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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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고려 국왕, 군주, 개혁가, 화가, 서예가 + 카테고리

공민왕은 고려 충숙왕의 아들로 태어나, 원나라 간섭기 고려의 자주성 회복과 권문세족 혁파를 목표로 과감한 개혁을 추진한 군주입니다. 정방 폐지, 친원 세력 숙청, 쌍성총관부 수복 등 강력한 반원정책을 펼쳤습니다. 신돈을 등용해 민생 안정에 힘썼으나,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국력이 소모되고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으로 개혁 의지를 상실합니다. 이후 향락에 빠져 자제위에 의해 시해당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지만, 그의 개혁은 신진사대부 성장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또한 뛰어난 예술적 재능으로 많은 그림과 서예 작품을 남겼습니다.

주요사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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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330

[공민왕 탄생]

고려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초명은 기, 휘는 전, 몽골식 이름은 바얀 테무르였습니다. 후에 원나라의 압력으로 몽골에 입조하게 됩니다.

1330년 5월 31일(음력 5월 6일) 고려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초명은 기(祺), 휘는 전(顓)이며 몽골식 이름은 바얀 테무르입니다.

1341

[원나라 입조]

충혜왕 2년, 원나라 조정의 압력으로 몽골에 입조하였습니다.

1341년(충혜왕 2) 원나라에 건너갔습니다.

1344

[강릉부원대군 책봉]

충목왕 원년에 강릉부원대군에 봉해졌습니다.

1344년(충목왕 원년)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에 봉해졌습니다.

1349

[노국대장공주와 혼인]

충정왕 1년에 원나라 황족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1349년(충정왕 1년)에 원나라의 황족인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1352

[고려 제31대 국왕 즉위]

충정왕이 폐위된 후, 대륙의 정세가 동요하는 틈을 타 고려의 제31대 국왕으로 즉위하여 원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를 시작했습니다. 왕비 노국대장공주도 그의 뜻을 지지하며 개혁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충정왕이 폐위되자 1352년 1월 22일(음력 1351년 12월 27일) 뒤를 이어 즉위하였습니다. 공민왕은 즉위 후 원나라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였고, 왕비인 노국대장공주 또한 왕의 뜻을 지지하여 많은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정방 폐지 및 개혁 조서 선포]

즉위 두 달 뒤, 무신정권의 잔재인 정방을 폐지하며 전격적인 개혁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다음 날 토지와 노비 문제 해결을 명하는 개혁 조서를 선포하여 왕의 친정체제를 구축하려 하였습니다.

즉위한 지 두 달 뒤인 1352년 2월 초하루(1일)에는 전격적으로 개혁작업에 돌입해 무신정권의 최우가 설치하여 인사행정을 맡아오던 정방을 폐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개혁조서를 선포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왕권 강화를 위한 친정체제 구축]

왕의 친정체제 구축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를 발표하며 각 부서의 중요 업무를 직접 챙기고 관계와 민생 전반에 대한 통치 기반을 확립하려 했습니다. 무신정권 이후 실권을 잃었던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1352년 8월 공민왕은 "옛날의 임금들이 일심전력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친히 국정을 담당함으로써 견문을 넓혔고 하부의 실정 또한 살필 수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임금이 친히 나라를 맡기에 걸맞은 시기이다. 첨의사, 감찰사, 전법사, 개성부, 선군도관은 판결송사에 관하여 5일에 한 번씩 반드시 계를 올리도록 하라."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이는 곧 왕의 친정체제 구축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였습니다.

[조일신의 난과 숙청]

공민왕의 과감한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판삼사사 조일신이 정변을 일으켜 대신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독차지하려 했습니다. 공민왕은 기회를 엿봐 조일신을 체포하고 측근들을 하옥하여 제거함으로써 왕권을 공고히 했습니다.

