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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
삼국 시대 인물, 촉한 장군, 무장 + 카테고리

강유는 중국 삼국 시대 촉한의 무장으로 제갈량의 능력을 인정받아 촉한의 주요 직책을 맡았습니다. 촉한사영 사망 후 병권을 잡고 대장군이 되어 북벌을 주도했으나 큰 공로를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잦은 북벌로 민생 피폐에 대한 비판도 있었으며 촉한 멸망 후에는 위나라 점령군 종회를 이용해 촉한의 재건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전사했습니다. 배잠론에서는 촉한의 최후 명장으로 평가되며 그의 충성심과 문무 겸비한 능력은 높이 평가되지만 과도한 북벌과 정치적 한계로 인한 비판도 함께 받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202

[강유 출생]

삼국 시대 촉한의 무장 강유가 태어났다. 자는 백약으로 옹주 천수군 기현 사람이다.

강유는 202년에 태어났다. 그의 자는 백약이며, 옹주 천수군 기현 출신이다. 훗날 촉한의 무장으로 활약하게 된다.

220

[위나라에서 강유의 초기 경력]

강유의 아버지 강경이 강족으로부터 태수를 지키다 전사했다. 강유는 위나라에서 군의 상계연, 주의 종사, 중랑 등을 지내며 천수군의 군무에 참여했다.

강유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 강경은 군의 공조로 일하다가 강족으로부터 태수를 지키려다 전사했다. 강유는 정현의 학문을 즐겼으며 입신양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군에서 상계연으로 근무했고, 이후 주의 종사로도 일했다. 아버지의 순직 덕분에 중랑으로 임명되어 천수군의 군무에 참여하게 되었다.

228

[제갈량 북벌 중 촉한으로 귀순]

제갈량이 기산으로 진출하는 제1차 북벌 때, 위나라 천수군 기현에 있던 강유는 촉한군에 합류하려 했으나 천수태수 마준에게 의심받았다. 결국 제갈량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촉한으로 귀순하게 된다.

228년 (건흥 6년), 촉나라 승상 제갈량이 기산으로 제1차 북벌을 감행했다. 이때 위나라 옹주자사 곽회는 천수군을 순찰 중이었고, 천수태수 마준은 강유 등을 대동하여 곽회를 수행했다. 곽회가 상규현으로 급히 향하고, 마준도 여러 현의 호응 소식에 곽회를 따랐다. 강유는 기현 복귀를 간언했으나 마준에게 의심받았다. 결국 강유는 어찌하지 못하고 태수와 떨어져 가족이 있는 기현으로 돌아왔다. 기현 사람들의 바람에 따라 제갈량 진영으로 갔고, 제갈량은 서현의 1,000여 가와 강유 등을 이끌고 퇴각했다. 이후 제갈량은 강유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촉한으로 귀순시켰다.

229

[촉한에서의 첫 관직 임명]

제갈량의 촉망을 받아 촉한에서 창조연, 봉의장군에 임명되고 당양정후에 봉해지는 등 빠르게 주요 직책을 맡으며 중용되었다.

촉한에 귀순한 강유는 제갈량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창조연에 임명되었고, 봉의장군을 겸임하며 당양정후로 봉해지는 등 촉한 내부에서 빠르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230

[정서장군 및 중감군 임명]

촉한에서 정서장군에 임명되고 중감군 혹은 호군을 맡아 중요한 군사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230년, 강유는 촉한에서 정서장군에 임명되었고, 중감군 또는 호군 중 하나의 직책을 맡아 군무에 더욱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는 그가 촉한 내에서 더욱 중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34

[보한장군 및 평양후 진봉]

보한장군으로 승진하고 우감군을 담당했으며, 평양후로 진봉되어 촉한 내에서의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

234년, 강유는 보한장군으로 승진하고 우감군을 담당했다. 또한 평양후로 진봉되면서 촉한에서의 지위와 권한이 한층 더 높아졌다.

238

[한중군 주둔 및 장완 사마가 됨]

대장군 장완을 따라 한중군에 주둔했으며, 이후 장완이 대사마가 되자 그의 사마가 되어 소규모 분견대로 위나라를 여러 차례 침범했다.

238년 (연희 원년), 강유는 대장군 장완을 따라 한중군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듬해 239년 장완이 대사마가 되자, 강유는 그의 사마가 되어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수차례 위나라를 침범하며 국경 분쟁에 참여했다.

