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즈버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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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즈버그 전투
전쟁, 역사적 사건, 전투 + 카테고리

- 미국 남북 전쟁에서 가장 참혹하고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됩니다. - 북군 조지 미드 장군이 남군 로버트 리 장군의 북부 침입을 결정적으로 저지한 전투입니다. - 리의 워싱턴 공격 및 남부 독립 승인 전략이 최종적으로 좌절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 양측 합계 51 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남북 전쟁 중 가장 큰 희생자를 낸 전투입니다. -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역사적인 게티즈버그 연설로 전쟁의 의미를 재확립한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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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장군, 챈슬러즈빌에서 승리하며 북부 침공 결심]

남부의 로버트 리 장군이 챈슬러즈빌 전투에서 북군에게 승리하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이 승리는 리가 북부로 두 번째이자 마지막 침공을 감행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그는 이 침공으로 북군의 여름 전쟁 계획을 무너뜨리고, 빅스버그에 포위된 남군을 구하며, 전쟁으로 피폐해진 버지니아를 위한 물자를 확보하려 했습니다.

리는 롱스트리트의 2개 사단을 빅스버그로 보내는 대신, 모든 가용 병력을 동원해 필라델피아나 워싱턴 D.C.를 점령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는 북부의 평화 운동에 힘을 싣고, 유럽 국가들의 남부 독립 승인을 얻어내 전쟁을 조기에 끝내고자 하는 리의 전략이었습니다. 그는 남부의 전쟁 자원 한계를 인지하고 있었기에, 북군 주력을 서둘러 섬멸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러한 과감한 전략은 스튜어트 기병대의 정보 부족 문제와 결합되어 게티즈버그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됩니다.

[남군 리 장군, 대규모 북부 침공 개시]

로버트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이 버지니아주 프레더릭스버그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며, 북부 침공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리는 군단 체계를 재편하여 제임스 롱스트리트, 리처드 유얼, A.

P.

힐에게 각각 군단을 맡겼습니다.

이는 북부의 심장부를 노리는 대담한 움직임의 시작이었습니다.

리의 3개 군단 재편은 지휘 효율성을 높이려는 의도였습니다. 특히 유얼과 힐은 명장 스톤월 잭슨 휘하에서 경험을 쌓은 용장이었습니다. 이들의 북상은 북부 전역에 긴장감을 고조시켰으며, 북군 또한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재편에 나섰습니다.

[남북 전쟁 최대 규모 기병전, 브랜디 역에서 발발!]

버지니아 쿨피퍼 근처 브랜디 기차역에서 젭 스튜어트 휘하의 남군 기병대가 북군 기병대의 기습을 받았으나 최종적으로 승리했습니다.

이 전투는 남북 전쟁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북군 기병대의 실력이 남군과 대등해졌음이 입증되었고, 자존심이 상한 스튜어트는 본래 임무인 정찰과 엄호 대신 북군 후방 침투에 몰두하게 되어 리 장군에게 치명적인 정보 부족을 안겨주었습니다.

스튜어트의 오판은 리가 포토맥군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제때 받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반면, 북군은 미드 사령관 교체 후 남군 움직임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병전은 단순한 승패를 넘어 게티즈버그 전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남군, 포토맥 강 도하 시작하며 메릴랜드 진격]

리의 북버지니아군이 포토맥 강을 건너 메릴랜드로 진격할 채비를 갖췄습니다.

이월의 2군단이 선두로 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힐과 롱스트리트 군단도 뒤를 따랐습니다.

이는 남군의 북부 침공이 본격적으로 메릴랜드 지역으로 확대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리는 워싱턴과 리 군대 사이에 있던 후커군을 추격하는 대신 북쪽으로 진격하며 북군과의 거리를 벌렸습니다. 북군도 6월 25일부터 27일 사이에 포토맥 강을 건너 남군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링컨, 후커 해임하고 조지 미드 장군을 새 사령관으로 임명!]

하퍼스페리 수비대 병력 사용 문제로 링컨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한 조지프 후커 장군의 사표가 즉시 수리되었습니다.

링컨은 후커의 주저하는 태도에 크게 실망했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당시 5군단장이던 조지 고든 미드 장군을 포토맥군 새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이 인사는 게티즈버그 전투의 판도를 바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미드는 전임 사령관과는 달리 리의 움직임을 상세히 파악하며 전투에 임했습니다. 이는 남군 스튜어트 기병대의 정보 부재와 대비되며 북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제공했습니다.

