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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슨 황은 대만 태생 미국인 전기공학자이자 엔비디아의 공동 창립자 겸 CEO입니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 와 오리건 주립대와 스탠퍼드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습니다. 1993년 엔비디아를 설립하여 GPU 및 인공지능 분야를 선도하며 세계적인 기술 리더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모교에 대한 대규모 기부 등 활발한 자선 활동을 펼쳤으며, 수많은 산업 및 사회적 공헌으로 여러 상을 수상하고 2021년 타임 100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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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재계의 거인이자 삼성그룹의 제2대 총수.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신경영 선언으로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이끈 혁신가. D램에서 20개 이상의 세계 1위 제품을 만들고 국내 주식 가치 9조 원을 최초로 돌파한 인물. 비자금 뇌물 공여 차명 계좌 등 논란 속에서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한국 경제사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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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1942
1963
[젠슨 황 출생]
젠슨 황이 타이완 타이난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대만계 미국인 전기공학자이자 엔비디아의 공동 설립자이며 현재 사장 겸 CEO를 맡고 있습니다.
젠슨 황은 1963년 2월 17일 대만 타이난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훗날 엔비디아를 공동 설립하고 CEO를 맡게 될 중요한 인물로 성장하게 됩니다.
1963
1966
1966
1967
1967
1972
[미국 이민]
젠슨 황의 가족은 그가 9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처음에는 켄터키주 오네이다에 살다가 이후 오리건주에 정착했습니다.
젠슨 황은 9세가 되던 해인 1972년경 가족과 함께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켄터키주 오네이다에 잠시 머물렀고, 이후 오리건주 포틀랜드 외곽의 알로하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1972
1979
1979
1984
[오리건 주립대 학사 학위 취득]
오리건 주립 대학교에서 전기공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업을 마쳤습니다. 이후 LSI 로직과 AMD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았습니다.
젠슨 황은 1984년 오리건 주립 대학교에서 전기공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LSI 로직의 이사이자 어드밴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시스(AMD)의 마이크로프로세서 디자이너로 일하며 반도체 산업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1984
1987
1987
[삼성 2대 총수 시대 개막]
아버지 이병철 회장 사후 삼성그룹 제2대 총수이자 삼성전자 회장에 취임하며 '이건희 시대'의 서막을 열다.
1992
[스탠퍼드 대학교 석사 학위 취득]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전기공학 석사학위를 받으며 전문성을 더욱 심화했습니다. 이는 훗날 엔비디아 설립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1992년 젠슨 황은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전기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문적 역량을 강화했습니다. 이는 그가 엔비디아를 공동 설립하고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깊이 있는 지식을 제공했습니다.
1992
[D램(DRAM) 세계 1위 등극]
1983년 반도체 사업 진출 선언 약 10년 만에,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하며 D램 분야 세계 1위 메이커로 부상했습니다. 이는 당시 시장을 주도하던 일본 기업들을 제친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배경: 1983년 이병철 선대회장이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한 이후, 삼성은 64K D램부터 4M D램까지 격차를 빠르게 추격해왔습니다.
1위 등극: 1992년 9월, 세계 최초로 64M D램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D램 분야에서 일본 도시바를 제치고 세계 제1의 메이커로 부상했습니다.
1993
[엔비디아 공동 설립]
자신의 30번째 생일에 동료 엔지니어 크리스 말라코프스키, 커티스 프리엠과 함께 엔비디아를 공동 창립했습니다. 당시 PC 게임의 낮은 그래픽 품질을 개선하겠다는 목표로 3D 그래픽 가속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공동 창업자들의 신뢰 속에 초대 CEO로 추대되었습니다.
1993년, 자신의 30번째 생일에 젠슨 황은 엔비디아를 공동 설립했습니다. 그는 엔비디아의 CEO이자 사장으로서 회사를 이끌며 그래픽 처리 장치(GPU) 기술을 발전시키고 인공지능 시대를 선도하는 핵심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1993
1993
1993
["모두 바꿔라!" 신경영 선언]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파격적인 선언과 함께 '신경영'을 주창하며 삼성의 혁신을 이끌다.
