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28- 22:22:46
이탈리아의 철학자, 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입니다.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실험적 검증을 통한 물리학의 선구자였습니다. 망원경을 개량하여 천체 관측에 응용하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강력히 지지했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 대립,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가택 연금되는 고난을 겪었으나, 운동 법칙 확립, 목성 위성 및 금성 위상 발견 등 다수의 획기적인 과학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갈릴레오 갈릴레이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최근 수정 시각 : 2025-11-15- 00:13:03
피사의 사탑은 850년의 역사 자체가 '위험한 불균형'과 '필사적인 균형 찾기' 사이의 투쟁을 보여주는 기념비입니다. 1173년, 연약한 지반 에 얕은 3미터 기초 라는 치명적인 설계 결함으로 착공된 순간부터 탑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100년간의 전쟁 이 공사를 중단시켜 지반이 안정화될 시간을 벌어주며 탑을 구했습니다. 1990년 붕괴 직전의 폐쇄는 마침내 '힘'이 아닌 '균형'으로 접근하는 발상의 전환을 이끌었습니다. 피사의 사탑은 '실패했기에 성공한' 건축물로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1173
1173
[1차 공사 착공]
피사 공화국의 군사적 성공과 번영을 기념하기 위해 '기적의 광장(Piazza del Duomo)'에 대성당의 종탑(캄파닐레)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차 공사는 건축가 보나노 피사노의 주도하에 진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 흰색 대리석을 사용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기반이 다져졌습니다. 하지만 이 기반은 치명적인 설계 결함을 안고 있었습니다.
착공 배경: 피사의 사탑은 피사 대성당(두오모)에 부속된 종탑(캄파닐레)으로 계획되었습니다. 당시 해양 강국으로 번영하던 피사가 사라센 제국과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며 1172년 1월, 한 미망인의 기부금(Donna Berta di Bernardo)을 바탕으로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1173년 8월 9일, 공식적인 기반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설계 및 건축가: 1차 공사의 책임 건축가는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의 16세기 기록에 따라 '보나노 피사노(Bonanno Pisano)'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탑은 원주형 캄파닐레로 , 흰색 대리석을 사용한 화려한 외관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치명적 결함 예견]
탑의 기울어짐은 이 착공 시점부터 예견되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1)매우 부적절한 지반과 (2)치명적으로 얕은 기초 설계의 조합이었습니다. 피사 지역은 고대에 저습지였던 곳으로, 지반은 점토, 미세 모래, 조개껍데기 등으로 구성된 매우 약하고 불안정한 충적토였습니다. 이러한 연약 지반에도 불구하고, 건축가는 14,700톤(약 14,453톤)이 넘는 대리석 탑의 하중을 지탱할 기초를 고작 3미터 깊이로 설계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지반 공학적 관점에서 볼 때, 14,000톤 이상의 하중을 고작 3미터 깊이의 기초로 연약한 점토층 위에 올리려는 시도 자체가 구조적 실패를 보장한 것이었습니다. 탑의 운명은 첫 삽을 뜬 1173년에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1178
1178
[최초 기울어짐 발견 및 1차 공사 중단]
착공 5년 후, 탑이 3층 높이(약 11미터)에 도달했을 때 구조물은 이미 북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연약한 지반이 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침하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로 인해 공사는 약 100년 가까이 전면 중단되었습니다.
1차 공사 중단: 기울어짐이 감지되자 공사는 중단되었습니다. 공사가 중단된 표면적인 이유는 피사 공화국이 제노바, 루카, 피렌체 등 주변 도시 국가들과의 끊임없는 전쟁에 휘말렸기 때문입니다.
역설적 구원: 이 100년간의 '전쟁으로 인한 공사 중단'은 피사의 사탑을 구원한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만약 공사가 강행되었다면, 지반이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탑은 거의 확실하게 무너졌을 것(certainly have toppled) 입니다. 이 긴 휴지기 동안, 탑의 하중을 받은 지반의 점토층이 서서히 압축되고 다져지면서(consolidate) , 다음 단계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정성을 '우연히'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즉, 피사의 군사적 위기가 역설적으로 건축물의 생존을 보장한 셈입니다.
