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나 왕조
연표
819
[사만 왕조의 탄생과 유목민 방어의 숙명]
이란계 사산 제국의 후예를 자처한 사만 왕조가 건국되어 중앙아시아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이들은 부하라를 거점으로 북방 유목민의 침입을 막는 조상 대대의 의무를 물려받았습니다.
893
[사만 왕조의 탈라스 정복: 튀르크 노예들의 유입]
사만 왕조의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가 북쪽으로 군사 원정을 감행하여 카를루크 튀르크족의 근거지인 탈라스를 정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전리품과 함께 수많은 튀르크계 유목민 노예들이 이슬람 세계로 공급되었습니다.
945
[사만 왕조, 맘루크 군부에 실권 장악당하다]
사만 왕조 내 맘루크 군부가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며 왕은 명목상의 권력만 가진 허수아비로 전락했습니다.
이는 이란의 부와이흐 왕조가 아바스 칼리파를 괴뢰로 만든 것과 유사했습니다.
950
[사만 왕조의 위기: 맘루크 병사들에 대한 의존]
경제적 침체와 내부 귀족들의 불만에 시달리던 사만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카를루크 연맹체의 위협에 취약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무력이 뛰어난 튀르크계 노예 병사인 맘루크들에게 점차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962
[알프 티긴의 가즈니 정복: 왕조 기반의 씨앗]
사부크티긴의 주인인 알프 티긴이 가즈니를 정복하며 훗날 가즈나 왕조의 근거지가 될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963
[가즈나 왕조,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다]
알프 티긴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아부 이샤크 이브라힘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 해는 가즈나 왕조의 공식적인 존속 시작점으로 기록됩니다.
966
[가즈니 맘루크들의 독립적인 행보 시작]
아부 이샤크 이브라힘이 사망하자, 가즈니의 맘루크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자치권을 얻었으며,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출하여 도시를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973
[사부크티긴, 차르크 전투에서 승리하며 세력 확장]
사부크티긴이 라위크 왕조와 힌두 샤히 연합군을 상대로 차르크 전투에서 승리하며, 그의 군사적 역량을 입증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아부 알리 라위크는 전사했습니다.
977
[사부크티긴, 가즈나 왕조를 건국하며 통치 시작]
인기 없는 뵈리 티긴에 지친 가즈니 시민들의 요청에 따라 아부 알리가 카불 힌두 샤히의 지원을 받아 가즈니로 진격하자, 사부크티긴은 이를 격퇴하고 전임자를 해임, 가즈니 총독이 되며 가즈나 왕조의 실질적인 개창자가 되었습니다.
978
[사부크티긴, 군사적 확장으로 권위 확립]
사부크티긴은 가즈니 맘루크 군대의 소수성을 극복하기 위해 군사적 확장을 시작했습니다.
영지 남쪽 룩카즈와 보스트를 공격하고 칸다하르 일대를 점령하며 발루치스탄 북동부와 힌두 샤히와의 국경 지대로 세력을 넓혔습니다.
988
[마흐무드의 통치 시작과 인도 원정의 서막]
사부크티긴이 힌두 샤히의 자야팔라를 격파한 제1차 라그만 전투가 있었고, 이 해에 그의 아들 마흐무드가 통치권을 승계하며 가즈나 왕조의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마흐무드는 주변국 정벌에 착수했습니다.
991
[가즈나 왕조, 칼리파와의 전략적 동맹 체결]
사부크티긴이 힌두 샤히와 라지푸트족을 격파했습니다.
한편, 아바스 칼리파 알 타이의 폐위 후 알 카디르가 즉위했으나 동부 이슬람 왕조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흐무드는 알 카디르에게 복종을 선언하며 칼리파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마흐무드가 알 카디르에게 복종을 선언하자, 칼리파는 그에게 '술탄'이라는 칭호를 하사했습니다. 이는 칼리파 가문 이외의 인물에게 수여된 세계 최초의 술탄 칭호였습니다. 이 합의는 마흐무드에게 합법적인 통치 명분과 정복 영토에 대한 합리적인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992
[사만 왕조, 카라한 칸국에 의해 수도 상실]
사만 왕조의 수도 부하라가 카라한 칸국에게 점령되면서 사만 왕조는 사실상 멸망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마흐무드가 사만 왕조 공략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994
[사부크티긴과 마흐무드, 사만 왕조를 구원하다]
사만 왕조의 내분 발생 시 누흐 2세의 요청으로 사부크티긴과 아들 마흐무드가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이 공로로 사부크티긴은 '신앙의 구원자', 마흐무드는 '국가의 오른팔' 칭호와 함께 호라산 군 총사령관직을 받았습니다.
997
[사부크티긴의 유언과 형제간의 권력 다툼]
가즈나 왕조의 개창자 사부크티긴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이 유언에 따라 영지를 분할했습니다.
