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연표
918
[왕건, 고려 건국]
통일신라 말 혼란 속, 송악의 호족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 '고려'를 건국했습니다.
고구려 계승 의지를 담은 국호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자주성을 천명했습니다.
궁예가 국호를 자주 바꾸고 무리한 천도를 하는 등 민심을 잃자, 왕건은 역성혁명을 일으켜 태봉을 멸망시키고 왕위에 올라 고려를 건국했다.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고, 고구려 계승 의식을 확고히 했다.
919
[송악, 개경으로 천도]
건국 이듬해 왕건은 자신의 고향이자 초기 태봉의 수도였던 송악을 '개경'으로 이름을 바꾸고 정식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는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926
[발해 유민 대거 수용]
요나라의 침략으로 발해가 멸망하자, 고려는 발해 왕족을 비롯한 많은 유민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웠습니다.
이는 왕건의 정치·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하고 고구려 계승 의식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935
[신라, 고려에 귀순]
왕건은 친신라 정책을 펼치며 신라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하려 노력했습니다.
결국 신라 경순왕은 나라의 멸망 위기 앞에서 고려 귀순을 결정하며 평화로운 통일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936
[후삼국 통일 완성]
신라의 귀순에 이어, 고려는 마지막 남은 후백제를 패망시킴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완성했습니다.
이로써 한반도에 새로운 통일 왕조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956
[노비안검법 시행]
광종은 황권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 확립을 위해 '노비안검법'을 실시했습니다.
이는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켜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재정 기반을 확대하는 혁신적인 정책이었습니다.
958
[과거 제도 도입]
광종은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 경전을 시험하여 문신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이는 공신 위주의 등용을 억제하고 신진 인사를 등용하여 왕권 강화를 위한 새로운 관료 체제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993
[서희의 강동 6주 획득]
요나라의 1차 침공 시, 외교관 서희는 뛰어난 담판술로 요나라로부터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오히려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획득하는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사건은 고려 외교사의 백미로 꼽힙니다.
1010
[요나라 2차 침공]
고려의 친송 정책과 강동 6주 반환 요구 불응을 빌미로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했습니다.
강조의 정변과 함께 개경이 일시 함락되는 등 위기를 겪었으나, 양규의 분전으로 요군이 퇴각했습니다.
1019
[귀주 대첩 대승]
요나라의 3차 침공에 맞서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고려군을 지휘하여 요군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요나라는 더 이상 고려를 공격할 수 없게 되었고, 동아시아 3국(고려, 송, 요) 간의 세력 균형이 유지되었습니다.
1024
[무슬림 상인 고려 방문]
고려 현종 15년 9월, 하산 라자를 포함한 100여 명의 무슬림 상인들이 한반도에 도착했습니다.
이는 고려가 아라비아 등 서방 세계와도 활발히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당대 고려 기록에 따르면 1024년 고려 현종 15년 9월에 하산 라자를 포함한 100여 명의 무슬림들이 한반도에 도착했고, 다음 해에 또 다른 100여 명의 무슬림 상인들이 왔다.
1107
[윤관, 별무반과 9성 축조]
윤관의 건의로 기병 중심의 특수 부대 '별무반'이 편성되어 여진족을 북방으로 쫓아냈습니다.
동북 지방 일대에 '9성'을 쌓아 방비했으나, 여진족의 계속된 침략으로 1년 만에 돌려주었습니다.
1115
[여진족, 금나라 건국]
만주 하얼빈 지방에서 일어난 여진족 완옌부가 다른 부족을 통합하여 금나라를 건국하고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고려는 현실적 판단 하에 금의 사대 요구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1126
[이자겸의 난 발생]
왕실의 외척으로 권력을 독점했던 이자겸이 인종의 견제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습니다.
왕을 금족시키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측근인 척준경과의 불화로 실각하며 문벌 귀족 사회 붕괴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1135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자겸의 난 이후 왕권 회복을 꾀하던 인종 시기,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개혁 정치를 시도했습니다.
개경 귀족 세력과의 대립 속에 결국 '대위국'을 칭하며 난을 일으켰습니다.
1136
[묘청의 난 진압]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1년 만에 평정되었습니다.
이는 보수적인 개경 세력의 승리로, 이후 고려 사회는 유교적 질서 강화와 함께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조정에서는 묘청 반대파의 수장인 김부식(金富軾)에게 서경 정토(征討)의 명령을 내렸다. 김부식은 출정에 앞서 정지상·백수환 등을 죽이고 북상하여 평양성을 포위했다. 조광 (고려)(趙匡)은 정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묘청·유참 등을 목베어 귀부(歸附)의 뜻을 표했으나 거절된 후 끝까지 반항하였다. 1136년(고려 인종 14년) 2월 서경성(평양성)이 함락되어 난은 1년 만에 평정되었다.