1272
1272
[2차 공사 재개 및 수정 시도]
약 1세기의 중단 끝에 2차 공사가 재개되었습니다. 새로운 건축가 조반니 디 시모네는 이미 발생한 기울기를 보정하기 위해, 기울어진 남쪽의 층을 더 낮게, 반대편인 북쪽 층을 더 높게 쌓아 올리는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공사 재개: 1272년, 조반니 디 시모네(Giovanni di Simone)의 감독하에 공사가 재개되었습니다. 이때 탑은 이미 북쪽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보정 시도: 시모네는 기울기를 '시각적으로' 바로잡기 위해 직관적인 해결책을 사용했습니다. 즉, 탑이 가라앉는 남쪽의 아케이드 기둥과 벽을 더 짧게(shorter side), 반대편인 북쪽을 더 길게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탑은 수직이 아닌, 위로 갈수록 꺾이는 '바나나'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공학적 오류: 이 시도는 지반 공학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시모네의 해결책 은 문제의 원인인 '불안정한 지반'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시각적 증상'만을 덮으려 한 것입니다. 오히려 기울어진 쪽에 더 많은 대리석(더 무거운 쪽)을 추가하는 대신, 반대편을 더 높게 쌓음으로써 탑의 전체 무게 중심을 높이고 불균형을 심화시켰습니다. 그 결과, 탑은 더 큰 하중을 받아 더 심하게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1284
1284
[2차 공사 재 중단]
조반니 디 시모네의 보정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탑의 기울기가 더욱 심각해지자 공사는 다시 중단되었습니다. 시모네는 7층 처마 장식에 도달했을 때(1278년) 이미 탑이 남쪽으로 약 1도 기울어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1284년 피사가 또다시 전쟁(멜로리아 해전)에 휘말리면서 공사는 수십 년간 멈췄습니다.
외부 요인: 1178년의 1차 중단과 마찬가지로, 1284년 피사가 제노바와의 멜로리아 해전에서 참패하면서 피사 공화국의 황금기가 막을 내렸고, 이는 탑의 공사를 다시 한번 장기간 중단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1차 중단이 '전쟁'이라는 외부 요인에 의해 전적으로 촉발되었다면 , 2차 중단은 '공학적 실패 인지' 와 '외부 요인' 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건축가는 자신의 시도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다는 데이터(기울기 심화)를 확인하고 작업을 멈췄습니다.
1372
1372
[3차 공사 및 종탑 완공]
착공 후 약 200년 만에 마침내 탑이 완공되었습니다. 토마소 디 안드레아 피사노의 감독하에 8층 종탑이 올려졌습니다. 이때에도 기울기를 보정하기 위해 종탑 자체를 기울어진 방향과 반대로 약간 틀어서 올렸으며 , 총 7개의 종이 설치되었습니다.
최종 건축가: 3차 공사이자 종탑의 완공은 토마소 디 안드레아 피사노(Tommaso di Andrea Pisano)가 담당했습니다.
마지막 보정 시도: 그는 조반니 디 시모네의 '바나나' 형태 위에 종탑을 올리면서, 기울기를 만회하기 위해 종탑을 북쪽으로 다시 살짝 꺾어 올렸습니다. (남쪽 6계단, 북쪽 4계단). 이로 인해 탑은 미묘한 'S'자 형태(S-shape) 를 갖게 되었습니다.
탑은 '곧게' 세워진 것이 아니라, 두 번의 실패한 보정 시도(1272년, 1372년)가 누적되어 'S'자로 휜 채 불안정하게 완공되었습니다. 이미 1350년에 1.4도 기울어져 있었으며, 7개의 무거운 종 (가장 큰 것은 3.5톤)을 올린 것은 가뜩이나 불안정한 구조물에 엄청난 하중을 추가한 행위였습니다.
1564
[갈릴레오 갈릴레이 탄생]
이탈리아 피사에서 유명한 류트 연주가 빈센초 갈릴레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15세기의 조상인 갈릴레오 보냐우티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2월 15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피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빈센초 갈릴레이는 유명한 류트 연주가이자 음악 이론가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조상인 갈릴레오 보냐우티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가문이 성을 '갈릴레이'로 바꾼 것과, 당시 맏아들의 이름을 성을 변형하여 붙이는 관습에 따라 지어졌습니다.
