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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D. 왓슨은 미국의 저명한 분자 생물학자이자 유전학자, 동물학자로,
* 1953년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DNA 이중 나선 구조를 공동 발견하여 과학계에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 이 업적으로 196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암 연구와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를 이끌었습니다.
* HGP 초대 소장으로서 연구의 윤리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논의를 선도했습니다.
* 인종과 지능의 연관성 등 여러 논쟁적인 발언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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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생물물리학자이자 X선 결정학의 대가 - DNA 바이러스 석탄 흑연 등 다양한 물질의 구조 규명에 결정적으로 기여 - 특히 DNA 이중 나선 구조 발견에 핵심적인 사진 51 등 중요한 데이터를 제공함 - 그러나 그녀의 놀라운 기여는 종종 무시되거나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사후 노벨상 수상 대상에서도 제외됨 - 과학적 업적뿐만 아니라 연구 과정에서 겪었던 논란과 성차별 의혹으로도 회자되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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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1920
[빛나는 시작, 부유한 유대인 가정의 맏딸로 태어나다]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런던 노팅 힐의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유대인 가정에서 둘째이자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과학, 라틴어, 스포츠 등 다방면에서 탁월한 소질을 보였으며, 그녀의 가족은 사회 개혁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프랭클린은 과학자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엘리스 아서 프랭클린은 런던 머천트 뱅크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뮤리엘 프랜시스 월리였습니다. 아버지의 삼촌 허버트 사무엘은 영국 내각 최초의 유대인 내무장관을 지냈으며, 고모 헬렌 캐롤라인 프랭클린은 여성 참정권 운동과 노동조합 조직에 활동적이었습니다. 프랭클린은 세인트 폴 여학교와 노스 런던 칼리지잇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가족은 나치를 피해 유럽에서 도망 온 유대인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1928
[출생]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제임스 듀이 왓슨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후 분자 생물학의 역사를 바꿀 주요 인물이 됩니다.
제임스 듀이 왓슨은 1928년 4월 6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살바도르 루리아의 작업을 통해 분자 생물학을 접하게 됩니다.
1928
1938
1938
[케임브리지 대학교 입학, 결정학의 씨앗을 뿌리다]
프랭클린은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교 뉴넘 칼리지에 진학하여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이 시기 그녀는 '결정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브래그스를 만나 결정학에 깊은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 만남은 훗날 그녀의 위대한 업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1941
1941
[우등 졸업과 새로운 도전, 전쟁 연구에 뛰어들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프랭클린은 학위 연구 대신 전쟁에 기여하고자 런던 외곽의 영국석탄이용연구소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곳에서 그녀는 숯과 석탄에 대한 창의적인 연구를 시작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연구 분야를 개척해 나갔습니다.
케임브리지는 1947년부터 여성에게 학사 및 석사 칭호를 소급 적용했고, 프랭클린은 이에 따라 학사 학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영국석탄이용연구소에서 그녀는 '왜 어떤 종류의 석탄은 물이나 공기를 통과시키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을 탐구하며 풍부한 실험 도구와 함께 국제적 명성을 가져올 이론을 발달시키게 됩니다.
1945
1945
[석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다: 비정질 물질 X선 결정학의 선구자]
영국석탄이용연구소에서 다공성 석탄의 물리화학적 성질을 연구한 프랭클린은 이 연구를 기반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녀의 석탄 연구는 여러 학술 논문의 기반이 되었고, 비정질 물질의 구조를 밝히는 데 대한 그녀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세계 최초의 선구적인 업적** 중 하나였습니다.
이 연구는 그녀의 박사 논문 'The physical chemistry of solid organic colloids with special reference to coal'의 기반이 되었고, 여러 학술 논문과 출판물의 표지 기사로도 다루어졌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DNA와 바이러스 연구에 필요한 X선 결정학 기술을 익히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됩니다.
1946
1946
[X선 결정학의 대가, 파리에서 꽃피우다]
프랭클린은 프랑스 국립 과학 연구 센터의 지원으로 파리 국립 화학 연구소에 합류하여 결정학자 자크 메링을 만났습니다.
메링에게 비정질 물질에 X선 결정학을 적용하는 실질적인 기술을 배우며 그녀의 전문성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이 시기 그녀는 석탄이 흑연으로 변할 때의 원자 배열 문제를 연구하며 여러 논문을 발표했고, 학계에서 명성을 쌓아갔습니다.
