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 포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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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포크스
잉글랜드 가톨릭 신자, 화약 음모 사건 주동자, 역사적 인물 저항의 아이콘

가이 포크스는 잉글랜드 가톨릭 신자이자 1605년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던 '화약 음모 사건'의 주요 주동자입니다. 그는 의회 지하에 화약을 설치했으나 음모가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런던탑에서 고문당한 뒤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영국에서 매년 11월 5일에 기념되는 '가이 포크스의 밤'의 주인공으로 남아있으며, 현대 대중문화에서는 저항의 아이콘으로 상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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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570

[가이 포크스 출생]

가이 포크스는 요크에서 에드워드 포크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벨프레이 성 미카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친할머니는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으나, 어머니의 가족은 완고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가이 포크스는 1570년 4월 23일(율리우스력 4월 13일) 요크의 스톤게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요크 교회 재판소의 사무 변호사였으며, 어머니는 에디스였다. 가이는 잉글랜드에서는 드문 이름이었지만 요크 지방에서는 사용되었다. 4월 26일(율리우스력 4월 16일) 벨프레이 성 미카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1579

[가톨릭 개종]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와 재혼했습니다. 이 영향으로 포크스 역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되었고, 가톨릭 학교에서 미래의 음모 가담자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습니다.

가이가 여덟 살이 되던 1579년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어머니는 수 년 후 스코튼의 가톨릭 신자인 다이오니스 베인브리지와 재혼하였다. 포크스는 아마도 베인브리지 가족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을 것이다. 그는 성 베드로 학교와 같은 가톨릭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나중에 화약 음모 사건을 함께 모의한 존 라이트와 크리스토퍼 라이트 형제와 예수회 수사가 된 오즈월드 테시몬드 등과 동문이었다.

1591

[유럽 참전 및 군사 경력]

포크스는 가족 재산을 처분하고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 스페인 편에서 80년 전쟁에 참전하며 군사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는 스페인 준사관 계급인 알페레즈에 임명되어 칼레 공방전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1591년 10월 포크스는 아버지가 물려준 요크 주 클리프턴의 재산을 처분하였다. 그는 유럽 대륙으로 가서 80년 전쟁에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편에 가담하여 신생 네덜란드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그는 1595년부터 1598년까지 프랑스에 있었으며, 1603년 스페인령 식민지로 재배치되었다. 스페인 준사관 계급인 알페레즈에 임명되어 칼레 공방전에 참전하였다.

1604

[화약 음모 사건 가담]

포크스는 로버트 캐츠비가 이끄는 가톨릭 소모임에 초대되어, 개신교 국왕 제임스 1세를 암살하고 가톨릭 왕을 세우려는 '화약 음모 사건'에 가담했습니다. 그는 의회 지하 석실에 화약을 운반하고 관리하는 핵심 역할을 맡았습니다.

1604년 4월, 윈터는 포크스와 함께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1604년 5월 20일 일요일, 포크스는 로버트 캐츠비가 이끄는 잉글랜드 가톨릭 소모임에 초대되었다. 캐츠비는 개신교 국왕인 제임스 1세를 암살하고 당시 왕위 계승 서열 3위인 그의 딸 엘리자베스 공주를 옹립하려고 하였다. 포크스는 캐츠비의 음모 모임에 필요한 '전쟁 기술'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1604년 6월, 포크스는 존 존슨이란 가명으로 퍼시의 하인 행세를 하며 의회 지하 석실 인근의 집 관리인이 되었고, 화약 운반을 담당했다.

1605

['가이 포크스의 밤' 기원 및 문화적 영향]

체포된 율리우스력 11월 5일은 영국에서 '가이 포크스의 밤'으로 기념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은 불꽃놀이와 허수아비를 태우는 전통으로 이어져 왔으며, 19세기에는 '가이'라는 단어가 남성을 지칭하는 말로 변하기도 했습니다.