1352년 9월 공민왕의 과감한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판삼사사(判三司事) 조일신(趙日新)이 정천기(鄭天起), 최화상(崔和尙), 장승량(張升亮) 등과 힘을 합쳐 대신 기원과 최덕림 등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정변에 성공한 조일신은 곧 공민왕을 협박하여 자신을 우정승에 임명케 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하였습니다. 한달 뒤 조일신은 다시 자신과 함께 거사를 감행했던 최화상과 장승량 등을 죽였습니다. 이때 조일신은 좌정승으로 승진하였으며, 판군부 감찰을 겸하며 공신 칭호까지 받아내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공민왕은 그를 제거할 마음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정동행성에서 대신들과 의논한 뒤 김첨수(金添壽)를 시켜 조일신을 연행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조일신을 제거한 공민왕은 그 측근인 정을보, 이권, 나영걸, 고충절, 이군상 등 28명을 하옥하였습니다. 이어 조익청을 좌정승으로, 이제현을 우정승으로 임명하여 개혁적 정권을 공고히 하게 되었습니다.

1354

[원나라 요청으로 홍건적 토벌 파병]

원나라의 지원 요청에 따라 최영, 이성계 등 장군들을 병력 2천과 함께 홍건적 토벌을 위해 파병했습니다. 파병군 귀국 후 원나라의 몰락을 보고받고 공민왕의 반원개혁에 힘을 실었습니다.

1354년 음력 7월, 원나라의 지원 요청으로 최영, 이방실, 안우, 김용, 정세운, 유탁 등은 병력 2천을 이끌고 원나라에 파병되었습니다. 파병군은 고려종정군(高麗從征軍)이라 불렸습니다. 파병 후 귀국한 장군들이 원나라의 몰락을 상세히 보고하여, 공민왕의 반원개혁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1356

[기철 등 친원파 숙청 및 반원 개혁]

공민왕은 원 순제의 황후 기황후를 배경으로 횡포를 부리던 기철 등 기씨 일족과 권겸, 노정 등의 부원 세력을 역모죄로 숙청하는 병신정변을 단행했습니다. 동시에 몽골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고 고려 문종 당시의 제도로 환원하는 반원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1356년(공민왕 5년) 음력 4월 공민왕은 당시 원나라의 기황후를 중심으로 하여 권세를 부리던 기철 등 기씨일족과 권겸, 노정 등의 부원 세력을 역모죄로 숙청하였는데, 이를 병신정변(丙申政變)이라 합니다. 또한 몽골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고 고려 문종 당시의 칭제(稱制)로 환원하였으며,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도 폐지하였습니다.

[쌍성총관부 수복 및 요동 정벌]

몽골이 100년 가까이 장악했던 쌍성총관부 지역의 수복을 유인우에게 명령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았습니다. 이는 공민왕 반원 개혁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성계 부자가 내응하여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와 함께 인당에게 명하여 압록강 너머 원나라 8참을 공격, 파사부 등 3참을 점령하며 고려 최초의 요동 정벌을 이끌었습니다.

1356년 음력 4월, 공민왕은 유인우(柳仁雨)에게 몽골이 백 년 가까이 장악하고 있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관할 지역의 수복을 명령하여 한반도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았습니다. 또한 원나라의 연호 대신 독자적인 연호를 쓰고, 관직 명칭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습니다. 쌍성총관부를 공격한 것은 공민왕의 반원 개혁의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고려인의 후손으로 원나라에 투항한 조휘와 탁청 이래 쌍성총관부에서 총관과 천호 직을 대대로 세습해온 한양 조씨와 탁씨 세력을 척결하는 데 조휘의 손자 조돈과 이자춘, 그리고 그의 아들 태조 이성계가 결정적으로 내응해 쌍성총관부 격파가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고려 조정에 협력한 조돈과 이자춘 부자(父子) 등이 고려 정계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같은 해 공민왕은 인당에게 명하여 압록강 너머 원나라의 8참(站)을 공격하여 격파하였으며, 파사부(婆娑府) 등 3참을 점령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고려 최초의 요동 정벌로 평가됩니다.

1358

[오예포 대첩]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4백 척 규모의 함대로 오예포에 침략한 왜구를 물리치며 왜구 침입에 대한 방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1358년(공민왕 7년)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4백 척 규모의 함대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습니다.

