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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경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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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르기니

슈퍼카 브랜드,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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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1-07- 00: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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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경주 시리즈

포뮬러 1(F1)은 단순한 모터스포츠를 넘어, 기술 혁신, 상업적 팽창, 그리고 인간 드라마가 얽힌 한 세기가 넘는 역사의 집약체입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공공 도로에서 시작된 위험천만한 자동차 경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체계적인 규정과 월드 챔피언십을 갖춘 '포뮬러 1'으로 진화했습니다. 이후 기술 혁명과 천문학적인 자본이 유입되며 F1은 전 세계 수억 명의 팬을 열광시키는 글로벌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로 자리 잡았습니다. 본 보고서는 F1의 시초가 된 그랑프리 레이싱의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스포츠의 판도를 바꾼 중요한 사건들을 시간 순으로 정리하여 F1의 역사를 조망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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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카 브랜드, 자동차

창업주의 개인적인 도전에서 시작된 람보르기니는 '슈퍼카'의 개념을 창시하며 자동차 역사를 바꿨다. 이후 수십 년간의 경영난과 파산 위기를 거치며 끈질기게 생존했고, 마침내 아우디의 체계적인 관리 아래 전례 없는 안정과 성장을 이룩했다. 이제 람보르기니는 대담한 혁신이라는 DNA를 유지한 채, 전동화라는 새로운 시대를 선도하며 스스로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주요사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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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최초의 그랑프리 개최]

프랑스 르망에서 최초의 '그랑프리(Grand Prix)' 자동차 경주가 열렸습니다. 이 경주는 도시 간 도로 경주의 위험성 때문에 폐쇄된 공공 도로 서킷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헝가리 출신의 페렌츠 시스가 르노 차량을 타고 이틀에 걸친 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자동차 경주는 1903년 파리-마드리드 레이스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며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프랑스 자동차 클럽(ACF)은 안전을 위해 통제된 105km 길이의 공공 도로 서킷에서 경주를 개최했으며, 이것이 '그랑프리'라는 명칭을 사용한 최초의 공식적인 이벤트였습니다. 이 경주는 국가별 자동차 클럽 간의 경쟁 형태로 발전하며 그랑프리 레이싱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906

1925

[최초의 월드 챔피언십]

FIA의 전신인 AIACR(국제 공인 자동차 클럽 협회) 주관으로 최초의 '제조사 월드 챔피언십'이 개최되었습니다. 이 챔피언십은 드라이버가 아닌 제조사를 위한 것이었으며, 알파 로메오가 첫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이 시리즈는 3시즌 만에 중단되었지만, F1 월드 챔피언십의 개념적 전신이 되었습니다.

1923년 프랑스 잡지 '로토(L'Auto)'가 글로벌 시리즈 아이디어를 제안한 것을 바탕으로, 1925년 인디애나폴리스 500을 포함한 4개의 레이스로 챔피언십이 구성되었습니다. 알파 로메오는 강력한 P2 모델을 앞세워 초대 챔피언의 영예를 안았고, 이를 기념하여 1972년까지 브랜드 엠블럼에 월계관을 추가했습니다.

1925

1946

[포뮬러 1 규정 공식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터스포츠 재건을 위해, FIA의 전신인 AIACR의 스포츠 위원회(CSI)가 새로운 그랑프리 규정을 논의했습니다. '포뮬러 1'이라는 명칭이 최고 수준의 레이싱 카테고리를 위한 공식 규정으로 합의되었습니다. 이는 현대 F1의 기술적 토대를 마련한 순간이었습니다.

전쟁 이전에도 월드 챔피언십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전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1946년, CSI는 새로운 규정을 투표에 부쳐 '포뮬러 1'을 공식 명칭으로 채택했습니다. 이 규정에 따른 첫 공식 경주는 1946년 토리노 그랑프리였으며, 1947년부터 본격적으로 F1 규정에 따른 레이스들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1946

1950

[F1 월드 챔피언십 출범]

영국 실버스톤 서킷에서 최초의 FIA 드라이버 월드 챔피언십 경주가 열렸습니다. 이 역사적인 레이스에는 영국 국왕 조지 6세가 참석했으며, 알파 로메오를 탄 주세페 파리나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로써 오늘날 우리가 아는 F1의 시대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49년 말, FIA는 여러 국가의 F1 그랑프리를 묶어 드라이버를 위한 월드 챔피언십을 창설한다고 발표했습니다. 1950년 시즌은 인디애나폴리스 500을 포함한 총 7개의 레이스로 구성되었으며, 실버스톤에서 열린 첫 경주에는 약 14만 명의 관중이 모였습니다. 페라리는 이 첫 경주에 불참하고 8일 뒤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데뷔했습니다.

1950

1962

[로터스의 모노코크 섀시 혁명]

로터스 팀이 기존의 스페이스 프레임 디자인을 대체하는 알루미늄 모노코크 섀시를 도입했습니다. 이 혁신적인 설계는 차량의 강성을 높이고 무게를 줄여 F1 차량 설계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미드십 엔진 도입 이후 가장 큰 기술적 진보로 평가받습니다.

1950년대 후반 쿠퍼 팀에 의해 시작된 미드십 엔진 혁명에 이어, 1962년 로터스의 창립자 콜린 채프먼은 항공기 기술에서 영감을 얻은 모노코크 섀시를 F1에 도입했습니다. 이 새로운 섀시는 더 가볍고 구조적으로 훨씬 견고하여 코너링 성능을 극대화했습니다. 이 기술은 곧 모든 팀이 채택하는 표준이 되며 F1 차량 설계의 패러다임을 바꾸었습니다.

