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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과 영연방 왕국의 여왕으로 70년간 재위하며 영국 역사상 최장수 통치자 기록을 세웠다. 대영 제국의 해체 속에서 연방 국가들의 단합을 이끌었고, 입헌군주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도 국민과 소통하며 왕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러 국내외 도전과 왕실 스캔들을 극복하며 격동의 시대를 관통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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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엘리자베스 공주 탄생]
요크 공 앨버트와 요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의 장녀로 런던 메이페어에서 제왕절개를 통해 태어났다. 할아버지 조지 5세는 그를 "릴리벳"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1926년 4월 21일 2시 40분(GMT) 런던 메이페어의 브루턴 거리 17번지에서 요크 공 앨버트(훗날의 조지 6세)와 요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장녀로 제왕절개를 통해 태어났다. 버킹엄 궁전의 개인 부속 예배당에서 코스모 고든 랭 요크 대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할아버지 조지 5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조지 5세는 엘리자베스가 어릴적에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옹알거리는 것을 보고 "릴리벳"라는 애칭을 그에게 주었다.
1926
1930
엘리자베스 공주의 유일한 자매인 마거릿 공주가 1930년에 태어났으며, 두 공주는 집에서 어머니의 감독 아래 교육을 받았다.
1930
1936
[추정 상속인으로 등극]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가 자식 없이 퇴위하면서 아버지 조지 6세가 왕위에 올랐고, 엘리자베스는 왕위 계승 1순위인 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1936년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퇴위하고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조지 6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 공주 전하"로 불리는 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1936
1945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및 군 복무 시작]
스무 살의 나이로 아버지 조지 6세를 설득하여 영국 여자 국방군에 입대, 보조 영토 서비스에 배치되어 운전병으로 복무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왕위 계승자임에도 사병이나 부사관이 아닌 장교로 강제되어 보급수송장교로 임무를 수행했다.
1945년 3월 4일, 스무 살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전쟁에 직접 참가해 조국에 봉사하고 싶다며 아버지 조지 6세를 설득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영국 여자 국방군에 입대하여 보조 영토 서비스에 배치되었으며, 군번 230873의 엘리자베스 윈저 소위로 불리며 군용 트럭을 모는 운전병으로 복무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여성 왕족 중 다른 학생들과 동등한 훈련을 받으며 군 복무를 한 첫 사례이다.
1945
1947
1947
[카밀라 로즈메리 섄드 출생]
카밀라 로즈메리 섄드가 런던 킹스 칼리지 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영웅인 브루스 섄드 소령이었고, 어머니는 제3대 애쉬컴 남작의 딸인 로절린드 큐빗이었습니다.
이로써 카밀라는 귀족과 연결된 상류층 배경을 가졌지만, 왕족은 아니었습니다.
카밀라는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연결된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브루스 섄드는 군인으로서의 경력 외에도 와인 상인으로 활동했으며, 이스트 서섹스의 부지사였습니다. 어머니 로절린드 큐빗은 19세기 부동산 개발로 부를 축적한 토머스 큐빗의 후손으로, 귀족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카밀라가 어린 시절부터 영국의 상류 사회와 자연스럽게 교류하는 환경을 제공했지만, 당시 미래의 국왕과 결혼하기 위해 요구되던 최고 수준의 귀족 혈통이나 칭호는 갖추지 못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녀의 외증조모인 앨리스 케펠은 찰스 왕세자의 고조부인 에드워드 7세의 정부(mistress)였으며, 이는 훗날 찰스와의 관계에서 운명적인 연결고리로 종종 언급되었습니다.
1947
엘리자베스는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필리포스와 결혼하였으며, 필립이 정교회 신자이고 후원 세력이 없으며 나치 독일 지지자와 결혼한 누이가 있어 논쟁이 있었으나, 조지 6세의 지지 아래 엘리자베스의 21번째 생일 전인 1947년 7월 두 사람의 약혼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
1947
1947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
필립 마운트배튼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필립은 결혼에 앞서 에든버러 공 작위를 받고 필립 마운트배튼 중위로 불리게 되었다.
1947년 11월 20일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필립 마운트배튼과 결혼식을 올렸다. 필립은 그리스에서의 왕위에 관한 권리를 포기하고 에든버러 공의 작위를 받기 전에 간결하게 필립 마운트배튼 중위로 불렸다.
