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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계의 거장이자 사회 변혁의 아이콘입니다. <아침 이슬>로 1970년대 저항 정신의 상징이 되었으며, 유신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포크 음악과 뮤지컬 제작으로 꾸준히 활동했습니다. 학전 소극장을 통해 후배 양성과 공연 예술 발전에 기여하며 탁월한 예술성과 사회 참여 정신으로 한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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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의 6촌 동생이자 한국 포크 음악의 전설적인 인물. 명문가에서 태어나 의대에 진학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가수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송창식과 함께 '트윈 폴리오'로 데뷔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며, 솔로 활동과 라디오 및 TV 프로그램 MC, CM송 제작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습니다. 한국 대중문화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그는 '오란씨', '새우깡' 등 수많은 히트 CM송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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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1947
[서울 출생]
서울특별시에서 시인 윤영춘과 성악가 김귀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학업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6촌 형은 일제강점기 저항 시인 윤동주입니다.
1947년 11월 19일 서울특별자유시에서 시인 윤영춘과 성악가 김귀순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글과 음악에 익숙했으며, 공부에도 소질을 보여 경기고등학교 입학 당시부터 '서울대학교 학생회장'으로 불릴 정도로 학업 성적이 우수했습니다. 시와 운율에 깊은 조예가 있었고, 6촌 재종형 윤동주 시인의 뜻을 이어 연세대학교 의예과에 진학했습니다.
1951
[김민기 출생 및 유년기]
대한민국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에서 태어났으며, 초등학교 입학 전 서울로 이사하여 유년기를 보냈다.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에서 태어나 중앙동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그는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서울로 이사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51
1965
1965
[연세대학교 의예과 진학 결정]
예비고사 후 연세대학교 의예과에 지원하며, 만약 낙방한다면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로 진학하여 시인이 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결국 연세대학교에 합격하며 시인의 꿈은 잠시 접었습니다.
수험생 시절 1965년 예비 고사를 치른 후 기대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6촌 재종형 윤동주 시인의 뜻을 이어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길 바랐던 부모님의 설득 끝에 연세대학교 의예과에 지원했습니다. 만약 본고사에서 낙방한다면 후기 대학인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로 진학하여 시문학가(시인)의 길을 걷겠다고 밝혔으나, 연세대학교 합격으로 시인의 꿈은 접게 되었습니다.
1966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기타를 선물받았고, 독학으로 기타를 익히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1966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입학]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의학 전공 중에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습니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예과 2년을 수료했습니다.
1968
1968
[트윈 폴리오 결성 및 데뷔]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전학 후,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를 결성하여 가요계에 데뷔했습니다. '하얀 손수건', '축제의 노래', '웨딩 케익' 등의 곡을 발표하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1968년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전학하였으며, 같은 해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를 결성하여 가요계에 데뷔했습니다. 〈하얀 손수건〉, 〈축제의 노래〉, 〈웨딩 케익〉, 〈슬픈 운명〉 등을 발표하며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1969
['도비두' 결성 및 양희은과의 만남]
서울대학교 회화과 재학 중 '도비두(도깨비두마리)'라는 포크 밴드를 결성하여 음악 활동을 시작했으며, YWCA 포크동아리 '청개구리'에서 양희은을 만났다.
서울대학교 회화과 재학 중 고교 동창이자 대학 동창인 김영세와 '도비두(도깨비두마리)'라는 포크 밴드를 결성하여 음악 활동 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김민기가 활동하던 YWCA의 포크동아리 '청개구리'에서 김민기의 음악적 동반자인 양희은을 처음 만났다.
1969
1970
1970
[솔로 활동 시작]
트윈 폴리오 해체 후 솔로 가수로 전향하여 '비와 나', '라라라(조개껍질 묶어)', '비의 나그네'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이어갔습니다.
1970년부터 솔로로 전향하여 "비와 나", "라라라(조개껍질 묶어)", "비의 나그네", "두개의 작은 별", "우리들의 이야기", "바보(짧다란 사연 하나)", "고백", "사랑스런 그대", "어제 내린 비" 등을 불렀습니다.
