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퀴리

과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노벨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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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국제상, 학술상, 과학상, 문학상, 평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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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교체
과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노벨상 수상자

* 폴란드 출신 프랑스 과학자 방사능 분야의 선구자. * **여성 최초 노벨상 수상** 유일하게 물리학상 화학상 모두 수상한 2관왕. * 남편 피에르 퀴리와 라듐 폴로늄 발견으로 과학사에 큰 획. * 평생 연구에 헌신했으나 방사능 피폭으로 사망한 비극적인 삶. * 사후 **여성 최초 팡테옹 안장** 등 인류에게 영감을 준 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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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상, 학술상, 과학상, 문학상, 평화상

노벨상은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으로 제정된 세계 최고 권위의 상입니다. * 인류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되며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경제학 등 6개 분야로 구성됩니다. * 1901년부터 시작되어 매년 수상자를 선정하며 각 분야에서 최고의 영예로 여겨집니다. * 수상자는 금으로 된 메달과 표창장 그리고 상금을 받으며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원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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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사건만
최신순

1867

[바르샤바에서 탄생]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가난한 교육자의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로, 훗날 세계적인 과학자로 이름을 알리게 될 그녀의 위대한 여정이 시작된 순간입니다.

1867

1877

[어린 시절의 비극]

10세 무렵 어머니를 폐결핵으로 잃고, 아버지의 실직, 큰 언니의 요절 등 혼란하고 슬픈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러시아의 지배 아래 폴란드 전통 학습이 억압받는 등 힘든 청소년기를 겪었습니다.

1877

1884

[유학을 향한 열망]

17세 무렵부터 가정교사로 일하며 학비를 모았습니다.

당시 폴란드와 독일에서는 여성이 대학교에 갈 수 없었기에, 성 차별 없는 프랑스 파리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시골 농가에서 야학을 운영하며 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1884

1891

[파리 소르본 입학]

마침내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 언니 부부의 돌봄을 받으며 학업에 매진했습니다.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며 최상위 성적으로 졸업,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입증했습니다.

1891

1895

[피에르 퀴리와 결혼]

뛰어난 과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며 그의 성을 따랐습니다.

피에르는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학업을 적극 지원한 든든한 동반자였습니다.

두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등 소박하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1895

1895

1895

[노벨상 제정 유언 작성]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이 "매년 인류를 위해 크게 헌신한 사람"에게 상을 수여하라는 내용의 마지막 유언을 작성했습니다.

이는 세계적 권위의 노벨상이 탄생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다이너마이트 발명가인 노벨은 자신의 부고 기사 오보를 접한 후, 유산으로 인류에 긍정적인 영향을 남기고자 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1896

[방사능 연구 시작]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찾던 중, 앙리 베크렐이 발견한 우라늄염의 '베크렐선'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우라늄 외에도 자연계에 이러한 현상을 보이는 물질이 더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연구에 뛰어들었습니다.

1896

1897

[장녀 이렌 졸리오퀴리 출생]

첫째 딸 이렌(Irène)이 태어났다. 이렌의 출생에도 불구하고 마리의 과학 연구는 중단되지 않았다. 이렌은 훗날 부모의 뒤를 이어 과학자가 되어, 남편 프레데리크 졸리오와 함께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며 퀴리 가문의 과학적 유산을 계승하게 된다.

마리는 당시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했던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는 가정생활과 고된 연구를 병행하며, 여성도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했다. 이러한 그녀의 삶은 후대 여성 과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1897

1898

[폴로늄과 라듐 발견]

피에르 퀴리와 공동 연구를 통해 '피치블렌드'에서 우라늄보다 400배 강한 새로운 원소, '폴로늄'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조국 폴란드를 기리는 이름입니다.

이후 우라늄보다 250만 배 강한 '라듐'도 발견하며 **세계 최초**로 방사능 물질의 존재를 밝혀냈습니다.

퀴리 부부는 방사능 물질에서 나오는 빛을 '방사선'이라 명명하며 과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1902년에는 8톤의 폐우라늄 광석에서 0.1g의 순수한 염화라듐을 얻는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1898

1901

1901

[노벨상 최초 시상]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문학상, 평화상 등 5개 분야에서 최초로 수상자가 선정되어 시상되었습니다.

이는 세계 최고 권위의 노벨상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역사적인 해입니다.

노벨 평화상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나머지 상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수여되는 전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03

1903

[마리 퀴리 최초 여성 수상]

마리 퀴리가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방사선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며, 노벨상 역사상 최초의 여성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또한 최초의 부부 공동 수상자이기도 합니다.

마리 퀴리는 1911년 노벨 화학상까지 단독 수상하며, 두 번의 노벨상을 받은 세계 최초의 인물로 기록됩니다. 퀴리 부부의 딸과 사위 또한 노벨상을 수상하며 독보적인 가족 기록을 세웠습니다.