1564
1575
[수도원 학교 입학 및 초기 학문적 불만]
11세에 피렌체 근처 발롬브로사 수도원 학교에 입학하여 인문학을 배웠으며,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레오는 11세경 피렌체 근처의 발롬브로사 수도원 학교에 입학하여 인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대해 처음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1세에'라는 표현은 추정 연도에 해당합니다.
1575
1586
['작은 천칭' 저술]
공기 및 수중 물질의 무게를 측정하는 정확한 저울에 대한 소책자 '작은 천칭'(The Little Balance)을 저술하며 그의 초기 과학적 연구 성과를 보여주었습니다.
갈릴레오는 1586년 공기 중과 수중에서 물질들의 무게를 측정하기 위한 정확한 저울을 설명한 '작은 천칭'(The Little Balance)이라는 소책자를 저술했습니다. 이 저서는 그의 초기 과학적 문서 중 하나입니다.
1586
1589
[피사 대학 수학 교수 부임 및 '운동에 대하여' 저술]
피사 대학교의 수학 교수로 부임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낙체 이론에 반박하는 내용의 '운동에 대하여'를 저술했습니다.
갈릴레오는 1589년 피사 대학교의 수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운동에 대하여'(Pisan De Motu, On Motion)를 저술했으며,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낙체의 속도가 무게에 비례한다'는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반박했습니다.
1589
1590
1590
[갈릴레이의 낙하 실험]
유명한 일화에 따르면, 피사 대학의 교수였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탑 꼭대기에서 무게가 다른 두 물체 를 떨어뜨려 동시에 떨어지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중력 이론을 반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갈릴레이 자신에 의해 기록된 바가 없으며 ,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실제 실험이 아닌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이었거나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진위 여부 (신화): 이 실험은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갈릴레이 본인이 직접 이 실험에 대해 기록한 바가 전혀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의 제자인 빈첸초 비비아니가 1654년(갈릴레이 사후)에 저술한 전기 에서 처음 등장하며, 스승을 실험가로서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로 해석됩니다.
대체 역사: 유사한 실험은 갈릴레이 이전에 이미 네덜란드의 시몬 스테빈이 1586년 델프트의 탑에서 수행한 바 있습니다. 갈릴레이는 실제 탑에서 실험하는 대신, 빗면 실험이나 "사고 실험" 을 통해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 사건은 탑의 물리적 역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문화적 역사에는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미 유명한 건축적 '오류'(기울어진 탑)가 과학적 '오류'(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를 바로잡는 무대로 사용됨으로써, 피사의 사탑은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과학 혁명의 아이콘'이라는 강력한 상징성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1600
갈릴레오는 마리나 감바와의 사실혼 관계에서 1600년에 첫째 딸 비르지니아를 얻었습니다. 당시 혼외자였기 때문에, 후에 비르지니아는 수녀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1600
1601
갈릴레오는 마리나 감바와의 사실혼 관계에서 1601년에 둘째 딸 리비아를 얻었습니다. 리비아 역시 혼외자였기에 후에 수녀원에 들어가 아르찬젤라 수녀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1601
1606
[막내 아들 빈센초 출생 및 '컴퍼스의 작동' 발행]
마리나 감바와의 사실혼 관계에서 막내 아들 빈센초가 태어났으며, 같은 해 '기하학 및 군사 영역에서의 수행을 다룬 컴퍼스의 작동' 입문서를 발행했습니다.
갈릴레오는 1606년에 마리나 감바와의 사실혼 관계에서 막내 아들 빈센초를 얻었습니다. 같은 해, 그는 기하학 및 군사 영역에서의 컴퍼스 활용법을 다룬 입문서인 '기하학적 및 군사적 컴퍼스의 작동'(Le Operazioni del Compasso Geometrico et Militare)을 발행하여 과학 기술 분야에 기여했습니다.