1947
1952
[조지 6세 서거, 여왕으로 즉위]
아버지 조지 6세가 암으로 사망하자, 케냐에 머물던 엘리자베스 공주는 즉시 영국으로 돌아왔고, 자동으로 왕위 계승 1순위인 엘리자베스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같은 날 캐나다 추밀원에 의해 캐나다 여왕으로 선포되었다.
1951년에 조지 6세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엘리자베스는 왕실 행사를 자주 행했고, 1952년 2월 6일 엘리자베스가 케냐에 도착했을 때 조지 6세가 폐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엘리자베스에게 부왕의 부고 소식을 전한 사람은 남편인 필립 공이었다. 조지 6세의 사망은 자동으로 그의 맏딸이자 1순위 왕위계승권자인 엘리자베스에게 왕위가 돌아감을 의미했으며, 맨 처음 엘리자베스는 캐나다 추밀원에 의해 캐나다 여왕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영국 여왕으로서의 선포는 다음 날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이루어졌다.
1952
1953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 거행]
조모 메리 대왕대비의 사망 후, 그의 소망대로 대관식은 연기되지 않고 TV를 통해 전 세계 2,500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웅장하게 거행되어 여왕으로 정식 즉위했다.
1953년 3월 24일에 조모 메리 대왕대비가 폐암으로 사망하였으나, 그의 소망은 손녀의 대관식이 뒤로 미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은 1953년 6월 2일 TV를 통해 전 세계에서 2,500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웅장하게 거행되어 여왕으로 정식 즉위하게 되었다.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대전쟁 후 위축되어가던 영국의 대외적 위상 회복과 국내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화려하게 진행할 것을 지시하였다고 한다.
1953
1953
[영국 연방 순회로 위상 강화]
독립하는 옛 식민지들을 접어두고 영국 연방만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6개월간 영국 연방을 순회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영국의 급속한 위상 추락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이었음에도 위상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1947년 조지 6세의 치세에 인도를 상실한 여파는 스리랑카, 버마, 말라야, 이집트, 로디지아의 독립으로 줄줄이 이어졌다. 심지어 영국 연방의 자치령들도 모국인 영국과는 큰 틀만 유지하고 독립된 정치 구조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엘리자베스 2세는 이미 독립한 옛 식민지들은 접어두고라도 영국 연방만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1953년 11월부터 6개월간 영국 연방을 순회할 계획을 세웠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순방은 영국 군주로서는 처음 갖는 행사로 그들과의 유대를 맺게 해주었다. 또 영국 군주로서는 50년 만에 인도를 방문했으며 이후 남아프리카와 페르시아만 연안 국가들을 꾸준히 순방하였다. 그의 적극적인 행동은 성과를 거두어 1977년 여왕 즉위 25주년에는 영국 연방의 35개국 지도자들이 축하 연회에 참석하는 결실을 보았다. 한마디로 급속하게 추락하던 영국의 위상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1953
1965
1965
[런던 사교계 데뷔]
카밀라 섄드는 런던에서 데뷔탕트(debutante)로 사교계에 공식 데뷔했습니다.
이는 당시 상류층 여성이 결혼 적령기가 되었음을 알리는 공식적인 사교계 입문 절차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스위스와 파리에서 학업을 마친 뒤, 사교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카밀라는 서섹스의 덤브렐스 스쿨과 런던의 퀸스 게이트 스쿨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후 스위스의 피니싱 스쿨인 몽 페르틸(Mon Fertile)과 파리의 런던 대학교 인스티튜트에서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교육 과정은 당시 그녀의 계층 여성들에게 전형적인 것으로, 전문적인 직업보다는 사교계 활동과 성공적인 결혼을 준비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1965년 사교계에 데뷔한 후, 그녀는 리셉셔니스트로 잠시 일하며 활발한 사교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이 시기는 그녀가 앤드루 파커 보울스와 찰스 왕세자를 만나게 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1965
[총리 지명권 자발적 포기]
입헌군주제 원칙을 존중하여, 논란에 휩싸이자 의회에서 불신임된 집권 세력을 대신해 새 총리를 지명할 수 있는 전통적인 권한을 스스로 포기했다.