1971
[1집 발표 및 <아침 이슬> 작곡]
대학교를 휴학하고 <아침 이슬>, <가을 편지>, <꽃 피우는 아이>를 작곡하고, 솔로 가수 겸 작곡가로서 첫 앨범 《김민기 1집》을 발표하며 한국 대중음악계에 기념비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대학교를 휴학하고 <아침 이슬>, <가을 편지>, <꽃 피우는 아이>를 작곡하였다. 《김민기 1집 - 아하 누가 그렇게/길 (김민기 노래모음)》을 시작으로 솔로 가수 겸 작곡가의 삶을 시작했다. 앨범 1집 발매부터 가수, 작곡가로서 빛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현재까지도 김민기의 앨범은 대중음악계의 기념비적인 앨범이라 찬사받는다. 김민기는 정치적 행보를 밝히지 않는 가수였지만, 그의 노래는 1970년 정치사에 맞물려 그의 음악 행보는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누렸다. 현실 인식을 담백하게 담아 낸 김민기의 노래는 당시 통기타 세대, 저항세대로 불렀던 젊은 세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동시에 억압과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71
[의대 중퇴 및 라디오 MC 활동 시작]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을 중퇴하며 음악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동아방송 라디오 심야 프로그램인 '0시의 다이얼'과 '톱 툰 쇼'에서 MC를 맡으며 방송인으로도 활동 영역을 넓혔습니다.
1971년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을 중퇴하며 본격적으로 음악과 방송 활동에 집중했습니다. 같은 해 동아방송 라디오 심야 프로그램 '0시의 다이얼'과 '톱 툰 쇼'에서 MC를 맡아 뛰어난 진행 능력을 선보였습니다.
1972
[유신 정권 탄압 시작 및 <아침 이슬> 금지곡 지정]
서울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노래를 부르다 경찰에 연행되었으며, 유신 정권에 의해 그의 앨범과 노래들이 방송 금지되고 전량 압수되었다. 특히 <아침 이슬>은 저항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앨범 발표 이듬 해 서울대학교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노래 부르기를 지도하다가 동대문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유신 정권 시절 김민기의 노래들이 유신 저항 운동에서 불리면서 보안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김민기의 앨범 1집 노래인 <꽃 피우는 아이>, <아침 이슬>이 금지되고, 1집 앨범이 전량 압수되었다. 그러나 <아침 이슬>은 70-80년대에 저항문화를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매김하였다. 지금까지도, 한국 정치사에 맞물려 변혁적인 사건 때마다 김민기의 노래를 부른다.
1972
1972
[양희은과의 협업 앨범 발매]
양희은과 함께 <백구>, <새벽길>, <작은 연못> 등 한국 통기타 음악계의 걸작 앨범을 발매하여 젊은 세대 혁명적 낭만주의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양희은과 함께 <백구>, <새벽길>, <작은 연못> 등 한국 통기타 음악계의 걸작 앨범을 발매한다. 당시 젊은 세대의 혁명적 낭만주의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1972
1973
[연극 <금관의 예수> 참여]
시인이자 서울대학교 동문인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 전국 순회 공연에 노동자들과 함께 참여했으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노래 '금관의 예수'를 작곡했다.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를 노동자들과 함께 공연했던 그는 국악인들과 교류하여 다음해 〈아구>를 무대에 올렸다. 또한 김지하가 희곡을 쓴 연극 《금관의 예수》의 전국 순회 공연에 참여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노래 '금관의 예수'를 작곡했다.
1973
[동아방송 '팝스 투나잇' MC]
동아방송 '팝스 투나잇'의 MC를 맡으며 꾸준히 방송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가창력뿐 아니라 유려한 말솜씨로 많은 청취자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1973년 동아방송 '팝스 투나잇'의 MC를 맡으며 방송인으로서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했습니다.
1974
1974년 군에 입대해 1977년 전역하였다. 또한 소리굿 《아구》의 극본을 썼다.
1974
1975
['아침이슬' 금지곡 재확인]
당국에 의해 그의 노래 '아침이슬'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으나, 명확한 금지 사유가 명시되지 않아 상징적인 의미를 더했다.
당국에 의해 그의 노래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됐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는 “금지곡들은 분명한 금지사유가 명시됐지만 이 노래에는 아무런 금지사유가 명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라고 말했다.
1975
1976
1976
[광고회사 '서울 오디오' 설립]
광고회사 '서울 오디오'를 설립하며 기업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이후 다양한 CM송을 제작하며 광고 음악계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76년 광고회사 '서울 오디오'를 설립하여 기업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 회사를 통해 오란씨 CM, 롯데껌 CM, 새우깡 CM 등 수많은 히트 CM송을 제작했습니다.
1977
1977년, 제대한 후 공장에서 일했다.
