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연표
1394
[조선 왕조의 시작, 경복궁 건립]
한양 천도 후 고려 남경 이궁 자리가 좁아 현재 위치로 변경하여 궁궐 건립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듬해 9월 1만 5천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1차 건축을 완료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3년째인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고 심덕부에게 궁궐 건설을 맡겼습니다. 1395년 8월 경기 좌우도와 충청도에서 총 15,000명의 인부를 징용하여 공사를 시작했고, 같은 해 9월 29일에 궁궐 내부 중심부가 완성되었습니다.
1395
[궁궐 이름, 경복궁의 탄생]
태조가 궁궐에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짓게 했습니다.시경의 '개이경복(介爾景福)'에서 따와 '큰 복을 누리다'라는 의미의 경복궁이라는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정도전은 《시경》의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 구절에서 두 글자를 따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때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도 함께 정해졌습니다. 이후 궁궐 외곽 울타리인 궁성은 태조 7년(1398년) 1월에 착공하여 같은 해 7월에 수축되었습니다.
1412
[조선 최대 누각, 경회루 탄생]
태종의 명으로 경복궁 서쪽 습지에 있던 작은 누각이 인공 연못과 함께 대규모 연회 장소인 경회루로 재건되었습니다.이는 조선 왕조의 법궁으로서 면모를 갖추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태종 12년(1412년)에 연못을 크게 넓히고 건물도 다시 크게 완성하여 외국 사신과 조정 관원들의 연회 장소로 활용했습니다. 이후 세종 대에는 광화문, 홍례문 등 각 문과 다리 이름이 지어지고, 사정전, 경회루 중수를 비롯해 간의대 등의 천문 관측 시설도 완비되며 경복궁은 법궁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습니다. 특히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으로 평가받습니다.
1553
[명종 시기 대화재와 중건]
명종 8년, 강녕전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경복궁의 편전과 침전 구역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습니다.왕실의 보물과 서적 등이 불타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이듬해 빠르게 중건 공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화재로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 등 일부 전각을 제외한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불탔습니다. 명종은 불이 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1554년 봄부터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9월에 완료했습니다.
1592
[임진왜란으로 궁궐 전소]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의 주요 궁궐들이 모두 불타 전소되었습니다.이로 인해 경복궁은 273년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실록에는 난민들이 궁궐에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있지만, 왜군이 한성에 입성하기 전까지 경복궁의 전각들이 남아있었다는 일본 측 기록도 있어 방화의 주체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이 화재로 경복궁은 폐허가 되었고, 조선의 법궁 역할은 창덕궁이 대신하게 됩니다.
1865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273년간 폐허로 남아있던 경복궁이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의 지시와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대규모 중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7년여의 공사 끝에 1868년 궁궐의 위용을 되찾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당백전을 발행하고 백성들을 징용하는 등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들여 경복궁을 재건했습니다. 공사는 1868년 6월 말에 완료되었고, 7월 2일 국왕과 왕실이 경복궁으로 이어하며 다시 조선의 정궁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는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873
[고종의 친정 선언, 건청궁]
고종은 왕의 사비인 내탕금으로 건청궁을 건립했습니다.이는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벗어나 친정을 선언하는 고종의 정치적 자립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축물이었습니다.
건청궁은 조선 왕조 역대 임금의 어진(초상화)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졌으나, 실제로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1887년 건청궁 북행각에 한국 최초로 전깃불이 켜지는 등 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창덕궁 연경당과 낙선재처럼 일반 사대부 저택과 유사한 건축 형식을 지녔습니다.
1887
[한국 최초 전깃불 점등]
건청궁 북행각에 미국 에디슨전기회사가 발전기를 설치하여 한국 역사상 세계 최초에 가까운 전깃불을 밝혔습니다.이는 조선 근대화의 중요한 상징이자 전기의 도입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전깃불은 '밤에도 촛불 켜지 않고 대낮같이 밝다'고 하여 백성들에게 큰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발전기가 물을 끓여 증기로 터빈을 돌리는 방식이었기에 소음이 크고 고기가 익을 정도로 연못 물이 따뜻해져 '궁궐에 물고기 살이 익어 죽어가는 전등사'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1895
[명성황후 시해, 왕궁 운명 끝나다]
경복궁 내 건청궁 곤녕합에서 일본군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을미사변)이 발생했습니다.이 사건으로 고종은 이듬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며 경복궁은 왕궁으로서의 운명을 사실상 마감했습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고, 이후에도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공간으로 관리되었으나 더 이상 왕실의 주요 거처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조선 왕조의 몰락과 일제 침략의 비극적인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1910
[일제에 의한 경복궁 훼손]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일제는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훼손하기 시작했습니다.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개최를 명목으로 수많은 전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전시관을 지었으며, 1926년에는 근정문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건설하여 궁궐의 본모습을 완전히 망가뜨렸습니다.