메링은 기존의 수천 가지 결정에 X선 회절을 적용하는 연구와 달리, 비정질 물질에 X선 회절을 적용하는 선구적인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프랭클린은 이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여 석탄의 물리적, 화학적 연구에 적용했고, 파리에서 다양한 학회에 참여하며 세계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48
[박사 과정 시작 및 파지 그룹과의 만남]
인디애나 대학교 루리아의 실험실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고, 같은 해 막스 델브뤽을 처음 만났습니다.
1948년 초 왓슨은 인디애나 대학교의 루리아 실험실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그 해 봄, 그는 루리아의 아파트에서 막스 델브뤽을 처음 만났고, 여름에는 Cold Spring Harbor Laboratory로 첫 이동하여 델브뤽을 다시 만났습니다. 이 만남들은 왓슨이 파지 그룹에 속해 과학자로 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8
1949
[유전 물질에 대한 고민]
유전자가 단백질이라고 여기는 전통적 관념을 접했지만, 파지 그룹의 영향을 받아 DNA가 유전 물질이라는 에이버리-맥클라우드-맥카트 실험을 알게 됩니다.
1949년 왓슨은 당시의 전통적 관점인 유전자가 단백질이고 스스로 복제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강의를 펠릭스 하우로위즈와 같이 받았습니다. 염색체의 다른 중요한 분자 요소인 DNA는 '멍청한 테트라뉴클레오티드'라고 받아들여졌지만, 왓슨은 파지 그룹의 영향을 받아 DNA가 유전 물질이라고 제안한 에이버리-맥클라우드-맥카트 실험을 알고 있었습니다.
1949
1950
[동물학 박사 학위 취득]
22세의 나이로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의 연구 프로젝트는 엑스레이를 이용해 박테리아 바이러스를 불활성화 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1950년 왓슨은 22세의 나이로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의 연구 프로젝트는 엑스레이를 이용해 박테리아 바이러스를 불활성화 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1950
1950
1950
[킹스 칼리지 합류, DNA 연구의 서막]
프랭클린은 런던 킹스 칼리지의 존 랜들 과장에게 스카우트되어 3년간의 연구 펠로우십을 수락했습니다.
그녀는 원래 단백질 및 지방의 X선 회절 연구를 맡을 예정이었으나, 연구 방향이 급격히 변경되면서 핵산 섬유의 X선 회절 연구, 즉 DNA 구조 규명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녀의 삶을 바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프랭클린이 펠로우십을 확정하자마자 윌킨스가 새로운 핵산 샘플을 가져오면서 연구 방향이 DNA로 변경되었습니다. 프랭클린은 런던에서의 연구를 위해 필요한 실험 장비들을 요청했고, 랜들은 그녀에게 핵산 섬유에 대한 X선 회절 연구를 시작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1950
[박사 후 연구 시작]
박사 후 연구를 위해 코펜하겐 대학교의 생화학자 허번 칼크라 실험실로 향했지만, DNA 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칼크라와의 연구 방향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왓슨은 1950년 9월, 박사 후 연구를 위해 생화학자 코펜하겐 대학교의 허번 칼크라 실험실로 처음 향했습니다. 칼크라는 효소의 핵산 합성에 관심이 있었고 그는 파지를 실험적 제도로 이용하길 원했지만, 왓슨은 DNA 구조에 대해 알고 싶어 했기에 그의 관심은 칼크라의 것과는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1950
1951
1951
[DNA 연구 본격 돌입, 그리고 윌킨스와의 불편한 동거]
프랭클린은 킹스 칼리지에서 레이먼드 고즐링과 함께 새로운 X선 회절 장치를 조립하며 DNA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물을 많이 머금은 B형 DNA와 짧고 건조한 A형 DNA라는 두 가지 형태의 DNA를 발견하며, 탁월한 X선 분석 기술과 시료 준비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킹스 칼리지에는 이미 모리스 윌킨스가 핵산에 대한 연구를 몇 년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윌킨스는 프랭클린의 전문성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팀에 합류하길 기대했지만, 프랭클린은 랜들의 지시로 자신과 고즐링만이 DNA 연구를 맡았다고 생각하여 둘 사이에 오해가 생겼고, 이는 심각한 불화로 이어졌습니다. 이 불화는 훗날 프랭클린의 기여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1951
1951
[DNA 핵심 정보 발표, 왓슨과의 운명적 만남]
킹스 칼리지에서 열린 DNA 세미나에서 프랭클린은 DNA 분자 바깥에 인산기가 위치하며 물이 이를 둘러싸고 있다는 중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제임스 왓슨도 참석했는데, 왓슨은 이 정보를 무시하고 인산기가 안쪽에 있는 잘못된 DNA 모델을 만들었다가 프랭클린의 비판으로 폐기하게 됩니다.