243

[진서대장군 승진 및 양주자사 겸임]

진서대장군으로 승진하고 양주자사를 겸하게 되어 촉한의 서쪽 국경 방어와 양주 지역 문제에 대한 책임이 커졌다. 장완과 상용 기습 작전을 기획했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243년, 강유는 진서대장군으로 승진하였고, 양주자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이로써 촉한 서부 지역의 군사 및 행정 책임자로 중용되었다. 장완과 함께 위나라 상용 기습 작전을 계획했으나, 장완의 병세 악화로 인해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다.

244

[낙곡 대전에서 위나라 군대 격파]

낙곡 대전에서 비의와 함께 중앙군을 이끌고 깊숙이 몰아쳐 위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44년 낙곡 대전에서, 왕평이 위나라 군대를 상대로 시간을 버는 동안 강유는 비의와 함께 중앙군을 이끌고 적진 깊숙이 진격하여 위나라 군대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는 촉한의 중요한 승리 중 하나이다.

246

[농서 진격 및 곽회, 하후패 격파]

장완 사후, 비의에게 권한이 넘어간 시기에 강유는 농서로 진격하여 위나라 장수 곽회와 하후패를 상대로 승리하고 돌아왔다.

246년 11월, 대장군 장완이 병사한 후 비의가 권한을 이어받았을 때, 강유는 농서 지역으로 진격하여 위나라의 곽회와 하후패 군을 격파하고 돌아왔다. 이는 강유가 북벌에 대한 의지를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247

[위장군 승진, 녹상서사 및 강족 반란 지원]

위장군으로 승진하고 대장군 비의와 함께 녹상서사에 올랐다. 문산군의 반항하는 이민족들을 토벌했으며, 농서, 남안 등지의 강족 반란을 지원했으나 곽회의 대응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요화를 구원하러 후퇴했다.

247년, 강유는 위장군으로 승진하였고, 대장군 비의와 함께 녹상서사에 올랐다. 그는 문산군 평강현의 반항하는 이민족들을 토벌했다. 한편, 농서군, 남안군, 금성군, 서평군 일대의 강족 아하소과, 벌동, 아차새 등이 위나라에 반기를 들고 촉나라에 연락을 취했다. 양주의 유명 호인 치무대도 이에 가담했다. 강유는 토촉호군 하후패가 진을 치고 있던 위시로 진격했으나, 곽회가 풍중을 거쳐 내려오는 바람에 후퇴해야 했다. 곽회는 다음 해까지 대적하는 강족들을 소탕했다. 강유는 패주한 치무대를 강천으로 영접하고, 음평태수 요화는 성중산에 요새를 쌓아 패배한 강족들을 거두었다. 곽회는 부대를 나누어 하후패는 답중에서 강유를 저지하고, 자신은 요화를 공격했다. 강유는 위군의 예상치 못한 기동에 더 서쪽으로 가지 못하고 요화를 구원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

249

[국산 성 축조 및 구원 실패]

국산에 성 두 개를 축조하고 구안과 이흠을 주둔시켰으나 위나라 진태의 보급로 차단 작전에 고립되어 구원에 실패했다. 철수 중 등애와 백수에서 대치했으나, 등애가 조성을 선점하여 허사가 되었다.

249년, 강유는 국산에 두 개의 성을 쌓고 구안과 이흠을 주둔시켰다. 그러나 위나라의 신임 옹주자사 진태는 이들의 보급로를 끊어 고사시키려 했다. 구안 등은 어렵게 버텼고, 강유가 이들을 구하기 위해 우두산에서 나왔으나 곽회가 조수로 이동하며 퇴로를 끊으려 했다. 강유는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철수해야 했고, 고립된 구안 등은 결국 항복했다. 강유는 철수하다가 다시 방향을 돌려 조성을 습격하려 했지만, 남안태수 등애가 이미 그곳에 주둔하고 있어 실패로 돌아갔다.

250

[서평군 출진 실패]

서평군으로 다시 출진했지만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250년, 강유는 다시 서평군으로 출진했으나, 이번에도 위나라 군대를 이기지 못하고 철수했다.

253

[비의 피살 및 남안 포위 실패]

정월, 북벌을 제지하던 비의가 피살되자, 강유는 수만 명을 동원하여 남안을 포위했으나 식량 부족으로 철군해야 했다.