1962

[트랙터 거장의 창업 신화]

성공한 트랙터 사업가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소유하던 페라리의 잦은 클러치 고장과 형편없는 사후 서비스에 불만을 품었다. 그는 직접 문제를 해결한 뒤 엔초 페라리에게 개선을 요구했으나, "트랙터나 몰아라"는 모욕적인 답변을 들었다. 이 사건은 그가 직접 완벽한 그랜드 투어러(GT)를 만들기로 결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군용 차량을 개조해 트랙터를 생산하는 '람보르기니 트라토리(Lamborghini Trattori)'를 설립하여 큰 성공을 거둔 자수성가형 사업가였다. 자동차 애호가였던 그는 여러 대의 페라리를 소유했지만, 레이싱에 치중한 나머지 도로 주행용 차량의 내구성과 품질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특히 클러치 문제로 마라넬로의 페라리 공장을 수시로 방문해야 했고, 불만족스러운 서비스에 인내심을 잃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페라리 250 GT를 직접 개조하여 순정 모델보다 뛰어난 성능을 내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엔초 페라리를 찾아가 클러치 문제를 지적했지만, 엔초는 "람보르기니, 당신은 트랙터는 몰 수 있을지 몰라도 페라리는 절대 제대로 다룰 수 없을 것"이라며 그의 의견을 무시했다.

이 일화는 람보르기니가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든 핵심 동기로 알려져 있으며, 브랜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창업 신화'가 되었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복수심을 넘어, 기존 강자(페라리)가 만족시키지 못하는 '완벽한 로드카' 시장을 개척하려는 명확한 사업적 비전의 출발점이었다.

1963

1963

[오토모빌리 람보르기니 설립]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1963년 5월 7일, 산타가타 볼로냐에 '오토모빌리 람보르기니(Automobili Lamborghini S.p.A.)'를 공식 설립했다. 이 지역은 페라리, 마세라티 등 경쟁사가 위치한 이탈리아 '모터 밸리'의 심장부였다. 이는 처음부터 최고 수준의 경쟁을 위한 전략적 포석이었다.

페라리와의 만남 이후, 페루치오의 결심은 신속하게 실행으로 옮겨졌다. 그는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여 단기간에 회사를 설립하고 공장을 건설했다. 산타가타 볼로냐를 부지로 선택한 것은 단순한 지리적 결정이 아니었다. 이 지역은 이탈리아 최고의 엔지니어링 인재, 부품 공급업체, 숙련된 장인들이 모여 있는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였다. 이는 신생 브랜드가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생산 품질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략이었다. 페루치오의 접근 방식은 소규모 차고에서 시작하는 일반적인 스타트업과 달리, 처음부터 대규모 산업 프로젝트로서 자동차 시장의 판도를 바꾸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1963

1963

[첫 프로토타입 350 GTV 공개]

 1963년 토리노 모터쇼에서 람보르기니의 첫 프로토타입 350 GTV가 공개되었다. 급진적인 디자인과 페라리 출신 기술자 지오토 비자리니가 설계한 레이싱 사양의 $V12$ 엔진을 탑재했으나, 실제로는 엔진이 차체에 맞지 않아 벽돌로 무게를 채운 미완성 쇼카였다. 하지만 이 쇼카는 엄청난 홍보 효과를 낳으며 브랜드의 시작을 화려하게 알렸다.

350 GTV(Gran Turismo Veloce)는 프랑코 스칼리오네가 디자인한 파격적인 차체와 비자리니가 설계한 3.5리터 V12 엔진을 특징으로 했다. 비자리니의 엔진은 레이싱을 위해 개발되어 8,000 rpm에서 347마력을 내는 고성능 유닛이었으나, 페루치오가 원했던 부드럽고 신뢰성 높은 GT카의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

이 기술적, 철학적 불일치로 인해 엔진은 쇼카의 엔진 베이에 실제로 장착되지 못했고, 모터쇼 기간 내내 보닛은 굳게 닫혀 있었다.
비록 미완성이었지만 350 GTV는 대담한 마케팅 전략이었다. 이 쇼카는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신생 브랜드 람보르기니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동시에 이 사건은 페루치오가 자신의 비전을 실현시켜 줄 새로운 엔지니어 파올로 스탄자니를 영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브랜드가 나아갈 방향을 레이싱이 아닌 '궁극의 GT카'로 명확히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1964

1964

[첫 양산차 350 GT 출시]

 1964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람보르기니의 첫 양산차인 350 GT가 공개되었다. 350 GTV의 과격한 디자인을 카로체리아 투어링이 현실적으로 다듬고, 파올로 스탄자니가 $V12$ 엔진을 270마력으로 디튠하여 안정성과 편안함을 확보했다. 이로써 람보르기니는 창업자의 비전을 완벽하게 구현하며 성공적으로 시장에 진입했다.

350 GT는 350 GTV라는 급진적 콘셉트를 실용적이고 우아한 양산 모델로 전환시킨 결과물이다. 파올로 스탄자니는 비자리니의 레이싱 엔진을 도로 주행에 적합하도록 재설계하여, 높은 성능을 유지하면서도 다루기 쉽고 신뢰할 수 있는 엔진으로 만들었다. 350 GT의 성공적인 출시는 람보르기니가 단순한 '페라리 대항마'가 아니라, 독자적인 기술력과 철학을 가진 진지한 자동차 제조업체임을 증명했다. 이는 페루치오가 꿈꿨던 '성능, 편안함, 품질을 모두 갖춘 완벽한 GT카'라는 브랜드의 약속이 단순한 구호가 아님을 보여준 첫 번째 실증 사례였다.

1966

1966

[세계 최초의 슈퍼카, 미우라 탄생]

1966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미우라(Miura)가 데뷔하며 자동차 역사를 바꿨다. 젊은 엔지니어들이 개발한 혁신적인 가로배치 미드십 $V12$ 엔진을 탑재하여 '슈퍼카'라는 개념을 창시했다. 미우라는 람보르기니를 단숨에 혁신의 아이콘으로 각인시켰다.