이 선언은 삼성전자가 D램 시장을 넘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초석이 되었다.
1994
1994
[반도체 '초격차' 전략 (256M D램)]
1993년 신경영 선언의 '질(Quality)' 경영이 반도체 기술력으로 구현된 사건입니다. 이듬해인 1994년 8월, 세계 최초로 256M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993년 신경영 선언은 품질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한 반도체 등 첨단 산업에서 삼성이 일류 기업으로 성장하는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 회장의 질 중심 경영 철학은 D램 개발에서 즉각적인 성과로 나타났습니다.
1992년 64M D램으로 1위에 오른 지 2년 만인 1994년 8월, 256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습니다.
1995
[첫 제품 'NV1' 출시와 실패]
엔비디아의 첫 그래픽 카드인 'NV1'을 출시했으나 상업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우수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높은 가격과 당시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던 다이렉트3D(Direct3D)와의 비호환성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회사는 첫 번째 파산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1995년 출시된 'NV1'은 PC용 멀티미디어 그래픽 카드였으나, 판매는 부진했다. 가격 경쟁력 확보에 실패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다이렉트3D가 아닌 세가의 새턴 게임기 방식을 지원하는 등 시장의 흐름을 읽지 못한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NV2'의 실패까지 겹치며 회사는 존폐의 기로에 섰다.
1995
1995
1995
[구미사업장 '애니콜 화형식']
1994년 말 삼성전자 휴대폰(애니콜)의 불량률이 11.8%에 달하자, 150억 원 상당의 불량 제품 15만 대를 구미사업장에서 전량 소각하도록 지시한 사건입니다. 이는 "불량은 암이다" 라는 이 회장의 품질 경영 철학을 전 임직원에게 각인시킨 충격 요법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삼성전자가 '품질경영'을 조직 문화로 뿌리내리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배경: 1993년 신경영 선언 이후 1년이 지나도 소비자 불만이 계속되고, 특히 '애니콜' 브랜드로 막 시작한 휴대폰 사업의 불량률이 11.8%에 달하자 이 회장은 "수준 미달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적자 내고 악평 받는 사업을 왜 하는가"라고 질타하며 극단적인 처방을 내렸습니다.
사건: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임직원 2,0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량 휴대폰, 무선전화기 등 15만 대(당시 150억 원 규모)가 쌓여 불태워졌습니다.
전략적 함의: 이는 단순한 불량품 폐기가 아니었습니다. (1) 매몰 비용(Sunk Cost)의 파괴: 이미 투입된 비용(150억)보다 미래의 브랜드 신뢰라는 더 큰 가치를 선택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2) 조직 문화 혁신: "품질"이 타협 불가능한 최우선 가치임을 고통스러운 시각적 충격을 통해 조직 전체에 강제한 것입니다.
1996
[故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편지 수신]
당시 삼성의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비전이 담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에는 한국을 초고속 인터넷으로 연결하고, 비디오 게임으로 세상을 바꾸며, 비디오게임 올림픽을 열고 싶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젠슨 황은 훗날 이 편지가 자신이 한국에 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2025년 한 행사에서 젠슨 황은 "1996년 인생 처음으로 한국에서 편지를 받았다"고 밝혔다. 편지에는 '한국을 초고속 인터넷으로 연결', '비디오 게임으로 세상 변화', '비디오게임 올림픽 개최'라는 세 가지 비전과 함께 이를 위해 엔비디아의 지원을 받고 싶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는 당시 작은 스타트업이었던 엔비디아의 기술적 잠재력을 한국의 최고 경영자가 먼저 알아보았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사건이다.
1996
1996
1996
[IOC 위원으로 국제 활약]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출되며 스포츠 분야에서도 국제적인 영향력을 확대하다.
