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독립운동가, 정치인, 대통령, 국가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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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정치인, 공직자, 사회운동가, 체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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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정치인, 대통령, 국가 건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를 신봉했습니다. 미국 유학 중 외교독립론을 주창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습니다. 해방 후 건국 과정에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이끌었고, 한국전쟁 중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국가 안보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농지개혁과 문맹퇴치, 초등 의무교육 도입 등 긍정적 업적도 있으나, 장기집권, 친일파 등용, 언론 탄압,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비판도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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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공직자, 사회운동가, 체육인

이승만 정권의 핵심 측근으로 국방부 장관,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3.15 부정선거를 주도하여 4.19 혁명의 도화선을 제공했으며, 이로 인해 아들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며 일가족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병약했음에도 강한 권력욕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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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사건만
최신순

1875

[출생]

황해도 평산군에서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태어났으며, 아명은 승룡이었다. 두 명의 형이 홍역으로 사망하여 사실상 6대 독자로 자랐다.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군 봉천군 성가리 능내동에서 아버지 이경선과 어머니 김말란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는 조선 태종의 장남이자 세종대왕의 맏형인 양녕대군의 방계 16대손으로 왕족이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살았다. 이승만에겐 두 명의 형들이 있었으나 이승만이 태어나기 전 모두 홍역으로 사망하여 사실상 6대 독자로 자랐다. 이승만이 2세 때인 1877년 아버지 이경선의 대에 다시 한성부로 이주하였다.

1875

1887

[이름 개명]

13세 때 아명인 '승룡'을 '승만'으로 고쳤다.

이승만은 13세 때 아명인 '승룡'을 '승만'으로 고쳤다. 이름의 변경에 대한 구체적인 배경이나 계기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유년기에서 청소년기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이루어진 변화였다.

1887

1890

[박승선과 결혼]

동갑내기인 박춘겸의 딸 음죽박씨 박승선과 결혼하여 후에 외아들 이봉수를 가졌다.

이승만은 1890년 동갑내기인 박춘겸의 딸 음죽박씨 박승선과 결혼하여 1898년 6월 9일 외아들 이봉수를 가졌다. 이봉수는 1906년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고, 이에 이경선은 격노해 이승만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결국 이승만은 1912년 박승선과 이혼했다.

1890

1895

[배재학당 입학]

20세 때 헨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근대 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초기에는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다.

이승만은 20세 때인 1895년 4월 2일 헨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초기에는 '기독교라는 사교집단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졌다. 그러나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던 중, 곧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95

1896

[서재필과의 만남 및 독립협회 활동]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큰 영향을 받았으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연설가로 활발히 활동하며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과 교류했다.

1896년 5월,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심지어 비가 내리는 날 볏짚으로 만든 모자와 짚으로 만든 비옷을 입고 서재필의 집에 찾아가 그를 꼭 만나보고 싶다고 또 '박사님의 배재학당 강연을 대단히 감명깊게 들었습니다.'라며 찾아뵙고자 온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후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민중운동시기 즉 1898년 만민공동회 당시 가장 치열하게 앞장선 운동가들 중의 으뜸가는 청년이었으며 활발한 연설가로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을 만나 자주 교류했는데, 그 중 서재필은 그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

1896

1896

[협성회 조직 및 활동]

배재학당에서 서재필 주도로 협성회가 조직될 때 창립발기회원으로 참여하여 서기, 회장 등을 맡아 근대적 자주민권운동을 전개했다.

1896년 11월 30일,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의 주도 하에 협성회가 조직되었다. 협성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 단체이며 근대적 자주민권운동의 기폭제로서, 학생정치단체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협성회의 창립발기회원은 양홍묵·이승만·신흥우·노병선·주상호·윤창렬·민찬호 등 13인이었다. 협성회에서 이승만은 서기, 회장 등을 맡았다. 협성회는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구국운동의 방향을 찾았다. 협성회는 나날이 발전하여 창립 1년만에 회원수가 2백여 명으로 늘어났고, 1898년 2월에는 3백여 명으로 증가했다.

1896

1896

1896

[이기붕 출생]

충청북도 괴산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독자로 태어났다.

만송 이기붕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독자로 태어났다.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17대손이었다.

1897

[배재학당 졸업 및 '한국의 독립' 연설]

배재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졸업식에서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제목으로 영어 연설을 하여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며 청중을 사로잡았다.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졸업식에서는 이승만이 졸업생을 대표해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제목으로 영어 연설을 시작하였는데,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는 패기로 참석한 청중들, 정부 고관들, 주한 외국 사절들을 사로잡았다.

1897

1898

[《협성회회보》 발간 및 '고목가' 발표]

양홍묵과 함께 한글판 주간신문인 《협성회회보》를 발간하고 주필을 맡았으며, 한국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枯木歌)'를 신문에 실었다.

1898년 1월 양홍묵과 함께 한글판 주간신문이자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발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이때 이승만은 열강의 침략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한국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枯木歌)'를 신문에 실었다. 이 고목가(枯木歌)가 신체시의 효시라는 주장이 있다.

1898

1898

[《매일신문》 창간 주도]

《협성회회보》를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으로 발전시키고 사장 겸 저술인 직책을 맡아 언론 활동을 이어갔다.

1898년 4월 9일 《협성회회보》를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으로 발전시키고 사장 겸 저술인의 직책을 맡았다.

1898

1898

[《제국신문》 창간]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편집과 논설을 담당하며 언론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1898년 8월 10일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 편집과 논설을 담당하였다.

1898

1898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 임명]

독립협회 사건 해결 과정에서 고종의 약속 이행에 따라 남궁억 등과 함께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으로 임명되었다.

1898년 11월 28일 대한제국 고종은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해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하고, 이승만·남궁억 등 50여명을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으로 임명하였다.

1898

1899

[한성감옥 투옥]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으며, 5년 7개월간 수감되었다.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계몽활동을 펼쳤다.

이승만은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수감 시절 기독교로 개종하고, 옥중 계몽활동을 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이승만은 투옥 당시 고문을 당하여 안면 경련을 겪었다는 증언도 있다.

1899

1899

[탈옥 시도 실패]

옥중 동지였던 주시경에게 리볼버를 받아 서상대, 최정식과 함께 감옥 탈출을 시도했으나, 중간에 붙잡혀 들어오며 실패했다.

1899년 1월 30일 독립협회의 동지였던 한글학자 주시경을 만나 그로부터 몰래 건네받은 육혈포를 쏘며 서상대, 최정식과 함께 감옥을 탈출했으나, 서상대만 중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승만은 중간에 붙잡혀 들어왔다.

1899

1899

[종신형 선고 및 재수감]

평리원 재판소에서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고 한성감옥서에 재수감되었으며, 탈옥 동지 최정식은 처형당했다.

1899년 7월 11일 평리원 재판소에 회부, 재판장 홍종우로부터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한성감옥서에 재수감되었다. 이때 탈옥 동지였던 최정식은 처형당하였다. 본래 성격이 성급하기로 유명했던 이승만은 오랜 감옥생활로 성격이 더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899

1904

[《독립정신》 원고 완성]

5년 7개월의 옥중 생활 중 국민계몽서인 《독립정신》의 원고를 완성했으며, 이 책은 1910년 미국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1904년 6월 29일 국민계몽서인 《독립정신》의 원고를 완성하였다. 《독립정신》은 총 52편으로 이뤄졌고, 서양의 선진문명을 배워 부국강병을 이룩할 것을 백성에게 호소한 책이었다. 크게 근대 역사관과 정치관으로 이뤄진 앞부분과 당시 시대상황을 해석한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해외 사례를 언급하는 부분 상당수가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대통령제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차 있다. 당시 《독립정신》은 대중과 지식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출간이 되지는 않아 필사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돌려봤다고 한다. 이승만이 도미한 1910년이 되어서야 로스앤젤레스에서 첫 출판본이 나올 수 있었다.

1904

1904

[옥중 특별 사면]

러일 전쟁 발발 후 민영환, 한규설 등의 건의로 특별 사면령을 받아 5년 7개월 만에 한성감옥에서 석방되었다.