미우라는 창업주 페루치오의 의도를 넘어선, 젊은 엔지니어들의 열정이 낳은 '우연한 혁명'이었다. 엔지니어 지안 파올로 달라라, 파올로 스탄자니, 그리고 테스트 드라이버 밥 월러스는 페루치오 몰래 미드십 엔진 레이아웃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통적인 GT카를 선호했던 페루치오는 처음에는 회의적이었으나, 그들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프로젝트를 승인했다. 미우라는 4.0리터 V12 엔진을 운전석 뒤에 가로로 배치하는 혁신적인 구조를 채택했으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양산차였다.

이 차의 등장은 고성능 자동차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었고, 이후 모든 슈퍼카의 교과서가 되었다. 미우라를 통해 람보르기니는 '편안한 GT' 브랜드에서 '세상을 바꾸는 혁신가'라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1968

[스폰서십과 에어로 시대 개막]

팀 건스톤이 처음으로 담배 회사 로고를 차량에 부착하며 상업적 스폰서십 시대를 열었고, 곧이어 로터스도 골드 리프 리버리를 선보였습니다. 같은 해 로터스는 차량에 앞뒤 윙(에어로포일)을 장착하여 다운포스를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두 가지 변화는 F1의 외관과 비즈니스 모델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1968년 1월 1일 남아공 그랑프리에서 개인 참가팀인 팀 건스톤이 처음으로 상업 스폰서십을 도입했고, 5개월 뒤 로터스가 팩토리 팀 최초로 임페리얼 토바코의 골드 리프 색상으로 차량을 도색하며 본격적인 스폰서십 시대를 열었습니다. 같은 해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로터스의 콜린 채프먼은 차량에 윙을 부착해 공기역학적 다운포스를 생성하는 아이디어를 선보였고, 이는 F1의 에어로다이나믹 기술 경쟁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1968

1971

1971

[쿤타치 프로토타입, 미래를 제시]

1971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노란색 쿤타치(Countach) LP 500 프로토타입이 공개되며 충격을 안겼다. 마르첼로 간디니의 미래지향적 쐐기형 디자인과 시저 도어(Scissor doors)는 이후 람보르기니 $V12$ 플래그십의 상징이 되었다.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회사는 이 비현실적인 쇼카의 양산을 결정했다.

쿤타치는 의도적으로 기획된 '미학적 전쟁'이었다. 같은 쇼에 함께 전시된 미우라 SV마저 구식으로 보이게 할 만큼 미래적인 디자인이었다. '쿤타치'라는 이름은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의 방언으로, '놀라움'을 뜻하는 감탄사에서 유래했다. 이 차는 엔진을 세로로 배치하는 'Longitudinale Posteriore(LP)' 레이아웃을 처음 도입했으며, 위로 열리는 시저 도어는 람보르기니의 시그니처가 되었다. 쿤타치의 압도적인 대중적 성공은 람보르기니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확립했다. 즉, 불가능해 보이는 콘셉트카를 먼저 제시하고, 대중의 열광적인 수요를 동력 삼아 엄청난 기술적 난제를 극복하며 양산해내는 방식이다.

1972

1972

[창업주 페루치오, 회사 매각]

1972년,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회사 지분 51%를 스위스 사업가 조르주-앙리 로세티에게 매각했고, 1974년에는 잔여 지분 49%를 그의 친구 르네 라이머에게 넘기고 완전히 은퇴했다. 트랙터 사업의 재정난과 1973년 오일 쇼크로 인한 슈퍼카 시장 침체가 주된 원인이었다. 이로써 창업주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페루치오의 매각 결정은 개인적인 선택이 아닌, 외부 경제 충격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주력 사업이었던 '람보르기니 트라토리'는 남아프리카와 볼리비아로부터의 대규모 주문이 취소되면서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했다. 여기에 1973년 전 세계를 덮친 오일 쇼크는 고성능 자동차 판매에 직격탄을 날렸다. 창업주의 손을 떠난 '오토모빌리 람보르기니'는 구심점을 잃고, 이후 25년간 이어질 불안정한 소유 구조와 생존을 위한 투쟁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1978

1978

[경영난 심화와 파산 선고]
창업주가 떠난 후 회사는 경영난에 시달리다 1978년 말 파산을 선고받았다. 새로운 스위스인 소유주들의 자동차 산업에 대한 경험 부족과 투자 기피가 주된 원인이었다. BMW M1 개발 계약 실패는 재정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며 파산을 앞당겼다.

스위스인 소유주들은 브랜드의 가치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신규 투자를 꺼렸고, 이는 기술 개발 정체로 이어졌다. 생존을 위해 BMW의 M1 개발 및 생산 계약을 수주했지만, 프로젝트는 지연을 거듭하며 오히려 람보르기니의 재정을 더욱 압박했다.

1978년의 파산은 전설적인 브랜드 이미지와 매력적인 제품만으로는 기업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냉혹한 사례다. 유능한 경영진과 지속적인 투자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가장 상징적인 브랜드조차 무너질 수 있음을 증명했다.

1980

1980

[밈란 형제, 구원투수로 등판]

1980년, 이탈리아 법원은 파산한 람보르기니를 젊은 사업가 패트릭 밈란과 장클로드 밈란 형제에게 맡겼다. 그들은 막대한 투자를 통해 회사를 회생시키고, $V8$ 모델 할파(Jalpa)와 최초의 슈퍼 SUV인 LM002를 출시하며 라인업을 다각화했다. 밈란 형제는 람보르기니의 숨은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밈란 형제는 1984년까지 회사를 법정 관리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했으며, 단순한 재정 지원을 넘어 전략적인 부활을 이끌었다. 그들은 V12 쿤타치만으로는 회사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판매량을 늘리기 위한 '엔트리급' V8 모델 할파와, 시대를 앞서간 슈퍼 SUV LM002를 출시했다. 특히 LM002는 람보르기니의 대담한 정신이 슈퍼카 이외의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 선구적인 시도였다. 밈란 형제의 시기는 훗날 아우디 체제 하에서 완성될 '2-모델 라인업' 전략의 중요한 초석을 다진 시기였다.

