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

군함, 전투선,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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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역사 인물, 군인,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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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전투선으로, 판옥선을 기반으로 독특하게 덮개를 씌운 형태를 가졌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직전 건조하여 사천 해전에서 첫 출전한 이래, 일본 수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며 조선 수군의 16전 16승에 크게 기여했다. 강력한 화포와 견고한 방어력을 겸비한 돌격선으로, 조선 해전사의 상징이자 세계 해군사에서도 독창적인 군함으로 평가받는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꾸준히 발전하며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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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불멸의 영웅. 탁월한 지략과 통솔력으로 수많은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원했다. 한산도 대첩과 명량 해전은 세계 해전사의 길이 빛나는 승리. 세계최초의 철갑선 거북선을 건조·활용하는 등 혁신가 면모도 겸비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며 나라를 지키는 데 혼을 바친 그의 삶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강렬한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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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사건만
최신순

1413

[거북선 첫 기록]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13년(1413년) "임금이 임진강 나루[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2월 5일)

이때 이미 '거북선'이라는 이름의 배가 존재했으며, 왜선과의 모의 전투 훈련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413

1415

[거북선 성능에 대한 기록]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15년(1415년)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올린 상소 내용 중에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히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있다.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7월 16일)

거북선이 매우 견고하여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돌격선(突擊船)의 개념으로 개발되었음을 보여준다.

1415

1545

1545

[이순신 탄생]

한성 건천동에서 이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외가인 아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이름은 고대 중국 성인의 이름자를 따 희신, 요신, 순신, 우신으로 지어졌다.

조부 이백록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에 나가지 못했고, 아버지 이정 또한 관직이 넉넉지 않아 집안이 부유하지는 않았다.

1565

1565

[결혼과 무과 준비]

21세에 온양 방씨와 혼인하고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며 무과를 준비했다.

장인 방진의 뛰어난 활솜씨를 배우며 무예를 연마했다.

방씨 부인은 슬기롭고 내조에 능하여 이순신의 무술 연습을 위해 자신의 패물로 말을 사게 할 정도였다. 그녀는 이순신과의 사이에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1572

1572

[무과 시험 낙방]

28세에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시험 도중 말에서 낙마했다.

주변에서 기절한 줄 알았으나, 옆에 있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리를 동여매고 끝까지 시험을 치렀다.

하지만 결국 시험에서는 낙방하고 말았다.

이 일은 이순신의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정신을 보여주는 일화로 전해진다.

1576

1576

[무과 급제]

32세에 식년시 무과에 병과 제4인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훈련원 봉사 실습생)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당시 무과 합격자 중 비교적 높은 등수였다.

이후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을 거쳐 훈련원 봉사로 근무했으며, 사사로운 청탁을 단호히 거절하는 강직한 성품을 보였다.

1580

1580

[발포 수군만호 임명]

36세에 전라도 발포의 수군만호로 전근되었다.

그러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나라의 재산인 오동나무를 베기를 거부하여 전라좌수사 성박의 미움을 샀다.

성박의 후임 좌수사 이용 또한 이순신을 밉게 보아 근무성적을 최하로 매겼으나, 전라도사 조헌의 항의로 수정되었다. 나중에 이용은 이순신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그를 군관으로 추천했다.

1586

1586

[북방 국경 방어]

사복시 주부가 되었고, 이어 조산만호 겸 녹도 둔전사의가 되어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에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다.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려 했으나 거절했다.

이순신은 권세가의 집에 드나들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1587

1587

[녹둔도 전투 승리]

녹둔도 둔전 관리 중 여진족의 기습 침입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잡혀갔으며, 15필의 말이 약탈당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북병사 이일이 도망치는 와중에도 이순신은 이경록과 남아 싸워 승리했고 조선인 백성 60여 명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순신은 사전에 추가 병력을 요청했으나 이일이 거절하여 피해가 커졌다. 이순신의 무예는 대단하여 수십 명의 병사로 1,000기의 여진족 기병을 상대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하여 무찔렀다.

1587

1587

[첫 백의종군]

녹둔도 전투의 책임을 북병사 이일이 이순신에게 덮어씌워 해임되고 투옥되었다.

선조는 사형이 과하다는 의견에 따라 장형 집행 후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선조는 이일의 모함을 눈치챘으나 당시 신립과의 정치적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처벌하되, 참수형이 아닌 백의종군으로 일단락시켰다. 이순신은 이후 북병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2차 녹둔도 정벌에서 공을 세워 복직되었다.

1591

1591

1591.02 1해당 사건의 피인용 횟수를 나타냅니다. 46세

[전라좌수사 임명]

류성룡의 추천으로 정읍현감 재직 중, 선조의 강력한 신임으로 종6품 정읍현감에서 종4품 진도군수, 종3품 가리포첨절제사를 거쳐 정3품 전라좌수사로 초고속 승진하여 임명되었다.