1996
[용산전자상가 방문 및 시장 개척]
창업 초기, 젠슨 황은 아시아 최대 전자제품 시장이었던 서울 용산전자상가를 직접 방문하며 한국 시장의 잠재력을 탐색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PC방과 e스포츠 문화가 고성능 그래픽 카드의 중요한 수요처가 될 것임을 일찌감치 간파했습니다. 이는 엔비디아의 초기 성장 전략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젠슨 황은 1990년대 중반, 회사가 아직 자리를 잡기 전부터 서울 용산전자상가를 자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은 게임 시장의 가치를 낮게 평가했지만 , 황은 용산과 PC방에서 열정적인 사용자층을 직접 확인하며 자신의 비전에 대한 확신을 굳혔다. 이러한 현장 중심의 시장 조사는 훗날 지포스 시리즈가 한국 시장을 장악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96
1997
['NV3(RIVA 128)' 성공으로 재기]
시장 표준을 수용한 'NV3(제품명 RIVA 128)'를 출시하며 시장에서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 제품은 4개월 만에 약 100만 대가 판매되는 성공을 거두며 회사를 파산 위기에서 구해냈습니다. 이 성공을 발판으로 엔비디아는 업계에서 본격적으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NV1'과 'NV2'의 실패를 교훈 삼아, 'NV3'는 업계 표준 기술과 호환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RIVA 128'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이 제품은 뛰어난 성능으로 시장의 인정을 받았고, 약 4개월 만에 100만 대를 판매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성공으로 확보한 자금은 차세대 제품 개발의 원동력이 되었고, 1998년 'RIVA TNT'의 성공으로 이어지며 엔비디아의 명성을 굳혔다.
1997
1997
1997
[1997년 신년사 위기 경영]
이건희 회장은 1997년 1월 신년사를 통해, 국가적 외환위기(IMF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에 이미 심각한 위기를 경고했습니다. 그는 "삼성은 물론, 나라마저 2류, 3류로 떨어질 수 있다" 고 선언하며, '헝그리 정신'과 '모방 정신'을 버리고 '자율과 창의'에 기반한 경영을 촉구했습니다. 이러한 선제적 위기 인식은 삼성이 1996년부터 비상 경영에 돌입하여 IMF 위기를 타 기업보다 성공적으로 극복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997년 말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기 전, 1996년 호황기 속에서도 이 회장은 이미 위기를 직감했습니다. 1997년 1월 신년사에서 그는 "외부환경의 위기, 내부혁신의 위기, 시간의 위기"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며, 21세기를 준비할 시간이 3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절박함을 토로했습니다.
삼성은 이미 1996년부터 비상 경영에 돌입, 한계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경영 전반의 원가를 절감하는 선제적 구조조정을 단행했습니다. 그 결과 삼성은 외환 위기의 타격을 최소화하며 생존했고, 2002년에는 삼성의 무역수지 흑자(145억 달러)가 한국 전체 흑자(108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1999
[엔비디아 상장 및 올해의 기업가 선정]
'RIVA' 시리즈의 연이은 성공에 힘입어 1999년 1월 22일 나스닥에 성공적으로 상장했습니다. 기업 공개(IPO)를 통해 막대한 자금을 확보했으며, 이는 향후 GPU 개발을 위한 대규모 R&D 투자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엔비디아는 기술 혁신을 가속화할 수 있는 동력을 얻었습니다.
젠슨 황은 언스트 엔 영에 의해 첨단 기술 부문 올해의 기업가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1999년, 엔비디아의 주식이 공개되어 회사의 성장을 공식화했습니다. 같은 해 젠슨 황은 언스트 엔 영(Ernst & Young)으로부터 첨단 기술 부문 올해의 기업가로 선정되며 그의 비전과 리더십을 인정받았습니다.
