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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TK 야당 도의원으로 시작해 3선 국회의원, 국회 사무총장을 지낸 입지전적인 인물
한나라당 내 개혁 보수 소장파를 지향하며 친이계와 친유승민계를 거침
이재명 정부의 통합 상징으로서 국가보훈부 장관에 임명
진영 논리를 초월한 통합의 가치를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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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출신으로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을 지냈다. 제17·18·19·20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4선 정치인이다. 새누리당 원내대표 시절 박근혜 정부와 갈등을 겪었으며, 이후 바른정당, 바른미래당 등 개혁 보수 정당을 창당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와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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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1957
1958
1958
1958년 1월 7일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 중구 대봉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제학자로 활동하다 정치에 입문하여 4선 국회의원을 지내게 된다.
1976
[중·고등학교]
안동중학교와 경북고등학교(57회)를 졸업했습니다.
경북고 57회 졸업생 동기로는 유승민, 류성걸, 정종섭, 주성영 등이 있습니다.
1976
1976
1976
1978
1978
1982
1982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유승민은 1982년부터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1983
[대한상공회의소 입사]
정치에 입문하기 전(고려대 학사 졸업 이후인 1982년부터 1991년 도의원 당선 이전 사이에), 그는 대한상공회의소(KCCI)에 입사하여 조사역, 선임연구원, 국제협력부 조사역 등으로 근무하며 경제와 정책에 대한 실무적인 시각을 길렀습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상공회의소 재직 중 노동조합 부위원장을 역임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경력은 그가 보수적인 TK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책을 바라보는 시야를 경제 관료나 전통적인 보수 인사들보다 더 민생 지향적이고 실용적으로 확장시키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983
1987
1987
1987년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다시 한국개발연구원으로 돌아왔다. 그의 전공은 기업결합과 독과점 방지, 경쟁정책을 다루는 산업조직론이었다.
1990
1990
1991
[꼬마민주당 도의원 당선]
경북 최연소 도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TK 지역에서 야당 소속으로 지역 민생에 집중하며 우수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로부터 4년 연속 우수 의원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꼬마민주당 소속으로 경상북도 도의회 안동시 제3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당시 34세로 경북지역 최연소 도의원이었습니다. 도의원 시절 안동댐 보상 문제 등 지역 민원 해결에 앞장서는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것이 명성을 얻은 기반입니다.
1991
1996
[15대 총선 당선 (통합민주당)]
경북 안동 갑에서 현역 신한국당 재선 의원을 꺾고 국회에 입성했습니다. 당시 TK 지역에서 유일한 통합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최연소)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선 후 통합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했습니다.
TK 보수 텃밭에서의 이변으로 젊은 패기를 인정받았으며, 경북 지역 최연소 초선 의원이었습니다. 개원 국회 본회의에서 당적 변경 의원들의 책임을 집중 비판하는 등 소신을 강하게 밝혔으며, 1997년까지 통합민주당 대변인을 역임했습니다.
1996
1997
[한나라당 창당 합류 (보수 편입)]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에 흡수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창당될 때 이에 참여하며 보수 정당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후 한나라당 안동지구당 위원장 및 이회창 총재 기획특보를 맡았습니다.
이 결정은 지역구 관리 및 중앙 정치 무대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실리적 선택으로 평가됩니다. 이로써 그는 보수 정당 내 소장 개혁파로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1997
2000
2000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경제 교사로 정계 입문]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경제 교사'로 정치권에 입문했으며, 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장을 역임하며 '정책 브레인'으로 평가받았다.
2000년, 유력 대권 주자였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경제 교사'로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원외 인물임에도 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장을 맡아 이회창 총재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역대 최장기 여의도연구소장으로 꼽혔다.
2000
[16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한나라당 소속으로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간사 등을 역임했습니다.
이 기간 중 국회의원 273명 중 평가 1위로 의정활동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2000년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 권정달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습니다. 의정 활동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16대 의정활동 대상 수상 기록이 있으며, 국회 활동보다 정당 활동이 주목받는 정치 풍토를 비판하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2000
2004
[17대 총선 당선 (한나라당)]
한나라당 소속으로 경북 안동시에서 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3선 의원이 되었습니다.
공직자로서 안정적인 경력을 쌓으며 보수 정당 내 입지를 다졌습니다. 이 시기 국회 활동 전문성을 인정받았습니다.
