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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계의 거장이자 사회 변혁의 아이콘입니다. <아침 이슬>로 1970년대 저항 정신의 상징이 되었으며, 유신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포크 음악과 뮤지컬 제작으로 꾸준히 활동했습니다. 학전 소극장을 통해 후배 양성과 공연 예술 발전에 기여하며 탁월한 예술성과 사회 참여 정신으로 한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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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포크 음악의 살아있는 전설 양희은. 1971년 아침 이슬로 데뷔해 시대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수많은 금지곡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음악과 목소리를 지켜왔습니다. 여성시대 DJ로도 국민적 사랑을 받으며 가수 방송인 작사가로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빛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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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김민기 출생 및 유년기]
대한민국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에서 태어났으며, 초등학교 입학 전 서울로 이사하여 유년기를 보냈다.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에서 태어나 중앙동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그는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서울로 이사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51
1952
1952
1966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기타를 선물받았고, 독학으로 기타를 익히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1966
1969
['도비두' 결성 및 양희은과의 만남]
서울대학교 회화과 재학 중 '도비두(도깨비두마리)'라는 포크 밴드를 결성하여 음악 활동을 시작했으며, YWCA 포크동아리 '청개구리'에서 양희은을 만났다.
서울대학교 회화과 재학 중 고교 동창이자 대학 동창인 김영세와 '도비두(도깨비두마리)'라는 포크 밴드를 결성하여 음악 활동 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김민기가 활동하던 YWCA의 포크동아리 '청개구리'에서 김민기의 음악적 동반자인 양희은을 처음 만났다.
1969
1970
1970
[저항의 목소리, 30여 곡 이상 금지곡 지정]
제3, 4공화국 독재정권을 거치며 양희은의 약 30여 곡 이상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이유'로, '작은 연못'은 당시 권력자들을 연상시킨다는 소문으로 금지되는 등 시대의 억압을 온몸으로 견뎌냈습니다.
'작은 연못'의 경우, "작은 연못에 살던 붕어 두 마리가 싸우다 한 마리가 죽어 물이 썩어 결국엔 모두가 죽었다"는 가사가 남한과 북한, 박정희와 김대중 등 당시 권력 암투의 주인공들을 연상시킨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1971
[1집 발표 및 <아침 이슬> 작곡]
대학교를 휴학하고 <아침 이슬>, <가을 편지>, <꽃 피우는 아이>를 작곡하고, 솔로 가수 겸 작곡가로서 첫 앨범 《김민기 1집》을 발표하며 한국 대중음악계에 기념비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대학교를 휴학하고 <아침 이슬>, <가을 편지>, <꽃 피우는 아이>를 작곡하였다. 《김민기 1집 - 아하 누가 그렇게/길 (김민기 노래모음)》을 시작으로 솔로 가수 겸 작곡가의 삶을 시작했다. 앨범 1집 발매부터 가수, 작곡가로서 빛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현재까지도 김민기의 앨범은 대중음악계의 기념비적인 앨범이라 찬사받는다. 김민기는 정치적 행보를 밝히지 않는 가수였지만, 그의 노래는 1970년 정치사에 맞물려 그의 음악 행보는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누렸다. 현실 인식을 담백하게 담아 낸 김민기의 노래는 당시 통기타 세대, 저항세대로 불렀던 젊은 세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동시에 억압과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71
['아침 이슬'로 시대의 아이콘이 되다]
서강대학교 1학년 재학 중 '아침 이슬'이 수록된 1집 앨범으로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그녀의 등장은 암울했던 시대에 한 줄기 빛이 되었으며, 특히 '아침 이슬'은 단순한 노래를 넘어 당시 군부 독재에 억압받던 민중들에게 민주화 열망의 상징적인 곡이 되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데뷔 당시 작곡가 김민기는 '아침 이슬'에 직접적인 민주화 내용은 담지 않았다고 했지만, 7080년대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불리며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1972
[유신 정권 탄압 시작 및 <아침 이슬> 금지곡 지정]
서울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노래를 부르다 경찰에 연행되었으며, 유신 정권에 의해 그의 앨범과 노래들이 방송 금지되고 전량 압수되었다. 특히 <아침 이슬>은 저항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앨범 발표 이듬 해 서울대학교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노래 부르기를 지도하다가 동대문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유신 정권 시절 김민기의 노래들이 유신 저항 운동에서 불리면서 보안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김민기의 앨범 1집 노래인 <꽃 피우는 아이>, <아침 이슬>이 금지되고, 1집 앨범이 전량 압수되었다. 그러나 <아침 이슬>은 70-80년대에 저항문화를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매김하였다. 지금까지도, 한국 정치사에 맞물려 변혁적인 사건 때마다 김민기의 노래를 부른다.
