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대한제국)

num_of_likes 130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고종 (대한제국)
연혁 피인용 수 1
황제, 국왕, 군주, 정치인 + 카테고리

조선의 마지막 국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흥선대원군 섭정을 벗어나 친정을 시작했으나 격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국권 수호에 고뇌했습니다.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 신분제 폐지 등 근대 개혁을 추진했으며 전등 전차 등 신문물을 적극 도입하며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이끌었습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하고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 사망 시 독살설이 퍼져 3.1 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852

[고종 탄생]

조선 한성부 운현궁 사저에서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휘는 희(㷩), 초명은 재황(載晃), 아명은 명복(命福), 초자(初字)는 명부(明夫)입니다. 호는 주연(珠淵)입니다.

1864

[조선 제26대 국왕 즉위 및 흥선대원군 섭정 시작]

철종 사망 후 11세의 나이로 익종의 양자가 되어 조선의 제26대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생부 흥선대원군이 통치하는 전례 없는 섭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조의 증손자 헌종이 후손없이 사망하고 철종 또한 후계없이 사망하자, 흥선대원군은 익종 비 신정왕후 조씨를 찾아 왕위 계승 동의를 얻어 자신의 둘째 아들 재황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왕으로 즉위시켰습니다. 왕이 어렸기 때문에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어 집권했습니다.

1865

[경복궁 중건 시작]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기 시작했습니다.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한 시도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백전 발행으로 물가 상승, 원납전 징수, 묘지림 벌목, 도성 통행세 징수, 백성 노역 부과 등으로 백성과 양반 모두의 반발을 샀습니다.

1866

[병인박해 발생]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를 이용하려던 대원군이 프랑스 주교의 비협조에 불만을 품고 프랑스 신부 9명과 수천 명의 천주교도를 처형했습니다.

[병인양요 발발]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로즈 제독이 강화도를 침략했으나, 문수산성, 정족산성 등에서 한성근, 양헌수 등에 의해 격퇴되었습니다.프랑스군은 외규장각을 불태우고 유물들을 약탈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자, 평양 주민과 감사 박규수에 의해 선박이 불타고 선원들이 살해된 사건입니다.

5년 후 신미양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1868

[남연군묘 도굴 미수 사건]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시신을 협상에 이용하려 했으나, 회곽으로 단단히 굳은 묘지를 파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1871

[신미양요 발발]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강화도를 침략했습니다.미군은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를 공격했고, 어재연 장군이 광성보에서 전사했습니다.미군이 탈취한 '수(帥)자기'는 현재 장기대여 형식으로 반환되었습니다.

이 시기 서양 제국과의 일련의 사건을 겪은 고종과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수교거부 의지를 천명했습니다.

1873

[흥선대원군 실각 및 고종 친정 시작]

일본에서 정한론이 주장되다 실각하고, 조선에서는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면서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여흥 민씨에 의한 척신 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1875

[운요호 사건 발생]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무력으로 압박했습니다.이 사건은 이듬해 강화도 조약 체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876

[강화도 조약 체결 및 개항]

일본과 조선 사이에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이는 영토 주권과 사법 주권이 무시된 불평등 조약으로, 부산, 원산, 인천이 차례로 개항되었습니다.

1880

[통리기무아문 설치 및 개화정책 추진]

고종은 청나라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행정기구를 개혁하고 개화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김홍집이 일본에서 황준헌의 을 가져오면서 러시아 견제를 위한 청, 일본, 미국 3국 유대 관계 강조론이 제기되었고, 유생들은 이만손, 홍재학 등이 만인소와 척화상소를 올려 개화정책을 반대했습니다.

1881

[신식군대 별기군 창설]

고종은 군제개혁에 관심을 기울여 구식 군대인 5군영을 개편하고, 일본식 군제를 도입하여 교육받은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조직했습니다.

진신 자제를 사관생도로 삼아 신식 무예를 연마하게 했습니다.

