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

군함, 전투선, 조선시대

0

임진왜란

전쟁, 동아시아 역사, 조선 시대

96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7- 21:04:08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교체
연혁 피인용 수 2
군함, 전투선, 조선시대

거북선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전투선으로, 판옥선을 기반으로 독특하게 덮개를 씌운 형태를 가졌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직전 건조하여 사천 해전에서 첫 출전한 이래, 일본 수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며 조선 수군의 16전 16승에 크게 기여했다. 강력한 화포와 견고한 방어력을 겸비한 돌격선으로, 조선 해전사의 상징이자 세계 해군사에서도 독창적인 군함으로 평가받는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꾸준히 발전하며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거북선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7- 20:42:36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교체
연혁 피인용 수 2
전쟁, 동아시아 역사, 조선 시대

1592년 일본 도요토미 정권의 조선 침략으로 시작된 대규모 전쟁입니다. 조선 일본 명 여진족 등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과 강력한 화포 등 조선 수군의 압도적 무기와 전술이 빛을 발했습니다. 의병의 분투와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남겼으나 동아시아 역사 흐름을 바꾼 중요한 사건입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임진왜란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413

[거북선 첫 기록]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13년(1413년) "임금이 임진강 나루[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2월 5일)

이때 이미 '거북선'이라는 이름의 배가 존재했으며, 왜선과의 모의 전투 훈련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413

1415

[거북선 성능에 대한 기록]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15년(1415년)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올린 상소 내용 중에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히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있다.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7월 16일)

거북선이 매우 견고하여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돌격선(突擊船)의 개념으로 개발되었음을 보여준다.

1415

1587

1587

[일본의 침략 야욕 드러남]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쓰시마 국주에게 조선 정벌 준비를 명령하며 침략 야욕을 드러냅니다.

이후 1591년에는 조선에 명나라 정벌에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를 요구하지만 조선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1590

1590

[조선 통신사 일본 파견]

일본의 실정과 히데요시의 의도를 살피기 위해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됩니다.

정사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부사 김성일은 이를 부인하며 조정 내 갈등을 빚었고, 결국 김성일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전쟁 대비가 미흡하게 됩니다.

1592

[이순신, 거북선 진수]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직전 전라좌수영 여수 앞바다에서 거북선을 처음 진수시켰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직전인 1592년(선조 25) 음력 3월 27일(양력 5월 7일)에 전라좌수영 여수 앞바다에서 거북선이 처음 진수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발발 직전 조선 수군의 핵심 전력으로 거듭날 거북선이 마침내 그 위용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1592

1592

[거북선, 실전용 최종 완성]

일본의 침공 단 하루 전, 거북선에 지자포와 현자포 시사를 성공적으로 마쳐 실전 투입 준비를 완료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1592년(선조 25) 음력 4월 12일(양력 5월 22일), 일본의 침공 단 하루 전에 거북선에 지자포·현자포 등의 화포를 장치하고 시사를 성공적으로 마쳐 실전용으로 최종 완성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발발 직전, 조선 수군의 핵심 전력인 거북선이 전장에 투입될 준비를 마쳤음을 의미한다.

1592

1592

1592

[일본군 조선 침략 개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끄는 일본군 약 20만 명이 부산진에 상륙하며 임진왜란이 시작됩니다.

정발이 지키던 부산진성과 송상현이 지키던 동래성이 속수무책으로 함락되며 조선은 개전 초부터 큰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일본군의 파죽지세에 조선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집니다.

1592

1592

[의병, 전국 각지에서 봉기]

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혼란 속에서 조헌,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등 각지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여 일본군에 대항했습니다.

이들은 일본군의 보급로와 통신망을 끊으며 적을 괴롭혔고, 광해군의 분조 활동과 더불어 조선 관군이 재기할 시간을 벌어주며 전세를 뒤집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곽재우 (최초의 의병)

1592년 6월 1일 (음력 4월 22일)

전쟁 발발 9일 만에 경상도 의령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고경명

1592년 7월 9일경 (음력 6월 1일경)

전라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김천일

1592년 7월경 (음력 6월)

전라도 나주에서 봉기했습니다.


조헌

1592년 7월경 (음력 6월)

충청도 옥천에서 봉기했습니다.

1592

1592

[신립, 탄금대에서 전사]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 탄금대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전사하며 조선의 남부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집니다.