1981

[콩코드 협정과 상업권 장악]

버니 에클레스턴이 이끄는 FOCA(F1 제작자 협회)와 FISA(국제 자동차 스포츠 연맹) 간의 권력 투쟁이 '콩코드 협정' 체결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협정을 통해 FOCA는 F1의 TV 중계권 협상 권한을 확보했습니다. 이는 F1이 거대한 상업적 스포츠 제국으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F1의 상업적 권리를 두고 팀들을 대표하는 FOCA와 규제 기관인 FISA 간의 'FISA-FOCA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1981년 체결된 첫 콩코드 협정은 FOCA에게 TV 중계권 협상 권한을 부여했고, 버니 에클레스턴은 이 권한을 바탕으로 F1을 전문적인 TV 스포츠 상품으로 만들어 막대한 부를 창출하기 시작했습니다.

1981

1987

1987

[미국 크라이슬러, 람보르기니 인수]

1987년 4월 23일, 미국 크라이슬러가 람보르기니를 2,500만 달러에 인수했다. 크라이슬러는 람보르기니의 브랜드 명성과 알루미늄 엔진 주조 기술을 활용해 자사의 아이코닉 모델인 닷지 바이퍼의 $V10$ 엔진을 개발하고자 했다. 이 인수로 람보르기니는 차세대 플래그십 디아블로 개발 자금을 확보하는 상호 이익 관계를 형성했다.

람보르기니 역사상 최초로 대형 자동차 제조사의 품에 안긴 사례였다. 크라이슬러의 자금 지원 덕분에 노후화된 쿤타치를 대체할 후속 모델, 디아블로의 개발이 본격화될 수 있었다.

반대로 크라이슬러는 람보르기니의 대형 알루미늄 엔진 블록 주조 경험을 전수받아 닷지 바이퍼의 심장인 8.0리터 V10 엔진을 개발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이 관계는 단기적으로는 성공적이었으나, 장기적으로는 대중차 브랜드와 소량 생산 럭셔리 브랜드 간의 문화적, 전략적 차이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1989

[세나와 프로스트의 충돌]

일본 그랑프리에서 챔피언십을 다투던 맥라렌의 팀 동료 아일톤 세나와 알랭 프로스트가 충돌했습니다. 프로스트는 리타이어했고, 세나는 레이스를 재개하여 우승했지만 실격 처리되어 프로스트가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F1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논쟁적인 라이벌 관계의 정점을 보여주었습니다.

1989년 시즌 내내 이어진 두 선수의 갈등은 스즈카 서킷의 시케인에서 정점에 달했습니다. 세나가 추월을 시도하자 프로스트가 코너를 닫아버리며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이듬해인 1990년에는 반대로 세나가 첫 코너에서 프로스트와 충돌하며 챔피언을 결정짓는 등,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는 2년에 걸쳐 F1 역사에 길이 남을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1989

1990

1990

[쿤타치의 계승자, 디아블로 출시]

1990년 1월 21일, 쿤타치의 후속 모델인 디아블로(Diablo)가 출시되었다. 람보르기니 최초로 공식 최고속도 시속 320km(200mph)를 돌파한 이 모델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크라이슬러의 투자가 성공적인 결과물로 이어진 대표적인 사례다.

디아블로는 15년 이상 생산된 쿤타치의 원초적인 매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성능을 한층 끌어올린 모델이다. 크라이슬러의 자본과 관리하에 개발되어 이전 모델들보다 향상된 품질과 신뢰성을 갖추었다. 디아블로의 상업적 성공은 1991년 회사에 상당한 이익을 안겨주었으며, 적절한 재정 지원만 있다면 V12 플래그십 모델이 브랜드의 핵심이자 수익원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1993

1993

[재매각, 인도네시아 메가테크 품으로]

디아블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크라이슬러는 1993년 람보르기니를 인도네시아 투자 그룹 메가테크(MegaTech)에 4,000만 달러에 매각했다. 이는 대중차 브랜드와 소량 생산 슈퍼카 브랜드 간의 문화적, 전략적 부조화를 명확히 보여준다. 람보르기니는 다시 한번 불확실한 미래와 소유주 리스크에 직면했다.

크라이슬러에게 람보르기니는 결국 핵심 자산이 아닌, 관리하기 어려운 특별한 존재였다. 단기간의 기술적 시너지를 얻은 후, 크라이슬러는 브랜드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이 매각으로 람보르기니는 다시 한번 장기적인 비전이 불투명한 투자 그룹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는 대형 자동차 그룹의 일원이 되는 것만이 안정성을 보장하는 길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1994

[이몰라의 비극과 안전 강화]

산마리노 그랑프리 주말 동안 롤란드 라첸버거와 전설적인 드라이버 아일톤 세나가 연이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F1 역사상 최악의 주말로 기록된 이 사건은 스포츠 전반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FIA는 차량과 서킷의 안전 규정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1994년 이몰라 서킷에서 일어난 두 건의 사망 사고는 F1의 안전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최고조로 끌어올렸습니다. 이 사건 이후, FIA는 엔진 출력 제한, 단계적 바닥 도입, 콕핏 측면 보호 강화 등 차량 안전 규정을 대폭 수정했습니다. 또한 서킷의 안전 기준을 높이고 위험한 코너를 재설계하는 등, F1을 더 안전한 스포츠로 만들기 위한 포괄적인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1994

1998

1998

[아우디, 람보르기니의 최종 구원자]

1998년 6월 13일, 폭스바겐 그룹 산하의 아우디 AG가 람보르기니를 약 1억 1,000만 달러에 인수했다. 이 인수는 람보르기니의 미래를 보장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재정적 안정을 가져왔다. 아우디는 람보르기니의 기술력을 활용해 자사의 슈퍼카 R8을 개발하는 등 강력한 시너지를 창출했다.

