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물리학자, 과학철학자, 평화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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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이혼사

개인사,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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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과학철학자, 평화 운동가

•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

• E=mc²로 대표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방정식 창시.

• 1921년 광전 효과 법칙 발견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

• 천재의 대명사로 불리는 20세기 최고의 이론 물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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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사, 가족관계

아인슈타인의 삶을 통해 본 천재의 두 얼굴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비밀을 푼 혁명적 지성이었으나, 그의 사생활은 과학적 업적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첫 아내와의 지적 동반자 관계는 그의 이기심과 외도로 파탄 났고, 노벨상 상금을 위자료로 내건 이혼은 그의 명성에 가려진 냉혹함을 보여준다.

천재의 위대함이 한 인간으로서의 책임과 윤리를 보장하지 않음을 그의 삶은 증명한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879

[아인슈타인 출생]

독일 울름에서 세속적인 아슈케나즈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79

1880

[뮌헨 이주 및 사업 시작]

아인슈타인 가족이 뮌헨으로 이사했고,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직류 기반 전기 장비 제조 회사를 설립했다.

1880

1884

[초등 교육 시작]

5세부터 3년 동안 뮌헨의 가톨릭 초등학교에 다녔다.

1884

1887

[김나지움 전학]

8세에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으로 옮겨져 7년 후 독일 제국을 떠날 때까지 고급 초등 및 중등 학교 교육을 받았다.

1887

1891

[수학 독학 및 피타고라스]

12세의 어린 나이에 대수와 유클리드 기하학을 독학으로 배웠다.

또한 피타고라스 정리에 대한 독자적인 증명을 발견하며 수학적 재능을 드러냈다.

1891

1892

[칸트 철학에 심취]

13세에 철학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어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접하게 되었다.

1892

1893

[미적분학 마스터]

14세 때 스스로 '미적분학을 마스터했다'고 말할 정도로 뛰어난 학습 능력을 보였다.

1893

1894

[가족 이탈리아 이주]

아버지 회사의 전기 조명 공급 입찰 실패로 가족은 이탈리아로 이주했고, 아인슈타인은 학업을 위해 뮌헨에 남았다.

1894

1894

[이탈리아 가족 합류]

학교의 통제와 교수법에 불만을 가졌던 아인슈타인은 의사의 진단서를 이용해 뮌헨 학교를 설득하고 이탈리아의 가족에게 합류했다.

1894

1895

[ETH 입학 시험 낙방]

16세의 나이로 취리히 연방 폴리테크닉 학교 입학 시험에 응시했으나, 일반 부분에서 요구되는 기준에 미달하여 낙방했다.

1895

1896

1896

[지적 동반자, 밀레바 마리치와의 운명적 만남]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에서의 첫 만남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ETH)에서 물리학과 수학 교사

과정을 밟던 중, 같은 반 학생이었던 세르비아 출신의 밀레바 마리치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과학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공유하며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당시 여성의 고등 교육 기회가 극히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밀레바 마리치는 물리학자의
꿈을 안고 취리히 공대에 입학한 선구적인 여성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보다 4살
연상이었던 그녀는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두 사람은 '보헤미안'적인 생활
방식을 공유하며 학문적 동반자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마리치에게 보낸
초기 편지들에는 상대성 이론의 개념을 포함한 "우리의 이론"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는데,
이는 두 사람이 단순한 연인을 넘어 깊은 지적 교감을 나누는 협력자였음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이 관계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어머니 파울리네는
마리치가 4살 연상이고, 유대인이 아니며, 선천적인 고관절 탈구로 다리를 저는 것을 문제
삼아 "책벌레"라 부르며 둘의 결혼을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이러한 가족의 반대는 두
젊은 연인에게 큰 정신적 압박으로 작용했습니다.

1896

[독일 시민권 포기]

군 복무를 피하기 위해 아버지의 승인 하에 독일 뷔르템베르크 왕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1896

1896

[스위스 마투라 합격]

물리학 및 수학 과목에서 최고 등급을 포함한 좋은 성적으로 스위스 마투라 시험에 합격하고, 취리히 연방 폴리테크닉 학교의 4년제 수학 및 물리학 교육 디플로마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1896

1900

[ETH 졸업 및 첫 논문]

취리히 연방 폴리테크닉 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 시험에 합격하고 연방 교육 디플로마를 받았다.

이후 '모세관 현상으로부터의 결론'이라는 첫 논문을 물리학 연보에 게재했다.