영국은 명예 혁명 이후로 국왕이 내정에 간섭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군주에게는 암묵적으로 지속돼 온 국왕의 정치적 권한이 있었다. 집권 세력이 의회에서 불신임됐을 때 새 총리를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두 차례 총리를 지명한 적이 있었지만 논란에 휩싸이자 1965년 이 권한을 스스로 포기했다.
1965
1971
1971
[찰스 왕세자와의 첫 만남]
카밀라 섄드는 윈저 그레이트 파크의 폴로 경기장에서 찰스 왕세자를 처음 만난 것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공동의 친구였던 루시아 산타 크루즈의 집에서 공식적으로 소개받았습니다.
카밀라는 "제 증조할머니가 당신의 고조할아버지의 정부였답니다.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네요."라는 대담한 농담으로 찰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만남을 계기로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습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70년 또는 1971년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카밀라는 앤드루 파커 보울스와 헤어진 상태였고, 찰스는 22세의 젊은 왕세자였습니다. 카밀라의 당당하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는 찰스에게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고, 두 사람은 폴로 경기, 사교 모임 등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습니다. 찰스는 카밀라의 가족들을 만났고, 그녀를 왕실 가족 일부에게 소개하는 등 관계는 진지하게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1973년 초 찰스가 해군 복무를 위해 해외로 떠나면서 이들의 관계는 중단되었습니다.
1973
1973
[앤드루 파커 보울스와 결혼]
카밀라 섄드는 육군 장교인 앤드루 파커 보울스와 런던의 가드 채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찰스 왕세자가 해군 복무로 해외에 파견된 사이, 카밀라는 오랜 연인이었던 앤드루의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결혼은 찰스와의 초기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었습니다.
찰스가 해군 복무로 자리를 비운 사이, 카밀라와 앤드루 파커 보울스의 관계가 재개되었습니다. 카밀라의 아버지가 신문에 약혼 발표를 내어 앤드루에게 청혼을 압박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앤드루 파커 보울스 역시 사교계에서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결혼 전에는 앤 공주와 교제했고 결혼 후에도 여러 여성과 염문을 뿌리는 등 자유로운 연애를 즐겼습니다. 그는 찰스 왕세자와 폴로 팀 동료이자 친구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영국 상류층 사회에서는 부부가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하며 가문의 품위만 유지하면 서로의 외도를 묵인하는 문화가 일부 존재했습니다. 앤드루 본인 역시 자유로운 연애를 즐겼기에, 아내와 미래 국왕의 관계를 알면서도 문제를 삼지 않았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이 결혼식에는 퀸 마더, 마거릿 공주, 앤 공주 등 왕실 인사들이 참석했으며, 이는 파커 보울스 가문과 왕실의 사회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1974
1974
[아들 톰 파커 보울스 출생]
카밀라와 앤드루 파커 보울스 부부 사이에서 첫째 아이인 아들 톰이 태어났습니다.
찰스 왕세자는 톰의 대부(godfather)가 되었습니다.
이는 카밀라가 결혼한 후에도 찰스와의 우정이 계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톰 파커 보울스의 대부로 찰스 왕세자가 지명된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사교계 친구 이상으로 깊고 지속적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카밀라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음에도 불구하고, 찰스는 그녀의 삶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었으며, 이는 세 사람의 복잡하고 긴밀한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톰은 훗날 유명한 음식 평론가이자 작가가 되었습니다.
1978
1978
[딸 로라 파커 보울스 출생]
카밀라와 앤드루 파커 보울스 부부의 둘째 아이인 딸 로라가 태어났습니다.
이로써 카밀라는 두 자녀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후 몇 년간 자녀 양육과 가정생활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딸 로라의 출생으로 카밀라는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로라는 훗날 아트 큐레이터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 시기 카밀라는 공식적으로는 파커 보울스 부인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지만, 찰스 왕세자와의 우정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1981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세기의 결혼]
결혼 전 염문이 많았던 웨일스 공 찰스가 정숙한 다이애나 스펜서와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면서, 한때 실추되었던 왕실의 권위가 다시 회복되는 듯했다.
결혼 전부터 염문을 많이 뿌리고 다니던 웨일스 공 찰스는 1981년 7월, 정숙하고 가문 좋은 스펜서 가문의 딸이며 유치원 보모로 일하던 다이애나와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으로 왕실의 권위는 다시 회복되는 듯하였다. 둘 사이에서 윌리엄 왕자와 헨리 왕자가 연이어 탄생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절정에 다다랐다.