1904년 2월 8일 러일 전쟁이 일어났다. 민영환, 한규설 등이 건의한 끝에 7월 8일 조칙(詔勅)이 내려졌고, 이승만은 8월 4일 특별 사면령을 받아 8월 9일 석방되었다.

1904

1904

[고종 밀사 자격으로 도미]

민영환의 요청으로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밀서를 소지하고 제물포항에서 미국으로 출국했다. 이는 독립 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함이었다.

1904년 8월 9일 석방된 이승만은 이후 민영환을 만나 그의 밀서를 소지하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하기로 하였다. 이승만은 대한제국 고종을 만나보라는 민영환의 요청을 거절했고, 고종이 보낸 궁녀 역시 만나주지 않았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이 이승만을 만나기를 원하여 밀지(密紙)를 써서 궁녀를 비밀리에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고종이 왜 자신을 만나려 하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밀지를 들고 온 궁녀를 돌려보냈다. 이승만은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쳐버린 고종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 1904년 11월 4일 제물포항에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한 대한제국 고종의 밀사 자격이었다.

1904

1905

[미국 외교 활동의 좌절]

존 헤이 국무장관과 면담하여 한국 독립 협조 약속을 받았으나 그의 사망으로 무산되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면담도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거절당해 미국 외교에 실망했다.

1905년 2월 20일 이승만은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적이 있던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를 찾아가, 그의 주선으로 존 헤이 미국 국무부 장관과 30분간 면담하였다. 존 헤이 장관을 설득, 1882년의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제8조)에 따라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존 헤이 장관의 죽음으로 허사가 되었다. 1905년 8월 4일 뉴욕시 동부 루스벨트 대통령 별장에서 이승만과 만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밀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귀국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건 할 용의가 있다'라고 답변했다. 다만 외교적인 일이므로 밀서가 아닌 워싱턴의 한국공사관을 통해 제출하라고 권유했다. 루스벨트는 끝내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미 태프트를 보내 일본 총리 가쓰라와 식민지 분할에 합의한 뒤였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을 알게 된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확신하였고 그 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1905

1907

[조지 워싱턴 대학교 학사 학위 취득]

조지 워싱턴 대학교 콜럼비아 학부를 졸업하고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하버드 대학교 석사과정,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학업을 계속했다.

1907년 6월 5일 조지 워싱턴 대학교 콜럼비아 학부를 졸업하고 학사(Bachelor of Arts) 학위를 받았다. 1907년 9월 하버드 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하였다. 1908년 9월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국제법을 공부하였다. 지도교수인 우드로 윌슨 총장(나중의 대통령) 가족과 친밀한 관계 유지하였다.

1907

1908

[더럼 스티븐슨 암살 사건 변호 거부]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더럼 스티븐슨 암살 사건 변호 요청을 외교독립론의 입장 때문에 거절하며, 감정적인 암살은 독립에 해악이 된다고 비판했다.

1908년 3월 23일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을 샌프란시스코 페리부두에서 저격, 암살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전명운과 장인환을 변호하기 위해 십시일반하여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 와중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방략은 미국 등에 의한 외교독립론이었는데 정작 미국인이 한국인에게 암살되었으니 난처한 입장이었다. 이승만은 미주의 한인들에게 전명운과 장인환의 변호비용으로 3,000달러의 거액을 요구해 사실상 변호를 거부하였다. 이승만은 공립신보에 '일본의 기탄하는 일이 곧 우리의 행복될 일이라'는 장문의 칼럼을 통해 감정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오히려 서구 국가를 적으로 돌리게 되어 그들이 일본과 더더욱 밀착해 일본을 도우는 꼴이라며 독립에 도움은 커녕 해악이 된다고 호되게 질책하였다.

1908

1910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 학위 취득]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외교독립론의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1910년 3월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했다. 1910년 7월 18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Doctor of Philosophy) 학위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다른 학교이지만 옆에 붙어 있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도 강의를 들었다.

1910

1910

[한국 귀국 및 YMCA 활동]

국권을 빼앗긴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뉴욕 항을 출발하여 5년 11개월 6일 만에 한국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종로 YMCA 총무 겸 학감으로 교육 및 기독교 전도 활동을 했다.

1910년 9월 3일 국권을 빼앗긴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뉴욕 항을 출발, 리버풀,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만주를 거쳐 1910년 10월 10일 한국에 귀국하였다. 5년 11개월 6일 만의 귀국이었다. 당시 들어온 신문화에 대해 긍정적이라서 '나라가 없어진 것은 슬프지만 왕, 양반, 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910년 10월 10일부터 1912년 3월 26일까지 종로 기독교청년회(한국YMCA)의 총무 겸 학감에 취임하여 교육,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였다. 1911년, 이승만은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청년 선교를 위해 발행한 YMCA 국제위원회 총무 존 모트가 쓴 책들을 번역해 출판하였다.

1910

1912

[미국 망명]

일제의 105인 사건 관련 체포 위협을 피해 감리교 총회 참석을 명분으로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로써 1년 5개월의 한국 생활을 마감했다.

1911년, 105인 사건에 뒤이은 일본 제국의 체포 위협이 있자,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국제기독교 감리회 총회의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도록 선교사들이 주선함으로써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1912년 3월 26일,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로써 1년 5개월의 한국 생활을 마감하였다. 망명길에 일본에 들러 1912년 4월 10일까지 도쿄 조선YMCA를 근거로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 이때에 도쿄 조선YMCA에 드나들던 유학생들은 조만식, 송진우, 이광수, 안재홍, 신익희, 최린, 조소앙, 김병로, 현상윤, 이인, 전영택, 윤백남, 김필례 등을 포함하여 50~6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12

1913

[하와이 정착 및 《한국교회 핍박》 출판]

미국에서의 순회 활동 후 하와이에 정착하여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집필, 출판했다.

총회가 끝나자 이승만은 약 6개월간 미주 각 지역을 순회하며 미국에 거주하는 동포들과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미국의 옛 친구들, 지인들을 방문하였고 또 만나는 사람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여러 자문을 구하였다. 1913년 2월 3일, 이승만은 하와이에 정착하였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 집필에 몰두하였고 1913년 3월, 이를 완성하여 출판하였다.

1913

1914

[박용만과의 노선 갈등]

박용만이 하와이 오아후섬에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고 군사훈련을 시키자, 이승만은 비폭력 외교독립론을 주장하며 박용만과 갈등했다.

1914년 6월 10일 박용만은 하와이 오아후섬에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고 한인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에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일본과의 군사적 대결은 무고한 백성의 피만 흘릴 뿐 실질적 소득이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인류 양심과 여론에 호소해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도록 외교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하와이 한인사회가 이승만파와 박용만파로 갈리게 됐고 교회까지 분열하게 되었다.

1914

1915

1915

[보성고등보통학교 입학]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입학하였다. 졸업 직후 중국인 교회에 다녔고, 남궁억과 함께 교회 성가대원으로도 활동했다.

1918

1918

[연희전문학교 진학 및 중퇴]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중퇴했다.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이후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중퇴하였다. 중퇴 후 J.R.무스 선교사의 통역으로 활동하다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1918

[파리 강화회의 대표 선출과 외교 노력]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후 대한인국민회에서 파리 강화회의 한인대표로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가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국제 연맹에 위임통치 청원서를 발송하는 외교적 노력을 했으나 여권 발급 거부 등으로 참여는 불가능했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자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이탈리아 강화회담이 1919년 1월 18일에 개최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기한 민족자결주의에 전세계의 공산 운동가들이 고무되었다. 1918년 11월 25일 대한인국민회에서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가 강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919년 1월 6일 호놀룰루를 출발, 미주 본토로 향했다. 그는 뉴욕을 거쳐 1919년 2월 3일, 서재필이 거주하는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1919년 3월 3일 미국 국무성이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고 파리 강화회담에 기대할 것이 없어보이자, 이승만과 정한경은 안창호의 협조를 미리 받고 대한인국민회의 명의로 작성한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서를 우드로 윌슨과 미국 신문사에 송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18

1919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임시위원회 대표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의 국제연맹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서한을 제출했다. 이 청원은 임시정부 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19년 2월,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회장 안창호는 미주에서 한인 국민대회를 열고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을 대표로 선정하여 독립운동을 촉진시키고 2월 25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임시위원회 대표 이승만, 정한경 2명의 이름으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 청원서는 한국을 일본의 학정에서 구출하고 장래 한국의 완전 독립을 보증하며, 한국은 임시로 국제연맹 관할 하에 당할 것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4월경, 3~4월에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등 외교독립론자들이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을 했던 일이 상해 임시 정부 내에 알려지자 박용만, 신채호, 이동휘 등 무장독립론자들은 이승만 등을 맹비난하였다.