1606
1609
[망원경 개량 및 대중에 첫 공개]
네덜란드에서 제작된 3배율 망원경을 개량하여 30배율 망원경을 만들고, 베네치아 입헌자들에게 최초로 설명하며 그의 혁신적인 관측 시대를 열었습니다.
갈릴레오는 1609년 네덜란드 망원경을 개량하여 30배율 망원경을 제작했습니다. 그는 이를 천체 관측에 응용하며 혁신적인 발견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8월 25일, 그는 베네치아 입헌자들에게 자신의 개량된 망원경을 설명하며 그 유용성을 알렸습니다.
1609
1610
1610년, 갈릴레오는 피렌체의 대공인 메디치 가문의 코지모 2세의 초청을 받아 피렌체에 부임하여 그의 과학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1610
1610
[목성의 4대 위성 발견]
망원경을 이용해 목성 주위를 도는 세 개의 '별'(위성)을 처음 관측하였고, 며칠 후 네 번째 위성 가니메데를 발견하여 목성의 4대 위성을 확인했습니다. 이는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관에 반하는 중대한 발견이었습니다.
갈릴레오는 1610년 1월 7일 밤중에 망원경으로 목성 주위를 도는 세 개의 별을 관측했습니다. 다음 날 관측을 통해 이 별들의 위치가 변하는 것을 확인했고, 1월 13일에는 네 번째 위성인 가니메데를 발견했습니다. 이로써 이오, 유로파, 칼리스토, 가니메데로 이루어진 목성의 4대 위성(갈릴레이 위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는 지구중심설에 대한 중요한 반박 증거가 되었습니다.
1610
1610
['별에서 온 메신저' 출판]
그의 초기 망원경 관측 결과를 담은 '별에서 온 메신저'(Sidereus Nuncius)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는 달의 반점, 목성의 위성 등이 서술되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는 중요한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1610년 3월, 갈릴레오는 '별에서 온 메신저'(Sidereus Nuncius)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책에는 그가 망원경으로 관측한 달의 표면, 목성의 4대 위성, 그리고 은하수가 수많은 별들의 집합체라는 사실 등이 담겨 있었으며, 이는 당시 지배적이던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에 강력히 반박하며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지지하는 첫 번째 과학적 저서로 평가됩니다.
1610
1610
[금성의 위상 변화 관찰 시작]
금성의 위상이 달처럼 변하는 현상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금성이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예측과 일치하며,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에 결정적인 반박 증거가 되었습니다.
갈릴레오는 1610년 9월부터 금성의 위상이 달의 위상 변화와 유사하게 변하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이 관측 결과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 모델이 금성의 모든 위상을 예측할 수 있는 반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 모델은 금성의 초승달 같은 위상만을 예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태양중심설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1610
1611
[로마 방문 및 린체이 아카데미 회원 활동]
뛰어난 학자들이 많았던 예수회 철학자 및 수학자들에게 로마에서 자신의 망원경 성능과 목성의 위성 관측 사실을 증명했으며, 린체이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1611년, 갈릴레오는 로마에 방문하여 예수회의 영향력 있는 학자들에게 자신의 망원경 성능을 시연하고, 목성의 4대 위성과 관련된 사실들을 직접 관측하게 했습니다. 이 방문 동안 그는 저명한 린체이 아카데미(Accademia dei Lincei)의 회원이 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1611
1612
[지동설 반대 부상 및 토성, 해왕성 관찰]
태양 중심 이론에 대한 반대가 수면 위로 부상했으며, 토성의 고리를 처음 관찰했으나 3개의 계로 오인했습니다. 또한 해왕성을 관찰했지만 행성임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1612년, 갈릴레오가 지지했던 우주의 태양 중심 이론에 대한 반대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토성을 관찰하며 고리를 발견했지만, 처음에는 이를 세 개의 계로 착각했습니다. 또한 해왕성을 관찰했으나, 이것이 행성인지는 깨닫지 못하고 희미한 별 중 하나로 기록했습니다.
1612
1613
['흑점에 관한 편지들' 출간]
태양의 흑점에 대해 설명한 '흑점에 관한 편지들'(Letters on Sunspots)을 출간하며 태양이 변할 수 있다는 주장을 지지하고 천동설을 반박했습니다.