1981
1986
1986
[찰스 왕세자와의 불륜 관계 재개]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의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자, 찰스와 카밀라의 관계는 다시 연인 사이로 발전했습니다.
찰스의 공식 전기 작가 조나단 딤블비에 따르면, 찰스는 결혼 생활이 "회복 불가능하게 무너진" 후에야 카밀라와의 관계를 재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써 카밀라는 훗날 '웨일스 부부의 결혼'에서 제3의 인물로 대중에게 각인되었습니다.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은 초기부터 삐걱거렸고, 1986년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형식적인 관계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찰스는 정서적 위안과 지지를 얻기 위해 오랜 친구이자 옛 연인이었던 카밀라에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관계 재개는 비밀리에 이루어졌지만, 사교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왕실이 찰스에게 '적합한' 신붓감을 강요함으로써 발생한 예견된 결과였으며, 개인의 행복보다 제도의 유지를 우선시한 결정이 초래한 비극적 귀결이었습니다.
1989
1989
[다이애나, 카밀라와 정면 대결]
다이애나는 카밀라의 여동생 애너벨 엘리엇의 40세 생일 파티에 예고 없이 참석했습니다.
그녀는 파티장 지하에서 찰스와 함께 있던 카밀라를 찾아가 정면으로 대면했습니다.
이 사건은 다이애나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결혼을 지키기 위해 싸우겠다는 선전포고였습니다.
찰스와 카밀라의 친구들로 가득한 '적진'과도 같은 파티에 다이애나가 나타나자 장내는 순식간에 얼어붙었습니다. 다이애나는 훗날 이 순간을 "내 인생에서 가장 용감했던 순간 중 하나"라고 회고할 정도로 큰 결심을 하고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지하에서 찰스와 카밀라를 발견한 후, "카밀라, 잠깐 얘기 좀 할까?"라며 단둘만의 대화를 요청했습니다. 다이애나는 녹음 테이프를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카밀라, 당신과 찰스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내가 정확히 다 알고 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해요. 나 바보 아니에요." 이에 카밀라가 "당신은 원하는 걸 다 가졌잖아요. 세상 모든 남자가 당신을 사랑하고, 예쁜 아들도 둘이나 있는데, 뭘 더 원해요?"라고 응수하자, 다이애나는 "내 남편을 원해요(I want my husband)"라고 답했습니다. 이 대면은 두 사람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결정적 사건으로, 이후 다이애나는 화해의 희망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1989
1989
['카밀라게이트' 전화 통화 녹음]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파커 보울스 간의 지극히 사적인 전화 통화 내용이 아마추어 무선 통신사에 의해 우연히 녹음되었습니다.
이 통화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했으며, 특히 찰스가 "당신의 바지 속에서 살고 싶다"거나 "탬팩스가 되고 싶다"고 말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녹음 테이프는 훗날 왕실을 뒤흔드는 거대한 스캔들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 6분 길이의 통화는 찰스가 친구의 시골집에, 카밀라가 자택에 있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 통화가 암호화되지 않아 스캐닝 장비를 가진 사람이 쉽게 도청할 수 있었습니다. 녹음된 내용은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우정을 넘어선 깊고 친밀한 사이임을 명백히 보여주었습니다. 이 테이프의 존재는 한동안 수면 아래에 있었으나, 1993년 언론에 공개되면서 '카밀라게이트' 또는 '탬폰게이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며 왕실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켰습니다.
1993
1993
['카밀라게이트' 스캔들 공개]
1989년에 녹음된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의 사적인 통화 내용이 호주와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을 통해 대중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찰스와 다이애나의 공식 별거 발표 직후에 터져 나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로 인해 카밀라는 '왕세자비를 불행하게 만든 불륜녀'라는 대중적 비난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1993년 1월 13일, 호주의 '뉴 아이디어' 매거진이 처음 내용을 폭로했고, 이후 영국의 '선데이 미러'와 '피플' 등이 이를 대서특필했습니다. 대중은 통화 내용의 노골적인 성격에 충격을 받았고, 찰스의 왕위 계승 자격에 대한 의문까지 제기되었습니다. 이 스캔들은 카밀라의 이미지를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했으며, 그녀는 영국에서 가장 미움받는 여성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사건은 두 사람의 관계가 가벼운 만남이 아닌, 깊고 오래된 사랑이었음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1993
[왕실 면세 특권 자발적 포기]
윈저 성 대형화재 보수비 문제로 영국 사회에 논란이 일자, 엘리자베스 2세는 왕실의 면세 특권을 스스로 포기하며 국민의 비판에 응답했다.