1999
1999
[세계 최초 GPU '지포스 256' 출시]
세계 최초로 'GPU(Graphics Processing Unit)'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지포스 256'을 출시했습니다. 이 제품은 CPU가 담당하던 그래픽 연산(T&L)을 하드웨어적으로 처리하며 3D 그래픽 성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습니다. 이로써 엔비디아는 GPU라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업계 표준을 정의하는 선도 기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지포스 256(코드명 NV10)'은 1999년 8월 31일에 발표되어 10월 11일에 SDR 메모리 버전이 공식 출시되었다. 엔비디아는 이 제품을 '세계 최초의 GPU'로 마케팅하며, 단순한 그래픽 칩이 아닌 독립적인 프로세서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 전략은 시장에 강력한 인상을 남겼고, 컴퓨팅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999
2000
[닷컴버블 속 PC방 붐과 성장]
2000년 닷컴 버블 붕괴로 수많은 기술 기업이 파산했지만, 엔비디아는 견고한 실적을 바탕으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특히 한국의 PC방 붐은 '지포스' 시리즈의 폭발적인 수요를 창출하며 엔비디아의 안정적인 수익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엔비디아가 기술 개발에 지속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2000년 3월 닷컴 버블이 붕괴하며 나스닥 지수가 폭락했지만 , 엔비디아는 달랐다. 2000년에 이미 매출 10억 달러를 달성했고 , 꾸준한 순이익을 기록하며 견실한 재무 상태를 유지했다.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한국의 PC방 시장이 있었다. 고사양 3D 게임 구동을 위해 지포스 그래픽 카드를 대량으로 구매하는 PC방의 존재는 엔비디아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은 안정적인 수요를 제공했고, 이는 회사의 R&D 투자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2000
2003
[모리스 창 모범적 리더십 상 수상]
팹리스 반도체 협회로부터 팹리스 반도체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모리스 창 모범적 리더십 상을 수상했습니다.
2003년, 젠슨 황은 팹리스 반도체 협회로부터 모리스 창 모범적 리더십 상을 수상하며 팹리스 반도체 산업의 개발, 혁신, 성장 및 장기적인 기회 창출에 기여한 뛰어난 리더로 인정받았습니다.
2003
2006
[CUDA 플랫폼 발표, AI 시대의 서막]
병렬 컴퓨팅 플랫폼 'CUDA(Compute Unified Device Architecture)'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GPU를 그래픽 처리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목적의 연산에도 활용할 수 있게 만든 혁신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당장은 큰 수익이 되지 않았지만, 이 결정은 훗날 엔비디아가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 기업으로 도약하는 결정적 초석이 되었습니다.
2006년 CUDA의 등장은 GPU의 가능성을 재정의했다. 개발자들은 C언어 등을 통해 GPU의 수많은 코어를 활용해 복잡한 연산을 병렬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AI 시장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젠슨 황은 GPU의 병렬 처리 능력이 과학 및 연구 분야에서 잠재력이 클 것이라 예견하고 장기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이 선구적인 결정 덕분에, 훗날 딥러닝 연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을 때 엔비디아 GPU는 대체 불가능한 도구로 자리 잡게 되었다.
2006
['보르도 TV' 글로벌 TV 시장 1위]
2005년 '밀라노 선언'을 통해 '디자인 경영'을 선포한 지 1년 만에 , 와인잔을 형상화한 '보르도 TV'를 출시하여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제품의 성공으로 삼성전자는 2006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매출액 기준 글로벌 TV 시장 1위를 달성했습니다. 이는 삼성전자의 경영 핵심이 '품질'을 넘어 '디자인'과 '브랜드'로 성공적으로 확장되었음을 입증하는 사건입니다.
2007
[Pioneer Business Leader Award 수상 및 고액 연봉 CEO 선정]
기업 및 자선 활동 공로로 실리콘 밸리 교육 재단의 Pioneer Business Leader Award를 수상했으며, 포브스로부터 61번째로 높은 급여를 받는 미국 CEO로 선정되었습니다.