253년 정월, 촉한의 국정을 총괄하며 강유의 북벌을 제지했던 비의가 피살당했다. 비의의 사망으로 강유는 더 이상 제약을 받지 않고 본격적으로 북벌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해 여름, 강유는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석영과 동정을 지나 남안을 포위했으나, 위나라 진태가 낙문으로 와 대치하는 가운데 식량이 바닥나 결국 철군했다.

254

[독중외군사 추가 및 농서 대승]

독중외군사를 추가하여 권한을 강화했다. 이간의 투항을 기회로 농서군을 휩쓸고 양무현에서 서질을 무찌르며 하관, 적도, 임조 세 현의 주민들을 데려오는 큰 전과를 올렸다.

254년, 강유는 독중외군사 직책을 추가로 맡으며 군사적 권한을 더욱 강화했다. 농서군 적도현장 이간이 성을 들어 촉한에 투항하는 기회를 포착하여, 강유는 농서군 일대를 휩쓸고 다녔다. 양무현에서는 위나라의 서질을 무찌르고, 하관, 적도, 임조 세 현의 주민들을 촉한으로 이주시켰다. 이로써 강유는 한때 옹주 전체를 점령할 뻔할 정도의 큰 전과를 거두었다.

255

[적도 대전에서 왕경 대파]

하후패 등과 적도로 진격, 왕경을 조수 서쪽에서 대파하여 수만 명을 죽거나 흩어지게 했다. 그러나 적도를 포위한 채 장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세를 지속하다가 진태와 등애의 구원군에 막혀 퇴각했다.

255년, 강유는 이전에 귀순한 거기장군 하후패 등과 함께 다시 적도로 진격했다. 국가의 규모와 백성의 어려움을 들어 무력 남용을 반대하는 장익도 대동했다. 강유는 기산, 석영, 금성 세 군데로 진군하는 거짓 정보를 흘린 후 부한현을 거쳐 적도로 신속히 이동했다. 위나라 진서장군 진태는 강유의 계략에 속지 않고 옹주자사 왕경에게 적도로 나아가 자신을 기다리라 명했다. 강유는 시간을 주지 않고 조수 서쪽에서 왕경을 대파하여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왕경군 만여 명만을 적도성으로 물러나게 했다. 이에 등애마저 옹주 포기를 언급했으나 진태는 거부했다. 장익은 지금의 공적이 훼손될 수 있다며 작전 지속을 만류했지만, 강유는 이를 무시하고 적도를 에워쌌다. 진태는 빠르게 움직여 밤중에 적도 동남쪽 산에 당도했고, 강유는 진태 군을 습격했으나 이미 고지를 점령한 진태에게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위나라 양주 군대까지 적도로 오고 있었고, 진태와 왕경이 강유의 퇴로를 막으려 하자 강유군은 즉시 퇴각하여 종제(鍾提)로 군을 물렸다.

256

[대장군 승진 및 단곡 대전 대패]

적도 전투의 공으로 대장군에 올랐다. 그러나 기산으로 출정했다가 등애의 방비에 막혀 동정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돌파가 어려웠다. 호제와의 합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단곡에서 등애 군에 대패하고 많은 병력을 잃었다. 이 패배로 후장군으로 관직을 스스로 깎았다.

256년, 적도 전투의 공적으로 강유는 대장군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기산으로 출정했으나 안서장군 등애가 미리 방비를 하고 있었다. 강유는 방향을 동정으로 틀어 남안으로 질주했으나 등애도 무성산에서 맞섰기에 돌파가 어려웠다. 진서대장군 호제와 동쪽 상규에서 합치기로 약속하고 밤중에 위수를 건너 재빠르게 기동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호제는 약속 날짜에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결국 상규 앞 단곡에서 등애 군과 회전을 벌여 대패했다. 장수 십 수 명이 사망하고 천여급이 참수되는 등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 패배로 인해 여론은 강유를 원망했고 농서의 협력 세력들도 동요했다. 강유는 스스로 후장군으로 관직을 깎았지만, 대장군의 업무는 그대로 보았다.

257

[제갈탄의 난 이용 낙곡 출진]

위나라 제갈탄의 회남 반란으로 관중 병력이 동쪽으로 빠지자, 수만 명을 이끌고 진천 지방을 목표로 낙곡을 나서 침령에 다다랐다. 사마망과 등애의 견고한 방어에 막혀 별다른 성과 없이 망수에서 대치만 계속했다.