1992년 11월 20일, 윈저 성의 대형화재에 따른 천문학적 보수비를 정부에서 지급하는 문제와 관련해 영국 사회에서 논란이 일자 엘리자베스 2세는 1993년 왕실의 면세 특권을 스스로 포기했다.
1993
1995
1995
[앤드루 파커 보울스와 이혼]
카밀라와 앤드루 파커 보울스는 22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이혼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두 사람은 성명을 통해 수년 간 별거해왔으며, 사적인 삶의 방식에 차이가 있어 이혼을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이혼으로 카밀라는 찰스 왕세자와의 미래를 위한 법적 장애물을 제거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이혼은 1995년 1월에 신청되어 3월에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앤드루 파커 보울스 역시 결혼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외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혼은 두 사람의 합의 하에 원만하게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듬해 앤드루는 오랜 연인이었던 로즈메리 피트먼과 재혼했습니다. 카밀라의 이혼은 찰스와의 관계를 공식화하기 위한 수순으로 해석되었으며, 이는 1996년 8월에 이어진 찰스와 다이애나의 이혼과 함께 왕실의 큰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1996
[왕실 스캔들로 권위 실추]
찰스 왕세자가 다이애나 공주와 이혼하고, 같은 해 둘째 왕자인 앤드루 공작도 이혼하면서 왕실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이 가해졌으며 국민들의 실망감이 커졌다.
결혼 전부터 사귀던 카밀라 파커 볼스와의 관계를 잊지 못하던 찰스는 결혼 1년쯤 뒤부터 다이애나와 불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찰스는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관해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거기에 대해 토론하기를 좋아하는 반면, 다이애나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무도희나 파티 등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취미나 취향은 정반대였다. 반면에 카밀라 파커 볼스는 찰스와 같이 여러 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두루 갖추고 있어 두 사람은 서로 어떤 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1986년부터 심심찮게 웨일스 공 부처의 불편한 관계가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더니 결국 1996년 이혼을 하면서 국민의 실망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거기에 같은 해 둘째 왕자인 요크 공작 앤드루도 사라 퍼거슨과 이혼을 하면서 충격을 더했다.
1996
1997
[다이애나 비 사망, 왕실에 치명타]
파리에서 파파라치를 따돌리다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국민들의 원망이 찰스 왕세자에게 돌려지면서 왕실 권위에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졌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사건은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가 프랑스 파리에서 연인 도디 알파예드와 함께 파파라치를 따돌리려는 와중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국민의 원망이 찰스에게로 돌려지면서 왕실 권위에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졌다. 1992년 다이애나는 자신의 결혼 생활과 왕실의 뒷이야기를 다룬 책을 통해 삶의 어려움을 밝혔고, 이는 대중매체를 통해 퍼져나가면서 그녀에 대한 동정과 왕실 및 찰스에 대한 안 좋은 시각이 커졌다.
1997
1999
1999
['오퍼레이션 리츠'로 공식 등장]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파커 보울스는 런던 리츠 호텔에서 열린 카밀라 여동생의 50세 생일 파티에 함께 참석한 후, 처음으로 커플로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호텔 정문으로 함께 나와 수많은 사진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했습니다. '오퍼레이션 리츠'로 명명된 이 사건은 두 사람의 관계를 공식화하는 치밀한 홍보 전략의 정점이었습니다.
다이애나비 사망 이후 극도로 악화된 여론 속에서, 찰스의 홍보 전문가 마크 볼랜드는 카밀라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오퍼레이션 PB')을 수립했습니다. '오퍼레이션 리츠'는 그 계획의 핵심으로, 두 사람이 더 이상 숨지 않는 당당한 커플임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200여 명의 사진기자들이 미리 정보를 받고 대기했으며, 찰스와 카밀라가 함께 차에 타는 짧은 순간은 다음 날 모든 신문의 1면을 장식했습니다. 이 사건은 왕실이 전통적인 '불평 말고, 설명 말라'는 태도에서 벗어나,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여론을 관리하는 현대적 홍보 전략을 채택했음을 보여주는 전환점이었습니다.