3선에 성공하며 지역구 기반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15, 16, 17대 3선 국회의원을 역임했습니다. 이 당선으로 그는 안동시에서 3선 의원 경력을 쌓게 되었습니다.
2004
2004년 5월부터 2005년 10월까지 제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 한나라당)으로 활동하며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과 한나라당 제3정조위원장을 지냈다.
2005
2005
[박근혜 대표최고위원 비서실장 역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최고위원의 비서실장을 지내며 박근혜 캠프의 핵심 측근으로 활동했다.
2005년 1월부터 10월까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최고위원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2007년 제17대 대선 한나라당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가 대립했을 때, 유승민 의원은 박근혜 캠프의 정책 및 메시지를 담당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2005
2005
[대구 동구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당선]
10·26 재보궐선거에서 대구 동구 을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지역구 활동을 시작했다.
2005년 10월 26일 10·26 재보궐선거에서 대구 동구 을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2008년, 2012년, 2016년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에서 당선되며 4선 국회의원이 된다.
2006
[17대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장]
17대 국회 후반기 농림해양수산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국회 예산결산특위 위원, 문화관광위원 등을 거치며 입법 활동의 전문성을 확보했습니다.
3선 의원으로서 상임위원장직을 맡아 농어촌 및 해양 정책 분야에서 실질적인 정책 결정에 참여했습니다. 국회 행정 경험을 쌓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2006
2007
[이명박 대선 캠프 유세단장]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친이계로 분류되어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이후 대선 본선에서 유세단장으로 활동하며 주류 계파 진입을 시도했습니다.
이명박 후보 당선에 기여했으나, 이듬해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하며 정치적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는 보수 정당 내 주류 계파의 역학 관계에 의해 정치적 입지가 흔들렸음을 보여줍니다.
2007
2008
[18대 총선 공천 탈락]
2007년 이명박 캠프 유세단장으로서 친이계 활동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2008년 18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하며 주류 계파 내에서의 입지 불안정성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공천 탈락은 그가 당의 방침이나 계파 논리보다는 자기 소신에 따라 움직이려는 성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2008
2010
[제25대 국회 사무총장 임명]
국회의장(박희태)의 추천으로 국회 본회의에서 제25대 국회 사무총장에 임명 승인되었습니다.
임명 당시 국회에서 제15대 국회 이후 최고 득표율인 94.5%의 찬성률을 기록했습니다.
국회 사무총장직은 3선 의원 출신이 공천 탈락 등으로 제도권 정치의 문이 막혔을 때, 공적 역할을 확장하며 국회 운영의 실무를 총괄하는 중요한 행정가로서의 역량을 증명한 계기였습니다.
2010
2011
2011
2011년 7월 한나라당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홍준표 후보가 대표최고위원으로 당선되었고, 유승민 후보는 친박계의 지원을 받아 2위에 올랐다. 유 의원은 나경원, 원희룡, 남경필 후보와 함께 선출직 최고위원이 되었다.
2012
2012
2012
2012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취임]
제19대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국정감사에서 여러 차례 최상위권 평가를 받는 등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2012년 7월부터 2014년 5월까지 제19대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국방위원회 활동 중 머니투데이 국회 출입기자들의 평가에서 여러 번 최상위권에 올랐으며, 2015년 국정감사 총결산에서는 '북한 핵미사일 방어체계부터 KF-X 등 무기개발 사업 문제, 방산비리, 공정한 장병 보상문제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은 촌철살인의 질의'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4
2014
2015
2015
2015년 2월 새누리당 원내대표로 당선되었다. 재벌 개혁,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 등의 발언을 통해 증세론과 경제 정책 전반에 대해 진보적인 경제관을 드러냈다. 특히 2015년 4월 8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양극화 해소 통찰을 높이 평가하며 야당으로부터 "보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준 놀라운 명연설"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2015
2015
[박근혜 대통령과의 갈등 끝에 새누리당 원내대표직 사퇴]
국회법 개정안을 둘러싼 박근혜 대통령과의 심각한 갈등 끝에 원내대표직을 사퇴하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1조 1항의 가치를 지키려 했다고 밝혔다.
정부 시행령을 국회가 수정·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국회법 개정안으로 인해 박근혜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다. 박 대통령은 이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며 유승민 원내대표를 "배신의 정치"라고 비판했다. 결국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사퇴 권고가 결정되자, 2015년 7월 8일 유승민은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나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2016
2016
[20대 총선 무소속 당선 및 새누리당 복당]
친박계 공천 배제로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대구 동구 을에서 당선되었으며, 이후 새누리당에 복당했다.
