참여]

계급과 파벌을 타파하고 인천의 유지들이 창립한 신정회 창립에 참여했다.

1927년 6월 6일 계급과 파벌을 타파하고 전인천적 집단체로 인천의 유지들이 창립한 신정회 창립에 참여하여 창립멤버가 되었다.

1928

[언론 활동 및 동포 보호 노력]

만보산사건 당시 재만동포보호연맹 인천특파원으로 활약했으며, 동아일보 인천지국장을 맡기도 했다.

1928년 만보산사건이 터지자 재만동포보호연맹 인천특파원으로 활약했다. 한때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여 동아일보 인천지국장을 맡기도 했다.

1929

[신간회 수원지부 회원 후보 선출]

신간회 경기도 수원지부 회원후보로 선출되었다.

1929년 9월 17일 신간회 경기도 수원지부 회원후보로 선출되었다.

1930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피선]

신간회 전체대회대행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30년 11월 29일 신간회 전체대회대행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었다.

1942

[조선어학회 사건 증인 소환과 저항]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인으로 소환되었으나 피고들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하여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이윤재, 이극로 등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증인의 한 사람으로 소환되었다. 그러나 피고들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치장에 감금당하였다. 일제강점기 후반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던 중 박문하가 이주한 범어사 아래 촌가를 전전하며 생활했다.

1945

[광복과 석방]

부산 헌병대에 예비구속되었다가 8.15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1945년 8월 부산 헌병대에 예비구속되었다가 8월 15일 8·15 광복을 맞이하고 곧 석방되었다.

[한국민주당 가입]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인천지부에 가입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광복 이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45년 10월 하상훈, 이범진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 인천지부에 가입했다.

1948

[제헌국회의원 당선]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 한민당 공천 탈락에 불만을 품고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 인천지역 청년모임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하였다. 제헌국회에서 헌법기초위원 선출 방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1949

[반민특위 활동]

반민특위 위원으로 활동하며 검찰차장에 임명되어 친일분자 색출 활동에 나섰다.

제헌의회 등원 이후 1949년 반민족행위자처벌법 제정과정에서는 소극적이었으나, 반민특위가 설치되자 위원이 되었고 곧 반민특위 검찰차장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친일분자 색출 활동에 나섰으나 반민특위가 강제로 해산당하며 실패로 돌아갔다.

1950

[제2대 민의원 당선]

제2대 총선에서 인천 을 지역구에서 당선되어 국회 전원위원장을 지냈다.

1950년 5월 제2대 총선에서 인천 을 지역구에서 출마해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국회 전원위원장을 지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정부를 따라 대전과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휴전 이후 서울로 귀경했다.

1952

[내각책임제 개헌안 제출]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을, 국회에는 내각불신임 권한을 주는 개헌안을 제출했다.

1952년 4월 17일 대통령에게 입법부 국회해산권을, 입법부 국회에는 내각불신임 권한을 주는 개헌안을 제출했다. 이 개헌안은 '곽상훈 외 123명'의 명의로 제출되었다.

[부산 정치 파동 시 체포]

이승만 정권의 대통령 간선제 개헌안에 반대하다 부산정치파동 당시 서민호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대통령 간선제 개헌안에 분노한 이승만 정권은 5월 25일 부산 시내 전역에 계엄령을 내리고 출근 중인 국회 버스를 강제로 연행했다. 이때 그도 서민호, 정헌주, 임흥순, 이석기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자유당 정권은 이들을 국제공산당 정치 자금 수수 혐의로 발표했으나 곧 석방되었다.

1954

[제3대 민의원 당선 및 부의장 선출]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민의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민의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사사오입 개헌 반대]

사사오입 개헌이 확정되자 단상에 뛰어올라 개헌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부결을 선포했다.

1954년 11월 29일 사사오입 개헌이 확정되자 단상에 뛰어올라가 개헌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그는 개헌안이 가결되었다고 하는 것은 불법이며 무효이므로 부결되었음을 국민에게 선포한다고 밝혔다.

1955

[민주당 창당과 신파 지도자 활동]

호헌동지회 결성에 참여하고,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1955년 호헌동지회 결성에 참여했고, 조병옥, 장면, 정일형 등과 민주당 창당 준비 회의를 거쳐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이후 박순천, 장면, 이철승 등과 함께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1956

[민주당 최고위원 선출]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신익희 서거 후 임시 대표최고위원직을 맡았다.