조선이 자랑하던 유일한 버팀목이 사라져 버린 셈으로, 이 패배로 일본군은 수도 한양으로 향하는 길을 완전히 열게 됩니다.

1592

1592

[선조, 한양(도성) 탈출]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후에 선조가 도성을 떠났습니다.  

1592

1592

[일본군 한양 점령]

일본군이 개전 단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점령하는 초고속 진격을 선보였습니다.

조선 왕실과 조정은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했으며, 백성들은 왕이 도망치자 분노하여 궁궐과 노비 문서를 보관하는 장례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습니다.

1592

[사천 해전, 거북선 첫 출전 및 대승]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거북선이 사천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상대로 첫 전투에 참전하여 맹활약하며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1592년(선조 25) 음력 5월 29일(양력 7월 8일), 거북선은 사천 해전에서 첫 출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거북선은 적진으로 돌격하여 화포를 집중적으로 발사하며 일본 수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 이순신 장군은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과의 16전 16승의 서막을 열었다. 거북선의 등장은 일본 수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1592

[이순신, 사천 해전 승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사천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며 해전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거북선이 처음 실전에 투입되어 그 위용을 떨쳤으며, 조선의 판옥선과 총통의 압도적인 화력을 보여주며 일본 수군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1592

1592

[이순신, 당포 해전 승리]

조선 수군이 당포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또다시 대파하며 연이은 승전보를 울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술과 거북선, 판옥선의 강력한 성능이 다시 한번 입증되며, 일본의 해상 보급로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1592

1592

[평양 함락, 선조 의주 파천]

파죽지세로 진격한 일본군에 의해 평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더 이상 머물 곳이 없어 압록강 근처 의주까지 피신하는 굴욕적인 몽진을 감행합니다.

선조는 명나라 망명까지 고려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1592

1592

[권율, 이치 전투 대승]

권율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이치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치며 호남 방어의 교두보를 마련했습니다.

이 승리는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지켜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는 조선군의 재정비와 반격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1592

1592

[한산도 대첩 압승]

이순신의 학익진 전술이 빛을 발하며 한산도 대첩에서 일본 수군을 궤멸시키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로, 조선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어 일본군의 육상 보급에 심각한 차질을 초래했습니다.

1592

1592

[김시민, 진주성 방어 성공]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에서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을 9일간 막아내며 대승을 거둡니다.

이는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로 손꼽히며, 일본군이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계획을 좌절시키고 호남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습니다.

1593

1593

[조명연합군 평양성 탈환]

명나라의 대규모 원군(이여송, 송응창 지휘)이 조선군과 합세하여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던 평양성을 성공적으로 탈환합니다.

이로써 명나라는 일본군의 목표가 자국임을 깨닫고 조선 전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고, 전세는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1593

1593

[명군, 벽제관 전투 패배]

평양 탈환 이후 기세등등하던 명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일시 후퇴하며 전황이 소강상태에 접어듭니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한양에 집결, 대규모 반격을 준비합니다.

1593

1593

[권율, 행주대첩 대승]

권율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의 총공세를 막아내며 대승을 거둡니다.

화차의 활약과 승병, 병사들의 용맹이 빛을 발한 이 전투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로, 일본군의 한양 재점령 시도를 좌절시켰습니다.

1593

1593

[명-일 휴전협상 개시]

명나라의 심유경이 한양 일본군 본진에 파견되어 휴전협상을 추진하고, 일본군 또한 보급 문제와 악역 유행으로 화의에 응하며 전군을 남하시켜 성을 쌓고 협상 진행을 기다립니다.

3년에 걸친 지루한 휴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1593

1593

[일본군, 진주성 재함락]

일본군은 1차 진주성 전투에서 함락하지 못한 진주성을 다시 공격, 9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의병장 김천일 등 조선의 주요 인물들이 전사했지만, 일본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 전라도 진격에는 실패했습니다.

이는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이순신의 말처럼 전라도 보전의 중요성을 다시 보여주었습니다.

1593

1593

[선조, 한양으로 환도]

의주까지 피신했던 선조가 여러 대신들의 간곡한 요청 끝에 마침내 한양으로 돌아옵니다.