1972
1972
[양희은과의 협업 앨범 발매]
양희은과 함께 <백구>, <새벽길>, <작은 연못> 등 한국 통기타 음악계의 걸작 앨범을 발매하여 젊은 세대 혁명적 낭만주의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양희은과 함께 <백구>, <새벽길>, <작은 연못> 등 한국 통기타 음악계의 걸작 앨범을 발매한다. 당시 젊은 세대의 혁명적 낭만주의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1972
1973
[연극 <금관의 예수> 참여]
시인이자 서울대학교 동문인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 전국 순회 공연에 노동자들과 함께 참여했으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노래 '금관의 예수'를 작곡했다.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를 노동자들과 함께 공연했던 그는 국악인들과 교류하여 다음해 〈아구>를 무대에 올렸다. 또한 김지하가 희곡을 쓴 연극 《금관의 예수》의 전국 순회 공연에 참여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노래 '금관의 예수'를 작곡했다.
1973
[황당한 금지곡의 시작]
대표곡 '아침 이슬'은 1973년 정부가 선정한 '건전가요'에 이름을 올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다음 해인 1974년에는 가사에 포함된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구절이 '대한민국의 적화(赤化)를 암시한다'는 황당한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됩니다.
그럼에도 이 곡은 7,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노래로 깊이 각인됩니다.
1974
1974년 군에 입대해 1977년 전역하였다. 또한 소리굿 《아구》의 극본을 썼다.
1974
1975
['아침이슬' 금지곡 재확인]
당국에 의해 그의 노래 '아침이슬'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으나, 명확한 금지 사유가 명시되지 않아 상징적인 의미를 더했다.
당국에 의해 그의 노래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됐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는 “금지곡들은 분명한 금지사유가 명시됐지만 이 노래에는 아무런 금지사유가 명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라고 말했다.
1975
1976
1976
[가슴을 울리는 노랫말, 작사가로 변신]
'내 꿈을 펼쳐라', '들길 따라서' 등 직접 노랫말을 쓰기 시작하며 작사가로서의 재능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1983년 난소암 투병 중에는 당시 레코드 사장에게 특별히 받은 김희갑의 곡에 감동적인 노랫말을 붙여 '하얀 목련'을 탄생시켰습니다.
이 곡은 그녀의 투병 사실과 맞물려 더욱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1977
1977년, 제대한 후 공장에서 일했다.
1977
1978
[노래굿 <공장의 불빛> 발표]
동일방직 노조 문제를 다룬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작사, 작곡하여 언더그라운드에서 불법 인디 카세트 테이프로 발매했다.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작사, 작곡하여 테이프로 발매하였다. 정권의 제대와 감시의 대상이었던 김민기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불법 인디 카세트 테잎을 발매한다. (1970년대의 시대적 배경은 동일방직 노조 탄압 사건, 전태일 분신 사건 등 공장산업의 발달로 인한 '노동자'의 급증과 이에 따른 사회적 저항의 맥락이 전제하였다.)