1903

[최초 여성 노벨상 수상]

라듐 연구의 공로를 인정받아 남편 피에르 퀴리, 앙리 베크렐과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과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수상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처음에 피에르와 베크렐만을 후보로 추천하며 마리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이에 피에르가 "마리의 공로 없이는 상을 받을 수 없다"고 강력히 항의하여 공동 수상이 이루어졌다. 이는 당시 과학계에 만연했던 뿌리 깊은 성차별을 보여주는 동시에, 남편 피에르가 단순한 연구 동료를 넘어 그녀의 권리를 위해 싸운 진정한 동반자였음을 증명하는 일화다.

1903

1904

[차녀 이브 퀴리 출생]

둘째 딸 이브(Ève)가 태어났다. 이브는 언니 이렌과 달리 과학자가 아닌 작가이자 피아니스트의 길을 걸었다. 그녀는 훗날 어머니의 전기인 《마담 퀴리》를 집필하여 마리 퀴리의 인간적인 면모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이브의 남편인 헨리 라부이스(Henry Labouisse)는 유니세프(UNICEF) 총재로 활동하며 1965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로써 퀴리 가문은 물리학, 화학, 평화상에 걸쳐 총 5개의 노벨상을 수상한 유일무이한 '노벨상 명가'의 역사를 완성하게 된다.

1904

1906

[남편 피에르의 사망]

사랑하는 남편 피에르 퀴리가 출근길에 음주 마부가 몰던 마차에 치여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큰 슬픔 속에서도 그녀는 연구와 교육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았습니다.

피에르의 죽음은 마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녀는 일기장에 "당신 없는 삶은 잔혹해요. 고통으로 심장이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아요"라며 비통한 심경을 기록했다. 프랑스 정부는 그녀에게 연금을 제안했지만, 마리는 이를 거절하고 남편이 맡았던 소르본 대학의 교수직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는 슬픔을 연구에 대한 책임감으로 승화시키려는 그녀의 강인한 성격을 보여준다.


1906

1906

[소르본 최초 여성 교수]

남편의 뒤를 이어 소르본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소르본 대학교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교수**라는 기념비적인 기록입니다.

미리 강의 내용을 철저히 준비하는 꼼꼼함을 보여주며 남편의 유산을 이어나갔습니다.

1906

1910

[금속 라듐 분리 성공]

염화라듐을 전기분해하여 순수한 금속 라듐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라듐의 성질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활용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폴 랑주뱅과의 관계 시작]

남편 사후 수년간의 깊은 슬픔에서 벗어나, 마리는 피에르의 제자였던 동료 물리학자 폴 랑주뱅(Paul Langevin)과 사랑에 빠졌다. 랑주뱅은 뛰어난 과학자였지만,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던 유부남이었다. 이들의 관계는 훗날 그녀의 삶을 뒤흔들 거대한 스캔들의 불씨가 되었다.

폴 랑주뱅은 피에르 퀴리의 가장 뛰어난 제자 중 한 명으로, 퀴리 부부와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마리와 랑주뱅은 지적인 교감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깊이 끌렸고, 1910년경부터 연인 관계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는 랑주뱅과의 관계에서 지적 동반자이자 사랑하는 연인을 다시 찾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1910

1911

[아인슈타인의 편지]

마리 퀴리에 대한 사회적 비난과 스캔들이 극에 달해 그녀가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받고 있을 때 아인슈타인이 “업적으로 당당하라, 잡소리에 신경 쓰지 말라”며 직접 편지를 보냈습니다. 퀴리의 업적과 인격에 대한 신뢰, 그리고 과학자로서의 명예를 지키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존경하는 퀴리 여사,
사람들의 비열한 소문에는 신경 쓰지 마시고, 아무 상관도 하지 마십시오.
자신만의 세계에 담대하게 전념하셨으면 합니다.
과학에서 당신이 성취한 업적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대중이 당신을 비난하면 그냥 무시하고, 그들이 말하는 것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스톡홀름에서 곧 뵙기를 기대합니다.
친애하는 마음을 담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911

1911

['퀴리-랑주뱅 스캔들' 폭로]

두 번째 노벨상 수상을 앞둔 시점, 랑주뱅의 아내가 두 사람이 주고받은 연애편지를 훔쳐 언론에 폭로했다. 극우 성향의 신문 《르 주르날(Le Journal)》이 이 사실을 보도하며 스캔들이 터져 나왔다. 프랑스 사회는 "폴란드 출신 이방인이 프랑스 가정을 파괴한다"며 그녀를 맹렬히 비난했다. 