연관사건

선조는 대신들의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을 신임하여 파격적인 승진을 단행했다. 이순신은 부임 즉시 전쟁에 대비하여 휘하 부대의 실태를 파악하고, 무기와 군량미를 확충하며 거북선을 개발 및 건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했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일본 수군이 강할 것이라 예단하여 수군을 육지로 올리라는 조정의 명을 거부하며 수군력을 보존했다. 덕분에 전라좌수영은 20여 척의 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1592

[이순신, 거북선 진수]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직전 전라좌수영 여수 앞바다에서 거북선을 처음 진수시켰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직전인 1592년(선조 25) 음력 3월 27일(양력 5월 7일)에 전라좌수영 여수 앞바다에서 거북선이 처음 진수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발발 직전 조선 수군의 핵심 전력으로 거듭날 거북선이 마침내 그 위용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1592

1592

[거북선, 실전용 최종 완성]

일본의 침공 단 하루 전, 거북선에 지자포와 현자포 시사를 성공적으로 마쳐 실전 투입 준비를 완료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1592년(선조 25) 음력 4월 12일(양력 5월 22일), 일본의 침공 단 하루 전에 거북선에 지자포·현자포 등의 화포를 장치하고 시사를 성공적으로 마쳐 실전용으로 최종 완성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발발 직전, 조선 수군의 핵심 전력인 거북선이 전장에 투입될 준비를 마쳤음을 의미한다.

1592

1592

1592

[임진왜란 발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일본군 함대 700척이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순신은 밤 10시경 원균의 파발을 통해 침략 소식을 접하고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으며, 비상 소집하여 방비를 갖추도록 했다.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을 참수하여 군기를 바로 잡았다. 당시 조선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평안도를 거쳐 의주까지 피난하는 상황이었다.

1592

1592

[옥포 해전 대승]

이순신의 첫 승전으로, 옥포항에 정박하여 옥포를 침략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키고 잡혀있던 포로들을 구출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대선 4척, 소선 1척을 격파했으며, 다음날 적진포에서 13척을 침몰시켰다.

이 전투는 조선 수군이 임진왜란 발발 후 거둔 최초의 승리이며, 육전에서 연패하던 조선군에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순신은 적들이 육지로 도망간 후에는 더 이상 추격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였다.

1592

[사천 해전, 거북선 첫 출전 및 대승]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거북선이 사천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상대로 첫 전투에 참전하여 맹활약하며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1592년(선조 25) 음력 5월 29일(양력 7월 8일), 거북선은 사천 해전에서 첫 출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거북선은 적진으로 돌격하여 화포를 집중적으로 발사하며 일본 수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 이순신 장군은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과의 16전 16승의 서막을 열었다. 거북선의 등장은 일본 수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1592

[사천 해전 (거북선 첫 출전)]

노량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과 만난 후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총 적선 13척을 쳐부수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이순신의 두 번째 출동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투이자, **세계최초 철갑선**으로 알려진 거북선이 전투에 **최초로 출전**하여 실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해전이다. 조선 수군은 지자총통 등 우수한 화포의 화력을 바탕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1592

1592

[한산도 대첩 (학익진)]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이억기, 원균의 연합함대가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육전 전술인 **학익진을 해전에서 처음으로 펼쳐** 적함을 포위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군 연합함대는 거짓 후퇴로 적들을 큰 바다로 유인한 다음, 모든 군선들이 일제히 학익진 진형을 갖춰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 막강한 화력을 발포하여 적함선 59척을 침몰시켰다. 이 승리로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하고 전라도 곡창지대를 보전할 수 있었다.

1592

1592

[부산 해전]

전열을 정비한 이순신의 함대가 부산으로 출정하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했다.

부산 앞바다에서 400여 척의 적선 중 100여 척을 쳐부쉈으나, 상륙한 일본군이 도망갈 길을 남겨두기 위해 함대를 물렸다.

네 차례의 큰 해전을 통해 일본군은 수로를 통한 서해 해상권 장악 및 전라도 침략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 장수 정운이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1593

1593

[웅포 해전]

웅천현 웅포로 진격했으나, 일본군이 왜성을 깊숙이 유인하는 전술을 펼쳐 지루한 공방전으로 전개되었다.

이순신은 화포를 이용한 공격을 이어갔으며,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왜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 조선 수군의 부산성 방면 진출을 막으려 했고, 이로 인해 전라도 수군 약 4만 명이 해안선 방어에 투입되었다.

1593

1593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을 겸직하도록 했다.

이순신은 진을 한산도로 옮겨 백성을 모아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며 든든한 진을 구축했다.

이순신의 통제사 임명 후 원균은 자신이 나이 많고 선배라며 불만을 품고 명령을 어기는 등 불화가 깊어졌으며, 이는 향후 이순신의 두 번째 백의종군에 영향을 미쳤다.