1882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는 서양 국가 중 최초로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고,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을 인정했습니다.

[임오군란 발발]

신식군대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13개월간 급료를 받지 못한 구식 군대의 불만으로 임오군란이 발생했습니다.군인들은 민씨 척족과 명성황후를 원흉으로 지목하고 궁궐을 습격했습니다.

명성황후는 장호원으로 피신했으며, 흥선대원군이 10년 만에 재집권했습니다.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군란이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톈진으로 압송되었으며, 청나라는 조선 내정에 간섭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제물포조약과 청나라 상인 통상권 및 치외법권을 인정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었습니다.

1884

[갑신정변 발발]

김옥균과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해 정변을 일으켜 온건 개화파 대신들을 제거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이궁시킨 후 14개조 정강을 선포했습니다.

대원군 환국, 청나라 사대 폐지, 문벌 폐지, 인민평등권 제정, 지조법 개혁, 내시부 폐지, 간리·탐관오리 처벌, 환상미 폐지, 규장각 폐지, 순사 설치, 혜상공국 폐지, 유배·금고 죄인 재조사, 4영을 1영으로 합하고 근위대 설치, 재정 호조 관할, 대신·참찬 매일 회의, 불필요 관청 혁파 등을 골자로 했습니다. 이틀 후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어 주모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1885

[영국군의 거문도 불법 점령]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던 영국 군함 세 척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고 포대를 구축, 병영을 설치하며 섬 이름을 포트해필턴으로 명명했습니다.

이들은 1887년 청나라의 중재로 철수했습니다. 유길준과 독일 부영사 부들러가 한반도 중립화론을 주장했으나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1886

[노비 신분 세습 폐지 및 육영공원·이화학당 개교]

사노비의 세습이 폐지되고, 최초의 공립학교인 육영공원과 선교사가 세운 이화학당이 개교했습니다.

1887

[경복궁 전등 가설]

경복궁 내에 전등이 가설되었습니다.이는 고종이 신문물에 대한 넓은 이해와 포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됩니다.

1894

[동학농민운동 발발]

동학 교도들의 교조 신원 운동과 포교 자유 요구가 농민봉기와 연대하여 거대화되었습니다.5월 31일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여 점령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6월 1일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6월 6일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들어왔고, 톈진조약에 의거 6월 8일 일본 또한 인천항을 통해 군대를 파병했습니다. 정부는 6월 11일 서둘러 농민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청일 양국에 군대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갑오개혁 단행 및 청일전쟁 발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친일 정부를 수립한 후 갑오개혁을 단행했습니다.이 개혁으로 전근대적인 제도와 함께 신분제도가 형식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7월 25일 일본은 청나라에 선전포고하며 청일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은 이 전쟁의 주 전장터가 되어 한반도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1895

[명성황후 암살 사건 (을미사변)]

청일전쟁 승리 후 삼국 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한 일본을 견제하고자 고종과 명성황후가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려 하자, 일본은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 지휘하에 경복궁 건청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했습니다.

일본인 낭인들과 조선인 협력자들에 의해 왕비가 제거되었고, 고종과 왕세자는 덕수궁에 감금되었습니다. 이후 을미개혁과 단발령이 시행되며 유생들의 을미의병이 일어났습니다.

1896

[아관파천 단행]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불안을 느낀 고종은 왕태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했습니다.직후 을미 4적(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장박) 처단을 지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가 피살되었고 유길준, 장박, 조희연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김홍집 내각이 붕괴했습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을 중심으로 도시 개조 사업을 명하고 독립문 건립을 추진했습니다.

1897

[대한제국 선포 및 초대 황제 즉위]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새로 정한 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국호 '대한'은 마한, 진한, 변한을 통합한 삼한에서 유래하며, 태조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영토를 확장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독립협회는 대한 독립 공고화와 입헌군주제 수립을 호소했으나, 고종은 황국협회를 지원하여 두 단체를 무력으로 해산시켰습니다.