1605년 11월 5일(율리우스력), 런던 사람들은 국왕이 암살을 피한 것을 축하하며 화톳불을 피웠다. 의회는 '1605년 11월 5일 기념법'을 제정하여 매년 이 날을 기념토록 했다. 이 법은 1859년까지 유지되었다. 가이 포크스는 13명의 공모자 중 한 명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화약 음모 사건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영국에서 11월 5일은 '가이 포크스의 밤', '불꽃놀이의 밤'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기념일이 되었고, 허수아비를 불태우는 전통이 생겨났다. 19세기 영어에서 '가이'는 낡은 옷을 입은 사람을 뜻했으나, 미국 영어에서는 점차 남성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말이 되었다.

[음모 발각 및 체포]

익명의 투서로 인해 음모가 발각되었고, 의회 개원일인 새벽, 웨스트민스터 궁 지하에서 화약을 지키던 포크스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런던탑에 수감되어 고문을 받았습니다.

음모자들 중 일부는 상원 의원인 가톨릭 귀족의 안위를 염려했고, 10월 26일 제4대 몬티글 남작에게 개원 당일 의회에 위험이 있을 것이라는 익명 투서가 배달되었다. 몬티글 남작은 이를 제임스 1세에게 보고했다. 제임스 1세는 조사를 명했고, 1605년 11월 15일(율리우스력 11월 5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에 웨스트민스터 궁 지하에서 화약을 지키고 있던 가이 포크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런던탑에 수감되어 고문을 받았고, 처음에는 가명으로 일관했으나 결국 공범들의 이름을 자백하게 되었다.

1606

[재판과 처형]

화약 음모 사건의 주모자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고, 포크스를 포함한 공모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아 교수척장분지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는 교수대에 오르던 중 목이 부러져 고통스러운 형벌의 남은 부분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1606년 2월 6일(율리우스력 1월 27일) 8명의 음모자들에 대한 재판이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시작되었다. 포크스를 포함한 공모자들은 외환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교수척장분지형에 처한다는 선고가 내려졌다. 1606년 2월 10일(율리우스력 1월 31일), 포크스와 세 명의 공모자들은 런던탑에서 끌려나와 웨스트민스터의 옛 궁전 터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포크스는 교수대에 오르던 중 목이 부러져 즉사함으로써 나머지 고통을 피할 수 있었다. 그의 시신은 토막 나 왕국의 네 귀퉁이로 보내져 전시되었다.

1841

[대중문화에서의 재해석 시작]

윌리엄 헤리슨 에인스워스의 소설 《가이 포크스; 화약 반역자》가 발표되며 가이 포크스는 대중문화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가공의 인물'로 묘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가 단순한 반역자를 넘어선 상징적 존재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41년 낭만주의 역사 소설가 윌리엄 헤리슨 에인스워스는 《가이 포크스; 화약 반역자》를 발표하여 많은 인기를 모았다. 그는 소설에서 가이 포크스를 공감할 수 있는 밝은 인물로 묘사하였고, 이때부터 대중 문화에서 가이 포크스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공의 인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싸구려 이야기 책이었던 페니 드레드풀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1905년 발간된 《가이 포크스의 어린 시절; 옛 런던의 음모자》에서는 가이 포크스를 '타고난 액션 히어로'로 그렸다.

2005

[저항의 상징이 된 가이 포크스 가면]

만화 《브이 포 벤데타》 시리즈와 영화가 상영되면서, 가이 포크스 가면은 포스트모던 아나키즘의 명확한 표상으로 자리 잡았고 세계적으로 저항의 상징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학자 루이스 컬에 따르면, 가이 포크스는 이제 '근대 정치 문화의 중요한 아이콘'이 되었다. 만화 《브이 포 벤데타》 시리즈의 주인공 V가 쓰는 가이 포크스 가면으로 등장한 이후 포스트모던 아나키즘의 명확한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만화 속에서 V는 영국 국가의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가이 포크스 가면은 영화 《브이 포 벤데타》가 상영되면서 세계로 퍼져나갔으며 대한민국에서도 시위나 집회에 가이 포크스 가면을 사용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2018년 대한항공 경영진의 갑질에 맞선 직원들의 시위에서도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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