1919

1919

[한성정부 집정관총재 추대]

경성에서 수립된 한성정부에서 집정관총재로 추대되었고, 7월에는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

1919년 4월 23일 서울특별시 경성에서 한성 임시 정부(한성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했다. 이승만은 이 사실을 5월말에 알게 되었다. 1919년 4월 23일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활동본부가 설치되었다. 6월 14일부터 6월 27일 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과 파리 강화회담 의장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했다. 7월 4일 국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 선언서'를 발표했다. 7월 17일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

1919

1919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취임]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강화하고 국제적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다.

1919년 9월 11일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원칙 하에 상하이를 거점으로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 정부, 한성정부 등 국내외 7개의 임시 정부들이 개헌형식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은 기존의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대폭 개정하여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공포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하였다. 임시 헌법 제6조에서 대한민국의 주권행사는 헌법규범 내에서 임시 대통령에게 전임한다고 명시하였고, 제3장에서 임시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고 정무를 총감하며 법률을 공포한다고 명시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기존 국무총리였던 이승만이 1919년 9월 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던 데는 당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총장이었다는 점이 작용하였다. 당시 임시 정부는 외교활동을 통해 독립을 이루고자 했고, 외교활동의 주된 목표는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1919

1920

[상하이 임시정부 밀입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되었음에도 미국에만 머물다, 임시정부의 현지 취임 촉구에 응해 상하이 동부 푸둥에 밀입국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이승만은 여전히 미국 하와이와 워싱턴 D.C. 등지에서만 거주하고 있어, 임시 정부에서는 이승만의 현지 취임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임시 정부 및 임시 의정원의 명의로 워싱턴 D.C.에 발송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임병직, 이원순 등을 대동하고 1920년 6월 12일 워싱턴을 떠나 하와이를 거쳐 배를 타고 12월 5일 상하이 동부 푸둥에 밀입국 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미국에서 상하이로 건너가면서 배삯이 부족하여 중국인 시신 운반선에 밀항하여 고국으로 운반되는 중국인의 시신들 틈에 숨었다가 상하이로 건너오게 되었다. 상하이로 건너온 그는 한자를 잘 구사하는 점을 이용, 중국인 복장을 구한 뒤 중국인으로 행세하며 임시정부에 도착했다.

1920

1921

[워싱턴 군축 회의 참여 시도]

워싱턴 군축 회담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으나,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 조정 목적 회의로 한국 독립 문제는 철저히 묵살되었다.

워싱턴 군축 회담(Washington Naval Conference)에 참석하기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오전 8시 30분에 샌프란시스코 도착하자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이승만을 인터뷰 하였다. 이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워싱턴 군축 회의에서 한국민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워싱턴으로 돌아왔으며, 회의가 미국 영토에서 열리기 때문에 파리 평화회의에서처럼 한국 대표들이 일본 외교관들에게 질식을 당하지는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였다.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한국 대표가 공식적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준비 위원회를 꾸리기 시작하였다. 임시정부 대표단이 공식적이라는 인상을 가능한 띄기 위하여 이승만의 평생의 독립운동 동지인 국제 통신사인 INS의 젊은 기자 J. 제롬 윌리암스 주선으로 신문 기자들을 초청하여 기자 회견을 열고 억압에 눌린 한국인들의 투쟁사를 설파하며 기자들을 통해 먼저 세계 여론을 환기시키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끝내 목표한 바는 이루지 못하였고 다만 법률 고문이었던 프레드 돌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에 대한 논설이 1921년 12월 1일자 미 의회 회의록에 수록되는 결과만을 달성했다. 애초에 제국주의 열강간의 과도한 군비경쟁 해소 및 이권 조정이 회의의 목적이였던만큼 그들의 식민지에 대한 독립 등의 요구는 철저히 묵살되었다.

1921

1923

1923

[미국 대학 졸업]

미국 아이오와 주립 데이버 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하며 학업을 마쳤다.

아이오와주 데이버 대학교 문학과에 입학하였고, 스스로 고학과 노동으로 학비를 조달했으며 미국 아이오와주 데이버 대학교를 졸업을 했다. 졸업 직후 뉴욕으로 건너가서 노동을 하였다.

1925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 탄핵]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 면직되었다. 이는 임시정부의 고질적인 재정난과 내부 갈등, 그리고 이승만의 미국 체류로 인한 직접 영도 부재 때문이었다.

1925년 3월 23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은 이승만에 대한 탄핵을 의결해 대통령직에서 면직시키고, 곧바로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당시 이승만의 탄핵에 결의한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원은 곽헌, 최석순, 문일민, 고준택, 강창제, 강경선, 나창헌, 김현구, 임득산, 채원개 등 10명이었고, 탄핵심판위원장은 나창헌이었고, 위원은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이었다. 이시영, 조소앙, 김구 등은 이승만의 갑작스런 탄핵 면직은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의 횡포라며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4월 15일 김구에게 보낸 서한에 '보여주신 깊은 계획과 미래에 대한 고민은 우리들이 당연히 시행해야 할 大計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맨손과 맨주먹만으로는 절대로 성취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닙니다. 반드시 먼저 자금을 마련한 연후에야 능히 추진할 수 있습니다'라고 자금난을 토로하면서 탄핵 면직에 대한 항거를 사실상 포기하였다.

1925

1931

1931

[박마리아와 약혼]

미국 유학 중 신민회 집회에서 박마리아를 만나 약혼했으나, 박마리아의 귀국으로 약혼이 취소되었다.

유학시절 신민회 집회에서 박마리아를 만나 약혼했다가 박마리아의 귀국으로 약혼이 취소되었다.

1932

[국제연맹 특명전권대사 임명]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의해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며, 탄핵 면직 8년 만에 다시 임시정부 각료로 복귀했다.

1932년 11월 10일,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의해 국제 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 면직 당한 이승만을 대표로 기용한 것은 임시 정부의 외교 독립운동을 수행할 만한 적임자로서 이승만을 능가하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1932년 12월, 미국을 출발하여 리버풀, 런던, 파리 등을 경유한 후, 1933년 1월 4일에 국제 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1932

1934

1934

[미국 유학 후 귀국]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국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신한민보 기사를 통해 1934년 이기붕의 귀국 사실이 보도되었다. 귀국 후 북촌 일대에서 상점인 가회상회를 개업, 운영했으나 실패했다.

1934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

뉴욕 랙싱턴 가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했다. 백인 여성과의 결혼에 대한 반대 분위기가 강했다.

1934년 9월 20일, 뉴욕 랙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다. 백인 여성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신혼 초기부터 프란체스카 도너는 한인 지도자의 외국인 신부를 탐탁치 않게 여긴 한인 교포들에 의해 '호주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호주댁이 뭐냐는 질문에 이승만은 좋은 이름이라고 대답했다. 호주댁의 호주는 오스트리아의 착오로, 오스트리아를 하와이에서 가까운 오스트레일리아(호주)로 착각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1934

1934

1934

[박마리아와 재혼]

이화여자전문의 교수로 재직 중이던 박마리아와 재회하여 결혼했다.

귀국 후 이화여전에서 강사를 하고 있던 박마리아와 재회하여 1934년 12월 15일 결혼하였다. 결혼 당시 별다른 직업이 없었던 일로 장모의 반대가 심하였으나 아내 박마리아를 통해 어렵게 결혼 승락을 얻어냈다.

1941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임명]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워싱턴 D.C.에 위치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대미교섭의 전권을 위임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대미외교의 전면에 다시 나설 수 있었다.