[리, 캐시타운 집결 명령! 북군 뷰퍼드, 게티즈버그 요충지 간파!]

로버트 리 장군은 포토맥 강을 건넌 북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예하 전 부대에 게티즈버그 서쪽 8마일 지점인 캐시타운으로 집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적과의 접전은 피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북군 기병사단장 존 뷰퍼드는 게티즈버그에 도착하자마자 주변 지형이 고지를 먼저 장악하는 쪽에 유리하다는 것을 즉시 간파하고 전투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그의 빠른 판단이 게티즈버그 전투의 발발 지점을 결정하게 됩니다.

리는 캐시타운을 주 전장으로 생각했지만, 뷰퍼드의 선점과 초기 방어로 인해 의도치 않게 게티즈버그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뷰퍼드는 휘하 기병대를 말에서 내리게 하여 방어 태세에 돌입했고, 1군단장 레이놀즈 장군에게 증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남군은 스튜어트 기병대의 부재로 인해 뷰퍼드의 병력을 소규모 정찰대로 오판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남군 정찰대, 게티즈버그에서 북군과 조우]

힐 군단 소속 존스턴 페티그루 여단이 게티즈버그로 접근하던 중 북군 존 뷰퍼드 준장의 기병대가 마을 서쪽에 주둔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페티그루는 교전을 피하고 캐시타운으로 복귀했으나, 힐과 헨리 히스는 이를 소규모 민병대로 오판했습니다.

리의 교전 회피 명령에도 불구하고, 힐은 다음 날 아침 대규모 정찰 병력을 내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다음 날 전투의 불씨가 됩니다.

페티그루 여단의 게티즈버그 접근은 신발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로는 정찰 목적이 더 컸습니다. 남군 지휘부의 오판과 스튜어트 기병대의 정보 부재가 북군 방어선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게티즈버그 전투 발발! 북군 뷰퍼드의 지연전술, 대규모 충돌로 이어지다]

오전 5시경, 남군 히스 사단이 게티즈버그로 진격하며 북군 뷰퍼드 기병대와 교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뷰퍼드 장군은 게티즈버그 남쪽 고지대의 전술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신사 능선, 맥퍼슨 능선, 신학교 능선에서 강력한 남군에 대항하여 소규모 병력으로 시간을 끌었습니다.

이 지연 전술 덕분에 북군 1군단의 선두 부대가 도착할 시간을 벌었으나, 북군 지휘관 레이놀즈 장군이 전사하는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남군은 25,000명, 북군은 18,000명이 투입된 이 날 전투는 남북 전쟁 중 23번째로 큰 전투였습니다.

오전 7시 30분, 히스의 2개 여단이 북군 기병대와 처음 조우했습니다. 북군 '강철 여단'이 아처 여단을 상대로 수백 명의 포로를 획득하는 등 선전했지만, 페티그루 여단의 공격에 밀려 '강철 여단'은 묘지 능선으로 후퇴했습니다. 한편, 이월의 2군단 사단들이 마을 북서쪽에서 북군 11군단에 강력한 공격을 퍼부었고, 북군의 방어선이 붕괴되자 하워드 장군은 병력을 묘지 언덕으로 후퇴시켰습니다. 리 장군은 유얼에게 '가능하다면' 묘지 언덕을 점령하라고 명령했으나, 유얼은 공격을 선택하지 않아 많은 역사가들이 이를 큰 실수로 평가합니다.

[피의 격전! 리틀 라운드 탑 사수하며 북군 전선 지켜내다!]

이날 양측 보병대가 게티즈버그에 모두 집결했습니다.

북군은 '낚싯바늘' 모양의 내선 방어선을 형성하여 병력 기동과 집중 배치에 유리한 이점을 가졌습니다.

오후 4~5시경 롱스트리트의 1군단이 북군 좌익에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클스 장군이 멋대로 병력을 전진 배치하여 북군 방어선에 돌출부를 형성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나, 스트롱 빈센트 대령의 소규모 여단이 북군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리틀 라운드 탑* 고지를 사수하며 남군 후드 사단의 반복 공격을 격퇴했습니다.