언론의 공격은 단순한 불륜 비판을 넘어, 외국인에 대한 혐오(제노포비아)와 여성에 대한 혐오(미소지니)가 결합된 형태였다. 언론은 유부남인 랑주뱅보다 과부가 된 이민자 여성인 마리에게 비난의 화살을 집중시켰다. 그녀는 순식간에 위대한 과학자에서 부도덕한 '외국인 요부'로 전락했으며, 분노한 군중이 그녀의 집으로 몰려와 돌을 던지는 등 신변의 위협까지 받았다. 

1911

1911

[명예를 건 결투 사건]

스캔들을 둘러싼 언론의 비방이 격화되자, 결투 사건까지 벌어졌다. 마리를 옹호하던 기자 피에르 모르티에와 스캔들을 폭로한 기자 귀스타브 테리가 검으로 결투를 벌였고, 모르티에가 팔에 부상을 입었다. 며칠 후, 폴 랑주뱅 자신도 테리에게 "비겁자"라고 모욕당한 것에 분노하여 권총 결투를 신청했으나, 양측 모두 발포하지 않아 무승부로 끝났다.

이 결투들은 스캔들이 당시 프랑스 사회에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특히 랑주뱅과 테리의 결투에서 테리는 "프랑스의 위대한 지성을 내 손으로 없앨 수 없다"며 총을 쏘지 않았고, 랑주뱅 역시 "나는 암살자가 아니다"라며 총을 거두었다. 이는 마리 퀴리를 둘러싼 개인적 감정과 사회적 명예, 그리고 과학자로서의 공적인 가치가 복잡하게 얽혀있었음을 드러낸다.

1911

1911

[두 번째 노벨상 수상]

스캔들이 절정에 달하자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마리에게 시상식에 불참할 것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마리는 "상은 나의 과학적 업적에 대한 것이며, 사생활과는 무관하다"고 답하며 스톡홀름으로 향했다. 그녀는 라듐과 폴로늄 발견 및 순수 라듐 분리의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단독 수상하며, 역사상 최초로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인물이 되었다.

1911

1915

1915

[과학 분야 최연소 수상자]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가 25세의 나이로 아버지 윌리엄 헨리 브래그와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그는 과학 분야 역대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라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록은 99년간 깨지지 않았습니다.

1923

[건강 급격한 악화]

56세가 되던 해부터 고질적인 근육통, 난청, 백내장, 빈혈 등 건강이 눈에 띄게 악화되었습니다.

평생 방사성 물질을 연구하며 보호장구 없이 노출된 영향이었습니다.

1923

1934

[방사능 피폭으로 사망]

과도한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골수암, 백혈병 등으로 쇠약해져 6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평생을 과학에 바친 그녀의 희생은 라듐의 위험성을 일깨우는 비극적인 교훈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연구노트는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방사선을 방출하며 프랑스 국립도서관 지하에 차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녀의 연구 열정과 인류에게 미친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934

1936

1936

[나치에 저항한 노벨상 메달]

나치 독일이 자국민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자, 독일인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막스 폰 라우에와 제임스 프랑크는 자신들의 순금 메달을 압수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들은 나치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닐스 보어의 연구소에 메달을 보내 안전하게 보관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로써 인류의 위대한 유산은 나치의 손아귀를 피해 잠시 안식처를 찾게 되었습니다.

1935년, 반나치 운동가 카를 폰 오시에츠키에게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자 히틀러 정권은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전면 금지하고 기존 수상자들의 메달까지 위협했습니다. 이에 나치에 비판적이었던 독일의 저명한 과학자 막스 폰 라우에(1914년 수상)와 유대인이었던 제임스 프랑크(1925년 수상)는 자신들의 23캐럿 순금 메달을 지키기 위해, 당시 유대인 과학자들의 피난처 역할을 하던 덴마크의 닐스 보어 이론물리학 연구소로 비밀리에 메달을 보냈습니다. 독일 밖으로 금을 보내는 것 자체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죄였기에, 이는 목숨을 건 저항이었습니다.

1940

1940

[왕수에 녹아 사라진 노벨상]

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침공하자, 연구소에 보관 중이던 두 개의 노벨상 메달은 발각될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이때 헝가리 출신 화학자 게오르크 드 헤베시가 기지를 발휘하여, 금을 녹일 수 있는 유일한 액체인 '왕수(Aqua Regia)'에 메달을 녹여버렸습니다. 순금 메달은 나치 병사들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주황색 화학 용액으로 보였고, 덕분에 인류의 유산은 약탈의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나치가 코펜하겐 시내를 행진하는 동안, 게오르크 드 헤베시는 메달을 땅에 묻자는 닐스 보어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발각될 위험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질산과 염산을 1:3 비율로 섞은 강력한 산성 용액인 '왕수'를 만들어, 200그램에 달하는 순금 메달 두 개를 그 안에 담갔습니다. 금은 매우 비활성 금속이라 녹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나치 병사들이 연구소를 샅샅이 뒤질 때쯤 메달은 완전히 녹아 평범한 오렌지색 용액(클로로아우르산 용액)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수많은 비커들 사이에 놓인 이 용액의 정체를 몰랐던 병사들은 그냥 지나쳤고, 메달은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모두의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1945