20대 총선에서 친박계에 의해 공천이 배제되자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대구 동구 을에 출마했다. '옥새 파동'으로 새누리당 후보가 출마하지 못한 상황에서 75.7%의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같은 해 6월 16일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결정에 따라 복당했다.
2016
2016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비박계 주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새누리당 내 비박 세력을 이끌었으며, 여야 합의 결렬 시 탄핵 표결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찬성 입장을 밝혔다.
2016년 말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새누리당 내 비박 세력을 이끌었다. 초기에는 하야 입장을 보였으나, 11월 말에는 국회에서 여야 간 합의가 결렬될 시 탄핵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비주류 의원 모임 '비상시국위원회'는 유 의원의 입장대로 탄핵 표결에 참여하기로 결정했고, 그는 탄핵 표결 하루 전 공식적으로 탄핵 찬성 입장을 발표했다.
2017
[새누리당 탈당 및 바른정당 창당]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으며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개혁 보수를 기치로 내건 바른정당 창당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바른정당 최고위원으로서 '친유승민계의 좌장'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는 그의 오랜 소장파적 성향을 확고히 하는 행보였습니다. 당의 개혁 노선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표명하며, 결과적으로 자신의 지역구 기반인 주류 보수와의 정치적 단절을 선택했습니다.
2017
[바른정당 창당 주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친박계와의 갈등으로 새누리당을 집단 탈당하여 '개혁보수신당'(가칭)을 창당하고, 이후 바른정당으로 정식 출범시켰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친박계와의 갈등이 심화되자, 2016년 12월 27일 김무성 등 타 비박계 의원들과 함께 새누리당을 집단 탈당하며 '개혁보수신당'(가칭) 창당을 선언했다. 이 신당은 2017년 1월 24일 바른정당으로 공식 출범했다.
2017
2017
[제19대 대통령 선거 바른정당 후보로 출마]
바른정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남경필 후보를 꺾고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대선 토론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며 호평을 받았다.
박근혜 탄핵 인용 후 조기 대선이 결정되자, 당내 경선에서 남경필 후보와 치열한 '스탠딩 토론'을 펼쳐 주목받았다. 모병제, 사교육 폐지, 증세 등 다양한 정책을 놓고 토론한 결과 62.9%의 득표율로 바른정당의 대선 후보가 되었다. 대선 토론에서 경제와 국방 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드러내 호평받았으나, 지지율 상승에는 한계가 있었다.
2017
2017
[바른정당 당대표 당선]
이혜훈 대표 사퇴 후 치러진 바른정당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56.6%의 득표율로 당대표에 당선되었다.
이혜훈 대표의 금품 수수 의혹으로 인한 사퇴 이후, 바른정당은 자강파와 통합파로 분열되었다. 유승민은 자강파의 중심에 서서 '유승민 비대위 체제'를 주장했고, 2017년 11월 13일 전당대회에서 56.6%의 득표율로 바른정당 대표가 되었다. 그는 수락연설에서 "바른정당을 지키겠다. 개혁보수의 창당정신, 그 뜻과 가치를 지키겠다"고 밝혔다.
2018
2018
바른정당 대표 취임 후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통합을 선언했다. 문재인 정부와 자유한국당 양당을 비판하며 대안정치를 강조했고, 2018년 2월 13일 바른정당과 국민의당이 합당하여 원내 3당인 바른미래당이 출범했다. 유승민은 박주선과 함께 바른미래당의 초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2018
[바른미래당 경북도지사 낙선]
바른미래당 소속으로 경상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습니다.
그는 TK 지역에서 자유한국당의 낡은 수구 행태를 비판하며 새로운 도정 혁신을 주장했습니다.
권오을은 지역주의에 기생하는 거대 양당에 대한 심판을 촉구했으나, 보수 텃밭의 견고한 지역주의 벽과 보수 분열의 한계를 넘지 못했습니다.
이 패배는 보수 진영 내에서 개혁 노선만으로는 주류를 대체하기 어렵다는 냉혹한 현실 인식을 심어주었을 것으로 분석됩니다.
2018
2018
2018
[지방선거 참패 책임지고 바른미래당 대표직 사퇴]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바른미래당이 참패하자, 책임을 지고 공동대표직에서 사퇴하며 성찰의 시간을 갖겠다고 밝혔다.