1977
1978
[노래굿 <공장의 불빛> 발표]
동일방직 노조 문제를 다룬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작사, 작곡하여 언더그라운드에서 불법 인디 카세트 테이프로 발매했다.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작사, 작곡하여 테이프로 발매하였다. 정권의 제대와 감시의 대상이었던 김민기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불법 인디 카세트 테잎을 발매한다. (1970년대의 시대적 배경은 동일방직 노조 탄압 사건, 전태일 분신 사건 등 공장산업의 발달로 인한 '노동자'의 급증과 이에 따른 사회적 저항의 맥락이 전제하였다.)
1978
[광고회사 '샘 기획' 설립]
광고회사 '샘 기획'을 설립하여 운영했습니다. 지속적으로 광고 음악 분야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1978년 광고회사 '샘 기획'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며, '서울 오디오'와 함께 광고 음악 제작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79
[양희은의 <상록수> 첫 발표]
가수 양희은이 김민기의 곡 <상록수>를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하여 널리 알려졌다.
가수 양희은이 1979년 1월 20일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하여 널리 알려졌다.
1979
1979
1979년 12월에는 문화 체육관에서 공연을 펼쳤다.
1979
1981
1981
[MBC-FM 라디오 MC 활동]
MBC-FM '윤형주의 한밤의 데이트' MC를 맡았습니다. 또한 기독교 방송의 '찬양의 꽃다발'과 극동방송 '윤형주와 함께' 등 여러 프로그램의 MC를 지내며 활발한 방송 활동을 펼쳤습니다.
1981년부터 MBC-FM에서 '윤형주의 한밤의 데이트'의 MC를 맡았으며, 기독교 방송의 환자와 장애자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인 '찬양의 꽃다발'과 극동방송에서 '윤형주와 함께'의 MC를 지내며 방송 활동을 활발히 이어갔습니다.
1983
[국립극장 공연 및 연극 활동]
국립극장에서 탈춤과 판소리 등 소리굿 공연을 했고,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의 극본을 쓰고 연출했다.
1983년에는 국립극장에서 탈춤과 판소리 등 소리굿 공연을 했다.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극본, 연출을 맡았다.
1983
1984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음반 제작 참여]
<공장의 불빛> 이후 활동이 금지되어 소작농으로 지내던 중, 대학 노래패 출신들이 모여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음반을 제작하여 대학 운동권의 큰 지지를 얻었다.
1984년 <공장의 불빛> 이후 활동이 금지되어 소작농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문승현, 김창남, 김광석, 김보성 등 대학 노래패 출신의 사람들이 김민기를 중점으로 모여 음반을 제작한다. 진보적인 성향을 포함한 곡은 정부 검열로 발매하지 못했다. 세상에 나온 곡은 <갈 수 없는 고향>, <그루터기>, <내 눈길 닿는 곳>,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 등이 있다. 이 음반은 당시 1970년 통기타 문화의 젊은 세대들이 1980년에 접어들며 더욱 활발해진 대학 운동권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이 음반의 제목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다.
1984
1987
[<아빠 얼굴 예쁘네요> 발표 및 음반 발매]
탄광촌 이야기를 담은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발표했으며, 동명의 음반을 발매했다.
탄광촌 이야기를 담은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발표했고, 음반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발매했다.
1987
1988
음반 《엄마, 우리 엄마》를 발매했다.
1988
1990
[<겨레의 노래> 사업 지휘 및 직접 가창]
한겨레 신문사와 공동으로 음반, 공연, 노래 모음집을 아우르는 <겨레의 노래> 사업을 지휘했으며, 이 사업에서 <아침 이슬>을 직접 불렀다.
한겨레 신문사와 공동으로 음반과 공연, 노래 모음집을 한데 모은 <겨레의 노래> 사업을 지휘하였다. 김민기는 활동 금지 이후 음악 및 음반 발매 지휘만을 하였지만, <겨레의 노래>에서 부른 <아침 이슬>을 김민기가 직접 노래하였다.
1990
1991
1991년 학전(學田) 소극장을 개관했다.
1991
1991
학전에서 중국 조선족 창작 가곡, 동요를 모은 음반을 제작한다. 다양한 중국 교포들의 예술을 국민에게 선보여 민족적 정서의 고취를 위해 기획하였다.
1991
1992
1993년, 김민기가 직접 노래를 부른 <김민기 1.2.3.4> 음반을 발매하였다. (위키 원문은 1993년으로 되어있으나, 음반 목록에는 1992년으로 되어있어 1992년으로 통일합니다.)