그녀의 발표는 DNA 구조 규명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습니다.
세미나 후 왓슨과 크릭은 인산이 안쪽에 있는 DNA 모델을 만들었으나, 프랭클린은 이 모델이 물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며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이 일로 캐번디시에서는 DNA 연구를 잠시 중단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프랭클린은 이 시기 이미 DNA가 나선 구조이며 인산이 바깥쪽에 있다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1951
[DNA 구조 규명에 대한 확신]
이탈리아에서 모리스 윌킨스가 자신의 DNA 엑스레이 회절 데이터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고 DNA 구조 규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같은 해 존 켄드루를 통해 잉글랜드에서 새로운 박사 후 연구 프로젝트를 마련하게 됩니다.
왓슨은 칼크라와의 건설적인 상호교류는 없었으나, 이탈리아에서의 미팅에서 모리스 윌킨스가 자신의 DNA 엑스레이 회절 데이터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왓슨은 당시 DNA가 더 자세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 해 여름, 루리아는 존 켄드루를 만났고 그는 잉글랜드의 왓슨을 위해 새로운 박사 후 연구 프로젝트를 마련했습니다.
1951
1952
1952
[DNA 이중나선 규명에 결정적 '사진 51'을 찍다]
프랭클린은 B형 DNA의 가장 선명하고 중요한 X선 회절 사진인 **'사진 51'을 세계 최초로 촬영**했습니다.
이 사진은 DNA가 나선 구조를 가진다는 결정적인 증거였지만, 그녀는 A형 DNA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이 사진의 공개를 잠시 미루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사진은 훗날 왓슨과 크릭의 DNA 모델 구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사진은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선명도와 정보를 담고 있는 X선 회절 사진**이었습니다. 프랭클린은 또한 자신의 연구 결과를 옥스퍼드의 결정학 전문가 도로시 호지킨에게 가져가 논의하는 등, 자신의 결과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습니다.
1953
1953
[새로운 시작, 버크벡 칼리지로의 이적 확정]
킹스 칼리지에서의 불화와 연구 환경에 지쳐 있던 프랭클린은 1953년 1월 버크벡 칼리지로 이적을 확정했습니다.
그녀는 킹스 칼리지를 떠나기 전, DNA에 관한 중요 논문 두 편을 MRC(의학 연구 위원회)에 보고하며 자신의 연구 성과를 공식화했습니다.
이 시기 프랭클린과 고즐링은 패터슨 함수를 이용한 수많은 계산에 몰두하여 A형 DNA가 나선형이 아니라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이적 소문이 퍼지자 폴링과 코리가 DNA 구조를 알아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으나, 프랭클린은 이미 모델 구축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1953
1953
[고별 세미나, 그리고 결정적인 '사진 51'의 비자발적 유출]
프랭클린은 킹스 칼리지 고별 세미나에서 A형 DNA가 나선형이 아니라고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 직후, 왓슨은 프랭클린의 실험실을 찾아가 그녀의 X선 해석 능력을 의심하며 논쟁을 벌였습니다.
흥분한 프랭클린에게 왓슨이 도망치자, 모리스 윌킨스는 왓슨에게 프랭클린의 '사진 51'을 몰래 보여주었고, 왓슨은 이 사진을 보고 DNA가 나선 구조를 가진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이는 **DNA 구조 발견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윌킨스는 프랭클린이 떠난 뒤에도 DNA 연구가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에 고즐링으로부터 받은 '사진 51'을 왓슨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왓슨은 이 사진을 통해 DNA의 나선 구조와 정확한 경사도, 간격까지 알아낼 수 있었고, 캐번디시 연구소의 책임자 브래그는 DNA 연구 금지를 바로 풀어주어 왓슨과 크릭은 곧바로 DNA 모델 구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프랭클린의 기여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논란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1953
1953
[왓슨과 크릭, 프랭클린 데이터로 DNA 이중 나선 모델 완성]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프랭클린의 MRC 보고서와 '사진 51'을 바탕으로 DNA 이중 나선 모델 구축을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보고서에는 두 나선이 반평행하다는 등 모델 구축에 필요한 모든 핵심 정보가 담겨 있었습니다.