이 인수는 람보르기니가 차기 소형 모델에 탑재할 V8 엔진 공급처를 찾다가 아우디와 접촉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아우디를 이끌던 페르디난트 피에히 회장은 단순한 엔진 공급을 넘어, 브랜드를 소유하는 것의 전략적 가치를 간파했다. 이 인수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했다. 첫째, 폭스바겐 그룹은 페라리와 직접 경쟁할 수 있는 슈퍼카 브랜드를 확보했다. 둘째, 아우디는 람보르기니의 미드십 플랫폼과 엔지니어링 노하우를 직접 활용하여 훗날 큰 성공을 거둔 아우디 R8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이는 이전의 어떤 소유주도 시도하지 못했던 고도의 전략적 통합이었다.

2000

[슈마허, 페라리 21년 한을 풀다]

미하엘 슈마허가 일본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페라리에게 21년 만의 드라이버 챔피언십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는 1996년 슈마허의 이적 이후 팀을 재건해 온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이 우승을 시작으로 페라리와 슈마허는 2004년까지 5년 연속 챔피언을 차지하는 압도적인 황금기를 열었습니다.

1979년 조디 쉑터 이후 드라이버 챔피언을 배출하지 못했던 페라리는 장 토드, 로스 브런, 로리 번, 그리고 미하엘 슈마허로 구성된 '드림팀'을 구축하여 팀을 재건했습니다. 수년간의 도전 끝에 2000년 스즈카에서 미카 하키넨과의 치열한 접전 끝에 거둔 우승은 페라리 부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어진 5년간의 지배는 F1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팀 중 하나로 페라리의 위상을 공고히 했습니다.

2000

2001

2001

[아우디 시대의 첫 V12, 무르시엘라고]

2001년, 아우디 인수 후 첫 번째로 완전히 새롭게 개발된 모델인 무르시엘라고(Murciélago)가 출시되었다. 이 모델은 람보르기니 고유의 드라마틱한 디자인과 강력한 $V12$ 엔진을 유지하면서도, 독일의 엄격한 품질 관리와 신뢰성을 성공적으로 결합했다. 이는 '이탈리아의 영혼과 독일의 기술'이라는 새로운 브랜드 철학을 시장에 증명한 첫 결과물이었다.

디아블로의 후속 모델인 무르시엘라고는 람보르기니가 11년 만에 선보이는 새로운 디자인이었다.21 이 차는 람보르기니의 상징인 시저 도어와 V12 엔진을 계승했지만, 인체공학적 설계, 마감 품질, 전반적인 신뢰성 측면에서 이전 모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발전을 이루었다.

무시엘라고의 성공은 아우디의 관리가 람보르기니의 야성적인 매력을 거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매력을 더 안정적이고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견고한 토대를 제공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2003

2003

[베스트셀러 가야르도의 등장]

2003년, $V10$ 엔진을 탑재한 '베이비 람보' 가야르도(Gallardo)가 출시되어 10년간 14,022대가 판매되며 당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 되었다. 가야르도의 폭발적인 상업적 성공은 회사의 재무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는 안정적인 2-모델 라인업 전략의 성공적인 시작을 알렸다.

가야르도는 아우디가 람보르기니를 인수하게 된 계기였던 '소형 람보르기니' 콘셉트의 실현이었다. 이 모델의 성공은 람보르기니의 비즈니스 모델을 완전히 바꾸었다. 변동성이 큰 소량의 V12 모델에만 의존하던 부티크 제조사에서, 안정적이고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는 제조사로 탈바꿈한 것이다. 가야르도가 창출한 막대한 수익은 차세대 V12 플래그십 모델 개발과 회사의 장기적인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대적인 람보르기니의 재정적 기반은 가야르도가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7

[스파이게이트 스캔들]

맥라렌이 페라리의 기밀 기술 정보를 불법적으로 입수한 사실이 드러나 F1계를 뒤흔들었습니다. 이 '스파이게이트' 사건으로 맥라렌은 1억 달러라는 기록적인 벌금을 부과받았습니다. 또한 해당 시즌의 컨스트럭터 챔피언십 포인트를 모두 박탈당했습니다.

페라리의 전 직원 나이젤 스텝니가 맥라렌의 수석 디자이너 마이크 코플란에게 780페이지에 달하는 페라리 차량의 기술 데이터를 유출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FIA의 조사 결과, 맥라렌은 이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스포츠 역사상 가장 큰 액수의 벌금과 함께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에서 제외되는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2007

2011

2011

[카본파이버 플래그십, 아벤타도르]

2011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무르시엘라고의 후속 모델인 아벤타도르(Aventador)가 공개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V12$ 엔진과 양산차 최초로 싱글 쉘 타입의 혁신적인 카본파이버 모노코크 섀시를 특징으로 한다. 이는 폭스바겐 그룹의 막대한 R&D 역량을 활용해 $V12$ 플래그십을 기술의 정점에 올려놓은 결과물이다.

아벤타도르는 폭스바겐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기술적 성취를 보여준다. 특히 카본파이버 모노코크 섀시 개발은 막대한 비용이 드는 프로젝트로, 독립 기업 시절의 람보르기니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벤타도르는 그룹의 방대한 R&D 자원을 활용하여 람보르기니의 플래그십 모델이 하이퍼카 시장에서 기술적 우위를 유지하도록 하는 새로운 전략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2014

[V6 터보 하이브리드 시대 개막]

F1이 1.6리터 V6 터보차저 엔진과 강력한 에너지 회수 시스템(ERS)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파워 유닛 규정을 도입했습니다. 이 규정 변화는 F1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큰 기술적 전환 중 하나였습니다. 메르세데스 팀이 이 변화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응하며 압도적인 지배 시대를 열었습니다.