1941년 4월 20일 호놀룰루 9개 단체가 모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외교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41년 6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워싱턴 D.C.에 위치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대미교섭의 전권(全權)을 위임하는 '신임장'을 교부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대미외교의 전면에 다시 나설 수 있었다.

1941

1941

[《일본내막기》 출간]

뉴욕에서 일본의 미국 침공을 경고하는 《일본내막기》를 출간했다. 12월 진주만 공격 이후 큰 설득력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1941년 7월 뉴욕에서 일본의 미국 침공을 경고하는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를 출간하였다. 12월 진주만 공격 이후 큰 설득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당시 이 책은 《대지》의 저자 펄벅에게 '무서운 진실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들었다. 진주만 공격 이후 이 책을 통해 조선이 왜 독립해야 하는지 미국사회에 알릴 수 있었다.

1941

1942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 개국]

이승만의 제안으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이 개국되어, 매일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했다.

미국 정부는 1942년 2월 24일 전 세계의 청취자를 대상으로 태평양 전쟁의 전쟁상황을 알리기 위한 방송인 미국의 소리(VOA, Voice of America)를 개국하였다. 이승만은 1942년 6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였다. 1942년 8월 29일, 이승만의 제안으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이 개국하였다. 조선방송협회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을 듣곤 했는데, 이날 이승만의 항일 단파방송 내용을 밀청한 사람들은 그 내용을 입에서 입으로 전래하였고 훗날 국내에 이승만에 대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42

1944

[미국 태극우표 발행]

이승만의 노력으로 미국 체신청에서 태극 문양의 우표를 발행했다. 이는 한국의 독립을 미국이 지지한다는 증명으로 받아들여졌다.

1944년 7월, 이승만의 노력으로 미국 체신청이 태극문양이 들어있는 우표의 공식 발행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0월 18일 미국 체류 중인 이승만은 중국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영문으로 편지를 발송, 1944년 11월에 미국이 한국인의 대일항전을 기념하기 위해 5센트짜리 태극우표를 발행한다는 내용을 통지했다. 11월 2일 미국 체신청에서 태극우표를 발행하자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미국이 지지한다는 증명으로 태극마크를 도안하여 우표를 발행하였다는 사실을 알렸고, 발행된 태극우표 3점을 동봉하여 충칭 임시 정부로 발송해주었다.

1944

1945

1945

[미군정 통역관 활동]

광복 후 미군이 진주하자 미군정의 통역관으로 채용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광복 이후, 미군이 진주하자 미군정의 통역관으로 채용되었다. 군정청 통역관 당시 급료를 초콜렛과 캔디로 받았다.

1945

1945

[이승만 비서 활동 시작]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의 첫 사저인 돈암장에서 비서직을 맡아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승만이 귀국하면서 그는 이승만의 첫 사저인 돈암장에서 이승만의 비서직으로 지내게 되는데, 이는 과거 이승만과 인연을 가진 것 덕분이었다.

1945

[해방 후 고국 귀국]

맥아더 장군의 전용기를 이용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며 3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해방된 조국에서 건국 과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시작했다.

천황 히로히토가 방송을 통해 항복을 발표한 1945년 8월 15일 정오는 워싱턴 시간으로 8월 14일 밤 11시였다. 이 뉴스를 들은 이승만은 그 날 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웠다. 그는 부인 프란체스카에게 되도록 빨리 자신이 먼저 귀국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이승만은 즉시 귀국하려 하였으나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여기는 미국 국무부가 쉽게 여권을 내주지 않아 2개월간 발이 묶여 있었다. 1945년 8월 하순 이승만은 미군 인사들과 연락, 굿펠로 대령의 도움으로 미 여권국으로부터 여행증서를 받고 군사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던 한국에 입국하려고 맥아더의 극동사령부(GHQ)로부터 입경 허가서를 받아 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1945년 10월 4일 뉴욕을 출발해 하와이와 괌을 거쳐 10월 12일 도쿄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더글러스 맥아더를 만나 며칠 머문 다음, 태평양지구 미 육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전용기 ‘바탄(Bataan)’호를 이용하여 10월 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33년만의 귀국이었다.

1945

1945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 추대]

각 정당·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인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건국 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45년 10월 23일 각 정당·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이승만을 정점으로 소집한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초기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에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등 공산당도 모두 포함돼 있었다. 10월 24일 윤치영 등의 독지가들의 주선으로 돈암장에 입주하였다. 10월 31일 이승만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을 돈암장에 불러들여 회담했으며, 친일파를 제외하면 협의회에 참여하겠다는 박헌영의 동의를 얻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45년 11월 3일 조선공산당은 '선친일청산'을 주장하며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

1945

1945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취임 거부]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이를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독촉중앙협의회로 대동단결할 것을 역설했다.

1945년 9월 7일 이승만은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다. 10월 21일 허헌, 이강국 등 좌익인사들이 방문해서 조선인민공화국에 주석 취임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11월 7일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취임을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로 대동단결할 것을 역설하였다. '나는 중경임시정부의 한 사람이다. 임시정부가 들어와서 정식타협이 있기 전에는 아무런 데도 관계할 수가 없다.'고 밝혔다.

1945

1945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논의 반대]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결과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4개국 신탁통치 논의 사실이 알려지자, 반탁 입장을 표명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3상회의) 결과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미·소·영·중 4개국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를 논의하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때 동아일보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오보를 내보냈다. 좌우파 가릴 것 없이 모두 강력한 신탁통치 반대(반탁)를 표명했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도 반탁을 결의하였다. 1946년 1월 3일 좌익진영이 찬탁 입장으로 전환하면서 좌익과 우익의 분열이 노골화하였다.

1945

1945

1945

[도봉산 은신]

일제의 반체제 인사 숙청 정보를 입수하고 도봉산에 은신하며 광복을 맞이했다.

1945년 초 일제가 반체제 인사들을 숙청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경성부 도봉산 도봉으로 은신, 숨어 지내다가 8월 광복을 맞았다.

1946

1946

[YMCA 및 조선적십자사 이사]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이사와 조선적십자사 이사직을 맡았다.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이사, 조선적십자사 이사를 지내며 사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1946

[공산주의자들과의 결별 선언]

정례 기자회견에서 신탁통치 찬성으로 급선회한 공산주의자들을 친일파와 다름없는 매국노로 규정하고 결별을 선언했다.

1946년 1월 14일 이승만은 정례기자단회견에서 신탁통치 찬성으로 급선회한 공산주의자들을 친일파와 다름없는 매국노라고 단정하고 결별을 선언하였다. '파괴자와 건설자가 어떻게 합동되며 애국자와 매국자가 어떻게 한 길을 갈 수 있을까. (중략) 이후에 우리가 국권을 회복한 후에는 이 분자들에게도 친일분자와 같은 대우아래 우리 민족의 재판마당에서 우리가 이 사람들에게 물을 말이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1946

1946

[민주의원 의장 추대]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으로 개편될 때 의장에 추대되었으며, 김구, 김규식은 부의장이 되었다.

1946년 2월 8일 이승만 계열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 계열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라는 공통 분모 하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통합 결성하였다. 이승만은 총재, 김구는 부총재에 추대되었다.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가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으로 개편되었다. 이승만이 의장에, 김구·김규식이 부의장에 추대되었다.

1946

1946

[미소공위 개최 전 의장직 사표 제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미군정의 압력으로 민주의원 의장직 사표를 제출했다. 표면상 건강 문제였으나 실제로는 반소주의자였던 이승만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하려 한 것이었다.

1946년 3월 19일 이승만은 시간적 여유와 신병을 이유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표를 제출했으나 민주의원은 사표를 접수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승만의 건강이 회복될 기간 부의장 김규식이 의장직을 겸직하기로 하였다. 표면상 이유는 건강 문제였지만, 사실은 미군정이 다음날 개최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철저한 반소주의자이며 신탁통치안을 격렬히 비판해 온 이승만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1946

1946

[정읍 발언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 제기)]

전라북도 정읍에서 연설하며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니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나 위원회를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읍 발언'으로 불리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론을 공개적으로 제기한 최초의 사건이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전라북도 정읍에서 가진 유세에서부터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 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 하여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주기 바란다.'고 밝혔다. 이승만은 정읍 발언을 통해 본격적으로 '민족주의 대 공산주의' 프레임을 띄웠으나 반응은 시원찮았다. 이러한 주장은 6월 25일 경기도 개성에서도 이어졌다.