1900

1901

[스위스 시민권 취득]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하여 평생 유지하게 되었다.

1901

1902

[특허국 취직 및 딸 출생]

베른의 스위스 특허국 사무소에 보조 심사관으로 취직하며 생계를 꾸렸다.

이 무렵 첫째 딸 '리제를'이 태어났으며, 친구들과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소규모 토론 그룹을 시작했다.

1902

1902

1902

[딸 리제를의 출생과 상실]

기록에서 사라진 첫 아이, 리제를

밀레바 마리치는 1901년 임신한 상태로 졸업 시험에 재응시했으나 낙방하며 학업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고향인 세르비아로 돌아가 1902년 1월, 딸 리제를를 출산했습니다.

리제를의 행방은 이후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1901년, 임신 3개월 차였던 마리치는 졸업 시험에 다시 도전했지만 낙방했고, 이는 사실상
그녀의 과학자로서의 경력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학위 취득에 실패한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 딸 리제를를 낳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에 머물며 단 한 번도
자신의 딸을 보지 않았습니다. 리제를가 성홍열로 일찍 사망했거나 입양되었다는 추측만
있을 뿐, 그녀의 삶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전무합니다. 이 시기 아인슈타인 역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고, 마리치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 둘은 참 딱한
커플"이라고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첫 아이의 상실과 각자의 경력 실패는 두 사람의
관계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슬픔을 남겼습니다. 

1903

[밀레바 마리치와 결혼]

대학교 동기이자 미래의 아내인 밀레바 마리치와 결혼했다.

1903

1903

1903

[밀레바 마리치와의 결혼]

아인슈타인이 스위스 베른 특허청에 직장을 얻은 후, 두 사람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로써 마리치는 전도유망한 물리학도에서 평범한 가정주부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아버지가 임종 직전에야 결혼을 허락하면서, 두 사람은 베른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후 마리치는 자신의 학문적 야망을 접고, 남편의 연구를
돕고 가정을 돌보는 데 전념했습니다. 이듬해인 1904년 첫아들 한스 알베르트가
태어났고, 1910년에는 둘째 아들 에두아르트가 태어났습니다. 마리치의 역할 변화는
그녀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지만, 이 시기는 역설적으로 아인슈타인의 학문적 생산성이
폭발하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1904

[아들 한스 알베르트 출생]

스위스 베른에서 아인슈타인의 첫 아들인 한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태어났다.

1904

1905

[기적의 해 논문 발표]

그의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로 묘사되는 해에 광전 효과, 브라운 운동, 특수 상대성이론, 그리고 E=mc²에 관한 4편의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하며 현대 물리학의 기초를 뒤흔들었다.

1905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도약과 마리치의 보이지 않는 기여]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 광양자 가설, 브라운 운동 등 물리학의 역사를 바꾼 4편의 핵심 논문을 발표하며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를 맞이했습니다.

이 시기 마리치는 그의 가장 가까운 지적 조력자이자 안정적인 가정 환경을 제공한 인물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창의성이 최고조에 달했던 1905년은 그가 마리치와 가장 긴밀한 지적,
가정적 파트너십을 유지하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마리치가 논문의 공동 저자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부족하여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인정되지 않지만, 그녀가 남편의 연구에
지적인 영감을 주고 토론 상대가 되어주었으며,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여 그가 연구에
몰두할 환경을 만들어준 핵심적인 조력자였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초기 편지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연구라는 표현과, 두 사람의 별거 이후
그의 연구 성과 발표 방식이 혁명적인 단기 논문에서 점진적인 이론 완성으로 변화한 점을
고려할 때, 마리치의 존재는 그의 초기 위대한 업적에 필수적인 촉매제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녀의 학문적 꿈이 좌절된 것은 결과적으로 아인슈타인의 성공을 위한
희생이었던 셈입니다. 

1905

[박사 학위 논문 제출]

취리히 대학교에 '분자 크기의 새로운 결정'이라는 제목의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1905

1906

[박사 학위 수여]

제출했던 박사 학위 논문이 수락되어 정식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6

1907

[중력 이론 연구 시작]

특수 상대성이론 내에서 관성 운동의 선호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껴, 가속도와 등가 원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며 일반 상대성이론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다.

1907

1908

[베른 대학교 강사]

최고의 과학자로 인정받아 베른 대학교의 강사로 임명되었다.

1908

1909

[취리히 대학교 부교수]

취리히 대학교에서 전기역학과 상대성 원리에 대한 강의를 한 후 이론물리학 부교수로 임명되었다.