1956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56년 3월 신익희가 대선을 앞두고 급서하자 임시로 민주당 임시 대표최고위원직을 맡았으나, 이후 민주당 신구파 간 갈등으로 대표직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다시 장면, 박순천 등과 함께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58

[제4대 국회의원 당선 및 국가보안법 개정 반대]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자유당의 국가보안법 개정에 반대 투쟁위원회의 지도위원이 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해 자유당 정권이 국가보안법 개정을 통과시키려 하자, 11월 야당에서 구성한 국가보안법 개정반대투쟁위원회의 지도위원에 조병옥, 장택상과 함께 추천되었다.

1959

[민주당 최고위원직 사퇴]

민주당 경남도당 개편대회에서 아수라장이 되자 민주당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

1959년 9월 23일 민주당 경남도당 개편대회에서 아수라장이 되자, 그는 민주당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

1960

[제5대 국회의원 당선 (최고령, 최고 득표율)]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65세의 최고령으로 당선되었으며, 인천지역 역대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65세의 최고령 당선자를 기록했다. 특히 84.5%라는 경이적인 득표율(역대 인천지역 최고득표율)을 기록하며 다시 당선되었다.

[개헌 국회의장 피선]

4.19 혁명 이후 개헌 국회의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1960년 4.19 혁명 뒤엔 자유당 국회가 마비되자 개헌 국회의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이승만 망명 관련 국회 임석]

국회 민의원 의장 자격으로 이승만 망명의 책임을 추궁하는 국무총리 허정을 소환한 국회에 임석했다.

1960년 5월 30일, 국회는 전일 이승만을 비밀리에 망명시킨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 허정을 소환하여 이승만 망명의 책임을 추궁했다. 곽상훈은 민의원 의장 자격으로 임석하여 허정을 격려해주었다.

[대통령 권한대행직 수행]

내각수반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일시 사퇴하면서 일시적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수행했다.

1960년 6월 16일부터 6월 23일까지 내각수반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일시 사퇴하면서 곽상훈이 일시적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이후 허정이 권한대행직에 복귀하며 물러났다.

[민의원 의장 선출]

국회 민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8월 당시 국회 민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과 장면 총리 만남 주선]

보도연맹원 희생자의 유족이 찾아와 청원서를 제출하자, 그들과 장면 총리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1960년 9월 보도연맹원 희생자의 유족 송모씨 등이 찾아와 피해 사실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하자, 그들과 장면 총리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1961

[원주-춘천 도로포장 기공식 참석]

국무총리 장면과 함께 강원도 원주-춘천간 도로포장 기공식에 참석했다.

1961년 3월 29일 국무총리 장면과 강원도 원주-춘천간 도로포장 기공식에 참석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사퇴 및 탈당]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민주당을 탈당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물러났다. 이후 민주당을 탈당하였으며, 1963년 민주당 재건 때 불참했다. 군사정변 세력과의 내통을 의심받았으나 군사정권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박정희가 주는 명예직도 거절했다.

1966

[윤봉길 기념사업회 회장 선출]

매헌 윤봉길 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66년 12월 19일 매헌 윤봉길 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1967년 12월 다시 윤봉길기념사업회 회장에 유임되었다.

1969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여]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 받았다.

1969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 받았다.

1972

[유신 체제 참여와 비판]

제4공화국 출범과 함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당선되고 운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야당 동지들의 비판을 받았다.

1972년 제4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서울 도봉구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 일로 야당 동지들의 규탄을 받기도 했다. 기타 사회 활동으로는 사단법인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제헌동지회장 등을 역임했다.

1973

[매헌장학재단 회장 선출]

윤봉길을 추모하는 매헌장학재단이 설립되자 회장에 선출되었다.

1973년 12월 15일 윤봉길을 추모하는 매헌장학재단이 설립되자 회장에 선출되었다.

1979

[정계 은퇴]

정계를 은퇴했다.

1979년 곽상훈은 정계를 은퇴하였다.

1980

[곽상훈 별세]

서울 도봉구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1979년 10월 10·26 사태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장 재직 당시인 1980년 1월 19일 서울특별시 도봉구 우이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렀고, 서울특별시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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