1946

1946

[남한 단독 정부 수립 호소 위한 도미]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유엔에 직접 호소하기 위해 동경을 거쳐 미국으로 출발했다. 이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과 남북 분단의 고착화 조짐 속에서 이루어진 외교적 노력이다.

1946년 12월 1일 아침 김규식을 병문안 하고, 12월 2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유엔에 직접 호소하기 위해 동경을 거쳐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이승만이 미국에 있는 동안 국내 임시정부 지지세력은 미군정을 인수하기 위한 운동을 빠르게 추진하였다. 1947년 2월 17일 민족통일총본부·독촉국민회·비상국민회의를 통합하고 비상국민회의를 국민의회로 개칭하였다. 3월 3일 국민의회는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3월 5일 미군정 브라운 소장에게 임시정부의 권능을 인정해달라 요구했으나 거부 당했다.

1946

1947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주장]

국민의회 제43차 임시대회에서 주석으로 보선되었으나 거절하고, '남한만으로라도 총선거를 행하자'며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를 주장했다.

1947년 9월 5일 이승만은 국민의회 제43차 임시대회에서 주석에 보선되었으나, 9월 16일 국민의회 주석 유임을 거절하고 '남한만으로라도 총선거를 행하자'며, '내가 총선거를 주장하는 것은 남북을 영영 나누자는 것이 아니오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서 국제상에 발언권을 얻어 우리의 힘으로 통일을 촉성할 통로(門路)를 열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1947

1948

[유엔, 남한 단독 총선거 가결]

유엔이 남한 단독 총선거를 가결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이는 이승만의 단선단정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은 남한 단독 총선거를 가결하였다. 이 무렵부터 이승만의 단선단정론과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론 간 대립이 심화되고 국론도 분열되기 시작했다. 김구는 3월 1일 '초대 대통령은 나의 숭배하는 선배인 이승만 박사를 추대하나 남한 단독 총선거에는 응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1948

1948

1948

[비서실장 일시 사임]

병원 입원으로 이승만의 비서실장 직을 일시적으로 사임했다.

병원 입원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이승만의 비서실장 직을 내놓았다. 이후 윤보선이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실장을 맡게 된다.

1948

[제헌 국회의원 무투표 당선]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대문구 갑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준다.

1948년 5월 10일 이승만은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대문구 갑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 제헌국회 초기 원내 정파의 세력은 대체로 한국민주당(한민당) 70~80여 석,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 60여 석, 무소속 50여 석 정도로 추산되는데, 무소속 중 약 30여 명 정도가 김구 및 김규식 계열로 추산된다.

1948

1948

[제1대 제헌국회 의장 선출]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최고령자였던 이승만이 제1대 제헌국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개회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승을 확실히 밝혔다.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최고령자였던 이승만을 제1대 제헌국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때 개회사에서 '이 민국(民國)은 기미 3월 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라고 말해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계승을 확실히 밝혔다.

1948

1948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 및 정부 수립]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공식 선언하며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1948년 7월 20일 실시된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구, 안재홍, 서재필 등을 누르고 제헌 국회의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7월 24일 이승만은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날 이시영 부통령도 함께 취임식을 치렀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언하였다. 그 직후, 이승만은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으로 정하고, 공식 문서에서 쓰는 달력은 단군기원(4281년)을 사용하도록 했다.

1948

1948

[대마도 및 반출 문화재 반환 요구]

일본에 대해 쓰시마섬(대마도) 반환과 반출 문화재 반환 등을 요구했다. 이는 대한민국 주권 회복 후 대일 외교의 강력한 반일 노선을 보여주는 초기 행보였다.

1948년 8월 19일 이승만은 일본에 쓰시마섬(대마도)과 반출문화재 반환 등을 요구하였다. 정부수립 후, 미군정 하의 국방경비대를 국군으로 전환하였다. 이때는 대통령령으로 '호국병역에 관한 임시조치령'에 의해 의용병제 형태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8개월 후인 1949년 8월 6일 최초의 '대한민국 병역법'이 공포되면서 징병제를 원칙으로 하면서 보충적으로 지원제를 병용하는 병역제도가 실시되었다. 1949년 12월 18일 징병제 실시 축하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1948

1948

1948

[대통령비서실 실장 임명]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통령비서실 실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대통령비서실 실장이 되었고, 이승만의 비서실장직을 맡게 되었다.

1948

[반민족행위처벌법 국회 통과]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찬성 103표, 반대 6표로 통과되었다. 이는 친일파 청산의 법적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조치였다.

1948년 8월 16일 국회 특별법기초위원회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때 제정한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안'을 근거로 반민족행위처벌법 초안을 작성하여 국회본회의에 상정하였다. 8월 17일 김웅진 국회특별법기초위원장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의 대강을 국회본회의에 보고하였다. 1948년 8월 20일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건의안은 바로 본 것으로 나도 동의한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친일자를 정부 요직에 두어서 동포들의 감정을 악화시킬 수 없다. 앞으로는 그런 인물을 등용 안 하겠다'고 답변하였다. 1948년 9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이 찬성 103표, 반대 6표로 국회를 통과하였다.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다.

1948

1948

[여수·순천 사건 발생]

여수에 주둔 중이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9일 만에 진압되었으나 공산진영의 대규모 군사 반란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 중이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김지회와 지창수를 중심으로 일으킨 소위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되었다. 여수·순천 사건은 발생 9일만인 10월 27일에 진압되었지만, 공산진영이 같은 민족을 대상으로 전에 없던 대규모 군사반란을 일으키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여수·순천 사건으로 인한 피해에 관해서는 다양한 통계가 확인되며 대략 2,000~5,0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8년 기준 재산 피해는 약 100억 원, 가옥 소실은 2천 호 가량으로 집계되었다.

1948

1948

[국가보안법 제정]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반공 체제를 구축하고자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과 처벌에 나섰다.

이승만 정부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반공체제를 구축하였다. 군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는 '숙군작업'을 벌이는 한편, 1948년 12월 1일에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처벌에 나섰다. 문제는 이것이 일제시대 독립투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었던 그 악명높은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했다는 사실이다. 1949년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해체하려고 했을 때, 국가보안법 제정에 극렬 반대했던 노일환 의원 등 반대파 소장의원 13명을 이 국가 보안법을 통해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했으며, 1949년 한 해 동안 국가보안법으로 잡아 가둔 사람의 숫자가 12만 명이 넘었다.

1948

1948

[유엔의 대한민국 유일 합법 정부 승인]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하며 국제적 승인을 얻었다.

1948년 12월 7일 장면 한국유엔대표는 유엔 총회에서 한국승인을 요청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후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 결의 195(III)호(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에서, 대한민국 정부(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를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했다. 1948년 12월 11일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국제적으로 승인됐으니 이제 북한에 총선거를 실시시켜 선출된 인원을 남한 국회에 참가시켜 남북통일을 이루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1948

1949

[반민특위 활동 방해 및 제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에 대해 삼권분립과 치안 문제를 언급하며 제동을 걸고, 친일경찰 검거 활동을 제한할 것을 주장했다.

1949년 1월 5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본격적으로 사무를 개시하였다. 1월 25일 친일경찰 노덕술이 특별경찰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특별경찰대가 (친일)경찰을 체포하는 일이 생기자 2월 2일 이승만은 삼권분립과 치안문제를 언급하며 특별경찰대에 압력을 줬다. '조사위원들이 법을 범한 자를 비밀리에 조사해서 사법부에 넘기면 사법부가 행정부에서 각각 그 맡은 책임을 진행하여 처단할 것인데, 이러하지 않고 입법부와 행정부와 사법부의 일을 다 혼잡하여 행한다면 이것은 삼권 분립을 주장하는 헌법과 위반되는 것이니,... (중략) 지금 반란분자와 파괴분자가 여기저기(處處)에서 살인방화하여 인명이 위태하며 지하공작이 긴급한 이 때에 경관의 기술과 정력이 아니면 사태가 어려울 것인데, 기왕에 죄법이 있는 자라도 아직 보류하고 목하의 위기를 정돈시켜 인명을 구제하며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지혜로운 정책이 아닐까 한다.'고 밝혔다.