기존의 2.4리터 V8 자연흡기 엔진을 대체한 새로운 파워 유닛은 열에너지 회수 시스템(MGU-H)과 운동에너지 회수 시스템(MGU-K)을 포함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 복잡한 기술에 대한 이해도와 준비성에서 앞선 메르세데스는 2014년부터 8년 연속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석권하는 전례 없는 지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2014

[플랫폼 전략의 완성, 우라칸]

2014년, 가야르도의 후속 모델 우라칸(Huracán)이 데뷔했다. 우라칸은 단일 모델을 넘어, 트랙 중심의 '퍼포만테'와 'STO', 오프로드 버전 '스테라토' 등 다양한 파생 모델을 성공적으로 출시하며 플랫폼 전략을 완성했다. 이는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현대적 제품 수명주기 관리(PLM)의 모범 사례가 되었다.

우라칸은 람보르기니의 제품 전략이 한 단계 성숙했음을 보여준다. 가야르도가 단일 제품의 성공이었다면, 우라칸은 하나의 플랫폼을 기반으로 다양한 고객층을 공략하는 다각화 전략의 성공이었다. 람보르기니는 시장을 세분화하여 순수주의자, 트랙 애호가, 라이프스타일 모험가 등 특정 니즈를 가진 고객을 위한 맞춤형 모델을 체계적으로 출시했다. 이 전략은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모델의 신선도를 유지하고 초기 R&D 투자를 극대화하며 전체 수익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2017

[리버티 미디어, F1 인수 완료]

미국 미디어 기업 리버티 미디어가 F1 그룹 인수를 최종 완료하며 40년간 이어진 버니 에클레스턴의 시대를 마감했습니다. 체이스 캐리가 새로운 CEO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인수는 F1의 디지털 미디어 확장과 팬 참여 증대 등 새로운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리버티 미디어는 2016년 말 F1의 지배 지분 인수에 합의했으며, 2017년 1월 23일 44억 달러 규모의 인수를 완료했습니다. 버니 에클레스턴은 명예 회장으로 물러났고, F1은 소셜 미디어 활용, 'Drive to Survive' 시리즈 제작 등 팬들과의 소통을 강화하는 새로운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2017

2018

2018

[슈퍼 SUV 우루스, 시장을 정복하다]

2018년 본격적으로 고객 인도가 시작된 SUV 우루스(Urus)는 출시와 동시에 브랜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모델이 되며 연간 판매량을 두 배 이상으로 늘렸다. 우루스의 막대한 성공은 회사의 재무 안정성을 다지고, 전동화 시대로의 전환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핵심 동력이 되었다. LM002의 정신을 계승한 최고의 전략적 성공작이다.

우루스는 일부 순수주의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람보르기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략적 결정이었다. 2022년까지 누적 생산 2만 대를 돌파하며 최단 기간 최고 판매 모델 기록을 세웠고, 이를 위해 산타가타 공장을 대대적으로 증설해야 했다. 우루스는 판매량 증대를 넘어 회사의 비즈니스 리스크를 근본적으로 줄였다. 슈퍼카 시장의 경기 변동성에 덜 민감한 새로운 고객층을 유치했으며, 브랜드의 다음 도전 과제인 '전동화'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창출하는 '현금 창출원(Cash Cow)' 역할을 하고 있다.

2021

[아부다비 그랑프리 최종랩 논란]

시즌 마지막 레이스인 아부다비 그랑프리에서 루이스 해밀턴과 막스 베르스타펜의 챔피언십이 결정되었습니다. 마지막 랩에서 레이스 디렉터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세이프티 카 규정 적용으로 베르스타펜이 해밀턴을 추월하며 첫 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이 사건은 F1 규정 적용의 일관성에 대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레이스 막판에 발생한 세이프티 카 상황에서, 당시 레이스 디렉터였던 마이클 마시는 일부 랩핑카에게만 언랩(unlap)을 허용하여 마지막 한 랩의 레이스를 재개시켰습니다. 새 타이어를 장착한 베르스타펜이 해밀턴을 극적으로 추월하며 월드 챔피언이 되었고, 이 결정은 스포츠의 공정성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촉발시켰으며, 결국 FIA의 레이스 운영 구조 개편으로 이어졌습니다.

2021

2021

[실버스톤의 콥스 코너(Copse Corner) 충돌과 51G의 충격]

영국 그랑프리 오프닝 랩에서 챔피언십 경쟁자였던 루이스 해밀턴과 막스 베르스타펜이 고속 코너인 콥스에서 충돌, 베르스타펜이 리타이어하고 해밀턴이 우승을 차지했다.

2021년 영국 그랑프리는 시즌의 분수령이 된 사건이었다. 당시 포인트 리더였던 베르스타펜은 스프린트 예선에서 폴 포지션을 차지하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일요일 결선, 두 드라이버는 첫 랩부터 휠-투-휠(Wheel-to-Wheel) 배틀을 벌이며 웰링턴 스트레이트(Wellington Straight)를 지나 콥스 코너로 진입했다. 시속 290km에 육박하는 초고속 코너에서 해밀턴은 인사이드 라인을 파고들었고, 베르스타펜은 아웃사이드에서 방어 기동을 취했다.

결과적으로 해밀턴의 메르세데스 W12 좌측 전륜과 베르스타펜의 레드불 RB16B 우측 후륜이 접촉했다. 이 충격으로 베르스타펜의 차량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타이어 배리어에 꽂혔으며, 이때 기록된 충격량은 무려 51G에 달했다. 경기는 즉시 적기(Red Flag) 발령으로 중단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는 트랙 밖에서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베르스타펜이 인근 병원으로 후송되어 정밀 검사를 받는 동안, 해밀턴은 10초 페널티를 극복하고 샤를 르클레르(Charles Leclerc)를 추월해 우승을 차지했다. 해밀턴의 자국 국기를 흔드는 세리머니에 대해 베르스타펜은 병상에서 SNS를 통해 "병원에 있는 동료를 두고 저런 축하를 하는 것은 무례(disrespectful)하다"고 비난했다. 레드불의 수뇌부 헬무트 마르코(Helmut Marko)와 크리스찬 호너(Christian Horner)는 해밀턴의 행동을 "아마추어적이고 위험한 운전"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고, 메르세데스의 토토 울프(Toto Wolff)는 이를 "레이싱 사고(Racing Incident)"로 규정하며 맞섰다. 이 사건은 두 팀 간의 감정적 골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게 만들었으며, 시즌 남은 기간 동안의 모든 경합에 독성(toxicity)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2021

2021

[몬자(Monza)의 레티필로 시케인 샌드위치 사고]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피트 아웃하던 해밀턴과 메인 스트레이트를 달려오던 베르스타펜이 1번 코너에서 충돌, 레드불 차량이 메르세데스 차량 위로 올라타며 동반 리타이어했다.