굴욕적인 몽진이었으나, 백성들의 강한 저항과 의병, 수군의 활약으로 도성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1595

[조정, 거북선 제조 독려]

조정의 비변사가 거북선의 뛰어난 전과와 중요성을 인정하고, 해전 승리를 위해 거북선 제조를 더욱 서두를 것을 건의했다.

1595년(선조 28) 비변사는 거북선이 해전에서 승리하는 데 매우 요긴하며, 적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라고 보고하며 경상도와 전라도의 방어를 위해 거북선 제조를 서둘러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는 거북선이 임진왜란 초기부터 그 가치를 충분히 증명했음을 보여준다.

1595

1597

[칠천량 해전, 거북선 모두 침몰]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군에게 대패하면서, 참전했던 모든 거북선이 침몰하고 말았다.

1597년(선조 30) 음력 7월 16일(양력 8월 28일) 새벽에 벌어진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군에 의해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하면서, 당시 참전했던 거북선들은 모두 침몰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이 겪은 가장 큰 패배로 기록되었다.

1597

1597

1597

[정유재란, 남원성 함락]

휴전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제2차 침략인 정유재란을 일으켜 남원성을 공격, 조명연합군을 대파하고 함락시켰습니다.

일본군은 임진년과 달리 보급로 확보를 위해 전라도 점령에 집중했습니다.

1597

1597

[이순신, 명량해전 기적적 승리]

이순신이 단 12척의 배로 압도적인 일본 수군을 격파하며 명량해전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직후의 승리라 더욱 극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일본 육군의 전라도 점령 및 충청도 진격이 좌절되고 보급선이 끊길 우려에 휩싸였습니다.

1597

1597

[울산왜성 공격 실패]

조명연합군이 울산왜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며 일본군의 요새 방어력에 고전합니다.

이는 전쟁이 장기화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전투였습니다.

1598

1598

[조명연합군 공세 실패]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직후, 조명연합군이 서쪽 순천왜성, 사천왜성, 울산왜성을 동시에 공격하는 '사로 병진 작전'을 개시하지만, 각지에서 일본군의 저항에 부딪혀 결국 실패로 돌아갑니다.

1598

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임진왜란의 원흉이자 일본의 최고 권력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합니다.

일본군은 이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철수를 시작했으며, 이는 7년간 이어진 전쟁의 최종 종결을 알리는 결정적인 사건이 됩니다.

1598

1598

[노량 해전, 이순신 전사]

철수하는 일본군을 추격한 조명연합군이 노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하며 전쟁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며 영웅의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일본군의 완전한 패퇴를 이끌어내며 7년간의 전쟁은 마침내 끝을 고했습니다.

1606

[판옥선-거북선 결합한 창선 제작]

임진왜란 이후 거북선의 활약을 바탕으로, 판옥선과 거북선의 장점을 결합한 새로운 전투선 '창선'이 제작되었다.

1606년(선조 39년)에는 임진왜란 이후 수군의 전력 보강을 위해 판옥선과 거북선의 장점을 결합한 '창선'이 만들어졌다. 이 창선은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아 만들었으며, 격군 42명이 저어 판옥선보다 훨씬 빨랐다. 이는 거북선이 조선 군선 개발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606

1622

[광해군, 거북선 재건 명]

조선 광해군이 거북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다시 거북선을 건조하여 수군 전력을 재정비하도록 명령했다.

1622년(광해군 14년) 조선 광해군이 다시 거북선을 만들어 수군을 재정비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거북선이 조선 수군의 핵심 전력으로 인식되었으며, 전란으로 약화된 수군을 강화하기 위한 국가적 노력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1622

1687

[김수항, 거북선 개조 및 크기 유지 건의]

영의정 김수항이 기존 전선을 거북선으로 개조하고, 임진왜란 당시처럼 크게 만들지 않도록 경계할 것을 건의했다.

1687년(숙종 13년) 영의정 김수항은 기존 전선 3~4척을 개조하여 거북선으로 만드는 것과 임진왜란 때와 같이 크기가 커지는 것을 경계하도록 건의했다. 이는 거북선이 시대가 지나면서 형태나 크기가 변형될 수 있음을 시사하며, 효율적인 운용을 위한 고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687

1735

[윤필은, 거북선 3층 구조 개조 선보여]

별군직 윤필은이 이삼과 함께 거북선을 개조하여 3층 구조와 탈착식 방패, 풍랑에 강한 선수 디자인을 선보였다.

