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
연표
1873
[흥선대원군 하야와 고종의 친정 시작]
위정척사파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고종이 받아들이며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직접 국정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종은 자신의 친정을 도울 세력으로 외척 민씨 세력과 개화파를 선택했습니다.
[개화파 박규수, 우의정에 임명]
고종이 개화파의 선구자인 박규수를 우의정으로 임명하며 개화파를 국정의 주요 파트너로 기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정부 요인들이 대부분 척화론자였던 상황에서 이는 개화 정책 추진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1875
[일본의 운요호 사건 도발]
일본이 조선 해역에서 군함 운요호를 앞세워 무력 시위를 벌이며 조선에 개항과 수교를 요구한 사건입니다.
일본은 이를 계기로 조선과의 조약 체결을 강요했습니다.
이는 조선이 서구식 국제 관계에 강제로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76
[제1차 수신사 김기수, 일본 파견]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첫 외교 사절단입니다.
김기수는 일본의 문물을 살피고 고종에게 보고하며 근대화 정책 추진의 필요성을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 강화도 조약 체결]
일본의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체결된 조선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입니다.
조선의 개항을 알리는 이 조약으로 부산, 원산, 인천이 차례로 개항되었고, 일본은 치외법권과 해안 측량권을 얻는 등 막대한 특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개화파 활동의 본격적인 배경이 됩니다.
1880
[김홍집, 조선책략 국내 도입 및 회람]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이 주일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으로부터 얻은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바치고 전국에 간행, 회람시켰습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청, 일본, 미국과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위정척사파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근대적 관청 통리기무아문 설치]
고종이 개화 정책 추진을 위해 청나라의 관제를 참고하여 설치한 '최초의 근대적 정부 기구'입니다.
신식 무기 수입과 외교 관계 처리가 주요 업무였으며, 일본에서 돌아온 조사시찰단 인사들을 대거 기용하며 개화파가 실질적인 정책을 수행하게 했습니다.
1881
[일본 조사시찰단 파견]
고종이 일본의 근대 문물을 직접 시찰하고 배워오도록 개화파 인사들을 일본에 비밀리에 파견했습니다.
이들은 일본의 행정, 산업, 군사 시설 등을 둘러보고 귀국하여 통리기무아문에 배치되어 개화 정책 추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882
[임오군란 발발과 개화파의 분화]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급여 미지급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난으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고 명성황후가 피신하는 등 정국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청나라의 개입으로 흥선대원군이 납치되며 사태는 진압되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개화파는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분화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1884
[급진개화파, 갑신정변 일으키다]
임오군란 이후 위기를 느낀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우정총국 낙성식을 틈타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갑신혁신정강 14개조를 발표하며 신분제 폐지, 정부 기구 근대화 등을 추진했으나, 청나라의 군사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실패하고 주역들은 망명했습니다.
1894
[갑오개혁 추진 시작]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한 후 김홍집 등 온건개화파를 중심으로 구성된 군국기무처가 추진한 대규모 근대 개혁입니다.
신분제 폐지, 조세 제도 개편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개혁이 시도되었으나 일본의 간섭과 흥선대원군과의 내분으로 성과는 미미했습니다.
[갑오농민전쟁 발발]
전라도 고부군에서 조병갑의 학정에 항의하며 시작된 농민 봉기가 동학군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확산된 대규모 항쟁입니다.
이는 봉건적 악습 폐지와 외세 반대를 주장하며 개화파와는 대척점에 서 있었으나, 결국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의 촉발점이 됩니다.
[청일전쟁 발발, 일본의 조선 장악 시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일본군이 풍도 해전으로 청군을 공격하며 시작되었고, 이 전쟁의 결과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급격히 쇠퇴하고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정책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됩니다.
[우금치 전투, 동학 농민군 궤멸]
동학 농민군과 일본군 및 조선 관군 연합 진압부대 간의 최후 전투입니다.
기관총 등 신식 무기로 무장한 연합군에 맞서 조총과 창칼로 싸운 농민군이 궤멸적 피해를 입으며 동학 농민 전쟁의 사실상 종말을 고했습니다.
1895
[을미의병 거병]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 활동입니다.
위정척사파가 주도하며 개화파를 친일파로 규정하고 항일 운동을 전개했으나, 조선군과 일본군의 연합 진압으로 패배했습니다.
[일본의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
청일전쟁 승리 후 조선 내 영향력 강화를 시도하던 일본이 자신들의 방해물로 여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입니다.
이는 전국적인 반외세 감정을 격화시키고 을미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화파 내각, 단발령 단행]
을미사변 이후 김홍집의 온건개화파 내각이 근대화의 상징으로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을 강제 시행했습니다.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신체발부 수지부모' 사상에 입각한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고, 이는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또 다른 주요 원인이 됩니다.
1896
[그레고리력(태양력) 채택]
김홍집 내각이 음력을 폐지하고 태양력인 그레고리력을 공식 역법으로 채택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달력의 변화를 넘어, 청나라의 시헌력(음력)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근대 국가의 시간 표준을 선언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습니다.
[고종, 아관파천 단행]
고종이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입니다.
이는 김홍집 내각의 해임과 그의 피살로 이어졌으며, 개화파가 정부에서 실각하고 친러파가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화 정책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김홍집, 성난 군중에 의해 피살]
고종의 아관파천 직후 친일적이라고 비판받던 온건개화파 김홍집 내각이 해임되었고, 김홍집은 종로에서 성난 군중에게 붙잡혀 살해당했습니다.
이는 개화파의 직접적인 정부 참여가 사실상 종식되었음을 상징하는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1897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추진]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 황제 주도로 추진된 근대화 개혁입니다.
'구본신참'(옛것을 근본으로 새것을 참고함)을 기치로 황제권 강화와 근대식 군사, 산업, 교육 등 다방면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러일전쟁 등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고종의 환궁 및 대한제국 선포]
아관파천을 마치고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전통적인 사대교린 외교 체계의 종말을 선언하며 '황제국인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이는 자주 독립 국가임을 대내외에 천명하려는 의지였습니다.
1898
[독립협회 해산]
서재필 등 망명에서 돌아온 개화파 인사들이 설립한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 등을 통해 입헌군주제 수립을 주장했으나, 황제 중심의 전제군주제를 지향했던 고종은 이를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했습니다.
조병식 등의 무고를 빌미로 결국 독립협회는 해산되었습니다.
1904
[갑진혁신운동, 동학의 천도교 전환]
동학의 3대 교주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근대적 개혁 사상을 수용하며 교단의 재건과 근대화를 추진한 운동입니다.
이는 반외세적이었던 동학의 사상을 근대 개혁적 방향으로 전환시킨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1905
[일본, 을사늑약 강제 체결로 외교권 강탈]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체결한 불평등 조약입니다.
고종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완용 등 친일 대신들의 서명으로 이루어졌으며, 대한제국이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