1949

1949

1949

[서울특별시장 취임]

서울특별시장으로 취임하여 직무를 수행했다.

윤보선의 뒤를 이어 서울특별시 시장을 지냈다.

1949

[농지개혁법 제정]

농민들의 농지 및 토지개혁에 대한 목소리에 부응하여 농지개혁법을 제정했다. 이는 봉건적인 지주-소작인 관계를 자작농 체제로 바꾸는 혁명적 조치였다.

1949년 6월 21일, 이승만 정부는 농민들의 농지 및 토지개혁에 대한 목소리에 부응하여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였다. 이승만의 승인 하에 농지개혁법을 주도한 사람은 조봉암 농림부장관이었다. 농지개혁법은 한국민주당의 재정적 기반이던 친일지주층을 한 방에 박살낼 결전병기였다. 1948년 내각 구성 당시 이승만이 김성수의 천거를 무시했던 일에 더하여 농지개혁법 제정으로 인해 친이승만이던 한국민주당의 정치노선은 반이승만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농지개혁법은 일제강점기의 봉건적인 지주-소작인 관계의 사회를 자작농-자유인의 사회로 바꾸는 혁명적인 계기로 평가된다.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낡은 요소는 사라지고 지주 대신 자본가가 새로운 경제의 주역으로 급성장하였다. 자기 땅을 일구게 된 농가에서는 높은 교육 수준을 갖춘 미래의 노동자들이 배출됐다.

1949

1949

[김구 피살]

민족진영 재결합이 가시화되던 중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로 인해 민족진영 재결합과 반민특위 활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1949년 5월 말 민족진영 3영수의 재결합이 가시화되었다. 1949년 5월 19일 김구는 '일반국민들이 3영수의 재합작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현 시국에 비추어 있음직한 일이나 본래부터 대통령과 김박사와 나의 사이에는 별반 간격은 없었던 것이므로... (중략) 대통령과 金박사와는 앞으로도 종종 만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로 인해 이승만은 남북통일에 앞서서 민족진영을 재결합하는 데에 실패했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 암살의 배후에 대한 서로 간의 추궁이 이어졌으며 민족진영은 끝내 재결합하지 못하였다. 김구 서거 후 한국독립당은 와해되기 시작했고, 김규식 세력은 1950년 6.25 전쟁 때 그가 납북 당하면서 와해되기 시작했다. 결국 그 즈음으로 하여 대한민국의 주류 세력으로는 개화파 및 임시정부 우익의 정통성을 잇는 계보(보수계 정당)와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전신으로 하는 계보(민주당계 정당)만이 남아 현대의 양당구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1949

1949

[미군 완전 철수]

유엔 총회 결의에 따라 미군이 군사 고문단만 남기고 한국에서 완전 철수했다. 이는 북한의 남침 위협을 증가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49년 6월 29일, 미군이 1948년 12월 12일에 이루어진 유엔 총회 결의에 따라 500여명의 군사 고문단만 남기고 완전 철수하였다. 1949년 12월 16일, 군사원조에 비행기 등의 포함을 미국에 요청하였으나 묵살당하였다. 1950년 1월 10일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여 한국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 밖에 있다고 밝혔다. 그 당시 한반도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6.25 전쟁 발발 6일 전의 CIA 보고서에선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저평가되어 있었다. 북한이 소련의 위성국가라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1949

1949

1949

[서울특별시장 재선]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선되어 1951년 5월 8일까지 시장직을 수행했다.

1949년 8월부터 1951년 5월 8일까지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선되어 활동했다.

1950

[6.25 전쟁 발발]

새벽 4시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기습 남침하여 6.25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한반도와 한국민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한반도와 한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1950년 3월 10일부터 집행되기 시작한 농지개혁법으로 인해 남한에 공산주의가 스며드는 것까진 막을 수 있었다. 6월 25일 새벽에 기습침략을 당하자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피신한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익산(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고 부산으로 옮겨갔다.

1950

1950

[서울 수복]

인천 상륙 작전 성공 후 서울을 수복했다. 맥아더 사령관과 함께 서울시내로 향했으며, 수도 서울 환도식에 참여했다.

1950년 9월 15일 실시된 인천 상륙 작전 성공 후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였다. 서울시와 경찰은 서울이 완전히 탈환된 28일 낮부터 시정을 재개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공공시설을 급속히 복구하기 시작했다. 9월 29일 오전 10시 맥아더 사령관과 일행이 도쿄에서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고, 잠시 후 이승만 대통령 일행도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여 함께 서울시내로 향하였다. 수도 서울 환도식은 9월 29일 12시를 기해 거행되었고, 이로써 3개월간 북한의 점령하에 있던 수도 서울은 탈환되었다.

1950

1950

[평양시청 환영대회 참석]

평양을 점령한 후 평양시청 앞에서 열린 환영대회에 참가하여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았으며, 통일된 자유 조국을 위한 싸움을 맹세했다.

1950년 10월 30일, 평양을 점령한 후, 평양시청 앞에서 열린 환영대회에 참가하여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이 연설에서 이승만은 '여러분 우리는 이제 유엔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를 다시 분단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은 한국 내에서 축출되었으며 앞으로 중공이나 소련이 나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등 겁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싸울 뿐이요 우리가 합하면 감히 덤벼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나와 같이 맹서합시다. 자유와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하여 싸울 것을!' 이라고 연설했다.

1950

1951

[1.4 후퇴]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다시 서울을 점령하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38선 이북에서 후퇴하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궁지에 몰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도와 참전하자 국군과 유엔군은 200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38선 이북의 수복지역에서 부득이 후퇴하였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고, 유엔군은 원산 등의 지역에 폭격을 가하였다.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인해 예비병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자, 중공군 및 조선인민군에 대항하고자 제2국민병을 편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민방위군이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에게 군수보급, 물자를 지급해야 할 것을 고급 장교들이나 간부들이 이를 부정 착복, 횡령하여 수많은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이를 국민방위군 사건이라 한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가볍게 마무리하려다 국민여론이 거세게 일자 전면 재수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1951

1951

1951

[국방부 장관 취임]

제3대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국민방위군 사건을 처리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전중이던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국방장관 신성모를 몰아내면서 1951년 5월부터 1952년 3월까지 제3대 국방부 장관을 지내어 국민방위군 사건을 처리하였고, 국민방위군 사건 관련자를 엄격히 처벌하려다 모함을 당하기도 했으나 이승만이 듣지 않아 위기를 모면하였다.

1951

1951

[자유당 창당 참여]

이승만의 지시로 이범석, 장택상 등과 함께 자유당 창당 조직에 참여했다.

이승만의 지시로 이범석, 장택상, 전진한, 박용만 등과 정당 창당 작업에 착수, 이범석 등과 함께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1952

[평화선 선포 및 독도 사수]

동해에 평화선(이승만 라인)을 선포하여 독도 영유권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해양 주권을 확립했다. 일본과 미국이 반발했으나 이를 묵살하고 강경 대응했다.

1951년 9월 3일 '일본은 한국에 관하여 대마도·독도를 포함한 우리의 영토를 전부 반환하여야 된다'고 말했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하였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1월 20일 일본은 평화선 선포를 비난하였다. 2월 12일 미국은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해왔으나 그는 이를 묵살하였다.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발효로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한 일본의 군정기가 끝나고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였다. 동시에 맥아더 라인이 무효화되면서 이승만은 이를 대체할 법안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했다. 이어 1952년 10월 14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2호 포획심판령을 제정 공포하고 포획심판소 및 고등포획심판소를 개설하였다. 한국 해경은 평화선 침범 일본 선박 328척과 선원 3929명을 나포·억류했다.