257년 (연희 20년), 위나라의 정동대장군 제갈탄이 회남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관중의 병력이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기회를 포착한 강유는 진천 지방을 목표로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낙곡을 나서 침령에 도달했다. 위나라의 장성에는 곡물 비축량이 많았지만 수비병이 적어 초기에는 위협적이었으나, 진태의 후임 정서장군 사마망이 막아섰고, 등애도 농서로부터 지원을 왔다. 강유는 망수에 군영을 설치하고 연거푸 싸움을 걸었으나 사마망과 등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해, 연이은 출병으로 촉한 백성들이 초췌해지자 초주가 북벌을 쉬고 때를 기다리자는 내용의 <구국론>을 지었다.

258

[제갈탄 패망 소식에 환군 및 대장군 직위 회복]

제갈탄이 패망했다는 소식에 성도로 환군했다. 내치를 총괄하던 진지가 죽고 환관 황호가 권력을 잡는 시점에 대장군 직위를 회복했으나 4년간 북벌을 쉬었다.

258년 (경요 원년), 제갈탄이 패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강유는 성도로 군대를 돌렸다. 이 해, 내치를 총괄하던 진지가 사망하고 환관 황호가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강유는 대장군 직위를 회복했지만, 262년까지 4년간 북벌을 중단하고 별다른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260

[한중 방어 전략 개편]

선주 유비 때부터의 한중 방어 계획을 개편하여, 적을 평지로 유인하고 쓰촨 분지 관문을 강화한 후 유격전과 퇴각 시 총공격으로 섬멸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이로 인해 한중의 군사 및 곡식은 주요 성으로 집중되었다.

강유는 선주 유비 때부터 유지되던 촉나라의 방어 계획을 개편할 것을 건의했다. 기존의 적을 경계선에서 막는 방식으로는 큰 이익을 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적의 공격 징후가 포착되면 한중 일대의 군사와 곡식을 한성(漢城)과 낙성(樂城)으로 집중시켜 적을 평지로 들이고, 쓰촨 분지로 향하는 관문들을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유사시에는 유격병을 투입하여 적의 빈틈을 노리고, 적들이 총퇴각할 때 출성하여 일거에 섬멸하는 전략이었다. 그리하여 독한중 호제는 자동군 한수현으로 이전하고, 감군 왕함은 낙성에, 호군 장빈은 한성에 머물렀으며, 서안, 건위, 무위 등에도 수비 거점을 마련했다.

262

[황호 처형 건의 실패 및 답중으로 후퇴]

황호의 방자함에 유선에게 처형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했다. 유선과 황호의 끈끈한 관계를 확인한 후 성도를 빠져나와 답중에서 맥곡 농사를 짓겠다는 구실로 머물렀다. 음력 10월, 조양을 공격했으나 등애에게 격파당하고 답중으로 후퇴했다.

262년, 강유는 환관 황호의 방자함을 싫어하여 유선에게 황호의 처형을 건의했다. 그러나 유선은 “황호는 보잘것없는 신하일 뿐이오. 지난날 동윤이 치를 떨던 것도 내 안타까웠었소. 그에겐 신경쓸 가치가 없소.”라고 답하며 거절했다. 유선과 황호의 관계가 생각보다 끈끈함을 깨달은 강유는 아차 싶었다. 황호가 유선의 칙명을 받고 사과하러 오자, 강유는 답중에서 맥곡 농사를 짓겠다는 구실로 성도를 빠져나왔다. 동년 음력 10월, 강유는 4년 만에 조양을 공격했으나 후화에서 정서장군 등애에게 격파당하고 답중으로 후퇴했다. 단곡 전투 이후 강유는 공적을 세우지 못했고, 황호는 강유를 내리고 염우를 올리려 했기에 강유는 일이 생길까 우려하여 성도로 귀환하지 않고 답중에 그대로 머물렀다.

263

[위나라 침공 임박 보고 및 유선의 불신]

위나라 종회의 촉 침공 계획을 보고하며 장익과 요화의 선제 배치를 건의했다. 그러나 황호가 무당 점괘를 내세워 유선이 그 표문을 공론에 부치지 않아 대비가 무산되었다.

263년, 강유는 위나라 진서장군 종회가 촉나라를 도모하고자 관중군을 훈련한다는 보고를 받고, 좌거기장군 장익과 우거기장군 요화를 각각 양안관구와 음평교두에 미리 배치해야 한다고 표를 올렸다. 그러나 황호가 무당을 불러 점을 치니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점괘가 나왔고, 유선은 그 표문을 공론에 부치지 않아 촉한의 대비는 무산되었다.