1909

1910

[아들 에두아르트 출생]

취리히에서 둘째 아들인 에두아르트가 태어났다.

1910

1911

[빛의 굴절 예측]

무거운 물체에 의한 빛의 굴절 정도를 추정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일반 상대성이론의 이론적 예측이 처음으로 실험적으로 테스트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1911

1911

[프라하 대학교 정교수]

프라하에 있는 독일 찰스 페르디난트 대학교의 정교수가 되었으며, 이를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받아들였다.

1911

1912

1912

[사촌 엘자와의 불륜 시작]

관계의 파국, 사촌과의 또 다른 사랑

아인슈타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부부 관계는 점차 소원해졌고, 1912년경 그는

베를린을 방문했다가 자신의 사촌인 엘자 뢰벤탈과 불륜 관계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결혼
생활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가져왔습니다.

1910년 둘째 아들 에두아르트가 태어날 무렵부터 아인슈타인은 일에만 몰두하며 가정에
소홀해졌고, 마리치와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베를린에 사는 이혼녀이자
두 딸의 어머니였던 사촌 엘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엘자는 마리치와 달리 과학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명랑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아인슈타인을 살뜰히 챙기며 그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이 불륜 관계는 7년간 지속되었으며, 아인슈타인이 마리치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1912

[ETH 이론물리학 교수]

취리히에 있는 모교인 취리히 공과대학교로 돌아와 1914년까지 이론물리학 교수로 재직하며 분석 역학과 열역학을 가르쳤다.

1912

1913

[프로이센 아카데미 회원]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13

1914

[밀레바와 별거 시작]

베를린으로 이주한 뒤, 아내 밀레바 마리치가 아들과 함께 취리히로 돌아가 별거에 들어갔다.

아인슈타인은 사촌 엘사 뢰벤탈과 낭만적인 관계를 시작했다.

1914

1914

1914

[베를린 이주와 가혹한 결혼 조건, 그리고 별거]

파탄의 정점, 모욕적인 요구와 영원한 이별
아인슈타인이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며 가족 모두 베를린으로 이주했지만, 그는 마리치에게 모욕적인 내용의 '결혼 생활 유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마리치는 두 아들을 데리고 취리히로 돌아가면서 영구적인 별거가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치는 베를린행을 원치 않았지만 결국 남편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베를린 도착
직후 아인슈타인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은 굴욕적인 조건을 편지로 전달했습니다


"내 옷과 침실을 항상 정돈하고, 하루 세 끼 식사를 내 방으로 가져올 것. 당신은 나와의 모든
개인적인 관계를 포기하며, 내가 요구할 경우 즉시 대화를 중단하고 내 방에서 나갈 것.
아이들 앞에서 나를 폄하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 것".


이는 사실상 아내를 하녀처럼 취급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마리치는 처음에는 조건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결국 1914년 7월 29일,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바로 다음 날 두 아들을 데리고 취리히로 떠났습니다.


이별은 영구적이었습니다. 

1914

[평화 선언 서명]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93인의 성명서'에 반대하며 평화적인 '유럽인들에게의 성명서'에 서명한 몇 안 되는 독일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1914

1915

[일반 상대성이론 완성]

자신의 특수 상대성이론을 확장하여 중력을 기하학적으로 설명하는 일반 상대성이론을 성공적으로 완성했으며, 시공간의 곡률에 잔물결이 발생하는 중력파를 예측했다.

[아인슈타인-드 하스 효과]

오언 윌런스 리처드슨이 예측한 자기 모멘트 변화에 따른 물체 회전 현상인 '아인슈타인-드 하스 효과'에 대한 최초의 실험적 관찰 논문을 반더르 요하너스 더 하스와 함께 발표했다.

1915

1916

[독일 물리학회 회장]

독일 물리학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학술 활동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1916

1917

[우주론 및 자극 방출]

일반 상대성이론을 우주 전체의 구조에 적용하며 동적인 우주 예측을 위해 새로운 개념인 '우주 상수'를 장방정식에 도입했다.

또한 메이저와 레이저의 원리가 되는 '자극 방출'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1917

1917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소장]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고, 이로 인해 다시 프로이센인으로서 독일 시민이 되었다.

1917

1919

[엘사 뢰벤탈과 재혼]

1912년부터 관계를 가져온 사촌 엘사 뢰벤탈과 재혼했다.

