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연표
BC 6C
[위대한 사상가의 탄생]
노나라의 시골인 창평향 추읍에서 60대 후반의 무사 숙량흘과 16세의 소녀 안징재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사생아로 인정받지 못하고 곤궁하게 지냈으며,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단둘이 생활했다.
공자는 부친 숙량흘의 본처에게서 아들이 없었고, 첩과의 아들도 선천적 장애가 있어 노년에 안징재를 맞아 낳은 아들이었다. 공자 집안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부친의 재산도 상속받지 못한 채 어머니의 실명까지 겹쳐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 이 시기부터 그는 고실(故實)과 예법에 관심을 보이며 배움의 길을 택했다.
[배움에 뜻을 두다]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
이후 30세에는 학문의 기초를 세우고 생활의 토대를 마련하며 한 인간으로서 우뚝 섰다고 스스로 술회했다.
어릴 적부터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기를 좋아할 정도로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 의례와 제도, 관습에 밝았다.
공자에게는 특별한 스승이 없었으며,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려 했다. 주나라의 주하사였던 노자에게도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는 기록이 여러 문헌에 남아있다. 그는 이론적 지식뿐 아니라 실제 삶의 경험 속에서 지혜를 터득하며 학문의 기반을 다졌다.
[혼인과 어머니의 죽음]
송나라 병관씨의 딸과 혼인했으며, 이듬해인 16세에 어머니마저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어머니를 위한 3년 상을 마친 뒤 부친의 묘소 옆에 안장하며 효를 다했다.
20세에는 아들 리(鯉)를 얻었다.
[중국 최초의 학교 창설]
30대가 되자 노나라에서 가장 박식한 인물로 인정받았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사립 학교를 창설했다.
그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묶은 고기'(束脩) 이상의 예물을 가져온 모든 이에게 시경, 서경, 주역 등 경전을 가르쳤다.
공자는 노나라의 건국자인 주공의 종법제를 회복하여 노나라, 나아가 천하를 평화롭게 하고자 했다. 그의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을 인재를 양성하려는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이는 교육을 통해 사회 개혁을 이루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발자취였다.
[제나라 피난과 좌절]
노나라에서 삼환(맹손, 숙손, 계손)의 난이 일어나 노왕 소공이 쫓겨나자, 35세의 공자도 소공을 따라 제나라로 피난했다.
그곳에서 제나라의 왕 경공과 신하들에게 정명주의(正名主義)에 입각한 정치 이상을 설파했으나, 재상 안영의 반대로 뜻을 펴지 못하고 2년 만에 귀국했다.
공자는 제나라에서 음악을 논하며 자신의 박학다식함과 고매한 인품을 드러냈고, 경공은 그를 정치 고문으로 기용하려 했다. 그러나 공자의 높은 학식과 덕망이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할 것을 우려한 안영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좌절되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이상이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첫 경험이었다.
BC 5C
[관료로서의 활약]
46세 무렵 중도재가 되었고, 52세 무렵에는 대사구(법무부 장관)로 승진하며 최고 재판관 및 외교관직을 겸하게 되었다.
공자는 법보다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인본주의 정치관을 주창하며 주공이 다스리던 시대와 같은 평화로운 세상을 꿈꿨다.
이 시기 그의 명망은 천하 각국으로 퍼져나가며 3천 명이 넘는 제자가 모여들었다.
[빼앗긴 땅을 되찾고 순장을 폐지하다]
제나라와의 강화 회의에서 뛰어난 지략과 용기로 전쟁 없이 노나라가 빼앗겼던 땅을 되찾는 위업을 달성했다.
또한, 당시까지 이어져 오던 야만적인 순장의 악습을 왕에게 간청하여 마침내 폐지시켰는데, 이는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그의 정치 개혁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성과였다.
공자는 회의 장소에서 의심스러운 밀자를 붙잡아 제나라의 함정을 미리 막는 등 탁월한 외교 수완을 발휘했다. 이어 권세가였던 삼환씨의 횡포를 꺾기 위해 그들의 요새인 삼성(三城)을 허무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계손사의 저항으로 도중에 중단되었다. 이러한 좌절은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주유천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유천하의 시작]
노나라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벼슬을 버리고 수십 명의 제자들과 함께 위, 송, 조, 정, 진, 채 등 여러 나라를 14년 동안 주유하는 기약 없는 여정을 시작했다.
이 기나긴 주유천하의 기간 동안 공자는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으며, 만난 은자들에게 수모와 조롱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왕들은 더디더라도 올바른 길보다 손쉽게 국력을 팽창시키려는 부국강병책만을 원했기에, 공자의 도덕정치는 어느 나라에서도 외면당했다. 이는 그에게 큰 시련이자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주유천하 마치고 귀국]
10여 년이 넘는 주유천하 끝에 자신의 학문적 이상이 당시 정치 상황에서는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노나라로 귀국했다.
이후 그는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며, 미래 세대에 남은 희망을 모두 걸었다.
이로써 공자의 정치적 삶은 막을 내리고 교육자로서의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공자는 고향으로 돌아와 육예(역, 시, 서, 예, 악, 춘추)라 불리는 중국의 오래된 전통 경전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당시 진귀한 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속수(묶은 고기)' 이상의 예물을 가져온 이라면 누구에게나 가르침을 주며 교육의 기회를 넓혔다.
[제자들을 잃고 영면에 들다]
말년에 아들 백어와 특히 아끼던 제자 안연, 자로마저 잇따라 죽자 "하늘이 나를 버렸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공자는 72세가 된 해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하했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말씀들을 모아 《논어》를 저술하여 그의 사상을 길이 전했다.
공자는 죽기 전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나이 열다섯에 학문의 길로 가기를 마음먹었고, 서른에 세상에 존재를 알렸으며, 마흔에는 어떤 일에도 미혹됨이 없었고, 쉰에는 하늘의 뜻을 알았고, 예순에는 순리를 알았으며, 일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그의 죽음 후 제자들은 노성 북쪽에서 부모의 장례에 준하는 예로 3년 상을 치렀다.
738
[역대 왕조의 추존과 사상 계승]
당 현종이 공자를 '문선왕'(文宣王)으로 추존하며 그의 사상적 위상을 드높였다.
이후에도 송 진종은 '지성문선왕', 원나라는 '대성지성문선왕'으로, 명나라 건국 이후에는 '지성선사' 등 지속적으로 최고 등급의 시호가 추봉되었다.
이는 공자의 사상이 중국 왕조의 통치 이념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공자의 사상은 증자, 자사, 맹자 등으로 이어져 중국 사상계를 지배하는 가장 큰 조류를 이루었으며,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당은 문묘(文廟)로 불리며, 성균관 등에서 그를 기렸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악의 표상'으로 규정되어 묘와 유물이 파괴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