1945

[비커 속에서 부활한 순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3년 스웨덴으로 피신했던 게오르크 드 헤베시는 코펜하겐의 연구소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선반 위에 고이 놓여있던 주황색 용액을 발견하고 안도했습니다. 그는 화학 반응을 역으로 진행시켜 용액 속에 녹아있던 금을 다시 순금 가루(침전물) 형태로 추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연구소로 복귀한 드 헤베시는 자신이 숨겨두었던 비커가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용액에 특정 화학물질을 첨가하여 화학 평형을 반대 방향으로 이동시키는 원리를 이용, 용해되었던 금 이온을 다시 고체 금으로 침전시켰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나치의 눈을 속였던 주황색 액체로부터 원래의 순금을 거의 완벽하게 회수할 수 있었습니다.

1952

1952

[원래의 금으로 재탄생한 메달]

게오르크 드 헤베시는 회수한 순금을 스웨덴의 노벨 재단으로 보냈습니다. 노벨 재단은 이 금을 다시 녹여 원래의 주인인 막스 폰 라우에와 제임스 프랑크의 메달을 똑같이 재제작했습니다. 마침내 두 개의 노벨상 메달은 원래의 금으로,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며 한 편의 첩보 영화 같았던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

노벨 재단은 드 헤베시가 보낸 금을 받아, 이를 이용해 두 개의 새로운 노벨상 메달을 만들었습니다. 이 재제작된 메달은 1952년에 막스 폰 라우에와 제임스 프랑크에게 다시 수여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일을 해낸 게오르크 드 헤베시 자신도 1943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였으며, 그의 기지는 단순한 재치를 넘어 파시즘에 맞서 인류의 지성과 양심의 상징을 지켜낸 과학자의 위대한 저항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1954

1954

[폴링, 유일무이한 2관왕]

라이너스 폴링이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1962년 노벨 평화상까지 받으며, 유일하게 서로 다른 두 분야에서 단독으로 노벨상을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의 화학 결합 연구와 핵실험 반대 운동이 인정받았습니다.

1956

1956

[바딘, 동일 분야 2회 수상]

존 바딘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며, 1972년 또다시 물리학상을 수상하는 진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는 같은 분야에서 두 차례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과학자로, 반도체 연구와 초전도 현상 연구에 기여했습니다.

1958

1958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수상 거부]

소련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정부의 강력한 압력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는 이례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스웨덴 아카데미는 그의 거부를 인정하지 않고 해당 연도의 시상식을 보류했습니다.

파스테르나크의 아들은 1989년에 아버지의 노벨상을 대신 수령했습니다.

1961

1961

[최초 사후 노벨상 수상]

다그 함마르셸드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후 사망했으나, 유족이 대리 수상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이는 노벨상 역사상 최초의 사후 수상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노벨상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원칙이지만, 수상자로 지정된 후 사망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인정됩니다.

1964

1964

[장폴 사르트르 수상 거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폴 사르트르가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어떠한 공식적인 기관으로부터도 영예를 받지 않겠다는 개인적인 신념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1968

1968

[노벨 경제학상 제정]

스웨덴 국립은행이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경제학 분야의 스웨덴 중앙은행상'을 제정했습니다.

이는 노벨의 유언에 포함되지 않은 유일한 분야지만, 다른 노벨상과 동등한 권위를 인정받으며 노벨상의 범위를 확장시켰습니다.

이 상은 1969년부터 시상되기 시작했으며, 노벨 재단이 관리합니다.

1969

1969

[경제학상 첫 시상]

전 해에 제정된 노벨 경제학상에서 최초로 수상자가 선정되어 시상되었습니다.

이는 노벨상의 새로운 분야가 성공적으로 안착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1973

1973

[레득토의 평화상 거부]

베트남의 혁명가 레득토가 헨리 키신저와 함께 노벨 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베트남의 평화가 아직 정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1995

1995.04 사후 61년

[팡테옹에 안장된 영예]

사후 61년 만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여성 최초로 국립묘지 팡테옹에 안장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유해가 이장되는 과정에서 그녀의 유해에서 상당량의 방사선이 방출되는 것이 발견되어 납으로 특수 제작된 차단 관에 안치되었습니다.

1995

2014

2014

[역대 최연소 수상자 탄생]

파키스탄의 인권 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17세의 나이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역대 모든 분야를 통틀어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라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이는 99년 만에 깨진 기록으로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2019

2019

[역대 최고령 수상자 탄생]

존 B.

구디너프가 97세의 나이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며, 역대 모든 분야를 통틀어 최고령 노벨상 수상자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그의 리튬 이온 배터리 개발 기여가 인정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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