2월 말, 그들은 DNA의 상보적 결합을 발견하며 완벽한 DNA 구조를 설명해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랭클린의 데이터가 결정적이었으나, 그녀는 자신의 연구가 이용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왓슨은 프랭클린의 MRC 보고서를 입수하여 필요한 모든 정보를 얻었고, 크릭의 제안에 따라 인산을 바깥에 놓은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같은 주 프랭클린도 B형 DNA에 대한 계산을 진행하며 두 개의 사슬로 이루어져 있음을 받아들였지만, 염기 배치에 대한 설명에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DNA 구조 발견은 생물학 역사에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1953
[DNA 이중나선 구조 추정]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추정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삼중나선을 생각했으나, 여러 실험 결과를 종합하여 이중나선 구조를 확신하게 됩니다.
1953년 3월,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추정했습니다. 이들은 처음엔 DNA가 삼중나선일 것이라 생각했기에 3가닥 모형을 만들었지만, 염기들의 수소결합을 암시하는 노팅엄대학 매슨 걸랜드 연구팀의 DNA의 산성도에 따른 점성도의 변화 실험을 뒤늦게 알게 되어 이중나선구조를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폴링의 잘못된 가설 논문을 들고 윌킨스와 플랭클린에게 보여주려고 떠난 여행에서 윌킨스가 플랭클린이 최근에 찍은 X선 회절 사진을 왓슨에게 보여줘 DNA가 이중나선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953
1953
[DNA 이중나선 구조 논문 발표]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DNA의 이중나선 구조에 관한 역사적인 논문을 과학 저널 <네이처>에 발표하여, 20세기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 중 하나로 평가받았습니다.
왓슨과 크릭은 1953년 4월 25일 출간된 과학저널 <네이처>에 DNA의 이중나선 구조에 관한 논문을 제출했습니다. 캐번디시 실험실 감독 로렌스 브래그 경은 이보다 앞선 4월 8일 솔베이 컨퍼런스에서 단백질을 처음 발표했지만 인쇄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의 논문은 다른 생물학자들과 노벨상 수상자들로부터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으로 불리게 됩니다.
1953
[DNA 구조 논문 발표, 프랭클린의 기여는 그림자에 가리다]
DNA 구조를 다룬 세 편의 논문이 세계적인 과학 저널 《네이쳐》에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실린 것은 왓슨과 크릭의 논문이었고, 이어 모리스 윌킨스 팀, 그리고 프랭클린과 고즐링의 논문이 뒤따랐습니다.
프랭클린의 논문에는 그녀의 **결정적인 DNA X선 회절 사진과 정확한 데이터가 실렸지만**, 그녀의 기여는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었습니다.
왓슨과 크릭의 논문에서는 킹스 칼리지 연구팀의 자세한 결과는 알지 못했다고 서술했지만, 1년 뒤 그들의 논문에서는 킹스 칼리지의 데이터가 없었다면 모델 구축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인정했습니다. 프랭클린의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데이터가 새어 나가 캐번디시 연구팀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의심했지만, 프랭클린은 이에 대해 항의한 적이 없습니다.
1953
[DNA 이중나선 구조, 학생 신문에 보도]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 신문인 Varsity에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에 대한 짧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생 신문인 Varsity는 1953년 5월 30일,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에 대한 짧은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는 이 발견이 과학계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1953
1953
[Cold Spring Harbor Symposium 발표]
제18회 Cold Spring Harbor Symposium on Viruses에서 DNA 이중나선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여, 아직 이 발견을 듣지 못한 많은 과학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왓슨은 1953년 6월 초 제18회 Cold Spring Harbor Symposium on Viruses에서 DNA 이중나선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왓슨과 크릭이 <네이처>에 논문을 실은지 6주 후였는데, 그 모임의 많은 사람들은 아직 그 발견에 대해 듣지 못했었습니다. 이 심포지엄은 많은 사람들이 DNA 이중나선 모델을 처음으로 볼 기회였습니다.