실버스톤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몬자에서 두 라이벌은 다시 한번 물리적으로 충돌했다. 상황은 피트 스톱 타이밍의 엇갈림에서 비롯되었다. 베르스타펜은 11초가 넘는 느린 피트 스톱으로 인해 예상보다 뒤쪽으로 합류했고, 해밀턴 역시 피트 스톱 후 코스로 복귀하는 시점에 베르스타펜과 조우했다.   

레티필로 시케인(Rettifilo Chicane) 진입 과정에서 베르스타펜은 아웃사이드 라인을 통해 추월을 시도했으나 공간은 협소했다. 베르스타펜의 차량이 소시지 커브(Sausage Kerb)를 타고 튀어 오르며 해밀턴의 차량 위를 덮쳤다. 이때 베르스타펜의 우측 후륜 타이어가 해밀턴의 헬멧을 직접 가격했으나, 헤일로(Halo) 안전 장치 덕분에 해밀턴은 치명상을 피할 수 있었다.   

스튜어드는 이 사고의 주된 책임이 베르스타펜에게 있다고 판단하여 다음 경기인 러시아 그랑프리에서 3-그리드 페널티를 부과했다. 이 사고로 인해 다니엘 리카르도(Daniel Ricciardo)가 맥라렌(McLaren)에게 2012년 이후 첫 우승을 안겨주는 이변이 연출되었다. 챔피언십 관점에서는 두 드라이버 모두 0점을 기록했으나, 심리적 압박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는 두 드라이버가 서로에게 단 1cm의 공간도 양보하지 않을 것임을 전 세계에 확인시켜 준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2021

2021

[라스트 랩(Last Lap)의 반전과 마이클 마시의 결정]

시즌 마지막 경기인 아부다비 GP의 마지막 바퀴에서 세이프티 카 절차 논란 속에 베르스타펜이 해밀턴을 추월하며 월드 챔피언에 등극했다.

F1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고 극적인 피날레였다. 해밀턴과 베르스타펜은 369.5점 동점으로 최종전에 돌입했다. 경기 내내 해밀턴은 압도적인 페이스로 레이스를 리드하며 통산 8번째 챔피언 등극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스 종료 5랩을 남기고 니콜라스 라티피(Nicholas Latifi)의 사고로 세이프티 카(SC)가 발령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레드불은 즉시 베르스타펜을 피트로 불러들여 소프트 타이어로 교체하는 승부수를 띄웠고, 메르세데스는 트랙 포지션을 잃을 것을 우려해 해밀턴을 스테이 아웃(Stay out) 시켰다. 논란의 핵심은 레이스 디렉터 마이클 마시(Michael Masi)의 세이프티 카 운영이었다. 당초 "백마커(Backmarker, 한 바퀴 뒤쳐진 차량)들은 추월할 수 없다"고 공지했으나, 레이스 종료 직전 "해밀턴과 베르스타펜 사이에 있는 5대의 차량만 추월을 허용한다"고 번복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마지막 1랩을 남기고 경기가 재개되었고, 신선한 타이어를 장착한 베르스타펜은 낡은 하드 타이어의 해밀턴을 5번 코너에서 추월하며 생애 첫 월드 챔피언에 등극했다. 메르세데스는 즉각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FIA는 이후 조사 끝에 "인적 오류(Human Error)"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마이클 마시를 경질했다. 이 사건은 F1 규정 운영의 투명성과 일관성에 대한 거대한 담론을 불러일으켰으며, 베르스타펜 시대의 서막을 여는 동시에 해밀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2021

2022

[안전을 위한 수직 진동 제어 규정(TD039) 시행]

FIA는 드라이버들의 건강을 보호하고 공정한 경쟁을 위해 차량의 수직 진동(Bouncing/Porpoising)을 제한하고 플로어(Floor) 유연성을 엄격히 규제하는 기술 지침을 발효했다.

FIA는 벨기에 GP부터 TD039를 적용했다. 핵심은 '공기역학적 진동 측정 지표(AOM)'를 도입하여 허용치를 넘는 차량은 지상고를 의무적으로 높이도록 강제한 것이다. 또한, 페라리와 레드불이 규정의 허점을 이용해 플로어 하단의 스키드 블록(Skid Block)을 유연하게 만들어 마모를 피하고 있다는 의혹을 차단하기 위해 플로어 강성 테스트를 강화했다. 이 조치 이후 전반기까지 강력했던 페라리 F1-75의 경쟁력은 급격히 하락했고, 레드불 RB18은 오히려 더 강력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시즌 후반 독주 체제를 굳혔다.

2022

2022

[레드불 레이싱의 재정 규정 위반]

FIA는 레드불 레이싱이 2021년 시즌 예산 상한선을 초과 지출했음을 공식 확인하고 제재를 부과했다.