1359

[홍건적 1차 침입 및 격퇴]

홍건적 장수 모거경이 4만 명을 이끌고 고려 국경을 침공하여 서경까지 함락시켰으나, 안우, 이방실,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패배하여 물러갔습니다.

1359년(공민왕 8년) 음력 12월부터 1360년(공민왕 9) 음력 2월까지, 홍건적 장수 모거경이 4만 명을 이끌고 한반도 고려 국경을 침공하였습니다. 모거경은 서경까지 함락시켰으나 안우, 이방실,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패해 물러갔습니다.

1361

[홍건적 2차 침입 및 개경 함락]

반성, 관선생 등이 이끄는 홍건적 20만 명이 다시 고려를 침공하여 수도 개경까지 함락시켰습니다. 공민왕은 피난길에 올랐으나, 고려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홍건적은 압록강 너머로 패주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반원 개혁에 차질이 생기고 원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관제를 되돌리기도 했습니다.

1361년(공민왕 10년) 음력 11월부터 1362년 음력 1월까지 반성, 관선생, 사류, 파두반이 이끄는 홍건적 20만 명이 다시 한반도 고려국을 침공하여, 수도 개경까지 함락시켰습니다. 그러나 곧 고려군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고 압록강 너머로 패주하였습니다. 홍건적은 몽골에 반대하는 한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홍건적 침입의 영향으로 고려의 반원 개혁은 부분 차질을 빚었으며, 고려 조정은 원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한때 관제를 개혁 이전으로 되돌리기도 하였습니다.

1362

[김용의 난 야욕과 공신 주살]

공민왕의 총애를 받던 김용이 권력 욕심에 홍건적 토벌 공신인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 등을 음모를 꾸며 주살하고 더 큰 야망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공민왕이 왕세자로 원나라에 입조했을때 김용은 시종이었는데, 그때의 인연으로 인해 공민왕 즉위후 순조로운 관직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간통사건에 연루되는 등 여러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었으나 공민왕의 총애를 받는 측근으로서 가벼운 처벌을 받은후 다시 중용되기도 했습니다. 권력 욕심이 컸던 그는 1362년(공민왕 11년) 음모를 꾸며 자신과 권력을 다투던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 등을 주살한후 더 큰 야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나하추의 동북면 침공 격퇴]

요동의 몽골 군벌 나하추가 쌍성총관부 잔당 조소생과 함께 고려 동북면을 침공했으나,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대패하며 잔당 세력의 몰락을 초래했습니다.

1362년(공민왕 11년) 2월부터 7월까지 요동의 몽골 군벌 나하추는 쌍성총관부의 잔당인 조소생과 함께 고려의 동북면에 침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나하추는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대패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쌍성총관부의 잔당 조소생, 탁도경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습니다.

1363

[김용의 공민왕 암살 시도 (흥왕사 변)]

원나라의 기황후와 연계하여 공민왕 폐위를 획책하던 최유의 내응 요구를 받은 김용이 홍건적 침입으로 피난 중이던 공민왕의 처소 흥왕사를 자객들과 함께 급습했으나, 공민왕은 피신하여 화를 면했고 최영이 반란군을 진압했습니다. 김용은 참수당했습니다.

고려에서 죄를 짓고 원으로 도망쳐온 최유는 기황후에게 접근하여 공민왕 폐위와 덕흥군 추대라는 거사 추진을 부추겼습니다. 기황후가 지난 1356년에 자신의 오라비 기철을 죽인 공민왕에게 복수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나라 황실로로부터 거사에 대한 내응 요구를 받은 김용은 1363년(공민왕 12년) 음력 3월, 공민왕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홍건적과 여진족의 침입으로 피난하였다가 개경 근처에 있는 흥왕사(興王寺)에 행궁을 차리고 있던 공민왕의 처소를 자객들을 이끌고 급습했던 것입니다. 공민왕은 피신하여 화를 면했고 최영이 반란군을 진압하였습니다. 김용은 경주로 유배되었다가 참수당했습니다.

1364

[최유의 난 진압]

김용의 암살 시도 실패 후, 덕흥군과 최유가 원나라군 1만 명을 이끌고 고려 서북면을 침입했습니다.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대패하고 최유는 원나라로 돌아갔으나 고려로 압송되어 사형당했습니다. 이는 원나라의 마지막 고려 공격이었습니다.