2007년, 젠슨 황은 그의 기업가적 리더십과 사회 공헌 활동을 인정받아 실리콘 밸리 교육 재단의 Pioneer Business Leader Award를 수상했습니다. 또한 같은 해 2,460만 달러의 급여를 받아 포브스에서 선정한 미국 내 61번째로 높은 급여를 받는 CEO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2007
2008
[금융위기 속 '연봉 1달러' 선언]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전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젠슨 황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연봉을 1달러로 삭감했습니다. 이는 회사의 재정 부담을 줄이고 위기 극복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조치였습니다. 그는 절감된 비용을 핵심 인재 영입과 기술 개발에 투자하며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이어진 경기 침체 기간 동안, 젠슨 황은 CEO로서 솔선수범하여 자신의 연봉을 1달러로 낮췄다. 이는 단순한 비용 절감을 넘어, 직원들과 고통을 분담하고 회사의 장기적인 비전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는 리더십의 발현이었다. 이 시기를 무사히 넘긴 덕분에 엔비디아는 AI 혁명이 본격화되었을 때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기술력과 인재를 확보할 수 있었다.
2008
2008
2008
[비자금 사건으로 회장직 퇴진]
삼성 비자금 사건이 불거지며 조세 포탈 혐의로 기소, 경영 일선에서 전격 물러나다.
이 사건은 그룹의 지배 구조 및 편법 승계 논란을 촉발했다.
2008
[스탠퍼드 대학교 공학 센터 건립 기부]
모교인 스탠퍼드 대학교에 3천만 달러를 기부하여 젠슨 황 공학 센터 건설을 지원했습니다. 이는 스탠퍼드 과학 및 공학 쿼드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2008년 9월, 젠슨 황은 모교인 스탠퍼드 대학교에 3천만 달러를 기부하여 젠슨 황 공학 센터(Jen-Hsun Huang School of Engineering Center) 건립을 후원했습니다. 이 건물은 스탠퍼드 과학 및 공학 쿼드(Science and Engineering Quad)를 구성하는 핵심 시설 중 하나입니다.
2008
2008
[경기 침체기 급여 1달러 삭감]
글로벌 경기 침체 기간 동안 CEO로서 솔선수범하여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자신의 연봉을 1달러로 자발적으로 삭감했습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지속된 경기 침체 기간 동안, 젠슨 황은 리더로서 책임감을 보여주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급여를 1달러로 줄였습니다. 이는 그의 윤리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됩니다.
2008
2009
2009
[세계 부자 순위 205위]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대한민국 최고 갑부로서 30억 달러의 재산으로 205위를 기록하다.
2009
[오리건 주립대 명예 박사 학위 수여]
모교인 오리건 주립 대학교 졸업식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으며 학문적 업적과 사회적 기여를 인정받았습니다.
2009년 6월 13일, 젠슨 황은 오리건 주립 대학교 졸업식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공학 분야와 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입니다.
2009
2010
[젠슨 황 공학 센터 완공]
젠슨 황의 기부로 시작된 스탠퍼드 대학교의 젠슨 황 공학 센터가 완공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과학과 공학 연구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2010년에 스탠퍼드 대학교의 젠슨 황 공학 센터가 완공되었습니다.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Bora Architects에 의해 설계된 이 건물은 젠슨 황의 기부를 통해 건립되었으며, 스탠퍼드의 과학 및 공학 쿼드를 구성하는 중요한 건물 중 하나입니다.
[스타크래프트2 행사 참석차 방한]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스타크래프트 II: 자유의 날개' 출시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이는 그의 공식적인 방한으로, 엔비디아의 성장에 결정적이었던 한국 게임 커뮤니티와의 유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그의 꾸준한 '친(親)게이머' 행보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젠슨 황의 2010년 방한은 블리자드의 '스타크래프트 II' 글로벌 출시 기념 파티 참석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는 2025년 방한 이전까지 그의 마지막 공식 방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방문은 엔비디아의 뿌리가 게임에 있으며, 한국의 e스포츠 시장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10
2010
2010
[삼성전자 회장 경영 복귀]
2년간의 퇴진 후 삼성전자 회장으로 경영에 전격 복귀하며 "앞으로 10년 이내에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제품이 사라질 것"이라는 위기론을 제기하다.