1953
1954
1954
[버크벡 대학교, RNA 바이러스 구조 연구에 몰두]
버크벡 대학교로 자리를 옮긴 프랭클린은 농업 연구 회의의 지원을 받아 X선 결정학을 이용한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TMV) 구조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그녀는 1954년부터 아론 클러그와 성공적인 공동 연구를 시작했으며, RNA 바이러스의 유전 물질 구조를 밝히는 데 선구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1955년, 프랭클린은 《네이쳐》에 TMV 바이러스가 모두 같은 길이를 가지고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저명한 바이러스학자의 의견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주장이었으나 결국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그녀의 팀은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 모델을 완성하여 브뤼셀 세계 박람회에 전시하기도 했으며, 폴리오 바이러스 등 다양한 RNA 바이러스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1956
[하버드 대학교 교수 부임]
하버드 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로 연속 승진을 달성하며 분자생물학 연구를 이끌었습니다.
왓슨은 1956년에 하버드 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조교수로부터 부교수, 정교수로 연속 승진을 달성했습니다. 그는 하버드대에서 고전 생물학에서 분자 생물학으로의 전환을 옹호하며 학문적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1956
1956
1956
[암 투병 중에도 연구 열정 불태우다]
미국 출장 중 건강에 이상을 느낀 프랭클린은 그해 9월 복부 주위에 두 개의 종양이 있다는 난소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여러 차례 입원과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그녀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1956년에 7편, 1957년에 6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놀라운 연구 열정을 보여주었으며, 팀과 함께 폴리오 바이러스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그녀는 가족과 친구들, 특히 크릭 부부와 깊은 친분을 쌓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부모님께는 자신의 투병 사실을 숨기려 노력했습니다. 1957년 후반 다시 위독한 상태에 놓였다가 1958년 1월 생물물리학 연구 경영자로 승진되기도 했으나, 병세는 점차 악화되었습니다.
1958
1958
[위대한 과학자의 이른 죽음, 노벨상 수상 기회 박탈]
1958년 3월 30일 건강이 다시 악화된 프랭클린은 결국 4월 16일 37세의 젊은 나이로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이른 죽음은 장기간 X선에 노출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됩니다.
노벨상은 사후 수여되지 않기 때문에, 1962년 DNA 구조 발견으로 왓슨, 크릭, 윌킨스가 노벨상을 수상할 때 그녀는 그 영광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프랭클린은 생전 왓슨, 크릭, 윌킨스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이는 윌킨스와의 불화, 데이터의 무단 사용 의혹, 그리고 성차별적 대우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그녀의 결정적 기여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논란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962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DNA의 핵산 구조 연구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왓슨, 크릭, 그리고 윌킨스는 1962년 그들의 핵산의 구조에 대한 연구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이는 1953년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은 것입니다.
1962
[DNA 노벨상 수상자 발표, 프랭클린은 제외되다]
1962년,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는 핵산 연구, 특히 DNA 구조 규명에 대한 공로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1958년 사망한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노벨상의 사후 수여 불가 원칙에 따라 수상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녀의 결정적인 기여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논란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윌킨스는 10년 이상 DNA 구조를 연구하여 왓슨-크릭 모델을 확인했으며, 크릭은 유전 암호를, 왓슨은 RNA를 연구했습니다. 프랭클린의 결정적 데이터와 통찰이 없었다면 왓슨과 크릭의 모델 완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입니다. 또한 그녀는 연구 과정에서 성차별과 데이터 무단 사용 등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왓슨은 자신의 책 《이중나선》에서 프랭클린을 깎아내리는 발언을 했으며, 추후 공식적으로 사과했습니다.
1965
[저서 'The Molecular Biology of the Gene' 출판]
교과서인 'The Molecular Biology of the Gene'를 출판하며 분자생물학 지식의 대중화에 기여했습니다.
왓슨은 1965년에 교과서인 'The Molecular Biology of the Gene'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분자생물학 분야의 중요한 저서로 인정받았습니다.
1965
1968
[베스트셀러 'The Double Helix' 출판]
DNA 구조 발견에 대한 베스트셀러 'The Double Helix'를 출판하여 과학적 발견의 과정을 대중에게 흥미롭게 전달했습니다.