1919

1919

[밀레바 마리치와 이혼]

5년 동안 떨어져 살았던 아내 밀레바 마리치와 공식적으로 이혼했다.

이혼 합의의 일환으로 노벨상 상금을 주기로 동의했다.

1919

[노벨상 상금을 건 이혼 합의]

미래의 영광을 담보로 한 이혼 계약

수년간 이혼을 거부하던 마리치를 설득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미래에 노벨상을 받게 되면 상금 전액을 위자료로 지급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마리치는 그의 수상을 확신하고 이 조건을 받아들여 이혼에 합의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엘자와의 재혼을 위해 이혼을 서둘렀지만, 마리치는 완강히 버텼고 그
과정에서 심신이 쇠약해지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큰 재산이 없었던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가장 확실한 자산, 즉 미래의 지적 자본을 담보로 내걸었습니다. 그는 1918년 마리치에게
"이혼에 동의해준다면, 내가 노벨상을 받을 경우 상금 전액을 당신에게 양도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 제안은 단순한 금전적 합의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아인슈타인에게는
자유를 얻기 위한 계산된 도박이었고, 마리치에게는 자신의 젊음과 경력을 바쳐 함께 이룬
"우리의 연구"에 대한 정당한 몫을 주장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그의 업적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수상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결국 이 조항은 이혼
합의서에 명시되었고, 1919년 2월 14일 두 사람은 법적으로 남남이 되었습니다.

1919

[에딩턴의 이론 증명]

아서 에딩턴 경이 일식 관측을 통해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 예측(중력에 의한 빛의 굽힘)을 확인했다.

이 관측은 국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아인슈타인을 세계적인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1919

1919

1919

[사촌 엘자 아인슈타인과의 재혼]

혁명적 과학자의 보수적 선택, 사촌과의 재혼

아인슈타인은 밀레바 마리치와 이혼한 지 불과 넉 달 만에 자신의 사촌인 엘자 뢰벤탈과 재혼했습니다.

이는 당시 유럽 사회의 관습 안에서 이루어진, 안정과 보살핌을 추구한 선택이었습니다.


엘자는 아인슈타인의 이종사촌(어머니들끼리 자매)이자, 육촌(아버지들끼리
사촌)이었습니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사촌 간의 결혼은 법적으로 금지되지 않았으며,
특히 상류층과 중산층 사이에서는 가문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드물지 않게 이루어졌습니다. 유대교와 개신교 문화권에서도 사촌 결혼을 금기시하지
않았습니다. 뉴턴 물리학의 세계를 뒤엎은 혁명적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사생활에서는
지극히 관습적인 선택을 했다는 점은 흥미로운 역설입니다. 이는 그가 지적 파트너와의
갈등으로 점철된 첫 결혼과 달리, 자신을 보살펴주고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전통적인 관계를 원했음을 보여줍니다. 즉, 그의 선택은 과학 연구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한
실용적 판단이었던 셈입니다. 아인슈타인과 엘자는 자녀를 낳지 않았지만, 그는 엘자의 두
딸 일제와 마고를 자신의 딸처럼 키웠습니다. 특히 마고와는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편지를 통해 자신의 연애사를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결혼
생활 역시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여성 편력은 계속되었고, 심지어 엘자와 결혼하기 전 그녀의 딸인 일제에게 청혼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1919

['과학의 혁명' 보도]

에딩턴의 발표 후, 영국의 주요 신문인 《더 타임즈》는 '과학의 혁명 – 우주의 새로운 이론 – 전복된 뉴턴적 아이디어'라는 배너 헤드라인을 인쇄했다.

1919

1920

[네덜란드 아카데미 회원]

네덜란드 왕립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며 국제적인 학술적 인정을 받았다.

1920

1921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이론 물리학에 대한 공로, 특히 광전 효과 법칙의 발견'으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왕립학회 회원 선출]

영국의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며 그의 학문적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1921

1921

[뉴욕시 첫 방문]

존 프랜시스 하일런 시장의 공식 환영을 받으며 뉴욕시를 처음 방문했다.

이후 3주간의 강의와 리셉션에 참여했다.

1921

1921

['미국 첫인상' 출판]

미국 방문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라는 에세이를 출판하여 미국인의 몇 가지 특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1921

1922

[아시아 순회 강연]

싱가포르, 실론, 일본, 팔레스타인 등 아시아 지역을 6개월간 순회하며 수많은 강연을 진행했다.

