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
연표
1899
[가와바타 야스나리 탄생]
오사카부 오사카시 기타구에서 의사인 아버지 에이키치와 어머니 겐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누나는 와카코였습니다.
1899년 6월 14일, 오사카부 오사카시 기타구의 차화정(此花町, 지금의 덴진바시 부근)에서 의사 에이키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겐, 누나는 와카코였습니다.
1901
[아버지 사망 및 이주]
아버지가 사망하자 외가가 있는 오사카부 니시나리군 도요사토무라(지금의 오사카시 히가시요도가와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1901년에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외가가 있던 오사카부 니시나리군 도요사토무라(豊里村, 지금의 오사카시 히가시요도가와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1902
[어머니 사망 및 조부모와 생활]
어머니마저 사망하여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미시마 군 도요카와무라(지금의 이바라키시)로 이사했습니다.
1902년 이듬해 어머니마저 사망했고, 할아버지 미하치로, 할머니 가네와 함께 미시마 군 도요카와무라(豊川村, 지금의 이바라키시)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1906
[초등학교 입학 및 할머니 사망]
도요카와 심상고등소학교에 입학했으며, 동급생으로 사사가와 료이치가 있었습니다. 그해 9월 할머니가 사망했습니다.
1906년 도요카와 심상고등소학교(豊川尋常高等小学校, 지금의 이바라키 시립 도요카와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때 동급생으로는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가 있었으며, 할아버지와는 함께 바둑을 두는 등 사이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할머니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1909
1909년에는 따로 살고 있던 누나마저 사망하는 비극이 이어졌습니다.
1912
1912년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중학교(지금의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중학교 시절 하급생으로 오오야 소이치(大宅壮一)가 있었습니다.
1914
중학교 2년 뒤 할아버지까지 사망하면서 모든 가족을 잃게 되자, 도요사토무라의 구로다(黒田)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중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그곳에서 생활했습니다.
1916
[작가 지망 및 초기 투고]
중학교 2학년 때 작가에 뜻을 두기 시작하여, 『교한신보』에 단편을, 『분쇼세카이』에 단가를 투고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작가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중학교 2년 때의 일로, 1916년부터 『교한신보(京阪新報)』에 단편을, 『분쇼세카이(文章世界)』에 단가를 투고하게 되었습니다.
1917
[도쿄 상경 및 이즈 여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상경하여 제1고등학교 영문과에 입학했습니다. 이듬해 가을 이즈 여행에서 떠돌이 예인과 교유한 경험은 훗날 『이즈의 무희』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1917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도쿄로 상경하여 아사쿠사 구라마에(蔵前)의 사촌 집에서 얹혀살면서 예비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제1고등학교의 1부 을(乙) 영문과에 들어갔습니다. 이듬해 가을에 이즈를 여행하다가 떠돌이 예인과 만나 교유한 경험은 훗날 『이즈의 무희』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그 뒤 10년 동안 유가시마(湯ヶ島) 온천 여관을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1920
1920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했습니다.
1921
[국문과 전과 및 『신사조』 기획]
동경제국대학 국문과로 전과하고, 곤 도코, 스즈키 히코지로 등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제6차) 발행을 기획했습니다.
1920년 입학한 동경제국대학에서 이듬해 국문과로 전과했습니다. 대학 동기로는 기타무라 기하치, 혼다 아키라, 스즈키 히코지로 등이 있었습니다. 입학한 해에 곤 도코, 스즈키 히코지로 등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新思潮)』(제6차) 발행을 기획했습니다.
1923
[『분게이슌주』 동인으로 문인 데뷔]
『신사조』에 발표한 작품 「초혼제일경」이 기쿠치 간에게 인정받아 『분게이슌주』 동인이 되어 문인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국문과로 전과한 이듬해 동인지 『신사조』(제6차) 발행을 실행에 옮겼고, 그곳에 발표한 작품 「초혼제일경(招魂祭一景)」이 기쿠치 간에게 인정받아 『분게이슌주(文芸春秋)』(1923년 창간)의 동인이 되어 문인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1924
[『분게이지다이』 창간 및 「이즈의 무희」 발표]
대학을 졸업하고 요코미쓰 리이치 등과 동인지 『분게이지다이』를 창간하며 「이즈의 무희」를 발표하여 문단에 정식으로 등장했습니다.
1924년 대학을 졸업하고(졸업 논문은 「일본소설사 소론日本小説史小論」) 요코미쓰 리이치, 가타오카 갓페이, 나카가와 요이치, 사사키 모사쿠, 곤 도코 등 14명과 함께 동인지 『분게이지다이(文芸時代)』를 창간했습니다. 이 지면에 「이즈의 무희」를 발표하며 문단에 정식으로 등장했습니다.
1937
1937년 「설국」이 일본의 문예간담회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습니다. 이 작품은 이후 가와바타의 미의식이 절정을 이루는 작품으로 평가받았고, 노벨문학상 수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44
[기쿠치 간 상 수상 및 미시마 유키오 발굴]
「고향」, 「석일」 등의 작품으로 기쿠치 간 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무렵 미시마 유키오가 가져온 단편 「담배」를 호평하며 그를 문단에 데뷔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44년에 「고향(원제: 故園)」, 「석일(원제: 夕日)」 등의 작품으로 기쿠치 간 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무렵 미시마 유키오가 가져온 단편 「담배(원제: 煙草)」를 호평하였는데, 미시마에게 있어 가와바타는 그를 문단에 데뷔시킨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1945
[가미카제 특공대 취재]
일본 해군보도반 반원(소좌 대우) 자격으로 가미카제를 취재했으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 「생명의 나무」를 집필했습니다.