1595

[조정, 거북선 제조 독려]

조정의 비변사가 거북선의 뛰어난 전과와 중요성을 인정하고, 해전 승리를 위해 거북선 제조를 더욱 서두를 것을 건의했다.

1595년(선조 28) 비변사는 거북선이 해전에서 승리하는 데 매우 요긴하며, 적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라고 보고하며 경상도와 전라도의 방어를 위해 거북선 제조를 서둘러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는 거북선이 임진왜란 초기부터 그 가치를 충분히 증명했음을 보여준다.

1595

1597

1597

[두 번째 백의종군]

초기 승전 이후 소극적인 전술과 원균과의 불화가 문제가 되어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었다.

한성으로 압송되어 투옥되었으나, 우의정 정탁의 상소로 사형을 모면하고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순신은 백의종군 길에 어머니의 임종을 볼 수 없다는 슬픈 소식을 접하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당시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은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며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했으나,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 작전에 걸려들 위험을 경고하며 신중한 입장을 고수했다.

1597

[칠천량 해전, 거북선 모두 침몰]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군에게 대패하면서, 참전했던 모든 거북선이 침몰하고 말았다.

1597년(선조 30) 음력 7월 16일(양력 8월 28일) 새벽에 벌어진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군에 의해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하면서, 당시 참전했던 거북선들은 모두 침몰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이 겪은 가장 큰 패배로 기록되었다.

1597

[칠천량 패배와 복직]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며 판옥선 대부분을 잃었다.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으나, 남은 함선은 겨우 12척뿐이었다.

조선 정부가 수군 폐지를 명했음에도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며 수군을 재정비,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1597

1597

[명량 해전 (기적의 승리)]

13척의 전선으로 수백 척의 일본 함대와 울돌목(명량 해협)에서 대적하여 **세계 해전사상 유례없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명량 해협의 좁은 폭과 급류를 활용, 최소 130척 이상의 적선을 격파하여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난중일기에는 약 30척 격침으로 기록되었으나, 해남 명량대첩비에는 500척 격파로 기록되어 실제 전과는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이순신의 승리 이후 화의를 꾀했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며 철저한 응징을 주장했다.

1598

1598

[노량 해전 및 전사]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조선 수군 70여 척과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해협에 모인 일본군을 공격했다.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던 왜군 선단 500여 척 중 200여 척을 격파, 150여 척을 파손시켰다.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고,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격하던 이순신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죽기 전에 그는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이 해전을 끝으로 7년간의 임진왜란이 종식되었다.

1604

1604

1604.07.21 사후 6년

[선무공신/좌의정 추증]

선조는 이순신을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 1등 공신 및 덕풍부원군으로 추봉하고, 그해 7월에 의정부 좌의정을 가증했다.

그의 충성심과 희생을 기리기 위한 국가적 조치가 계속되었다.

1606

[판옥선-거북선 결합한 창선 제작]

임진왜란 이후 거북선의 활약을 바탕으로, 판옥선과 거북선의 장점을 결합한 새로운 전투선 '창선'이 제작되었다.

1606년(선조 39년)에는 임진왜란 이후 수군의 전력 보강을 위해 판옥선과 거북선의 장점을 결합한 '창선'이 만들어졌다. 이 창선은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아 만들었으며, 격군 42명이 저어 판옥선보다 훨씬 빨랐다. 이는 거북선이 조선 군선 개발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606

1622

[광해군, 거북선 재건 명]

조선 광해군이 거북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다시 거북선을 건조하여 수군 전력을 재정비하도록 명령했다.

1622년(광해군 14년) 조선 광해군이 다시 거북선을 만들어 수군을 재정비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거북선이 조선 수군의 핵심 전력으로 인식되었으며, 전란으로 약화된 수군을 강화하기 위한 국가적 노력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1622

1643

1643

1643.03 사후 45년

[충무 시호 하사]

인조는 이순신에게 '충무(忠武)'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충무' 시호를 받은 인물은 이순신을 포함해 10명에 불과하며, 그의 공적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다.

시호 '충무'는 '자기 몸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든 것'을 '충(忠)', '적의 창 끝을 꺾어 외침을 막은 것'을 '무(武)'라 하여 그의 공적을 기렸다. 효종은 그를 악비와 같은 훌륭한 장수로 평가했다.

1687

[김수항, 거북선 개조 및 크기 유지 건의]

영의정 김수항이 기존 전선을 거북선으로 개조하고, 임진왜란 당시처럼 크게 만들지 않도록 경계할 것을 건의했다.