특히 메인 20연대의 착검 돌격은 남북 전쟁 중 가장 전설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롱스트리트의 공격은 복숭아 숲, 악마의 소굴, 밀밭지대 등에서 치열한 백병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북군 3군단은 사실상 괴멸되었고, 군단장 시클스는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남군의 앤더슨 사단은 북군 중앙의 틈을 노리고 묘지 능선에 이르렀으나, 핸콕의 지시로 미네소타 1보병연대가 필사적인 방어를 펼쳐 남군을 격퇴했습니다. 저녁에는 남군 존슨 사단이 컬프스힐을, 얼리의 여단들이 묘지 언덕을 공격했으나 북군 그린 준장의 강력한 방어와 증원군 덕분에 북군은 고지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스튜어트 기병대는 이날도 정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늦게 도착하여 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게티즈버그의 운명을 가른 '피켓의 돌격' 대참사!]

리는 전날과 같은 기본 계획으로 공격을 재개하려 했으나, 북군의 컬프스힐 기습 포격으로 계획이 변경되었습니다.

오후 1시경, *전쟁 중 가장 대규모*인 170문의 남군 대포가 북군 방어선에 포격을 퍼부었습니다.

오후 3시경, 12,500명의 남군 병사들이 로버트 리 장군의 명령에 따라 묘지 능선을 향해 1.2km를 전진하는 *'피켓의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남군은 엄폐물이 없는 평원에서 북군 포병대의 3면 집중 포격을 뒤집어쓰며 공격대 절반가량이 돌아오지 못하는 대참사를 겪었고, 결국 공격은 완전히 격퇴되며 리의 북부 침공은 좌절되었습니다.

피켓의 돌격은 게티즈버그 전투의 상징적인 사건이자 남군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 비록 '꼭짓점'으로 불린 북군 방어선이 일시적으로 무너지기도 했지만, 북군 지원부대가 달려들어 틈새를 메웠습니다. 이날 묘지 언덕 동쪽 5킬로미터 지점에서는 스튜어트와 커스터의 기병대 간에 사브르 백병전이 벌어졌고, 커스터의 활약으로 스튜어트는 북군 보급선 차단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피켓의 돌격 실패 후 미드는 빅라운드탑 남동쪽 롱스트리트 군단 보병 진지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으나, 엘런 파른스워스 준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만 입었습니다.

[빅스버그 함락! 남부의 두 기둥 무너지다]

게티즈버그 전투가 끝난 바로 다음 날, 미시시피주의 요충지인 *빅스버그가 율리시스 그랜트의 북군에 항복*했습니다.

이는 남북 전쟁의 또 다른 중요한 전환점으로, 남부동맹은 동쪽의 게티즈버그와 서쪽의 빅스버그라는 두 개의 결정적인 패배를 동시에 겪으며 전세가 크게 기울었습니다.

리 장군은 미드의 추격에 대비하여 방어 태세로 부대를 재배치했습니다.

미드 장군은 신중하게 리의 잔존 부대를 추격하지 않아 훗날 많은 비판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빅스버그의 함락은 남부에게 게티즈버그만큼이나 큰 충격이었고,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남군, 비 내리는 게티즈버그 떠나 버지니아로 후퇴]

비가 내리는 가운데 로버트 리 장군의 북버지니아군이 게티즈버그를 떠나 하게스타운 도로를 따라 버지니아로 후퇴했습니다.

이로써 게티즈버그 전투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으며, 남부동맹은 다시 버지니아로 격퇴당했습니다.

북군의 추격은 형식적이었고, 범람한 포토맥 강 때문에 남군은 강 북쪽 강둑에서 정체되기도 했습니다.

북군이 따라잡았을 때 남군은 이미 강을 건널 준비를 마쳤습니다. 결국 7월 14일, 치명상을 입은 페티그루 장군을 포함한 수많은 사상자를 낸 게티즈버그 전역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리 장군의 '무적' 신화는 깨졌고, 그의 느슨한 지휘 방식의 문제점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북군은 조지 G. 미드라는 유능한 새 사령관을 맞이하며 전투력이 강화되었음을 입증했습니다.

[링컨 대통령, 게티즈버그 연설로 전쟁의 의미를 선포하다]

게티즈버그 전투의 참혹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국립 군인묘지가 헌정되었고, 이 자리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게티즈버그 연설*을 했습니다.

링컨은 짧지만 강렬한 연설을 통해 전쟁 노력과 미국의 이상을 재천명하며, 게티즈버그에서 헛되이 죽어간 병사들이 없음을 추모했습니다.

이 연설은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연설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게티즈버그 전투는 양측 합계 51,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7천 명 이상의 병사들이 즉사했습니다.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 버려진 시체들과 5천여 마리의 말 시체는 마을 주민들에게 악취와 전쟁의 참상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게티즈버그 국립 묘지와 게티즈버그 전장은 미국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유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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