1613년, 갈릴레오는 태양 흑점의 존재와 그것이 태양의 표면이 변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흑점에 관한 편지들'(Letters on Sunspots)을 출간했습니다. 이 저서는 천동설의 완벽한 천체 개념에 대한 도전을 더욱 강화했으며, 금성 위상 관측과 함께 지동설 전환을 촉진했습니다.
1613
1614
[카치티 사제의 이단 주장]
산타 마리아 노벨라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 토마소 카치티가 갈릴레오의 지구 운동 이론을 비난하며 그의 이론이 이단에 가깝다고 주장했습니다.
1614년, 산타 마리아 노벨라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 토마소 카치티는 설교를 통해 갈릴레오의 지구 운동에 대한 의견을 강하게 비난하며, 그의 이론들이 위험하고 이단에 가깝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갈릴레오와 교회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614
1615
[검사성성 고발 및 로마 방문, '크리스티나 공작부인에게 보내는 편지' 준비]
검사성성에 고발되자 자신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변호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으나, 이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또한 '크리스티나 공작부인에게 보내는 편지' 원고를 준비했습니다.
1615년, 갈릴레오는 검사성성에 고발되었고, 이를 알게 되자 자신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변호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이 방문은 그의 주장을 인정받는 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이 해에 그는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옹호하고 성서와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크리스티나 공작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원고를 준비했습니다. 이 편지는 1636년에야 발표되었습니다.
1615
1616
[지동설 금지 및 경고]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가 로마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올랐으며, 갈릴레오는 추기경 로베르토 벨라르미노로부터 지동설을 옹호하거나 가르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1616년, 코페르니쿠스의 주요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가 로마 교황청에 의해 금서 목록에 지정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추기경 로베르토 벨라르미노는 갈릴레오에게 개인적인 서신을 보내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옹호하거나 가르치지 말 것을 공식적으로 명령했습니다. 이는 갈릴레오에게 지동설 주장을 포기하라는 강력한 압박이었습니다.
1616
1616
['Discourse on the Tides' 저술]
코페르니쿠스적 지구에 입각한 조석 현상에 대한 논문인 'Discourse on the Tides'를 저술했습니다.
1616년,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바탕으로 조석 현상을 설명하는 논문인 'Discourse on the Tides'(Discorso del flusso e reflusso del mare)를 저술했습니다. 이 저서는 그의 코페르니쿠스주의적 관점을 반영한 것입니다.
1616
1619
['혜성에 관한 논설' 발간]
혜성에 대한 해석을 두고 예수회와 논쟁하는 과정에서 제자 마리오 귀두치가 갈릴레오의 강의를 정리한 '혜성에 관한 논설'을 발간했습니다.
1619년, 갈릴레오가 혜성 해석을 두고 예수회와 논쟁을 벌이자, 그의 제자 마리오 귀두치(Mario Guiducci)가 갈릴레오의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혜성에 관한 논설'(Discourse on the Comets)이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1619
1623
[우르바노 8세 교황 선출 및 '분석자' 출판]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 우르바노 8세로 선출되었습니다. 같은 해,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을 비판하고 과학적 사고의 수학적 체계를 발전시킨 '분석자'(The Assayer)를 출판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623년, 갈릴레오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새로운 교황 우르바노 8세로 선출되었습니다. 같은 해,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기반한 이론들을 비판하고 실험 방법과 과학적 사고의 수학적 체계를 발전시킨 '분석자'(Il Saggiatore)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가톨릭교회 계층의 지지까지 받았습니다.
1623
1624
[로마 재방문 및 교황 환대]
로마를 다시 방문하여 교황 우르바노 8세의 환대를 받으며, 자신의 지동설 이론을 '추론 수준'에서라면 발표해도 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1624년,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 우르바노 8세로부터 환대를 받았습니다. 교황과의 변함없는 우정을 확인한 그는 자신의 지동설 이론을 추론 수준에서 발표하는 것은 허용될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1624
1630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 출판 허가 요청]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의 출판 허가를 받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갈릴레오는 1630년,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의 출판 허가를 받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이 책은 이후 그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630
1632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 발간 및 배포 금지]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가 피렌체에서 발간되었으나, 갈릴레오 반대 세력의 격렬한 항의와 교황 우르바노 8세의 배신감으로 인해 곧바로 배포가 금지되었습니다.