2010
2010
[국내 최초 주식가치 9조 돌파]
국내 최초로 보유 주식 지분가치가 9조 2,230억 원을 돌파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주식 부호로 기록되다.
이는 한국 경제사에 기록적인 이정표를 남겼다.
2011
2011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 달성]
010년 '갤럭시 S'를 출시한 지 불과 1년 만에, 삼성전자가 2011년 연간 스마트폰 판매량에서 애플과 노키아를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습니다. 이는 '갤럭시 S' 시리즈의 성공적인 안착과 빠른 시장 대응(패스트 팔로워 전략)이 결실을 본 것입니다. 2012년 1분기에는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전체 휴대폰 시장에서도 노키아의 14년 아성을 무너뜨리고 1위에 등극했습니다.
이는 1993년 '품질', 2006년 '디자인'에 이어 2011년 '속도와 플랫폼 적응'이라는 이 회장 경영의 3번째 성공입니다. 하드웨어 제조 기술력(반도체, 디스플레이)에 '갤럭시'라는 강력한 브랜드를 입히고, '안드로이드'라는 개방형 플랫폼에 신속하게 적응하여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2011
2011
[원불교 센터에 120억 기부]
아내 홍라희 여사와 함께 원불교 해외 포교를 위한 '원달마센터' 건립에 120억 원을 기부하다.
2012
['알렉스넷', AI 혁명의 기폭제]
이미지 인식 대회 '이미지넷'에서 엔비디아 GPU로 훈련된 '알렉스넷(AlexNet)' 신경망이 압도적인 성능으로 우승했습니다. 이 사건은 딥러닝의 잠재력을 전 세계에 증명하며 현대 AI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2006년 CUDA에 대한 젠슨 황의 장기적인 투자가 마침내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알렉스넷'의 성공은 AI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이전까지 외면받던 딥러닝 기술이 엔비디아 GPU의 강력한 병렬 처리 능력과 결합하여 놀라운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AI 연구자들 사이에서 CUDA의 인지도가 급상승했고, 엔비디아는 딥러닝 분야에 대한 투자를 본격적으로 확대하며 AI 반도체 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2012
2014
2014
[심장마비로 장기 와병 시작]
한남동 자택에서 호흡곤란과 심장마비 증세로 병원에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으나, 이후 의식불명 상태로 장기 투병 생활이 시작되다.
2014
2014
[사망 오보 해프닝 발생]
특정 인터넷 매체에서 이건희 회장의 사망 보도가 나왔으나, 삼성 측은 사실무근이며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히며 해프닝으로 일단락되다.
2016
2016
[성매매 의혹 영상 유출]
이건희 회장으로 보이는 남성이 유흥업소 여성들에게 금품을 건네는 모습이 담긴 성매매 의혹 동영상이 언론에 공개되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다.
2018
2018
[차명계좌 및 횡령 혐의 입건]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임원 명의의 차명계좌를 통한 조세 포탈과 일가 주택 공사비 법인 자금 대납 혐의로 이건희 회장을 입건하고 검찰에 송치하다.
2018
[최초의 'Edge 50'에 등재]
최초로 발표된 'Edge 50' 목록에 등재되어 에지 컴퓨팅 분야에서 세계 50대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선구적인 리더십을 보여줍니다.
2018년 6월 13일, 젠슨 황은 최초로 발표된 'Edge 50' 목록에 이름을 올리며 에지 컴퓨팅(Edge Computing) 분야에서 전 세계 50대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는 기술 산업 내 그의 지대한 영향력을 입증하는 사건입니다.
2018
2020
2020
[영원한 이별, 이건희 별세]
약 6년 5개월간의 장기 투병 끝에 삼성서울병원에서 향년 79세로 별세하다.
사망 직전 보유 재산은 약 23조 7,100억 원으로 알려져 대한민국 최고 갑부였던 그의 삶을 마무리했다.