김용의 공민왕 시해가 실패하자 덕흥군은 1364년 음력 1월 원나라의 지원을 받아 최유와 함께 원나라군 1만 명을 이끌고 고려의 서북면(西北面)에 침입하였습니다. 침입소식을 접한 공민왕은 경천홍과 안우경에게 군사를 내주어 서북부 일대를 방비토록 하였습니다. 최유는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여 함락시켰습니다. 그후 선주를 근거지로 삼고 남하를 준비하고 있는데 최영의 군대가 급습하는 바람에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패배후 원나라로 돌아간 최유는 고려정벌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나 반대에 부딪쳤고 오히려 포박당한뒤 고려로 압송된후 사형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같은 달 원의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朴伯也大)가 고려의 서북면 연주(평안북도 영변)을 침입하였습니다. 이는 원나라가 고려에 행한 최후의 공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 의해 참패로 끝났습니다.

[여진족 침입 격퇴]

여진의 대추장 김삼선, 김삼개 형제가 고려 동북면에 침입했으나, 이성계 휘하의 고려군에게 대패하였습니다.

1364년(공민왕 13년) 음력 1월, 여진의 대추장 김삼선(金三善), 김삼개(金三介) 형제가 고려의 동북면에 침입하였으나 이성계 휘하의 고려군에게 대패하였습니다.

[진해 왜구 격파]

김속명이 이끄는 고려군이 진해에 침입했던 3천 명의 왜구를 격파하였습니다. 이후 왜구들은 약탈지를 중국대륙으로 변경하기도 했습니다.

1364년(공민왕 13년) 음력 5월에는 김속명이 이끄는 고려군이 진해에 침입했던 3천 명의 왜구를 격파하였습니다. 이후 왜구들은 원명교체기로 인해 해안경비가 소홀해진 중국대륙으로 약탈지를 변경하였습니다. 이로인해 한반도에 출몰횟수는 줄어드는듯 했으나 곧 왜구가 다시 출몰하였고 이들은 기마병까지 동원하였습니다.

1365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공민왕의 상심]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던 노국대장공주가 난산 끝에 사망하여 공민왕에게 극심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왕은 슬픔에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개혁 의지를 상실하며 방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365년(공민왕 14),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던 노국대장공주가 드디어 회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는 난산 끝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극심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통곡했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노국대장공주는 인덕왕후(仁德王后)로 추존되었으며, 공민왕은 서거한 왕후를 추모하는 불사(佛事)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신돈 등용 및 개혁 재추진]

노국대장공주 사망 후 상심에 빠졌던 공민왕은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수상직과 감찰서, 서운관의 수장직을 겸하게 하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의 토지를 환원하고 노비를 해방시키는 개혁을 다시 추진했습니다.

노국대장공주 사망 후 끝없는 상심에 빠졌던 공민왕은 1365년 음력 5월 을사환국(乙巳換局)을 통해 신돈을 등용하였습니다. 영산 출신 승려였던 신돈은 당시 살아있는 부처라는 소문이 있었고 그 소문을 들은 공민왕은 직접 영산까지 내려가 신돈과 만나 대담하였으며, 신돈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시국을 논하였는데 그의 달변이 왕의 마음에 들게 됩니다. 왕은 신돈을 환속시킨 뒤 수정리순론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책록하고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 판감찰사사(判監察司事)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司)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임명했습니다.

1366

[신돈의 전민변정도감 설치]

신돈의 건의로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어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환원시키고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등 민중을 위한 개혁이 시행되었습니다. 성균관도 다시 설치되었습니다.

1366년 신돈의 건의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이 설치되었습니다. 수상직과 감찰서와 서운관의 수장직을 겸한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또한 성균관을 다시 설치하였습니다. 신돈은 민중들에게 '성인' 칭송을 받았습니다.