1735년(영조 11년) 별군직 윤필은이 이삼과 더불어 거북선을 개조했다. 이때 거북선은 3층 구조로 가장 위층에 설치된 방패를 탈착식으로 개조하고, 선두에 곡목을 덧붙여 뾰족하게 만들어 풍랑을 뚫고 가기에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 개조된 모형은 내전에 가지고 와 선보였다.

1735

1751

[박문수, 거북선 총구 수 원상복구 주장]

영남 균세사 박문수가 거북선의 전선 개조 시 크기가 커지고 운용이 어려워지는 문제를 지적하며, 좌우 총구를 원래대로 줄일 것을 주장했다.

1751년(영조 27년) 영남 균세사 박문수는 전선이 개조할 때마다 길어지고 커져서 운용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순신의 기록에는 거북선 좌우에 각각 6개의 총구가 있으나 그 당시에는 8개가 있어 원래대로 줄일 것을 주장하며 거북선 원형의 효율성을 강조했다.

1751

1808

[순조, 거북선 현황 문의 및 이당 보고]

조선 순조가 전 통제사 이당에게 거북선 현황을 물었고, 이당은 여전히 통영 수군에 거북선이 남아있으며 왜인들이 경탄한다고 보고했다.

1808년(순조 8년) 조선 순조는 전 통제사 이당에게 거북선에 대해 물었다. 이당은 통영의 수군에 아직 거북선이 있으며 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고 노 없이 떠다닐 때는 마치 거북이 떠있는 듯한 모습이며 입과 코에서 연기가 나오는데 아직도 왜인들이 이를 보면 사람 잡는 기계라며 놀란다고 보고하였다. 이는 거북선이 후대에도 그 위용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808

1867

[의정부, 거북선 재배치 건의]

의정부에서 조선 수군 전력 강화를 위해 거북선의 재배치 정책을 건의했다.

1867년(고종 4년) 의정부에서 거북선의 재배치에 관한 정책을 건의하였다. 이는 조선 말기까지도 거북선이 수군 전력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며, 국가 방어를 위한 노력이 지속되었음을 시사한다.

1867

1966

[5원 동전에 거북선 도안]

대한민국 5원 동전 앞면에 거북선이 도안으로 새겨져 발행되기 시작하여, 거북선이 한국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1966년 이후로 발행된 대한민국 5원 동전 앞면에는 거북선이 도안으로 새겨졌다. 이는 거북선이 단순한 역사적 유물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상징이자 호국정신을 기리는 중요한 아이콘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1966

1973

[500원 지폐에 이순신-거북선 도안]

대한민국 500원권 지폐의 앞면에 이순신 장군과 함께 거북선이 도안되어 발행되었다.

1973년 9월, 대한민국에서는 500원권 지폐의 앞면에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을, 뒷면에는 현충사를 도안으로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이는 거북선이 한국인의 민족정신과 애국심을 상징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활용되었음을 의미한다.

1973

1990

[한강에 거북선 원형 복원 및 배치]

서울특별시가 한강 개조 사업의 일환으로 185톤 규모의 거북선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한강 이촌동에 배치했다.

1990년 10월, 서울특별시에서는 한강 개조 사업의 일원과 호국정신 계승 및 소년 교육을 목적으로 185톤 규모의 거북선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건조하고, 한강 이촌동 거북선나루터에 배치하였다. 이는 거북선이 역사 교육과 국민의 자긍심 고취를 위한 상징물로 활용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1990

2005

[복원 거북선, 통영시로 이전]

이촌동 거북선나루에 전시되던 복원 거북선이 통영시에 기증되어 이전 및 개조되었다.

이촌동 거북선나루에 지난 2005년 11월까지 전시되어 있던 복원 거북선이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재임 시 통영시에 기증되었다. 이후 한강하구를 통과해 통영으로 운반되어 민물에서 바닷물 전용으로 개조되었고, 현재 통영에서 전시되고 있다.

2005

비교 연표 검색
비교 연표 검색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
키워드 중복 확인

이미 등록된 키워드가 있습니다. 확인 후 등록 해주세요.

"홍명보"로 등록된 키워드입니다.

수정하기

연 도
세부 순서
내 용
상세내용
추가된 링크
취 소 등 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