1978
1979
[양희은의 <상록수> 첫 발표]
가수 양희은이 김민기의 곡 <상록수>를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하여 널리 알려졌다.
가수 양희은이 1979년 1월 20일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하여 널리 알려졌다.
1979
1979
1979년 12월에는 문화 체육관에서 공연을 펼쳤다.
1979
1983
[국립극장 공연 및 연극 활동]
국립극장에서 탈춤과 판소리 등 소리굿 공연을 했고,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의 극본을 쓰고 연출했다.
1983년에는 국립극장에서 탈춤과 판소리 등 소리굿 공연을 했다.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극본, 연출을 맡았다.
1983
1984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음반 제작 참여]
<공장의 불빛> 이후 활동이 금지되어 소작농으로 지내던 중, 대학 노래패 출신들이 모여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음반을 제작하여 대학 운동권의 큰 지지를 얻었다.
1984년 <공장의 불빛> 이후 활동이 금지되어 소작농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문승현, 김창남, 김광석, 김보성 등 대학 노래패 출신의 사람들이 김민기를 중점으로 모여 음반을 제작한다. 진보적인 성향을 포함한 곡은 정부 검열로 발매하지 못했다. 세상에 나온 곡은 <갈 수 없는 고향>, <그루터기>, <내 눈길 닿는 곳>,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 등이 있다. 이 음반은 당시 1970년 통기타 문화의 젊은 세대들이 1980년에 접어들며 더욱 활발해진 대학 운동권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이 음반의 제목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다.
1984
1987
[<아빠 얼굴 예쁘네요> 발표 및 음반 발매]
탄광촌 이야기를 담은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발표했으며, 동명의 음반을 발매했다.
탄광촌 이야기를 담은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발표했고, 음반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발매했다.
1987
1987
1987
[금지곡 해금, 다시 대중 곁으로]
역사적인 6.29 선언 직후, 오랜 시간 억압받았던 그녀의 수많은 금지곡들이 대부분 해금되었습니다.
이는 억압받았던 시대가 저물고 자유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양희은은 1990년대 이후부터 음반 활동과 더불어 방송 활동을 활발하게 재개하며 다시 대중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1988
음반 《엄마, 우리 엄마》를 발매했다.
1988
1990
[<겨레의 노래> 사업 지휘 및 직접 가창]
한겨레 신문사와 공동으로 음반, 공연, 노래 모음집을 아우르는 <겨레의 노래> 사업을 지휘했으며, 이 사업에서 <아침 이슬>을 직접 불렀다.
한겨레 신문사와 공동으로 음반과 공연, 노래 모음집을 한데 모은 <겨레의 노래> 사업을 지휘하였다. 김민기는 활동 금지 이후 음악 및 음반 발매 지휘만을 하였지만, <겨레의 노래>에서 부른 <아침 이슬>을 김민기가 직접 노래하였다.
1990
1991
1991년 학전(學田) 소극장을 개관했다.
1991
[모두의 '인생곡',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기타리스트 이병우가 4시간 동안 감금된 상태에서 작곡한 멜로디에 직접 노랫말을 붙여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발표했습니다.
이 곡은 사랑의 쓸쓸함과 그리움을 절절하게 담아내며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의 '인생곡'으로 회자되는 불후의 명곡이 되었습니다.
1991
학전에서 중국 조선족 창작 가곡, 동요를 모은 음반을 제작한다. 다양한 중국 교포들의 예술을 국민에게 선보여 민족적 정서의 고취를 위해 기획하였다.
1991
1992
1993년, 김민기가 직접 노래를 부른 <김민기 1.2.3.4> 음반을 발매하였다. (위키 원문은 1993년으로 되어있으나, 음반 목록에는 1992년으로 되어있어 1992년으로 통일합니다.)
1992
1993
['겨레의 노래' 사업 추진 및 뮤지컬 연출 시작]
'겨레의 노래' 사업을 추진하고, 뮤지컬 <개똥이>와 <지하철 1호선> 등 의욕적인 연출 활동을 시작했다.