[검각 항전 및 유선의 항복]

요화, 장익, 동궐과 합류하여 검각에서 종회에 항전했다. 그러나 등애가 무인지경의 산과 계곡을 우회 침공하여 면죽현의 제갈첨이 패사하자, 유선이 항복 조서를 내려 과와 갑옷을 버리고 종회에게 출두했다.

263년 겨울, 강유는 요화, 장익, 동궐과 합류하여 검각에서 종회에 맞서 항전했다. 강유는 종회의 회유에 답하지 않고 수비에만 전념하여 종회는 검각을 돌파하지 못하고 길어진 보급선에 철병을 고려했다. 그러나 등애가 측면의 무인지경인 산과 계곡 700여 리를 개척해 우회 침공했다. 강유(江油)의 수비대장 마막은 항복했고, 광한군 면죽현을 사수하던 위장군 제갈첨은 등애에게 패사했다. 검각에서는 유선이 성도를 고수한다는 둥, 오나라로 망명한다는 둥, 건녕군으로 피난간다는 둥 소문만 무성했다. 진위를 파악하고자 광한현과 처현 방면으로 내려갔다. 얼마 안 가 유선의 항복 조서가 내려와 강유와 장졸들은 과(戈)와 갑옷을 내던지고 종회가 있는 부현으로 출두했다. 장졸들은 분노하여 칼로 돌을 찍었다. 종회가 왜 늦었냐는 물음에 강유는 안색을 바르게 하고 눈물을 흘리며 오늘 보는 것만으로도 빠르다고 답했다. 종회는 강유를 비범하게 여겼다.

[위나라의 대규모 촉한 침공]

종회가 낙곡으로, 등애가 답중으로 대거 남하하여 촉한을 침공했다. 요화는 답중으로, 장익과 동궐은 양안관구로 파병되었으나, 이미 늦어 요화는 음평으로 패주했다.

263년 가을, 종회가 낙곡으로, 등애가 답중으로 대거 남하하며 촉한 침공이 시작되었다. 뒤늦게 조정에서는 요화를 답중으로, 장익과 보국대장군 동궐을 양안관구로 파병했다. 옹주자사 제갈서마저 건위로 남진했으므로 요화는 강유의 주요 후퇴로인 음평에서 대비했다. 강유는 음평으로 패주했다. 관구는 장서의 항복으로 부첨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호열에게 함락되었고, 장익과 동궐은 이제야 한수현에 닿았다.

264

[촉한 재건 기도 실패 및 전사]

종회에게 등애를 참소하여 체포시키고, 종회의 반란을 이용해 촉한 재건을 꾀했다. 그러나 종회의 계획이 발각되어 위나라 장수들의 습격을 받았다. 강유는 종회에게 "오로지 적을 격퇴할 뿐"이라 말하고 싸웠으나 결국 전사했고, 종회도 살해당했다. 강유의 처자식도 주살되었다.

264년 정월, 종회는 강유를 후대하며 그의 딴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강유는 종회에게 등애를 참소하여 등애가 체포되어 중앙으로 압송되게 했다. 사마소가 촉 지방의 정세가 심상찮음을 감지하고 병사 10만을 장안으로 보내 대비하자, 종회는 압박을 느끼고 서둘러 익주목을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종회는 위나라 장수들을 잡아들여 처형하려 했다. 강유는 종회가 위나라 장수들을 죽이면 자신이 종회를 주멸하고 위나라 병사들을 묻은 후 유선을 복위시킬 속셈이었다. 그는 유선에게 ‘며칠만 치욕을 견디시면 신이 위태로운 사직을 다시 평안케 하고, 어두워진 일월을 다시 환하게 하겠습니다.’라는 밀서를 전했다. 종회는 강유에게 50,000명을 주어 선봉으로 삼으려 했으나, 구건이 음식물 전달을 핑계로 잡혀있던 호열을 만나 종회의 계획이 담긴 밀서를 그의 아들 호연에게 몰래 전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위나라 장수들과 병졸들은 분노하여 성도로 몰려들었고, 무기를 배분하던 중인 종회와 강유를 습격했다. 강유는 두려워하는 종회에게 "오로지 적을 격퇴할 뿐"이라고 말하고 손수 위나라 군사 대여섯 명을 죽였으나 결국 전사했고, 종회도 살해당했다. 이때 강유의 나이 63세였으며, 그 시체는 참혹하게 찢겨 훼손되었고 처자들도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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