1945년 4월에 일본 해군보도반 반원(소좌 대우) 자격으로 가지마(鹿島)까지 따라가 가미카제를 취재했습니다. 이때 함께 갔던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는 그 자신의 작가관까지 바뀔 정도의 충격을 받았고, 가와바타는 이때의 일을 토대로 「생명의 나무(원제: 生命の樹)」를 집필하였습니다.
1948
「천 마리의 종이학」, 「산소리」 등을 단속적으로 발표하면서, 패전 뒤인 1948년에는 일본펜클럽 제4대 회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1952
1952년에 「천 마리의 종이학」으로 예술원상(芸術院賞)을 수상했습니다.
1954
1954년에 「산소리」로 제7회 노마 문예상(野間文芸賞)을 수상했습니다.
1957
1957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대회에서 주최국 일본측의 회장으로서 활약했습니다.
1958
[기쿠치 간 상 재수상 및 국제펜클럽 부회장 취임]
1957년 국제펜클럽 대회 활약에 대한 노고를 인정받아 기쿠치 간 상을 또 한 번 수상했고, 국제펜클럽 부회장으로 취임하며 국제적인 문학 교류에 기여했습니다.
1957년 도쿄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대회에서 주최국 일본측의 회장으로서 활약하여 이듬해인 1958년에 기쿠치 간 상을 또 한 번 수상했습니다. 같은 해 국제펜클럽 부회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1961
[노벨 문학상 후보로 결정]
스웨덴 아카데미의 자료 공개를 통해 노벨 문학상 수상 7년 전인 이때 이미 노벨상의 후보로 결정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2012년 9월 4일, 스웨덴 아카데미가 NHK의 공개 청구에 응하여 개시한 노벨 문학상 전형 과정의 자료를 통해 가와바타가 노벨상을 수상하기 7년 전인 1961년에 이미 노벨상의 후보로 결정되어 있었음이 밝혀져 NHK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습니다.
1962
[세계평화 위원회 참가 및 『잠든 미녀』 수상]
세계평화 어필 7인 위원회에 참가했고, 『잠든 미녀』로 제16회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을 수상했습니다.
1962년 세계평화 어필 7인 위원회에 참가하였고, 「잠든 미녀」로 제16회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毎日出版文化賞)을 수상했습니다.
1963
1963년에는 새로 생긴 일본근대문학관(日本近代文学館)의 감사(監事)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1964
[오슬로 국제펜클럽 대회 출석 및 「단포포」 연재 시작]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대회에 출석했으며, 『신조』에 작품 「단포포」의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1964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습니다. 또한, 단속적으로 작품 「단포포(たんぽぽ)」의 연재를 『신조(新潮)』에 시작하였습니다.
1965
1965년에 일본펜클럽 회장직을 사임하였습니다.
1966
1966년 이듬해에 맹장염으로 도쿄대학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1968
[일본인 최초 노벨 문학상 수상]
『설국』 등의 탁월한 작품성과 '일본인의 심정의 본질을 그린 몹시 섬세한 표현'을 인정받아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무려 12년간이나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설국》은 가와바타의 미의식이 절정을 이루는 작품으로, 그 문학성이 인정되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68년 10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노벨상 위원회는 '일본인의 심정의 본질을 그린, 몹시 섬세한 표현에 의한 서술의 탁월함(for his narrative mastery, which with great sensibility expresses the essence of the Japanese mind)'을 수상평으로 밝혔습니다.
[노벨상 수상식 참석 및 기념 강연]
스톡홀름 노벨상 수상식에서 일본 정부가 수여한 문화 훈장이 달린 몬쓰키하오리하카마 차림으로 수상에 임했으며, 기념 강연 「아름다운 일본의 나 그 서론」을 행했습니다.
1968년 12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수상식에서 가와바타는 연미복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수여한 문화 훈장이 달린 몬쓰키하오리하카마(紋付羽織袴) 차림으로 수상에 임했고, 기념 강연 「아름다운 일본의 나(美しい日本の私) 그 서론」을 행했습니다.
1969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 간행 시작]
노벨상 수상 이후 1974년까지 신초샤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전19권)이 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69년부터 1974년에 걸쳐 신초샤에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전19권)이 간행되었습니다.
1970
[국제 문학 교류 참여 및 명예 관장 취임]
타이베이의 아시아 작가 회의 및 한국에서의 서울 국제펜클럽 대회에 출석했으며, 일본 근대 문학관의 명예 관장으로 취임했습니다.
타이베이의 아시아 작가 회의뿐 아니라 1970년에 한국에서의 서울 국제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으며 일본 근대 문학관의 명예 관장으로도 취임했습니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 뒤에 발표한 작품은 단편 몇 개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노벨상 수여에 따른 중압이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1972
[가와바타 야스나리 사망]
가나가와현 즈시시 자택 작업실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으며, 사인은 가스에 의한 자살로 알려졌습니다. 향년 73세였습니다.
노벨 문학상 3년 뒤인 1972년 4월 16일, 가나가와현 즈시시의 맨션 「즈시 마리나」의 자택 작업실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은 가스에 의한 자살로 알려졌으며, 향년 73세였습니다. 계명은 문경원전고산강성대거사(文鏡院殿孤山康成大居士) 또는 대도원수예문화강성거사(大道院秀藝文華康成居士)입니다.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자살설과 사고사설이 대립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자살로 보도되었습니다.
1973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 제정]
재단법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념회에 의해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이 제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973년에 재단법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념회에 의해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이 제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985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관 개관]
이바라키 시립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관'이 개관했으며, 이바라키시 명예 시민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85년에는 이바라키 시립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관'이 개관했습니다. 또한 이바라키시 명예 시민으로도 임명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