1952

1952

[발췌개헌안 통과 및 대통령 직선제 도입]

부산 정치 파동 중 계엄령 하에 국회에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어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다. 이는 장기집권 기반을 마련하려는 이승만의 의도가 담긴 개헌이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구, 김규식 계열의 남북협상파와 무소속 계열의 후보가 대거 당선되었고, 6.25 전쟁 중인 1951년 발생한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으로 인해 이승만 정권은 지지 기반이 약화되어갔다. 국회는 이승만 정부의 실정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내각책임제 개헌을 다시금 강력히 밀어부쳤다. 이에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 개헌을 역설하며 자유당을 창당했다. 1952년 1월 18일 국회는 정부개헌안을 부결시켰다. 이승만 정부는 정부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관제시위를 획책하기도 하였다. 1952년 5월 25일 서민호 구속 사건을 구실로 계엄을 선포하고 야당 의원들을 연행했다. 1952년 6월 12일 장택상을 중심으로 한 '신라회'는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측 안과, 의원내각제와 국회 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절충한 '발췌개헌안'을 제시하였다. 1952년 7월 4일 국회 의석정수 210석 중 166명이 출석한 가운데 기립투표 결과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었고, 7월 7일 공포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에 최초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으며, 대한민국 국민은 처음으로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뽑게 됐다.

1952

1952

[제2대 대통령 재선]

직접 선거로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74.61%의 득표율로 재선되어 제2차 이승만 정부가 출범했다.

1952년 8월 5일 직접 선거로 실시된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제2대 대통령, 함태영이 제3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74.6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 선거는 발췌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후 첫 번째 국민투표에 의한 대통령 선거였다.

1952

1952

1952

[대한체육회 회장 및 KOC 위원장]

제17대 대한체육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을 겸임하며 체육계에서 활동했다.

1952년 9월부터 1960년 4월까지 제17대 대한체육회 회장을 역임했고 대한체육회 회장으로 재임중 제6대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을 겸임하였다.

1953

[반공포로 직권 석방]

휴전 협상 최대 쟁점인 포로 교환 문제를 방해할 목적으로 약 25,000명의 반공 포로를 직권 석방했다. 이 사건은 미국의 이승만 제거 작전까지 논의하게 했다.

한국 전쟁이 2년 이상 장기화되고 중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미국 본토에서는 휴전 협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 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약 25,000명의 반공 포로를 직권 석방시켰다. 당시 휴전 협정의 최대 쟁점이 포로교환 문제였기에 휴전 대화를 막으려는 의도적인 행위였다. 반공포로 석방 직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일련의 회의를 통해 이승만 제거, 미군 철수 등을 포함한 미국의 대응책을 논의했다. 결국 미국 정부는 예정대로 특사를 파견해 이승만에게 그가 원하던 안보 공약을 제공하는 대신 휴전에 대한 한국 정부의 협력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1953

1953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한국전쟁 휴전 후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대한민국의 안보를 확보하고 경제 개발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북한의 침략 의지를 무력화하는 중요한 조약으로 평가된다.

미국은 부담스러운 한미상호방위조약 대신 향후 북한의 남침에 유엔 참전국들이 공동 대응하겠다는 ‘대제재선언(greater sanctions statement)’을 발표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이승만은 '그런 건 믿을 수 없으니 주한미군을 주둔시켜 보장해달라'고 했으며 이에 아이젠하워는 확답하지 않고, 이후 이승만은 백악관을 괴롭히는 '벼랑 끝 전술'을 택하였다. 그리하여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1953년 8월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이 직접 한미안보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1953년 10월 1일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을 발판으로 대한민국은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훗날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오늘날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성공작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제2의 한국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약의 가장 큰 목적인 전쟁 방지를 이뤄낸 것이다. 여기에 국방 역량을 미군이 부담하여 대한민국은 경제개발에 그만큼 힘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의도 존재한다.

1953

1953

1953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 취임]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취임하며 당내 이범석 계열 세력을 축출하고 당의 2인자로 부상했다.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면서 이범석의 족청계 세력을 축출하였고, 자유당의 2인자로 부상하였다.

1954

1954

[국회의장 당선 및 사사오입 개헌 주도]

민의원의장에 당선되었고,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을 주도하여 통과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54년 6월부터 1960년 4월 사망할 때까지 세 차례에 걸쳐 민의원의장에 당선되었으며, 1954년에는 이승만의 대통령 장기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여 가결시키게 만들었다. 이 무렵 그의 집은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릴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고 있었다.

1954

[미국 대학 명예 박사 학위 수여]

방미 중 조지워싱턴 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이승만의 학문적, 정치적 위상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1954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을 방문했고 모교 조지워싱턴 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5년 3월에는 자유수호에 힘쓴 공로로 미국 금영자유훈장을 받았다.

1954

1954

[사사오입 개헌]

대통령 3선을 위해 재적의원 2/3 이상이라는 개헌 가능 의결정족수를 '사사오입'(반올림)이라는 논리를 적용하여 통과시켰다. 이는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오명을 남기며 독재적 행태의 비판을 받았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이승만의 대통령 3선을 노린 제2차 개헌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통령 3선금지조항 폐지, 국무원의 연대 책임제 폐지, 개별 국무원 불신임 인정, 부통령의 대통령 승계권 부여, 그리고 여기에 국민투표제 도입안을 더하여 개헌의 명분과 타당성을 선전하였다. 1954년 11월 27일 국회 비밀투표 결과 재적의원 203명, 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가 나왔다. 당시의 개헌 가능 의결정족수는 재적의원의 2/3 이상이었으므로 이 개헌안이 가결되기 위한 충분한 선은 136명이어야 했다(재적의원 2/3는 135.33…명이므로, 자연인은 136명이어야 함). 따라서 당시 사회자였던 국회부의장 최순주는 부결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은 수학의 4사5입(반올림)을 적용하여 135.33명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0.33이란 자연인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반(半)도 안되는 소수점 이하는 삭제하는 것이 이론상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954년 11월 29일 자유당은 의원총회에서 이 안을 채택하여 국회에서 재론하기로 하였고 이에 반발한 야당 의원들은 모두 국회의사당에서 퇴장하였다. 자유당 의원들만 남은 자리에서, 자유당 의원 125명 중 찬성 123명, 반대 2명(김두한, 민관식)으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이를 정부로 이송하여 개헌안을 공표·발효하였다.

1954

1955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

개천절 행사 때 나재하 등 9명이 수류탄으로 이승만을 암살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된 사건이 발생했다. 공보실은 이를 월북한 조소앙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은 나재하 등 9명이 이종태를 사주해 1955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 때 이승만에 대한 수류탄 암살을 기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된 사건이다. 재판 결과 나재하, 김병호, 민영수, 김재호, 김익중, 유성연, 김동혁에게는 징역 15년형이 선고됐다. 수류탄을 구해준 김재호의 아들 김동훈과 이종태를 포섭했다는 혐의를 받은 이범륜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들은 4.19 혁명 이후 출감되었다. 1955년 10월 14일 대한민국 공보실은 이 사건은 월북한(납북된) 조소앙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훗날 피고인들의 후손들은 이 사건이 육군특무대장 김창룡과 이종태의 함정수사였다고 주장하였다.

1955

1955

1955

[중앙대 명예박사 학위 수여]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56

1956

[부통령 선거 낙선]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민주당의 장면에게 패해 낙선했다.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의 장면에게 패하여 낙선하였다. 이기붕의 권력 장악에 반발한 장택상, 윤치영, 이윤영 등 친여 정치인들이 대통령 후보 없는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여당 성향의 표가 분산된 결과였다.

1956

[제3대 대통령 재선]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3선)되었고,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이 당선되었다. 이는 수복지구 유권자들이 참여한 첫 선거였다.