2020
[Eurostars '올해의 공급업체 CEO' 및 대만대 명예박사]
Eurostars AutomotiveNewsEurope에서 '올해의 공급업체 CEO'로 선정되었고, 국립대만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2020년 11월, 젠슨 황은 Eurostars AutomotiveNewsEurope에서 '올해의 공급업체 CEO'로 선정되며 자동차 산업에서의 기여를 인정받았습니다. 같은 달 국립대만대학교 개교기념일에는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으며 대만에서도 그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2020
2021
[순자산 143억 달러 기록]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에 따르면 젠슨 황의 순자산이 약 143억 달러에 달하며 그의 경제적 성공을 보여주었습니다.
2021년 4월,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에서 젠슨 황의 순자산이 143억 달러(약 14조 3천억 원)로 평가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엔비디아를 통해 이룩한 막대한 경제적 성공과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2021
2021
[반도체 산업 최고 영예, 로버트 N. 노이스 상 수상]
반도체 산업 협회(SIA)로부터 업계 최고의 영예인 로버트 N. 노이스 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반도체 산업에 대한 그의 지대한 공헌을 상징합니다.
2021년 8월 12일, 반도체 산업 협회(SIA)는 젠슨 황이 2021년 업계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로버트 N. 노이스 상을 수상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상은 반도체 산업의 혁신과 성장에 탁월한 기여를 한 리더에게 수여됩니다.
2021
2021
[타임 100 선정]
타임(Time)지가 매년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목록인 '타임 100'에 포함되며 글로벌 리더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습니다.
2021년 9월 15일, 젠슨 황은 타임(Time)지에서 매년 발표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목록인 '타임 100'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는 그가 기술 산업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2021
2024
[엔비디아, 시가총액 세계 1위 등극]
생성형 AI 열풍에 힘입어 엔비디아의 주가가 폭등하며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을 제치고 전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에 올랐습니다. 이는 30여 년 전 작은 스타트업으로 시작한 엔비디아가 AI 시대의 가장 핵심적인 기업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젠슨 황은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CEO로 등극했습니다.
2020년대 이후 불어닥친 AI 광풍의 최대 수혜 기업이 된 엔비디아는 2024년 6월, 마침내 세계 시가총액 1위를 달성했다. AI 모델 학습에 필수적인 GPU를 사실상 독점 공급하며 80%가 넘는 경이적인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는 등 시장 지배력을 과시했다. 이는 젠슨 황이 수십 년에 걸쳐 일관되게 추진해 온 비전과 전략이 거둔 결실이었다.
2024
2025
[이재용·정의선과 '깐부치킨' 회동]
15년 만의 방한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서울 삼성동의 '깐부치킨' 매장에서 '치맥 회동'을 가졌습니다. '깐부'라는 상징적인 장소에서 한국 대표 기업 총수들과의 파트너십을 과시했습니다. 이는 반도체, AI, 자율주행 등 미래 산업 분야에서 세 기업 간의 강력한 협력 관계를 상징하는 장면이었습니다.
APEC 정상회의 참석차 방한한 젠슨 황은 한국의 '치맥' 문화를 경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에 '깐부치킨'에서의 회동이 성사되었다. '깐부'는 '친한 친구'나 '동반자'를 뜻하는 은어로, 세 사람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상징하는 장소로 선택되었다. 황 CEO는 두 회장에게 위스키와 엔비디아의 초소형 AI 슈퍼컴퓨터 'DGX 스파크'를 선물하며 "우리의 파트너십과 세계의 미래를 위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지포스 25주년 페스티벌 참석]
'치맥 회동' 직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에 참석해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는 "지포스가 없었다면, PC방이 없었다면, e스포츠가 없었다면 지금의 엔비디아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한국 게이머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는 엔비디아의 성공 신화에서 한국 시장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입니다.
지포스 브랜드 탄생 2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이재용, 정의선 회장과 함께 등장한 젠슨 황은 한국 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는 한국의 PC 게임 및 PC방 문화가 AI 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강조하며, 엔비디아의 뿌리가 게이머 커뮤니티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 행사는 그의 여정이 게임에서 시작해 AI로 정점에 이르는 서사를 완성하는 상징적인 자리였다.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