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조약
연표
1876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의 개항 압박 시작]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전권대사와 군함을 보내어 협상을 강요했다. 이는 조선 개국을 목표로 한 강압적 외교의 시작이었다.
1876년 1월 30일, 일본은 자신들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을 명분 삼아 조선에 군함 3척과 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 부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파견하여 통상수호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일본은 조선 영해 자유항행과 강화 부근 개항 등을 조건으로 내걸며 교섭이 진전되지 않을 경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 강화도 조약 체결]
일본의 강압적인 요구와 조선의 개항 의지가 맞물려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는 조선이 자주국임을 명시했으나, 여러 불평등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조선과 일본 제국은 강화도 연무당에서 조일수호조규, 일명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근대 국제법을 토대로 맺어진 조선 최초의 근대 조약이었으며, 조선을 자주국으로 명시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무력시위와 청나라 이홍장의 권고, 고종의 개항 의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체결되었으며, 후에 일본의 조선 침략의 발판이 되는 불평등 조항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었다. 주요 조인자는 조선 측 신헌, 일본 측 구로다 기요타카였다.
[조일수호조규 부록 및 조일무역규칙 체결, 불평등 심화]
강화도 조약의 후속 조치로 조일수호조규 부록과 조일무역규칙이 체결되었다. 이를 통해 일본 화폐의 조선 내 사용이 허용되고, 양곡 무제한 유출과 일본 수출입 상품의 무관세 조항으로 불평등성이 더욱 심화되었다.
강화도 조약 체결 약 6개월 뒤인 1876년 8월 24일, 조일수호조규를 보완하기 위한 조일수호조규 부록과 조일무역규칙이 동시에 체결되었다. 부록에서는 일본인의 간행이정을 10리로 정하고, 일본 화폐의 조선 내 사용을 규정하여 조선의 화폐 체계를 이원화하고 일본의 경제 침투의 단초를 제공했다. 무역규칙에서는 양곡의 무제한 유출과 일본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 조항이 포함되어, 강화도 조약의 불평등성을 더욱 심화시켰다.
1877
[일본 외교관, 조선에 국제법 서적 기증]
일본 외교관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조선에 《만국공법》 등 국제법 관련 서적을 기증하며, 서구 조약체제 하에서 공사 교환이 상식적임을 설명하여 조선의 소극적인 태도를 변화시키려 했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양국 공사의 상호 파견 주재에 대해 조선과 일본 간 견해가 충돌하자, 1877년 12월 17일 일본 외교관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조선 측에 《만국공법》과 《성호지장》을 기증했다. 그는 공사 교환이 서구 조약체제 하에서 상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설명하여, 공사 교환에 소극적이던 조선의 자세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1882
[조선 최초의 관세권 설정,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조선과 미국 사이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조선 최초로 관세권이 설정되었다. 이는 강화도 조약으로 시작된 일본의 무관세 요구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82년 5월 22일, 조선과 미국 사이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으로, 특히 조선에 대한 관세권이 처음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졌다. 이로 인해 강화도 조약에서 일본에 허용했던 무관세 조항의 개정 가능성이 열렸고, 일본 역시 더 이상 무관세를 고집하기 어렵게 되었다.
[청나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으로 조선을 속방 명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었다. 청나라는 이 조약에서 조선을 '속방'으로 명시하여 조선의 자주권을 침해하고 대외적 위상을 격하시켰다.
1882년 8월 23일,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해금정책 철폐를 목적으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청나라가 조선을 자신의 '속방(屬邦)'으로 명시하여, 강화도 조약에서 조선이 자주국임을 명시한 것과 대비되며 조선의 대외적 위상을 훼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조선의 외교적 자주성에 대한 복잡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조일수호조규 속약 체결, 일본의 조선 침투 심화]
임오군란의 후속 대책으로 제물포 조약과 함께 조일수호조규 속약이 체결되었다. 이 속약은 일본인의 간행이정을 확대하고 일본 외교관의 조선 여행을 허용하여 일본의 침투를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1882년 8월 30일, 임오군란 이후의 일본의 보복성 조치인 제물포 조약과 더불어 조일수호조규 속약이 조인되었다. 이 속약은 일본인의 간행이정을 기존 10리에서 50리(또는 100리)로 확대하고, 양화진을 개장하며 일본 외교관의 조선 내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내용을 담아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침투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883
[조일통상장정 체결, 관세권 확보 및 방곡령 조항 명시]
조선의 관세권 회복 노력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영향으로 조일통상장정이 체결되었다. 이 장정은 일본에 대한 관세 부과와 쌀 수출 금지(방곡령) 조항을 포함하여 이전 조약들보다 조선에 유리한 내용을 담았다.
1883년 7월 25일,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관세권이 설정된 이후, 조선의 외교적 노력으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새로운 조일통상장정이 체결되었다. 총 42관으로 이루어진 이 장정은 일본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 부과를 명시하여 조선의 관세 자주권을 회복하고, 조선 국내 양식 부족 시 쌀 수출을 일시적으로 금지할 수 있는 방곡령 조항을 포함했다. 또한 최혜국대우 조항도 포함되어, 이전의 불평등한 조약들과는 성격이 다른 면모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