1687년(숙종 13년) 영의정 김수항은 기존 전선 3~4척을 개조하여 거북선으로 만드는 것과 임진왜란 때와 같이 크기가 커지는 것을 경계하도록 건의했다. 이는 거북선이 시대가 지나면서 형태나 크기가 변형될 수 있음을 시사하며, 효율적인 운용을 위한 고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687

1735

[윤필은, 거북선 3층 구조 개조 선보여]

별군직 윤필은이 이삼과 함께 거북선을 개조하여 3층 구조와 탈착식 방패, 풍랑에 강한 선수 디자인을 선보였다.

1735년(영조 11년) 별군직 윤필은이 이삼과 더불어 거북선을 개조했다. 이때 거북선은 3층 구조로 가장 위층에 설치된 방패를 탈착식으로 개조하고, 선두에 곡목을 덧붙여 뾰족하게 만들어 풍랑을 뚫고 가기에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 개조된 모형은 내전에 가지고 와 선보였다.

1735

1751

[박문수, 거북선 총구 수 원상복구 주장]

영남 균세사 박문수가 거북선의 전선 개조 시 크기가 커지고 운용이 어려워지는 문제를 지적하며, 좌우 총구를 원래대로 줄일 것을 주장했다.

1751년(영조 27년) 영남 균세사 박문수는 전선이 개조할 때마다 길어지고 커져서 운용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순신의 기록에는 거북선 좌우에 각각 6개의 총구가 있으나 그 당시에는 8개가 있어 원래대로 줄일 것을 주장하며 거북선 원형의 효율성을 강조했다.

1751

1793

1793

1793.07 사후 195년

[영의정 가증]

정조는 이순신에게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이는 조선 최고위 관직으로, 그의 공적에 대한 국가의 최종적인 존경을 표한 것이다.

정조는 그를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선정'으로 일컬으며 문묘에 위패가 모셔진 인물에 준하는 대우를 했다. 이로써 이순신의 최종 직함은 '유명 수군도독 조선국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덕풍부원군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삼도통제사 시 충무공 이순신'이 되었다.

1808

[순조, 거북선 현황 문의 및 이당 보고]

조선 순조가 전 통제사 이당에게 거북선 현황을 물었고, 이당은 여전히 통영 수군에 거북선이 남아있으며 왜인들이 경탄한다고 보고했다.

1808년(순조 8년) 조선 순조는 전 통제사 이당에게 거북선에 대해 물었다. 이당은 통영의 수군에 아직 거북선이 있으며 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고 노 없이 떠다닐 때는 마치 거북이 떠있는 듯한 모습이며 입과 코에서 연기가 나오는데 아직도 왜인들이 이를 보면 사람 잡는 기계라며 놀란다고 보고하였다. 이는 거북선이 후대에도 그 위용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808

1867

[의정부, 거북선 재배치 건의]

의정부에서 조선 수군 전력 강화를 위해 거북선의 재배치 정책을 건의했다.

1867년(고종 4년) 의정부에서 거북선의 재배치에 관한 정책을 건의하였다. 이는 조선 말기까지도 거북선이 수군 전력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며, 국가 방어를 위한 노력이 지속되었음을 시사한다.

1867

1966

[5원 동전에 거북선 도안]

대한민국 5원 동전 앞면에 거북선이 도안으로 새겨져 발행되기 시작하여, 거북선이 한국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1966년 이후로 발행된 대한민국 5원 동전 앞면에는 거북선이 도안으로 새겨졌다. 이는 거북선이 단순한 역사적 유물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상징이자 호국정신을 기리는 중요한 아이콘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1966

1973

[500원 지폐에 이순신-거북선 도안]

대한민국 500원권 지폐의 앞면에 이순신 장군과 함께 거북선이 도안되어 발행되었다.

1973년 9월, 대한민국에서는 500원권 지폐의 앞면에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을, 뒷면에는 현충사를 도안으로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이는 거북선이 한국인의 민족정신과 애국심을 상징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활용되었음을 의미한다.

1973

1990

[한강에 거북선 원형 복원 및 배치]

서울특별시가 한강 개조 사업의 일환으로 185톤 규모의 거북선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한강 이촌동에 배치했다.

1990년 10월, 서울특별시에서는 한강 개조 사업의 일원과 호국정신 계승 및 소년 교육을 목적으로 185톤 규모의 거북선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건조하고, 한강 이촌동 거북선나루터에 배치하였다. 이는 거북선이 역사 교육과 국민의 자긍심 고취를 위한 상징물로 활용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1990

2005

[복원 거북선, 통영시로 이전]

이촌동 거북선나루에 전시되던 복원 거북선이 통영시에 기증되어 이전 및 개조되었다.

이촌동 거북선나루에 지난 2005년 11월까지 전시되어 있던 복원 거북선이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재임 시 통영시에 기증되었다. 이후 한강하구를 통과해 통영으로 운반되어 민물에서 바닷물 전용으로 개조되었고, 현재 통영에서 전시되고 있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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