2021년 챔피언십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은 2022년 말까지 이어졌다. FIA 감사 결과, 레드불은 2021년 예산 상한선인 1억 4,500만 달러를 약 1.6%(약 220만 달러) 초과 지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경미한 위반(Minor Breach)'으로 분류되었으나, 경쟁 팀들은 단 1%의 초과 비용도 차량 개발에 막대한 이점을 줄 수 있다며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레드불은 케이터링 비용, 병가 처리, 세금 공제 등의 행정적 착오라고 해명했으나, 결국 FIA와의 '인정된 위반 합의(ABA: Accepted Breach Agreement)'를 통해 700만 달러의 벌금과 향후 12개월간 윈드 터널(Wind Tunnel) 및 CFD 사용 시간 10% 삭감이라는 스포츠적 페널티를 수용했다. 이 사건은 2021년 타이틀 경쟁이 얼마나 극한의 한계 상황에서 이루어졌는지를 방증하는 동시에, F1의 새로운 재정 규정이 실제로 팀들에게 강력한 구속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022

2023

2023

[전동화 시대의 서막, 레부엘토]

2023년, 아벤타도르의 후속이자 브랜드 최초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모델인 레부엘토(Revuelto)가 공개되었다. 새로운 자연흡기 $V12$ 엔진과 3개의 전기 모터를 결합해 시스템 총 출력 1,015마력($CV$)을 발휘한다. 이는 전동화를 타협이 아닌 성능 강화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람보르기니의 미래 전략을 명확히 보여준다.

레부엘토는 내연기관, 특히 상징적인 V12 엔진을 고수하는 브랜드가 어떻게 전동화 시대를 맞이해야 하는지에 대한 람보르기니의 대답이다. 전기 모터는 단순히 배출가스를 줄이는 역할을 넘어, 내연기관의 약점인 저속 토크를 보강하고, 전기 토크 벡터링을 통해 주행 성능을 극대화하며, 총 출력을 이전 세대보다 월등히 높이는 '성능 증폭기'로 활용된다. 레부엘토는 람보르기니의 전동화된 미래가 과거보다 더욱 강력하고 드라마틱할 것임을 선언하는 대담한 출사표다.

2023

[닉 드 프리즈(Nyck de Vries) 방출과 리카르도의 알파타우리 합류]

성적 부진을 겪던 루키 닉 드 프리즈가 10경기 만에 경질되고, 레드불 리저브 드라이버였던 다니엘 리카르도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2022년 몬자에서 윌리엄스 대타로 출전해 인상적인 데뷔를 했던 닉 드 프리즈는 알파타우리(AlphaTauri) 풀타임 시트 확보 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과 잦은 사고를 냈다. 반면, 맥라렌에서 방출된 후 레드불의 서드 드라이버로 복귀한 리카르도는 실버스톤 타이어 테스트에서 현역 수준의 랩타임을 기록하며 크리스찬 호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레드불은 즉각적인 교체를 단행, 헝가리 GP부터 리카르도를 투입했다. 이는 단순히 하위 팀의 드라이버 교체가 아니라, 부진에 빠진 세르지오 페레즈를 압박하고 향후 레드불 시트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었다. 리카르도는 복귀 후 네덜란드 GP에서 손목 골절 부상을 입어 잠시 리암 로슨(Liam Lawson)에게 자리를 내주기도 했으나 , 이후 복귀하여 건재함을 과시했다.

2023

2023

[라스베이거스 스트립 서킷(Las Vegas Strip Circuit)의 개막과 드라마]

F1이 직접 프로모터로 나선 첫 번째 경기인 라스베이거스 GP가 개최되었으며, 초기 시설 문제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레이싱 쇼를 선보였다.

2023

2024

[레드불 레이싱의 리더십 위기와 권력 암투]

크리스찬 호너 팀 감독이 여성 직원에 대한 부적절한 행동 혐의로 내부 조사를 받았으며, 무혐의 처분 이후에도 자료 유출과 항소 기각 등으로 팀이 내홍을 겪었다.

시즌 개막 직전, 호너 감독에 대한 내부 고발이 접수되었다. 레드불 유한회사(GmbH)는 독립 변호사를 선임해 조사를 진행했고 2월 28일 기각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다음 날, 익명의 계정으로 F1 관계자들에게 관련 증거 파일(왓츠앱 대화 내용 등)이 유포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 사건은 단순한 스캔들을 넘어 레드불 내부의 파워 게임(태국 대주주 vs 오스트리아 본사 및 요스 베르스타펜)을 노출시켰다. 요스 베르스타펜(Jos Verstappen)은 공개적으로 호너의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다. 2024년 8월, 고발인의 항소가 최종 기각되면서 호너는 자리를 지켰으나 , 이 과정에서 팀의 핵심 엔지니어인 아드리안 뉴이(Adrian Newey)가 팀을 떠나기로 결심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2024

2024

[마이애미의 기적 - 노리스, 110경기 만에 첫 승]

마이애미 그랑프리에서 랜도 노리스(Lando Norris)가 세이프티 카의 행운과 맥라렌의 대규모 업데이트에 힘입어 막스 베르스타펜을 꺾고 커리어 첫 우승을 차지했다.

2024

2025

[레드불의 즉결 처분 - 로슨 강등, 츠노다 승격]

2025년 시즌 초반 레드불 시트에 앉았던 리암 로슨이 부진하자, 레드불은 일본 GP부터 유키 츠노다(Yuki Tsunoda)를 막스 베르스타펜의 파트너로 승격시키고 로슨을 레이싱 불스(RB)로 강등시켰다.

2025

2025

[왕의 귀환 - 맥라렌, 2년 연속 컨스트럭터 제패]

맥라렌 레이싱이 2024년에 이어 2025년에도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컨스트럭터 월드 챔피언십을 조기에 확정 지었다.

안드레아 스텔라(Andrea Stella) 체제의 맥라렌은 MCL39 차량을 통해 기술적 우위를 완전히 점했다. 랜도 노리스와 오스카 피아스트리(Oscar Piastri)라는 가장 강력한 드라이버 라인업은 매 경기 더블 포디움을 밥 먹듯이 하며 레드불을 압도했다. 이는 1998년 이후 맥라렌의 황금기가 다시 도래했음을 의미하며, 2024년의 우승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했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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