1898

[독립협회 해산 및 전화 개통]

고종은 독립협회를 해산시켰고, 이 해에 전화가 개통되었습니다.

[고종 암살 미수 사건]

러시아 담당 역관 김홍륙이 커피 애호가인 고종에게 독극물(아편)을 탄 커피를 대접했으나, 고종은 커피를 마시지 않고 땅에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커피를 마신 아들 순종은 치아 결손 등 심한 후유증을 겪었습니다. 고종은 김홍륙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고 그 일당을 거의 토벌했습니다.

1899

[대한국 국제 선포 및 경인선 개통]

대한국 국제를 선포하여 전제군주권을 강화하고 원수부를 설치했습니다.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었습니다.

고종은 직접 대원수가 되어 육해군을 통솔했으며, 황태자를 원수에 임명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독립협회가 해산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준용의 쿠데타 기도 및 엄귀비와의 갈등]

고종의 조카 이준용이 직접 쿠데타를 기획하고 준비했으며, 이준용 추대 관련 역모가 세 차례 적발되었습니다.또한 엄상궁의 왕비 책봉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하며 엄귀비 측과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이준용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은 고종에게 충격을 주었고, 고종은 밀지를 내려 자객들을 일본 도쿄로 파견해 이준용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준용은 엄상궁이 자신의 아들 영친왕의 권력 승계를 위해 자신과 의친왕을 배척했다고 보았습니다.

1900

[울릉도와 독도 울도군 승격]

울릉도와 독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켰습니다.

1901

[지계아문 설치 및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 확립]

지계아문을 설치하여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지계를 발급했습니다.전국적으로 실시되지는 못했으나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를 확립했습니다.

1903

[육해군 창설 준비 및 징병제도 실시]

육해군 창설과 서양식 징병제 도입을 목표로 하는 조칙을 내렸으나, 을사조약 이후인 1907년 군대가 해산되면서 성과가 철회되었습니다.

1만2천(최종 1만6천) 병력을 갖추고 용산에 군부 총기제조소를 건립하는 등 국방력 강화를 시도했습니다.

[러시아 황제에 동맹 요청]

일본이 황성 침탈을 할 것을 예견하고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 동맹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1904

[대외 중립국 선포]

러일전쟁 발발에 앞서 대외적으로 중립국을 선포했으나, 서울을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며 중립을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05

[을사늑약 강제 체결]

일본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으로 덕수궁 중명전에서 어전회의가 열렸고, 고종 황제의 승인 거부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위협과 회유 속에 이른바 '한일 평화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습니다.이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불평등 조약입니다.

어전회의에서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만이 반대했고,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다섯 대신이 찬성했습니다. 이 조약은 장지연의 게재, 민영환의 자결, 윤치호의 상소, 전국적인 의병운동 등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고종은 이후 이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며 국제사회에 알리려 노력했습니다.

1907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특사와 호머 헐버트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했습니다.

[일본에 의한 고종 강제 퇴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의 압력에 의해 황태자에게 양위했습니다.양위자와 피양위자 모두 불참하는 기이한 양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나흘 뒤 일본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요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정미의병이 봉기했습니다.

1910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및 대한제국 멸망]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으로 격하되어 덕수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이로써 국권을 상실했습니다.

1912년 임병찬 등이 고종의 밀명을 받아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해 왕정 회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1919

[고종 사망 및 3.1 운동 도화선]

덕수궁 함녕전에서 68세로 사망했습니다.공식 사인은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이나, 갑작스러운 죽음에 독살설이 빠르게 퍼지며 3.1 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독살설에 따르면, 고종은 식혜를 마신 후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 사망했고, 시신은 심하게 부어오르며 이빨이 빠지고 혀가 닳아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 궁내청 고위 관료의 일기에서도 일본 수뇌부에 의한 독살 풍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전국에 3.1 운동이 발발했으며,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대한'을 국호로,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하며 대한제국의 영토와 구 황실을 계승한다고 명시했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고종 (대한제국)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