2018년 6월 14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바른미래당이 참패한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퇴했다. 그는 "개혁 보수의 길이 국민 기대에 못 미쳤다", "국민의 선택을 무겁게 받아들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성찰의 시간을 갖겠다"고 밝혔다.
2019
2019년 말, 유승민이 주도한 새로운보수당은 다시 보수 진영 내에서의 '개혁'과 '보수' 가치를 강조하는 분당 노선이었습니다.
하지만 권오을은 이미 보수 진영 내에서 거듭된 공천 탈락(2008년, 2012년)과 선거 패배(2018년)를 겪으며 주류 보수와의 연결고리가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그는 새로운보수당 합류 대신, 궁극적으로 '이념을 넘어선 통합과 실용'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출구를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2022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지지라는 극적인 전환으로 이어졌습니다.
2019
2020
2020
[새로운보수당 창당]
바른미래당 내 당권 다툼 끝에 '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을 조직하고 신당 창당을 결의, 2020년 1월 새로운보수당을 공식적으로 창당했다.
바른미래당 내 당권 다툼이 지속되자, 유승민과 그를 따르는 의원들은 2019년 9월 30일 '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을 조직했다. 이후 2019년 12월 신당 창당을 결의하고 '새로운보수당'으로 당명을 확정했으며, 2020년 1월 공식적으로 창당했다.
2020
2020
[미래통합당 합류 및 21대 총선 불출마 선언]
21대 총선을 앞두고 보수통합을 위해 새로운보수당이 자유한국당 등과 합당하여 미래통합당이 되면서 유승민도 합류했으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2020년 4월에 치러지는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새로운보수당이 보수통합을 위해 자유한국당 등과 합당하여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이 되었다. 유승민은 이에 따라 미래통합당에 합류했으며, 합당 이후 제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2021
2021
[제20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 (국민의힘 경선)]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선거 예비후보로 출마를 선언했으나, 당내 경선에서 3위로 탈락했다.
2021년 7월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선거 예비후보로 출마를 선언했다. 1, 2차 경선을 통과하여 최종 경선에 진출했으나 3위로 탈락하며 대선 후보가 되지 못했다.
2022
2022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예비후보 출마]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경기도지사 출마를 선언했으나, 당내 경선에서 김은혜 후보에게 밀려 공천에서 탈락했다.
2022년 3월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경기도지사 출마를 선언했다. 경기도지사 경선에서 김은혜 후보와 경쟁을 펼쳤으나 김은혜에게 밀려 공천에서 탈락했다.
2022
[이재명 후보 지지 선언]
제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지지를 공개 선언하며 진영을 초월하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민주당 중앙선대위 국민대통합위원장을 맡아 대구·경북 지역 선거운동을 도왔습니다.
그는 "진영 논리를 넘어 통합과 타협을 통해 국민이 행복한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재명의 '실용 정치'에 대한 기대를 표명했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적 궤적 중 가장 이례적이고 극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이러한 극적인 전환은 단순한 기회주의적 행보가 아니라, 오랜 기간 주류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정치인이 정치적 생명력을 유지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실용 정책을 펼칠 수 있는 마지막 돌파구를 찾은 결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2022
2025
[국가보훈부 장관 임명]
이재명 정부의 첫 국가보훈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었고,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되었습니다.
대통령실은 그를 '지역과 이념을 넘어서 국민 통합을 이끌 적임자'로 평가했습니다.
이 인사는 오랜 기간 보수 진영에서 활동한 인사를 진보 성향 정부의 장관으로 임명했다는 점에서 통합 인사의 상징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임명 과정에서 보훈 경력 부재 및 사적인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습니다.
[인사청문회]
국가보훈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권오을이 최근 몇 년간 전국 각지의 5개 법인 및 대학에서 동시에 급여를 수령한 사실이 드러나, 실제 근무하지 않고 급여만 수령한 것 아니냐는 '허위 근무'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배우자가 운영하는 삼계탕 전문 음식점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삼계탕 영업실장"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는 사적인 사실이 공론화되었습니다.
권오을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이 의혹에 대해 당시 생활이 매우 어려워 비상근 고문 자격으로 자문을 해주는 등 실제로 일했고 소액 자문료를 받았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는 "궁색하게 보인 점은 부끄럽다"고 인정하면서도, 법적인 문제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논란은 그가 2010년 국회 사무총장 이후 오랜 공백기를 거치면서 겪었던 사적인 경제적 어려움의 단면을 공적으로 노출시켰습니다.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