1999
[대한민국 국빈 방문]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하회마을, 성공회 서울 주교좌 대성당, 이화여자대학교를 다녀가며 양국 간의 교류에 기여했다.
1999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해 하회마을과 성공회 서울 주교좌 대성당, 이화여자대학교를 다녀갔다.
1999
2005
2005
[콘월 공작부인으로서의 공무 수행]
2005년 결혼 후 2022년까지 17년 동안 카밀라는 콘월 공작부인으로서 꾸준하고 성실하게 공무를 수행하며 대중의 인식을 점진적으로 바꾸어 나갔습니다.
그녀는 90개 이상의 자선단체를 후원하며, 특히 골다공증, 문맹 퇴치, 가정 폭력 및 성폭력 피해자 지원 등 소외된 분야에 집중했습니다.
이러한 진정성 있는 활동은 그녀를 '왕세자의 불륜 상대'에서 '헌신적인 왕실의 일원'으로 재평가받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카밀라는 화려하거나 인기 있는 분야 대신,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된 진솔한 자선 활동에 집중했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앓았던 골다공증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1994년부터 관련 단체의 후원자로 활동해왔습니다. 또한 가정 폭력과 성폭력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지원하는 활동을 통해 깊은 공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의 접근 방식은 요란하지 않았지만 꾸준했으며, 이는 대중에게 그녀가 왕실의 의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수년에 걸친 이러한 노력은 그녀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재건했으며, 왕실 내부에서도 그녀의 가치를 인정받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2005
2005
[찰스 왕세자와 결혼]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파커 보울스는 윈저 길드홀에서 간소한 시민 예식으로 결혼했습니다.
이후 윈저성 세인트 조지 채플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의 주관 하에 결혼을 축복하는 예배가 열렸으며, 이 예배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이 참석하여 두 사람의 결합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이 결혼으로 카밀라는 '콘월 공작부인(Duchess of Cornwall)' 전하의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약혼은 2005년 2월 10일에 발표되었습니다. 결혼식은 당초 4월 8일로 예정되었으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과 겹쳐 하루 연기되었습니다. 시민 예식을 선택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이혼 경력이 있다는 점과, 미래의 영국 국교회 수장이 될 찰스의 재혼에 대한 논란을 피하기 위한 신중한 결정이었습니다. 결혼식 증인은 찰스의 아들 윌리엄 왕자와 카밀라의 아들 톰 파커 보울스가 맡았습니다. 결혼 당시 왕실은 찰스가 왕위에 오르면 카밀라가 '왕비(Queen Consort)'가 아닌 '왕세자빈(Princess Consort)'으로 불릴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이는 다이애나비를 의식한 당시의 부정적인 여론을 완화하기 위한 타협안이었습니다.
2007
[영국 왕실 유튜브 채널 '로열채널' 개설]
국민과의 소통을 확대하기 위해 유튜브에 전용 동영상 사이트인 '로열채널'을 개설하여 영국 왕실의 일상과 성탄 축하 메시지 등을 게시하며 대중에게 다가갔다.
2007년 12월 24일, 엘리자베스 2세는 유튜브에 전용 동영상 사이트를 개설하였다. 로열채널이라는 이름의 이 사이트(www.youtube.com/theroyalchannel)에서는 영국 왕실의 일상에 대한 옛 뉴스와 각종 동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성탄절에는 왕의 성탄축하 메시지도 게시된다. 이 사이트는 정기적으로 새로운 소식을 갱신해 영국 왕실에 대한 누리꾼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2007
2011
[아일랜드 공식 방문 및 유감 표명]
영국 군주로서는 100년 만에 아일랜드를 공식 방문하여 양국의 아픈 역사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며 관계 개선에 힘썼다.
2011년 5월에는 영국 군주로서는 할아버지인 조지 5세 이후로 100년 만에 아일랜드를 공식 방문하여 양국의 아픈 역사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2011
2012
[즉위 60주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맞이]
재위 60주년을 맞이하며 영국 역사상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두 번째로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맞이한 군주가 되었다.