1992
1993
['겨레의 노래' 사업 추진 및 뮤지컬 연출 시작]
'겨레의 노래' 사업을 추진하고, 뮤지컬 <개똥이>와 <지하철 1호선> 등 의욕적인 연출 활동을 시작했다.
'겨레의 노래' 사업을 추진했다. 이후 뮤지컬 <개똥이>와 <지하철 1호선> 등 의욕적인 연출 활동을 했다.
1993
[KBS '열린 음악회' 초대 진행자]
KBS1TV '열린 음악회'의 초대 진행자를 맡았습니다. 대한민국 대표 음악 프로그램의 시작을 함께하며 안정적이고 깊이 있는 진행으로 프로그램의 성공에 기여했습니다.
1993년부터 대한민국 음악쇼를 이끌어 온 KBS1TV '열린 음악회'의 초대 진행자로 활약했습니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색다른 무대를 선사하고자 노력하는 프로그램의 성공적인 시작을 이끌었습니다.
1994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연출 시작]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번안하고 연출하기 시작하여 이후 학전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번안, 연출 활동을 시작했다.
1994
1995
록오페라 <개똥이> 작사/곡, 연출 활동을 시작했다.
1995
1996
개관한 극장을 ‘학전블루소극장’으로 운영하고, 1996년 ‘학전그린소극장’까지 열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1996
1998
뮤지컬 <의형제> 번안, 연출 활동을 시작했다.
1998
2002
[가수 활동 중단 및 뮤지컬 제작 전념]
고별 음반 《김민기 전집》을 발표한 후 가수 활동을 공식적으로 접고 뮤지컬 제작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2002년에 고별 음반 《김민기 전집》을 발표한 후 가수 활동을 접고 뮤지컬 제작에만 전념했다.
2002
2004
음반 《공장의 불빛》을 발매했다.
2004
2004
[《Past Life Of 김민기》 음반 발매]
6CD Box Set 형태의 《Past Life Of 김민기》 음반을 발매했다.
《Past Life Of 김민기 (6CD Box Set)》 음반을 발매했다.
2004
2007
독일연방공화국 문화훈장 괴테메달을 수상했다.
2007
2009
2009
[부산 도시철도 로고송 제작]
부산 도시철도의 로고송을 직접 작사, 작곡하고 노래했습니다. 이는 그의 CM송 제작 역량을 다시 한번 보여준 사례입니다.
2009년 부산 도시철도의 로고송을 직접 작사 및 작곡하였으며,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롯데월드 테마송 등 다수의 유명 CM송을 제작했습니다.
2010
[학전 재정난 시작]
공연 시장의 중심이 대극장 뮤지컬로 바뀌면서 대학로 소극장 관객이 줄어들기 시작하며 학전의 재정난이 시작되었다.
2010년 이후 공연 시장의 중심이 대극장 뮤지컬로 바뀌면서 대학로 소극장 관객은 점점 줄어들었고, 학전의 재정난이 시작되었다.
2010
2013
[학전그린소극장 폐관 및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수상]
학전그린소극장을 먼저 폐관했으며, 제10회 한국대중음악상 특별분야 공로상을 수상했다.
2013년에 그린소극장을 먼저 폐관했다. 제10회 한국대중음악상 특별분야 공로상을 수상했다.
2013
2015
2015
[경희대학교 명예 의학사 취득]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명예 의학사를 취득하며, 의학도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던 모교로부터 늦은 명예 학위를 받았습니다.
2015년 2월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명예 의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는 과거 의학을 공부했던 그의 경력을 기리는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2015
2015
[연세대학교 명예 학사 학위 취득]
연세대학교에서 의과대학 명예 의학사와 신과대학 명예 신학사 학위를 동시에 취득했습니다. 이는 그의 다채로운 삶과 사회 공헌을 인정받은 결과입니다.
2015년 8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에서 명예 의학사를, 신과대학 신학과에서 명예 신학사를 동시에 취득했습니다. 그의 다양한 활동과 기여에 대한 높은 평가를 보여주는 명예 학위입니다.
2016
2016
[고신대학교 명예 선교학 박사 취득]
고신대학교에서 명예 선교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는 그의 기독교 활동과 선교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은 결과입니다.
2016년 2월 고신대학교에서 명예 선교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오랜 시간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한 그의 사회적, 종교적 활동에 대한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2018
한국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2018
2020
호암문화재단 호암상 예술상을 수상했다.
2020
2024
학전은 재정난 및 김민기 대표의 위암 투병으로 인해 33년 만인 2024년 3월 15일에 폐업했다.
2024
2024
2024년 7월 21일 김민기가 사망하였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