그러나 경험 많은 마흐무드 대신 이스마일이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으며 형제간의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998
[마흐무드, 왕위 쟁탈전 승리 후 가즈나 제국의 술탄으로 등극]
마흐무드는 권력 분할을 거부하고 자신을 호라산 총독에서 해임시킨 동생 이스마일을 가즈니 인근에서 격파하고 구즈간의 탑에 유폐시켰습니다.
이로써 마흐무드는 가즈나 왕조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999
[사만 왕조의 완전한 멸망과 가즈나-카라한의 영토 분할]
카라한 칸국이 재차 남진하면서 사만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마흐무드는 옥수스 강을 경계로 카라한 칸국과 사만 왕조의 영토를 분할 점령하여 가즈나 왕조는 호라산을 차지했습니다.
1001
[마흐무드, 인도 원정의 시작을 알리다: 페샤와르 전투 승리]
마흐무드가 힌두 샤히의 자야팔라를 상대로 페샤와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자야팔라 왕을 포로로 사로잡았습니다.
이 승리를 시작으로 1027년까지 약탈을 목적으로 한 대규모 인도 원정이 시작되었습니다.
1002
[마흐무드, 사파르 토후국 멸망시키고 이란 동부 편입]
마흐무드는 시스탄을 재차 침공하여 사파르 토후국을 멸망시키고 이란 동부 지역을 제국의 영토에 편입했습니다.
이는 제국의 서부 국경을 안정화시키는 중요한 군사적 성과였습니다.
1004
[마흐무드, 바티아 왕국 점령]
마흐무드가 바티아 왕국을 공격하여 점령했습니다.
바티아의 왕 비지 라이는 영웅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자살했습니다.
1006
[마흐무드, 인더스 강변 전투 승리 및 물탄 점령]
마흐무드가 힌두 샤히와의 인더스 강변 전투에서 승리하고, 물탄 토후국을 점령했습니다.
물탄의 파테흐 다우드는 마흐무드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항복했습니다.
1007
[마흐무드, 물탄 전투에서 힌두 샤히 격파]
마흐무드가 힌두 샤히의 수크하팔라를 상대로 물탄 전투에서 승리하며 수크하팔라를 포로로 사로잡았습니다.
1009
[마흐무드, 차흐 전투 승리와 펀자브, 라자스탄 정복]
마흐무드가 힌두 샤히와의 차흐 전투에서 승리하고 펀자브 일대를 정복했습니다.
또한 나라얀푸르의 왕과 힌두 샤히를 격파하며 라자스탄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1010
1012
[마흐무드, 데라와 타네사르 전투에서 대승]
마흐무드가 데라 전투에서 승리하며 타네사르 인근까지 진군했습니다.
타네사르 전투에서는 토마라 왕조를 격파하고 도시를 약탈,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고 20만 명을 포로로 사로잡았습니다.
1016
[마흐무드, 난다나 요새 점령과 카슈미르 진격]
마흐무드가 힌두 샤히의 난다나 요새를 점령하고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했습니다.
이후 제1차 카슈미르 침공을 통해 카슈미르 계곡을 휩쓸며 트릴로찬팔라에게 재차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했습니다.
1018
[마흐무드, 북인도 도시들을 휩쓸며 파괴와 약탈 자행]
마흐무드가 불란드샤르, 마하반, 마투라, 카나우지, 칸푸르, 아시 요새 등 북인도의 수많은 도시와 요새를 공격하여 점령했습니다.
특히 마투라에서는 5만 명 학살, 1천 개 사원 파괴 등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마투라 공격에서 마흐무드는 약 50,000명의 인도인들을 학살하고, 1,000개 가량의 힌두 사원을 파괴하는 잔혹한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이는 그의 인도 원정의 잔혹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카나우지는 가즈나 왕조의 봉신으로 전락했습니다.
1019
1021
[마흐무드, 인도 원정 지속과 로흐콧에서의 좌절]
마흐무드가 라히브 강 전투에서 힌두 샤히와 라지푸트족을 격파하고 괄리오르 요새를 점령하여 카차파가타 왕조를 봉신으로 만들었습니다.
칼린자르에서는 평화 조약을 맺어 귀중한 보물을 얻었지만, 로흐콧 공방전에서는 로하라 왕조에게 패배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습니다.
1026
[마흐무드, 솜나트 대사원을 파괴하고 5만 학살]
마흐무드의 가장 유명한 원정 중 하나인 솜나트 원정에서, 그는 힌두 라지푸트족을 격파하고 솜나트 사원을 약탈했습니다.
이 한 번의 원정에서만 최소 5만 명의 인도인이 사망하고 사원 및 시가지가 모조리 철거되는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1027
[마흐무드의 인도 원정 종료와 대제국의 완성]
마흐무드가 자트족과의 인더스 강변 전투에서 승리하며 약 26년간 이어져 온 인도 원정을 마무리했습니다.