1170
[무신정변 발발]
문신 우대와 무신 차별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정중부, 이의방 등이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문신 다수를 살해하고 의종을 폐위, 명종을 옹립하며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고려의 정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1176
[망이·망소이의 난]
무신정변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 속,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봉기하여 크게 번져갔습니다.
이는 지방관의 횡포와 신분적 차별에 저항하는 농민·천민들의 대표적인 봉기였습니다.
1196
[최충헌, 이의민 제거]
무신 집권기 혼란 속에서 최충헌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이의민을 살해했습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최충헌-최우-최항-최의로 이어지는 강력한 최씨 무신정권이 약 60년간 고려를 지배하게 됩니다.
1198
[만적의 난]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며 신분 해방과 정권 탈취를 목표로 대규모 봉기를 계획했습니다.
비록 사전에 발각되어 진압되었으나, 당시 고려 사회의 신분 질서 동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1231
[몽골, 고려 침입]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을 구실로 몽골군이 고려를 침공하며 약 30년간의 고려-몽골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힘겹게 의주를 점령하고 개경까지 포위하는 등 고려는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1270
[개경 환도와 삼별초 항쟁]
최씨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고려 조정이 몽골과의 강화를 맺으며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삼별초는 배중손, 김통정의 지휘 아래 진도와 제주도로 옮겨 장기적인 대몽 항쟁을 벌였습니다.
1271
[티베트 승려 고려 방문]
원종 12년, 몽골에서 온 티베트 승려 4명이 고려를 방문했습니다.
고려는 원과의 강화조약 직후였음에도 왕이 직접 나와 환대할 정도로 이들의 방문은 중요한 외교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1274
[원, 일본 원정 1차 동원]
고려는 원나라의 요구로 1차 일본 정벌에 동원되며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는 원 간섭기 고려가 겪어야 했던 시련 중 하나로, 자주권을 잃어가는 아픔을 보여줍니다.
1281
[원, 일본 원정 2차 동원]
몽골은 1274년에 이어 다시 한번 고려를 동원하여 일본 원정을 시도했습니다.
고려는 또다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러한 강제 동원은 고려의 국력을 크게 소모시켰습니다.
1289
[안향, 성리학 도입]
충렬왕 15년, 안향이 원나라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도입하며 성리학(주자학)을 고려에 전파했습니다.
이는 이후 신진사대부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고려 말 개혁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349
[고려 최초 무슬림 사망]
고려에 정착한 무슬림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을 가진 '라마단 빈 알라웃딘'이 사망했습니다.
그의 기록은 고려 시대 이슬람교와 이민족의 존재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1374
[이인임, 우왕 옹립]
공민왕 시해 후, 권문세가의 수장 이인임이 어린 우왕을 옹립하며 다시 권문세가가 정치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 등 횡포가 극심했습니다.
1377
[최무선, 화통도감 설치]
왜구의 침략이 극심해지자, 최무선의 노력으로 '화통도감'이 설치되어 화포가 제작되었습니다.
이는 해상 전투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 왜구 격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중대한 과학기술 발전입니다.
1380
[진포 해전 대승]
최무선이 제작한 화포를 이용해 금강 입구에 침입한 왜구 대선단을 화공으로 전멸시킨 해전입니다.
내륙 침투 왜구까지 이성계가 소탕하며 왜구의 기세를 꺾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388
[이성계, 위화도 회군]
요동 정벌에 반대하던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는 고려 왕조의 운명을 결정지은 최후의 결정타이자 조선 건국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인임 일당 숙청]
청렴한 최영과 신흥 세력 이성계의 힘으로 토지 겸병으로 악명 높던 권문세가 이인임 일당이 대대적으로 숙청되었습니다.
이는 권문세가의 몰락과 신진사대부의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1389
[박위, 대마도 정벌]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박위가 이끄는 고려군이 정벌했습니다.
이는 왜구 문제 해결을 위한 고려의 적극적인 군사적 노력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류큐국 고려인 송환]
공양왕 1년 8월, 류큐국이 왜구에게 붙잡혔던 고려인들을 고려로 돌려보냈습니다.
이는 고려가 남쪽의 류큐국과도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1392
[공양왕 폐위, 고려 멸망]
이성계와 급진적 신진사대부들은 정몽주 등 온건파를 제거하고 공양왕을 폐위시켰습니다.
이로써 475년간 이어져 온 고려 왕조는 사실상 막을 내리고, 새로운 왕조 조선의 건국을 위한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1393
[고려, 국호 조선으로 변경]
공양왕 폐위 이후, 이성계는 1393년 국호를 '고려'에서 '조선'으로 최종 변경했습니다.
이는 고려 왕조의 완전한 종말과 새로운 조선 왕조의 공식적인 시작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