1632년, 갈릴레오의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Dialogue Concerning Two Chief World System)가 피렌체에서 인쇄, 발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우호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고,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이를 자신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면서 갈릴레오 반대 세력의 격렬한 항의를 받았습니다. 결국 교황청은 이 책의 배포를 금지시켰습니다.
1632
1632
1632년 10월, 갈릴레오는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의 내용으로 인해 로마의 종교재판소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지동설 주장에 대한 교황청의 강력한 제재 조치였습니다.
1632
1633
[종교 재판 유죄 판결 및 가택 연금]
로마 종교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지동설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종신 징역형을 감형받아 가택 연금에 처해지고 그의 모든 저서가 금서 목록에 올랐습니다.
1633년,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소에서 궐석재판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맹세코 포기하며, 저주하고 혐오한다'고 선언하도록 강요받았으며, 건강상의 이유와 고령임을 감안하여 종신 징역형이 가택 연금으로 감형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그의 모든 저서는 금서 목록에 오르는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을 상징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633
1634
[가택 연금 시작 및 큰딸 사망]
피렌체 근교 아르체트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머무르며 가택 연금 생활을 시작했으며, 큰딸 마리아 첼레스테(비르지니아)가 사망했습니다.
1634년부터 갈릴레오는 피렌체 근교 아르체트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가택 연금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4월 2일, 수녀원에 있던 그의 큰딸 비르지니아(마리아 첼레스테 수녀)가 사망하여 갈릴레오와 함께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대성당에 묻혔습니다.
1634
1636
갈릴레오가 1615년에 원고를 준비했던 '크리스티나 공작부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1636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이 편지는 코페르니쿠스주의를 물리적인 사실이며 성서와 일치한다고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1636
1638
[실명 및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술' 출판]
가택 연금 중 완전히 실명했으며, 네덜란드에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술'(Discourses and Mathematical Demonstrations Relating to Two New Sciences)을 완성하고 출판했습니다.
1638년, 갈릴레오는 가택 연금 생활 중 완전히 실명하게 되었으나, 집필 활동을 계속하여 네덜란드에서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술'(Discourses and Mathematical Demonstrations Relating to Two New Sciences)을 완성하고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그의 역학 연구를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1638
1642
[갈릴레오 갈릴레이 사망]
가택 연금 상태에서 발열과 심계항진을 겪다가 피렌체 근교 아르체트리 별장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42년 1월 8일, 피렌체 근교 아르체트리 별장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말년에는 실명과 건강 악화로 고통받았지만, 죽을 때까지 손님을 접대하며 학문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습니다.
1642
1838
1838
['카티노' 굴착 참사]
근대 최초의 보수 시도는 오히려 재앙이 되었습니다. 건축가 알레산드로 델라 게라르데스카는 탑의 기초 부분을 더 잘 보이게 하려는 미적 목적으로 탑 주변을 파내는 '카티노(catino)'라는 보도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굴착이 남쪽의 지하수면 을 건드렸고, 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지반을 심각하게 약화시켜 탑의 기울기를 급격히 증가시켰습니다.
이 "수리" 시도는 탑의 붕괴를 거의 초래할 뻔했습니다(nearly caused its downfall). 탑은 며칠 만에 수 인치 가라앉았으며, 기울기는 0.25도 에서 최대 0.5도 까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1990년대의 복원 목표 중 하나가 "탑을 1838년의 기울기(즉, 이 사건 이전)로 되돌리는 것" 이었을 정도로, 1838년의 굴착은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1934
1934
[무솔리니의 콘크리트 주입 실패]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기울어진 탑이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위신에 맞지 않는 상징이라 여겨 탑을 바로 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엔지니어들은 기초에 361개의 구멍을 뚫고 약 200톤의 시멘트 그라우트 를 주입했습니다. 하지만 이 무거운 콘크리트가 연약한 지반을 더욱 짓눌러, 탑은 오히려 더 가라앉고 기울기가 증가하는 역효과를 낳았습니다.