그의 치세 말기, 가즈나 왕조는 이란의 레이부터 사마르칸트, 카스피해에서 야무나 강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점유한 대제국으로 성장하며 황금기를 맞이했습니다.
마흐무드의 공격은 인도 아대륙 북부를 가로질러 갠지스 강 유역까지 도달했지만, 그의 목적은 영구적인 영토 정복이 아닌 부유한 힌두 국가들을 약탈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펀자브와 신드 일부만이 가즈나 왕조의 통치권 하에 들어왔고,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토착 힌두계 왕조가 지배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치세가 끝날 무렵, 가즈나 왕조는 이란의 레이에서부터 북동쪽의 사마르칸트, 그리고 카스피해에서 야무나 강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점유한 대제국이 되었습니다. 어느 누가 보나 마흐무드의 통치 시기는 왕조의 황금기이자 절정기였습니다.
1030
[마흐무드 사망과 왕위 계승 분쟁의 시작]
가즈나 왕조의 황금기를 이끈 마흐무드가 사망하고 온화한 성정의 아들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지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형 마수드 1세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1040
[단다나칸 전투의 대패: 가즈나 왕조 쇠퇴의 서곡]
마수드 1세 통치 하의 가즈나 왕조는 단다나칸 전투에서 셀주크 군대에게 처참히 패배하며 호라산을 비롯한 서부 지역 영토를 상실했습니다.
이 패배는 가즈나 왕조 쇠퇴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041
[패배의 대가: 마수드 1세의 비극적 최후와 왕위 혼란]
단다나칸 전투 패배의 책임을 군인들에게 돌린 마수드 1세는 군부의 반란에 직면했고, 복위한 동생 무함마드에게 처형당했습니다.
그러나 마수드의 아들 마우두드가 군대를 이끌고 거병하여 무함마드를 처형하고 술탄으로 즉위하는 등 혼란이 이어졌습니다.
1058
[가즈니의 이브라힘, 왕조의 일시적인 부흥을 이끌다]
마수드의 아들 이브라힘이 술탄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셀주크 제국과 평화 협정을 맺고 페르시아 지역과의 문화적, 정치적 교류를 재개하여 무너져가던 제국을 공고히 재건하며 일시적인 부흥기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매년 손수 『쿠란』을 필사하여 아바스 칼리파에게 보냈습니다.
1098
1115
[쉬르자드 술탄, 아르슬란에게 살해당하다]
쉬르자드가 동생 아르슬란에게 살해당하며 가즈나 왕조 내에서 또 한 번의 권력 다툼이 발생했습니다.
1116
[아르슬란 샤, 형 쉬르자드의 왕위를 찬탈]
아르슬란 샤가 형 쉬르자드의 왕위를 찬탈한 뒤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셀주크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의 지원을 받은 바흐람 샤에게 패배하게 됩니다.
1117
[바흐람 샤, 셀주크의 지원으로 왕위에 오르다]
셀주크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의 지원을 받은 바흐람 샤가 아르슬란 샤에게 승리하고 술탄으로 즉위했습니다.
1148
[바흐람 샤, 구르 왕조에 첫 패배를 당하다]
바흐람 샤가 구르 왕조 통치자 사이프 앗 딘 수리에게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에 다시 돌아와 복수에 성공했습니다.
1151
[수도 가즈니 함락: '세계를 불태운 자'의 등장]
또 다른 구르 통치자 알라 앗 딘 후세인이 친족의 복수를 명분으로 바흐람 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수도 가즈니를 점령했습니다.
그는 7일 동안 도시를 불태워 '세계를 불태운 자(Jahānsūz)'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이 사건은 가즈나 왕조 멸망의 서곡이 되었습니다.
1163
[가즈나 왕조, 라호르로 천도하며 명맥을 잇다]
수도 가즈니를 구르 왕조에게 넘겨준 가즈나 왕조는 제2의 도시였던 펀자브의 라호르로 천도했습니다.
이는 쇠퇴하는 왕조가 명맥을 이어가기 위한 최후의 발악이었습니다.
1170
[가즈나 왕조의 상징, 가즈니가 구르 왕조에게 최종 함락]
수도 가즈니는 셀주크의 도움으로 잠시 가즈나 왕조의 손에 돌아왔으나, 오구즈 튀르크족에게 빼앗긴 후, 최종적으로 1170년경 구르 왕조에게 완전히 넘어가며 가즈나 왕조는 더 이상 고향을 되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1186
[가즈나 왕조의 최후: 라호르 함락과 223년 역사의 종결]
라호르마저 구르 왕조의 무이즈 앗 딘 무함마드에게 함락당하면서 가즈나 왕조의 223년 역사가 막을 내렸습니다.
마지막 술탄 쿠스라우 말리크는 감금되었다가 처형되며 왕조의 혈통이 끊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