왓슨은 1968년에 DNA 구조 발견에 대한 베스트셀러인 'The Double Helix'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당시 과학계의 치열한 경쟁과 연구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1968
1968
[Cold Spring Harbor 연구소 감독 취임]
하버드 대학교 교수직을 정리하고 Cold Spring Harbor 연구소의 감독이 되어 연구소를 세계적인 분자생물학 연구센터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1968년, 왓슨은 Cold Spring Harbor 연구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시간제로 하버드와 콜드 스프링 하버를 오가며 근무하다가, 1968년 끝내 하버드의 교수직을 정리하고 콜드 스프링 하버의 연구소장직에 전념했습니다. 소장으로서 그의 청사진은 연구소를 세계적 분자생물학 연구센터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었으며, 유전자 치료와 암 정복을 연구소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1968
1968
1968년 3월 28일 왓슨은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고의 라홀라 해변 교회에서 엘리자베스 루이스와 결혼했습니다.
1968
1971
1971년 12월 닉슨 미국 대통령은 국가암퇴치법을 통과시켜 역사상 최대의 암 정복 운동을 벌였습니다. 법안의 요지는 연방정부가 국립암연구소를 통해 암 정복의 기초 연구에 엄청난 규모의 연구기금을 10여 년에 걸쳐 지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71
1972
[암 연구 기금 유치]
Cold Spring Harbor 연구소가 국립암연구소로부터 5년 동안의 암 연구 기금을 유치하며 연구 역량을 강화했습니다.
1972년, Cold Spring Harbor 연구소는 5년 동안의 암 연구기금을 국립암연구소로부터 유치하면서 최고 수준의 젊은 종양바이러스학자들을 연구소로 끌어들여 연구 역량을 한층 강화했습니다. 이는 의학계와 정치권의 암 정복이라는 국가적 과제에 대한 관심에 힘입은 것이었습니다.
1972
1974
1970년과 1972년 사이에 왓슨은 두 아들을 갖게 되었고, 1974년 그의 가족은 Cold Spring Harbor에 그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었습니다.
1974
1976
왓슨은 하버드 대학교에서의 교수 생활 대신 뉴욕주 롱아일랜드 북부 해변에 위치한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를 이끌어나가는 연구관리자 일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는 심지어 학생들이 그들의 연구가 방해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1976년에 학교를 떠났습니다.
1976
1977
[RNA 접합절단 발견]
Cold Spring Harbor 연구소의 리처드 로버츠가 RNA 접합절단(분할유전자)을 발견하는 중요한 연구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77년,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의 리처드 로버츠가 RNA 접합절단 또는 분할유전자를 발견하는 중요한 연구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mRNA가 핵 안의 DNA로부터 유전정보를 읽어 단백질 합성이 일어나는 세포질에 유전정보를 전달하기 전, 불필요한 염기 서열인 인트론을 제거하고 유용한 염기인 엑손을 연결하는 과정인 접합절단이 일어난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1977
1980
[제한효소 기술 개발 주도]
Cold Spring Harbor 연구소의 리처드 로버츠가 수많은 미생물로부터 새로운 제한효소를 정제하는 기술을 개발했고, 이는 DNA 재조합 연구에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습니다.
1972년경 로버츠는 수많은 미생물로부터 새로운 제한효소를 정제하는 기술을 개발했고, 1980년경이 되어 세상에 알려진 제한효소의 절반 이상이 그의 실험실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이러한 효소들이 DNA 재조합 관련 업체에 의해 상업적으로 활용될 기미가 보이자, 로버츠는 새롭게 발견된 효소를 무료로 전 세계 학계 연구자들에게 제공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콜드 스프링 하버는 종양 바이러스 연구자들을 위한 메카가 되었으며, 이 연구소의 소장으로서 암과의 전쟁에 선봉에 선 왓슨은 다시 한 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1980
1988
1988년, 60세의 왓슨은 NIH 산하 인간게놈 연구 기획에 합류했고, 그 이듬해에는 인간게놈연구센터의 초대 소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인류의 유전 정보 해독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게 됩니다.
1988
1990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 공식 시작]
NIH와 DOE 공동으로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왓슨은 이 프로젝트의 초대 소장으로서 연구를 주도했습니다.