1956년 3월 5일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추대하자 이승만은 '내 나이 이미 팔십이 넘어… 물러가는 것이 옳을 줄로 생각한다'라며 불출마 서한을 전달했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이승만 재출마 호소 궐기대회가 열렸고, 대한노총은 정치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1956년 3월 23일 이승만은 3백만명 이상이 날인한 탄원서와 혈서가 들어와 할 수 없이 민의에 양보하기로 했다며 입후보 의사를 표명했다. 1956년 5월 5일 신익희는 호남 유세를 다녀오던 중 열차 호남선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이승만은 경쟁자 없이 무난히 3선에 성공하였다. 1956년 5월 13일 유엔 한국 위원회 대표 전원이 선거 감시 차 각 지방에 출동하였다. 1956년 5월 15일 직접 선거로 실시된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재선(3선)되었으며,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이 당선되었다. 이 선거는 6.25 전쟁의 결과로 대한민국으로 편입된 수복지구 유권자들이 참여한 첫 선거이기도 했다.

1956

1956

1956

[여야 민의원 친선 야구대회 참석]

배재학원 운동장에서 열린 제1차 여야 민의원 친선 야구대회에 참석해 축사를 낭독했다.

배재학원 운동장에서 열린 제1차 여야 민의원 친선 야구대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했다.

1957

1957

[아들 이강석, 이승만 양자로 입적]

자신의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켜 권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려 했다.

자기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5대손이고, 그의 아들인 이강석은 효령대군의 17대 손이므로 서로서로 모두 촌수가 맞지 않으나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된 것이다.

1958

1958

[4대 민의원의원 당선 및 의장 재선]

이천군 선거구에서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민의원의장에도 재선되었다.

이정재와의 갈등 끝에 선거구를 서대문구에서 경기도 이천으로 옮긴 그는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고 민의원의장에도 재선되었다.

1958

1958

[순국선열추념회 회장 취임]

순국선열추념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순국선열추념회 회장이 되었다.

1959

1959

[이윤영 이승만 면회 방해]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이윤영이 이승만에게 진언하려 했으나, 이기붕의 방해로 만남이 거절되었다.

이윤영은 나라의 운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승만에게 진언을 하러 경무대로 찾아갔으나 이기붕이 못만나게 해 놓아서 결국 이윤영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섰다.

1960

[3.15 부정선거]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의 당선을 위한 개표조작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항의가 전국적으로 번졌고, 마산에서는 3·15 마산 의거가 발생했다.

1958년 8월 11일 자유당은 국가보안법 개정을 국회에 상정하였다. 야당은 야당 탄압의 수단으로 사용될 법이라고 주장하며 강력히 반대했으나, 여당은 12월 24일 무술 경관을 국회에 투입하여 야당 의원들을 감금하고 국회의사당 정문을 폐쇄시킨 채 여당인 자유당만이 출석한 국회에서 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비롯해 1959년 예산안 등 10개 법안 27개 의안을 통과시켰다.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가 있었고, 개표 과정에서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한 개표조작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항의가 전국적으로 진행된 가운데 경남 마산에서는 조직적 저항으로 발전한 3·15 마산 의거가 발생했다.

1960

[3.15 부정선거로 부통령 당선]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 3.15 부정선거를 통해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는 큰 사회적 문제로 비화되었다.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여 3·15 부정선거를 통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는데, 임기를 마칠 가망이 없는 고령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의 지위에 이기붕을 앉히려는 것이었다.

1960

[4.19 혁명]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경찰의 유혈 진압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학생들의 궐기를 높이 평가하며 대통령직 사퇴를 약속했다.

1960년 4월 11일 3·15 부정선거 반대시위에 참가했다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이 한 낚시꾼에 의해 마산 앞바다에서 숨진채로 발견되었다. 시체의 왼쪽 눈에서 박힌 최루탄이 확인되었고, 이는 부정선거 비판여론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언론을 통해 3·15 마산 의거를 남한에 잠복한 공산주의자 간첩이 배후가 된 폭동이라고 밝히고 마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960년 4월 19일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총궐기하고 수많은 중고생들과 시민들이 동참한 시위와 이에 대한 경찰의 유혈 진압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사태는 동료들의 희생에 분노한 학생들이 집회를 여는 지경에 이르렀고, 계엄령은 서울과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나 국군은 무력진압을 사실상 거부하고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1960년 4월 21일 이승만은 전직 각료들을 경무대로 불러 상의하였다. 4월 24일 4.19 유혈사태에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전념하겠다 하였다.

1960

1960

[대통령직 하야]

4.19 혁명으로 인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여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즉시 수리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960년 4월 26일 새벽 6시경 허정은 이승만에게 하야를 권고할 결심으로 경무대를 방문했다. 이때 이승만은 구 비서에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하야하겠다는 성명서를 구술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25일 저녁에도 학생들이 많이 죽고 다쳤다'는 보고를 듣고 어떻게 국민들을 죽일 수가 있느냐. 내가 물러 나야지 하며 하야를 결심했다. 이날 이승만은 시위대 대표 5명과 면담 후 하야를 약속하였다. 그 직후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 정부통령 재선거, 이기붕의 공직 사퇴, 국민이 원하면 본인이 책임지겠다'를 약속하였다. 1960년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하였고 즉시 수리되었다.

1960

1960

1960

[4.19 혁명과 비극적인 사망]

4.19 혁명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나, 경무대 별관에서 아들 이강석에 의해 부인과 차남과 함께 살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4·19 혁명이 일어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4월 28일 새벽, 이승만 정권의 몰락으로 자신이 위험에 처해진 이기붕은 미국으로 도주하려고 했었으나, 경무대 별관에서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아들 이강석이 권총으로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을 차례로 쏘아 죽이고 자살하여 그의 일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1960

1960

[일가족 장례식 거행]

이기붕과 일가족의 시신은 수도육군병원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기붕과 일가의 시신은 비서들에 의해 수습되어 1960년 4월 30일 수도육군병원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에는 이승만, 프란체스카 도너, 허정 등 내각 인사, 여야 국회의원 일부가 참여하고, 장지는 망우리 공동묘지, 먼저 죽은 딸 이강희의 묘 근처에 이기붕 내외의 묘, 아들 이강욱, 이강석의 묘가 그 아래, 먼저 죽은 이강희의 묘소 옆에 조성되었다.

1960

[하와이 망명]

4.19 혁명 이후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처음에는 한 달 정도 체류할 생각이었으나, 과도내각과 제2공화국 정부의 불허로 귀국하지 못하고 망명생활을 이어갔다.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처음에 한국을 떠날 때 영구 망명을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한 달 정도 잠시 머무는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허정 과도내각과 대한민국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은 이승만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와이에서 망명생활 중이던 이승만은 향수병에 걸렸다.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1962년 3월 17일자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3월 16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3월 17일 박정희는 특별지시를 통해 입국을 거부, 이승만의 귀국을 막는다고 알려졌는데 실은 허락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당시 실제 외교문서 기록에 불허했던 것으로 나온다. 이승만은 실어증에 걸려서 고생했다. 영어에 유창했던 이승만은 실어증 이후 프란체스카 도너의 간호를 받으며 약간의 한글과 한문으로 대화할 수 있었다.

1960

1962

1962

[사후양자 입양]

사망 후 10촌 동생 이기호의 차남 이강복을 사후양자로 입양하며 혈통을 이었다.

1962년 3월 30일을 기하여 일가(10촌 동생)인 전직 제일은행 은행장 이기호의 차남 이강복을 사후양자로 입양, 서울 종로구 구청에 입양수속을 했다.

1965

[하와이에서 서거]

하와이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심장병으로 서거했다. 향년 90세였다. 유해는 고국으로 운구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60년부터 심장병이 있던 그는 트리폴리 육군 병원에 자주 진료하였다. 이승만은 망명생활중 병세가 악화되면서 망명지 하와이에서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현지 시간 0시 35분 (한국 시간 19시 35분) 하와이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심장병으로 서거하였다. 향년 90세였다. 이승만이 부인과 양자 이인수 박사를 통해 남긴 마지막 기도와 유언은 '우리 민족이 굳세게 서서 국방에서나 경제에서나 다시는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였다. 서거 직후 데스 마스크를 만든 뒤 유해는 전 주한 미군 사령관 벤프리트 장군이 마련한 특별비행기편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였다. 1965년 7월 23일 오후 3시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유해를 운구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효상 국회의장, 조진만 대법원장, 정일권 국무총리 등 3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공항으로 나가 그의 유해를 영접했다. 1965년 7월 27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영결식을 갖고 서울 시가행진 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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