'겨레의 노래' 사업을 추진했다. 이후 뮤지컬 <개똥이>와 <지하철 1호선> 등 의욕적인 연출 활동을 했다.
1993
1994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연출 시작]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번안하고 연출하기 시작하여 이후 학전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번안, 연출 활동을 시작했다.
1994
1995
록오페라 <개똥이> 작사/곡, 연출 활동을 시작했다.
1995
[국민 DJ 등극! '여성시대'의 시작]
방송프로듀서연합회로부터 '최고의 라디오 진행자상'을 수상하며 라디오 DJ로서의 탁월한 역량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녀는 이후 대한민국 대표 라디오 프로그램인 '여성시대'의 DJ로 활약하며 수많은 청취자에게 따뜻한 위로와 공감을 전하는 '국민 DJ'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후 2001년, 2011년, 2019년 세 차례에 걸쳐 MBC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변함없는 국민 DJ의 위상을 보여주었습니다.
1996
개관한 극장을 ‘학전블루소극장’으로 운영하고, 1996년 ‘학전그린소극장’까지 열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1996
1998
뮤지컬 <의형제> 번안, 연출 활동을 시작했다.
1998
2002
[가수 활동 중단 및 뮤지컬 제작 전념]
고별 음반 《김민기 전집》을 발표한 후 가수 활동을 공식적으로 접고 뮤지컬 제작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2002년에 고별 음반 《김민기 전집》을 발표한 후 가수 활동을 접고 뮤지컬 제작에만 전념했다.
2002
2003
2003
[국가 공인! 대통령상 수상]
제10회 대한민국 연예예술대상에서 최고 영예인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대한민국 대중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같은 해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하며 그 위상을 더욱 높였습니다.
2004
음반 《공장의 불빛》을 발매했다.
2004
2004
[《Past Life Of 김민기》 음반 발매]
6CD Box Set 형태의 《Past Life Of 김민기》 음반을 발매했다.
《Past Life Of 김민기 (6CD Box Set)》 음반을 발매했다.
2004
2007
독일연방공화국 문화훈장 괴테메달을 수상했다.
2007
2008
2008
[40주년 기념 음반, '내 나이 마흔살에는']
데뷔 40주년을 기념하는 음반의 타이틀곡으로 강영국 작곡의 슬로우락 장르곡 '내 나이 마흔살에는'을 발표했습니다.
인생의 깊이를 담아낸 이 곡은 오랜 시간 그녀의 음악을 사랑해온 팬들에게 특별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같은 해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베스트 엔터테이너상을 수상하며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2010
[학전 재정난 시작]
공연 시장의 중심이 대극장 뮤지컬로 바뀌면서 대학로 소극장 관객이 줄어들기 시작하며 학전의 재정난이 시작되었다.
2010년 이후 공연 시장의 중심이 대극장 뮤지컬로 바뀌면서 대학로 소극장 관객은 점점 줄어들었고, 학전의 재정난이 시작되었다.
2010
2013
[학전그린소극장 폐관 및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수상]
학전그린소극장을 먼저 폐관했으며, 제10회 한국대중음악상 특별분야 공로상을 수상했다.
2013년에 그린소극장을 먼저 폐관했다. 제10회 한국대중음악상 특별분야 공로상을 수상했다.
2013
2018
한국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2018
2019
2019
[은관문화훈장 수훈! 레전드의 품격]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최고 영예인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하며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이와 함께 제16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과 MBC 방송연예대상 라디오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변함없는 레전드의 품격을 과시했습니다.
2020
호암문화재단 호암상 예술상을 수상했다.
2020
2024
학전은 재정난 및 김민기 대표의 위암 투병으로 인해 33년 만인 2024년 3월 15일에 폐업했다.
2024
2024
2024년 7월 21일 김민기가 사망하였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