1990년 8월, NIH와 DOE 공동으로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가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연방정부가 산하 기관을 통해 지원하는 이 프로젝트는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청사진인 모든 유전 정보를 완전히 해독하고, 아울러 게놈 지도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작성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왓슨은 이 프로젝트의 초대 소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90
1990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윤리적 측면 강조]
HGP 예산의 일부를 프로젝트가 일으킬 수 있는 과학적, 윤리적 문제에 대한 연구에 투입하도록 주도하며 '윤리, 법, 사회관계(ELSI)'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왓슨은 HGP 예산의 일부를 이 프로젝트가 일으킬 수 있는 과학적, 윤리적 문제에 대한 연구에 투입하도록 주도했습니다. 그의 선언에 힘입어 HGP가 본격화된 1990년부터 게놈 연구의 윤리적, 법적, 사회적 의미를 연구하는 프로젝트 '윤리, 법, 사회관계'에 연간 예산의 5%가 투입되었습니다. 이는 HGP로부터 예상되는 문제점 도출과 그에 대한 실제적인 제도적 대안 마련,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 등 다양한 활동을 폈으며, 이후 ELSI 연구는 생명공학 프로젝트 등에서 필수적인 세부 과제로 점차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990
1992
1992년을 기점으로 HGP는 국제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프로젝트를 미국이 주도하고 분석 작업 역시 절반 이상이 미국에서 이루어졌지만,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을 비롯한 쟁쟁한 국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추가로 동참했습니다. HGP는 전 세계 18개국의 연구진이 참여하는 국제 컨소시엄으로 발전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 이외에도 세균에서 꼬마선충에 이르기까지 몇 가지 생물의 염기 서열 분석이 완료되는 등 그 범위와 속도를 더하게 되었습니다.
1992
1992
1992년 HGP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 왓슨은 NIH의 소장으로 부임한 버너딘 힐리와 충돌을 빚으면서 HGP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두 사람의 분쟁 원인은 DNA의 특허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왓슨은 NIH 연구자들이 분석한 DNA 서열에 정부 특허 취득을 주장한 힐리의 결정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불확실한 유전자에 특허를 내줄 경우 장기적으로 의학 연구와 발전이 지체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1992
1998
[HGP 경쟁 구도 형성 및 가속화]
미국의 민간 생명공학회사 셀레라 지노믹스 사가 인간 유전체 연구에 뛰어들면서 HGP와 경쟁 구도를 형성, 유전자 해독 작업이 급류를 타게 되었습니다.
1998년 미국의 민간 생명공학회사인 셀레라 지노믹스 사가 인간 유전체 연구에 뛰어들면서 HGP와 경쟁 구도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유전자 해독 작업은 급류를 타기 시작하여 2005년까지 끝내기로 한 것을 2003년으로 앞당겨 끝냈습니다.
1998
1999
[United Biomedical 이사회 은퇴]
Chang Yi Wang이 설립한 United Biomedical의 이사회 멤버로 6년간 일하고 은퇴했습니다.
왓슨은 Chang Yi Wang이 설립한 Board of Directors of United Biomedical의 이전 멤버였습니다. 그는 6년간 일하고 1999년 은퇴했었습니다.
1999
2000
[저서 'Passion for DNA' 출판]
저서 'Passion for DNA'를 출판하며 자신의 과학적 열정과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왓슨은 2000년에 저서 'Passion for DNA'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그의 DNA 연구에 대한 깊은 열정과 과학적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2000년 컨퍼런스에서 왓슨은 피부 색깔과 성욕 사이의 관계에 대해 발표하며 비키니를 입은 여자의 사진을 슬라이드에 띄우고, 피부의 멜라닌이 성 충동을 향상시킨다며 “이것이 당신에게 라틴계 연인이 있는 이유입니다.”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습니다.
2000
2000
[인간게놈지도 초안 완성 발표]
HGP 컨소시엄과 셀레라 지노믹스 사가 공동으로 인간게놈지도 초안을 완성하여 발표하며 인류 유전체 해독의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2000년 6월, HGP 컨소시엄과 셀레라 지노믹스 사가 공동으로 인간게놈지도 초안을 완성하여 발표했습니다. 이는 인간 유전체 해독 작업의 놀라운 진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성과였습니다.
2000
2001
[전체 인간게놈지도 완성 공식 발표]
HGP 컨소시엄과 셀레라 지노믹스 사가 공동으로 전체 인간게놈지도를 완성했다고 공식 발표하여 의학과 인류 복지에 혁명적 진전을 예고했습니다.