일제는 왕권의 상징인 근정전, 사정전 등을 유물 전시실로 이용하고, 창덕궁 화재 복구를 명목으로 경복궁의 침전까지 철거하여 재목으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1927년 9월에는 정문인 광화문을 원래 자리에서 헐어 건춘문 북쪽으로 옮기는 등, 조선의 정궁을 철저히 유린하고 민족의 자긍심을 짓밟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수백 채의 전각 중 소수의 건물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1963
[국가 사적으로 지정]
대한민국 정부는 훼손된 경복궁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보존하기 위해 경복궁 일대를 사적 제117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적 지정 이후에도 한때 입장료 수익을 이유로 골프장 등 휴게시설 신축 계획이 발표되어 여론의 반발로 무산되는 등, 경복궁의 보존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습니다. 또한, 1960년대에는 국립종합박물관이 선원전 영역에 들어서는 등 추가적인 건물 철거와 변형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1990
[경복궁 복원 사업 착수]
일제강점기 동안 심하게 훼손되었던 경복궁의 본모습을 되찾기 위한 대대적인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이는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등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궁궐의 기본 궁제를 완비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1단계 종합정비 사업은 2010년까지 진행되어 강녕전, 교태전, 자선당, 비현각, 흥례문, 태원전, 광화문 등 중심 전각 89동이 복원되었습니다. 특히 1995년 조선총독부 청사, 1997년 조선총독부 청사, 1999년 조선총독부 미술관 등 일제강점기 건물들이 철거되며 경복궁 본래의 위상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2010
[광화문 복원 및 1차 사업 완료]
한국 전쟁으로 소실되었던 광화문 문루가 본래의 목조 형태로 복원되어 광복절에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이로써 1990년부터 시작된 1차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광화문은 원래 1963년에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되었으나, 2006년부터 시작된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을 통해 제자리에서 전통 방식의 목조 건물로 복원되었습니다. 1차 복원 사업으로 경복궁 전체 건물 중 약 25% 수준인 125동이 복원되었으며, 이를 통해 경복궁은 조선 정궁의 뼈대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경복궁, 밤의 문을 열다]
서울 G20 정상회의 성공 개최 기원 행사로 경복궁 야간 개장이 처음 실시되었습니다.이후 야간 개장은 정례화되어 일반 대중이 밤의 궁궐을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입장객 제한 없이 운영되어 한때 하룻밤에 4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으나, 일부 관람객의 부적절한 행동으로 인해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이에 2014년부터는 하루 관람 인원을 1500명(이후 2021년 4월 2000명으로 조정)으로 제한하여 운영 중입니다.
2011
[경복궁 2차 복원 사업]
1차 복원 사업에 이어, 경복궁의 더 많은 부속 건물을 복원하는 2차 복원정비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이는 2045년까지 경복궁을 원래 규모의 약 75.8%까지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2차 사업은 임금의 수라간인 소주방, 궐내각사 등 부속 건물들을 복원하여 궁궐에 '살을 붙이는' 과정입니다. 2015년 소주방 영역이 복원 완료되었고, 2023년에는 계조당 영역도 복원되었습니다. 또한, 2023년에는 광화문 월대 복원도 이루어지는 등 현재까지도 복원 작업이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2018
[영추문, 43년 만에 개방]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영추문이 43년 만에 일반에 개방되었습니다.이로써 경복궁은 남쪽 광화문, 북쪽 신무문, 동쪽 국립민속박물관 출입문과 함께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서 출입이 가능해졌습니다.
영추문은 과거 주로 일반 관료들이 드나들던 문으로, 1926년 전차 진동으로 무너진 후 1975년 원래 위치가 아닌 북쪽으로 50m 이전한 자리에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졌습니다. 이번 개방은 관람객 편의 증진과 서촌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조치로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