2012년 2월 6일에 재위 60주년을 맞은 엘리자베스 2세는 64년 동안 재위했던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영국 역사상 두 번째로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맞이하는 군주가 되었다. (원문은 6월로 표기되었으나, 즉위일 기준 2월 6일이 정확한 60주년이다.)
2012
2015
[영국 역사상 최장수 통치자 기록 달성]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 기간을 넘어서 영국 역사상 최장수 통치자로 기록되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2015년 9월 9일 오후 5시 30분을 기점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 기간을 넘어서 영국의 최장수 통치자로 기록되었다.
2015
2022
2022
[엘리자베스 2세, '퀸 커밀라' 지지 선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즉위 70주년(플래티넘 주빌리)을 맞아 발표한 성명에서, 찰스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카밀라가 '왕비(Queen Consort)'로 불리기를 바란다는 "진심 어린 소망"을 밝혔습니다.
이는 2005년 결혼 당시 발표했던 '왕세자빈(Princess Consort)' 칭호에 대한 논란을 종식시키는 결정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여왕의 공식적인 지지는 카밀라의 왕실 내 완전한 수용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여왕의 이 발표는 카밀라의 오랜 헌신과 공무 수행에 대한 인정이자, 미래의 왕인 찰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것이었습니다. 법적으로 왕의 아내는 자동으로 'Queen Consort'가 되지만, 'Princess Consort'라는 이례적인 칭호가 거론되었던 것은 카밀라에 대한 과거의 부정적 여론 때문이었습니다. 여왕이 직접 이 문제를 정리함으로써, 찰스의 즉위 시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인 논란을 사전에 차단하고 순조로운 왕위 계승을 위한 길을 닦았습니다. 이는 카밀라가 수십 년에 걸친 노력 끝에 마침내 왕실의 최고 수장으로부터 완전한 신임을 얻었음을 공표한 순간이었습니다.
2022
[즉위 70주년 '플래티넘 주빌리' 맞이]
사상 최초로 플래티넘 주빌리(즉위 70주년)를 맞이함으로써, 일본 쇼와 천황의 기록을 넘어섰다.
2022년 2월 6일에는 사상 최초로 플래티넘 주빌리(즉위 70주년)를 맞이함으로써, 일본의 124대 쇼와 천황의 기록을 깼다.
2022
2022
[밸모럴 성에서 서거]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에서 향년 97세(만 96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그녀의 서거로 70년간의 영국 여왕 통치가 막을 내렸다.
2022년 9월 8일 버킹엄 궁전은 엘리자베스 2세가 밸모럴성에서 의료진의 감독하에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고, 같은 날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에서 향년 97세(만 9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022
[찰스 3세 즉위와 함께 왕비(Queen Consort)가 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함에 따라 찰스 왕세자는 즉시 국왕 찰스 3세로 즉위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카밀라는 '왕비(Her Majesty The Queen Consort)'가 되었습니다.
이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유지를 받든 순조로운 칭호 승계였습니다.
군주의 서거와 동시에 다음 계승자가 즉위하는 영국 왕실의 원칙에 따라, 찰스 3세의 즉위와 카밀라의 왕비 등극은 자동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버킹엄 궁은 공식 발표에서 그녀를 'The Queen Consort'로 칭하며 새로운 시대를 알렸습니다. 수십 년간 대중의 비난을 받았던 인물이 마침내 왕의 배우자로서 최고 지위에 오르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2023
2023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 거행]
찰스 3세의 대관식에서 카밀라도 함께 기름 부음 받고 왕관을 쓰며 공식적으로 왕비(Queen Camilla)로 즉위했습니다.
이로써 그녀는 영국 역사상 가장 고령에 대관식을 치른 왕비가 되었습니다.
대관식 이후, 버킹엄 궁은 그녀의 공식 칭호에서 'Consort'를 빼고 'The Queen'으로 칭하기 시작했습니다.
대관식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1000년 넘게 이어져 온 전통에 따라 거행되었습니다. 카밀라는 찰스 3세의 대관식 후 별도의 간소화된 의식을 통해 축성되고 왕관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찰스 3세의 증조할머니인 메리 왕비가 1911년 대관식 때 썼던 왕관을 착용했습니다. 이 대관식은 한때 왕세자의 불륜 상대로 지탄받았던 인물이, 수십 년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국민과 교회의 축복 속에서 왕비로 인정받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의 최종 장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