수정된 목표보다 2년여가 더 빠른 2001년 2월, HGP 컨소시엄과 셀레라 지노믹스 사 두 조직은 전체 인간게놈지도를 완성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생명 현상에 대한 좀 더 확실한 접근이 가능해지고, 인류가 시달려왔던 많은 유전병 치료와 의약용으로 쓰일 각종 생체물질의 연구와 생산이 가능하게 됐습니다. 이는 암과 심장병 같은 복잡한 유전병에 대한 생물학적 통찰력은 물론 의학적 혜택 또한 엄청나 의학 분야에 혁명을 가져올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됩니다.
2001
2003
[인본주의자 선언문 서명]
인본주의자 선언문에 서명한 22명의 노벨상 수상자 중 한 명으로서, 그의 무신론적 관점을 공개적으로 표명했습니다.
무신론자인 왓슨은 2003년의 인본주의자 선언문에 서명한 22명의 노벨상 수상자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저서 'DNA: The Secret of Life' 출판]
저서 'DNA: The Secret of Life'를 출판하며 DNA와 생명의 비밀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높였습니다.
왓슨은 2003년에 저서 'DNA: The Secret of Life'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DNA와 생명 현상에 대한 그의 깊은 통찰을 대중에게 전달합니다.
2003
2007
[Champalimaud Foundation 심의회 장 취임]
Champalimaud Foundation의 레너 블레자의 권유를 받아 재단의 고문 역할을 하는 과학적 심의회의 장이 되었습니다.
2007년 1월, 왓슨은 Champalimaud Foundation의 장인 레너 블레자의 권유를 받아들여 재단의 고문을 하는 기관인 과학적 심의회의 장이 되었습니다.
2007
2007
[인종주의적 발언 파문]
영국 선데이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인종과 지능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논란의 발언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2007년 10월, 왓슨은 영국 선데이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흑인들이 백인과 동일한 지적 능력을 갖췄다는 전제 하에 이뤄지고 있는 서구 국가들의 아프리카 관련 정책들은 잘못됐다'며 '인종간 지능의 우열을 가리는 유전자가 앞으로 10년 안에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그는 문제가 커지자 공식 사과했지만 영국에서는 왓슨 박사의 발언을 놓고 논란이 계속됐습니다.
2007
2007
[Cold Spring Harbor 연구소 은퇴]
인종주의적 발언 논란이 커지자, 79세의 나이로 40년 가까이 봉사했던 Cold Spring Harbor 연구소에서 은퇴했습니다.
2007년 10월, 언론에 그의 인종주의적 발언이 노출되어 큰 논란을 일으키자, 결국 왓슨은 인종과 지능에 관한 비판적 관점을 철회했고, 1주 후인 25일에 79세의 나이로 '40년 가까이 고귀한 봉사를 했던' Cold Spring Harbor 연구소에서 은퇴했습니다. 왓슨은 성명서에서 그의 은퇴 이유를 그의 나이와 주변 환경으로 설명했습니다.
2007
2008
[저서 'Avoid Boring People' 출판]
저서 'Avoid Boring People(And Other Lessons from a Life in Science)'을 출판하며 과학 연구와 삶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담았습니다.
왓슨은 2008년에 저서 'Avoid Boring People(And Other Lessons from a Life in Science)'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과학자로서의 삶과 연구에 대한 그의 통찰을 보여줍니다.
2008
2019
[인종차별적 견해 재확인 및 연구소와 인연 단절]
미국 PBS 다큐멘터리에서 2007년에 했던 인종차별적 견해가 변하지 않았다고 답변하여 파장이 커졌고, 결국 연구소는 왓슨과의 모든 인연을 끊기로 결정했습니다.
2019년 1월 2일에 방송된 미국 PBS 다큐멘터리에서 왓슨은 2007년에 했던 인종차별적 견해가 바뀌었냐는 질문에 '전혀 아니다'라고 답해 파장이 커졌습니다. 이로 인해 Cold Spring Harbor 연구소는 '과학적 근거가 없고 입증되지 않은 개인적인 의견'이라며 왓슨과의 모든 명예 직함과 지원을 철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그의 오랜 과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논란의 발언으로 인해 과학계와의 관계가 단절된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2019
2025
[별세]
제임스 D. 왓슨 박사가 9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워싱턴포스트 등은 왓슨 박사가 미국 뉴욕 이스트 노스포트의 한 호스피스 시설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왓슨 박사는 지난 2018년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후 요양 중이었다.
정확한 사인은 유족 측에서 공개하지 않았다.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