1838년(지반 교란)과 1934년(하중 추가)의 두 차례 '근대적' 보수 시도는, 탑의 근본 문제인 '연약 지반과 하중의 불균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두 시도 모두 지반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어 탑의 붕괴를 가속화했습니다.
1965
1965년, 로마 교황 바오로 6세가 갈릴레오 재판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가톨릭 교회가 과거의 과오를 인정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1965
1987
1987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피사의 사탑을 포함한 피사 대성당 광장(Piazza del Duomo)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 등재는 탑의 독특한 건축미와 역사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공인받은 사건입니다. 이는 또한 탑을 보존해야 한다는 국제적인 압력과 책임감을 증가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피사의 사탑뿐만 아니라 대성당(두오모), 세례당, 납골당(캄포산토)을 포함하는 '피사의 두오모 광장'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등재는 단순한 명예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탑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기울어진 채로 보존하는 것'이 전 인류의 과제임을 공식화한 것입니다. 3년 뒤(1990년) 탑이 폐쇄되고 국제적인 보수 위원회가 결성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유네스코 등재를 통한 국제적 공감대 형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90
1990
[붕괴 위험, 탑 대중에 전면 폐쇄]
탑의 기울기가 5.5도, 수직에서 4.5미터 이상 벗어나면서 붕괴가 임박했다는 공학적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1989년 이탈리아 파비아의 종탑이 붕괴하는 치명적 사고까지 발생하자, 이탈리아 정부는 800년 역사상 처음으로 탑을 대중에게 전면 폐쇄했습니다. 이는 탑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보수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이 '폐쇄' 조치는 피사의 사탑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입니다. 이는 1838년과 1934년의 '실패한 개입' 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며, 막대한 관광 수입 을 포기하고 과학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겠다는 국가적 결단이었습니다.
199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갈릴레이 재판 오류 공식 인정 및 사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갈릴레이 재판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죄했습니다. 이는 갈릴레이 사망 35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1992년,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종교 재판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죄했습니다. 이는 갈릴레이가 사망한 지 350년 만에 이루어진 역사적인 화해 조치로, 과학과 종교의 오랜 대립에 종지부를 찍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92
1999
1999
['토양 추출' 공법 본격 시행]
국제 위원회는 '토양 추출(Soil Extraction)'이라는 혁신적인 공법을 최종 해결책으로 채택했습니다. 이는 탑을 밀거나 당기는 대신, 기울기 반대편(북쪽) 지반의 흙을 정밀하게 빼내는 방식입니다. 북쪽 지반에 의도적인 공간을 만들어 탑이 스스로의 무게로 아주 서서히 가라앉으며 기울기를 회복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1993년, 즉각적인 붕괴를 막기 위해 탑의 북쪽(들뜬 쪽)에 600톤의 납덩어리(lead weights) 를 올려놓아 무게 중심을 이동시키는 응급 처치 가 시행되었습니다. 또한 1998년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탑 3층에 거대한 강철 케이블을 연결했습니다.
2001
2001
[보수 완료 및 공식 재개장]
11년간의 폐쇄와 복잡한 공학적 보수 작업 끝에, 피사의 사탑이 마침내 안정화되어 대중에게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탑의 기울기는 붕괴 직전 5.5도에서 3.97도 로 약 40cm가량 되돌려졌으며, 이는 1838년 수준의 안정성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로써 탑이 최소 200년 이상 안전할 것으로 선언했습니다.
기울기는 5.5도에서 약 10% 감소한 3.97도 로 줄어들었습니다. 이는 탑을 '똑바로' 세운 것이 아니라, 19세기 초(1838년) 수준의 '안전한 기울기'로 되돌린 것입니다. 이로써 탑은 향후 200년 에서 300년 간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2003
[우르바노 8세의 박해 부정 주장]
로마 교황청 교리성성의 안젤로 아마토 대주교가 우르바노 8세가 갈릴레이를 박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2003년 9월, 로마 교황청 교리성성의 안젤로 아마토 대주교는 우르바노 8세가 갈릴레오를 박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갈릴레이 재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습니다.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