[제주도 공격 실패]

김유가 1백 척의 토벌군을 이끌고 제주도를 공격했으나 패전했습니다. 당시 제주도는 몽골 목마장이 설치되어 친원 노선을 걷고 있었으며, 이후 10여 년간 고려 조정에 반발했습니다.

1366년(공민왕 15년) 음력 10월 김유(金庾)가 1백 척의 규모의 토벌군을 이끌고 제주도를 공격했으나 패전했습니다. 당시 제주도는 삼별초의 항쟁에 진압된 뒤 몽골의 목마장(牧馬場)이 설치되었으며, 다수의 몽골인들이 주둔하여 친원노선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후 약 10여 년 넘게 제주도는 고려 조정에 반발하였습니다.

1368

[명나라 건국과 요동 공략]

명나라가 건국되자 이인임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고 동녕부를 공격하는 등 반원 정책을 지속했습니다.

1368년(공민왕 17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이인임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습니다.

1370

[이성계의 동녕부 공격 및 요동 고려인 송환]

이성계와 지용수를 보내 동녕부를 공격하여 오로산성을 점령하고, 요동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을 본국으로 송환했습니다. 이는 명나라와의 협력 아래 원나라 잔존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였습니다.

1370년(공민왕 19년) 1월과 11월, 이성계와 지용수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하였고, 요동의 고려인을 본국으로 송환시켰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토 확장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1371

[신돈의 유배 및 처형]

신해환국을 통해 개혁을 주도하던 신돈이 유배된 후 처형되면서 공민왕의 개혁은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 이후 신돈에게 의지하던 공민왕은 개혁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1371년(공민왕 20년) 음력 7월 신해환국(辛亥換局)으로 신돈이 유배된 후 처형되었습니다. 이로써 공민왕의 개혁은 사실상 마감되었습니다. 신돈을 잃은 공민왕도 더 이상 개혁의지를 갖지 못하고 방황하고 말았습니다.

1372

[자제위 설치]

노국대장공주를 잃은 슬픔과 개혁 의지 상실로 방황하던 공민왕은 젊고 잘생긴 청년들을 뽑아 자제위를 설치하여 곁에 두고 시중을 들게 하며 향락에 빠져들었습니다.

노국대장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1372년 젊고 외모가 잘생긴 청년을 뽑아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곁에 두고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하였습니다.

1374

[자제위에 의해 시해당함]

자제위 소속 홍륜이 후궁 익비와 간통한 사실을 최만생이 왕에게 보고하자, 공민왕이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려 했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최만생이 홍륜에게 알렸고, 그날 밤 홍륜 일파가 술에 취한 공민왕을 칼로 찔러 시해했습니다. 이 사건 후 우왕이 즉위하며 이인임의 섭정이 시작됩니다.

1374년(공민왕 23년) 9월, 자제위 중 한명인 홍륜(洪倫)이 공민왕의 후궁인 익비(益妃)와 간통하였는데, 내시 최만생이 은밀히 왕에게 보고하자, 공민왕은 "이 사실을 아는 자를 모두 죽여야 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최만생은 홍륜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날 밤에 홍륜은 권진(權瑨), 홍관(洪寬), 한안(韓安), 노선(盧瑄) 등과 더불어 모의하여 술에 취한 공민왕을 칼로 찔러 죽이고는 '도적이 침입했다'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위사(衛士)들은 벌벌 떨기만 하고 움직이지 못하였으며, 재상과 백집사들은 변을 듣고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날이 밝을 무렵에 명덕태후가 강녕대군(江寧大君) 우(禑)를 데리고 내전에 들어와 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발상(發喪)하지 않았습니다. 이인임은 처음에 승려인 중 신조(神照)가 항상 대궐 안에 있었으며, 완력이 있고 남을 속이는 꾀가 많았으므로 그가 난을 일으킨 것이라 여겨 감옥에 가두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풍과 최만생의 옷 위에 피가 뿌려진 흔적이 있음을 보고서, 이에 최만생을 하옥시켜 국문(鞫問)하여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었습니다. 최만생과 홍륜을 비롯하여 변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고 그들의 삼쪽 또한 멸족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이인임에 의해 어린 우왕이 즉위하면서 이인임의 섭정이 전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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