일본에서는 황제와 황후를 만나는 등 국빈급 환영을 받았다.

[국제 지적 협력 위원회]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맹의 국제 지적 협력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 단체는 과학자, 연구원, 교사, 예술가, 지식인 간의 국제 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22

[노벨상 수상과 상금 전달]

약속의 이행, 그러나 엇갈린 운명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에 대한 연구 공로로 1921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1922년에 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약속대로 상금 전액을 밀레바 마리치에게 송금했습니다. 

1922년 아인슈타인은 1921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습니다. 당시 상금은
121,572 스웨덴 크로나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수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약속을 지켜 상금 전액을 마리치에게 전달했습니다. 마리치는 이 돈으로
취리히에 3채의 건물을 구입하여 임대 수입으로 생활을 꾸려나갔습니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 따르면, 상금이 대공황 시기에 가치가 폭락한 장기 채권에 투자되어 마리치가
약속된 경제적 안정을 누리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이 거액의
위자료는 이후 정신질환을 앓게 된 아들의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하는 데 대부분
사용되면서 그녀의 고된 삶을 완전히 구원해주지는 못했습니다. 

1922

[노벨상 시상식 불참]

극동 여행으로 인해 스톡홀름 노벨상 시상식에 직접 참석하지 못했고, 독일 외교관이 대신 만찬 연설을 진행했다.

1922

1923

[스페인 방문]

2주 동안 스페인을 방문하여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을 만났고, 알폰소 13세로부터 스페인 과학 아카데미 회원 디플로마를 받았다.

1923

1924

[보스-아인슈타인 통계]

인도의 물리학자 사티엔드라 나트 보스의 통계 모형을 지지하고 이를 확장하여, 일부 입자가 매우 낮은 온도에서 나타나야 하는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현상을 예측했다.

1924

1925

[코플리 메달 수상]

영국 왕립 학회로부터 코플리 메달을 수상하며 그의 학문적 업적을 다시 한번 인정받았다.

1925

1925

[남미 순회 방문]

3월과 4월에 걸쳐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을 방문하며 강연과 학술 교류를 진행했다.

1925

1926

[아인슈타인 냉장고 발명]

그의 전 제자인 실라르드 레오와 함께 움직이는 부품 없이 열만으로 작동하는 혁신적인 '아인슈타인 냉장고'를 공동 발명하고 1930년에 특허를 받았다.

1926

1929

[우주 상수 폐기]

에드윈 허블이 성운의 후퇴를 발견한 후, 우주 상수가 '이론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주장하며 정적 우주 모형을 포기했다.

1929

1930

[두 번째 미국 방문]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의 연구원으로 두 번째 미국 방문을 시작했다.

전국적인 관심 속에서도 사생활 보호를 위해 공개 연설과 상 수여를 거절했다.

1930

1931

[평화주의자 친구 사귐]

평화주의자로 유명한 작가 업턴 싱클레어와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과 친구가 되었다.

그는 채플린의 영화 '시티 라이트' 시사회에 특별 게스트로 참석하기도 했다.

[옥스포드 대학 제안]

옥스포드 대학교를 포함한 여러 유럽 대학에서 제의를 받았으며, 특히 크라이스트 처치에서는 5년 연구 장학금까지 제안받았다.

1931

1933

[독일 귀국 포기]

미국을 방문하던 중,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부가 집권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독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인지했다.

1933

1933

[나치의 아파트 습격]

미국에 있는 동안 게슈타포가 베를린에 있는 그의 가족 아파트를 반복적으로 습격했으며, 그의 개인 범선도 압수당했다.

1933

1933

[독일 시민권 공식 포기]

벨기에 앤트워프에 도착하자마자 독일 영사관으로 가서 여권을 양도하고 공식적으로 독일 시민권을 포기했다.

1933

1933

[유대인 공직 금지 확인]

독일 정부가 유대인의 공직 진출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음을 알게 되었다.

수천 명의 유대인 과학자들이 갑자기 대학 직위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1933

1933

[나치 분서 사건]

그의 저술이 나치 책 불태우기에서 독일 학생회의 표적이 되었고, 나치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유대인 지식주의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1933

1933

[영국 망명]

학술 지원 위원회의 도움으로 독일을 떠나 벨기에에서 몇 달 살다가, 영국 의원 올리버 로커-램슨의 초청으로 약 6주간 영국에 머물렀다.

로커-램슨은 그를 보호하기 위해 경호원을 배치했다.

1933

1933

[학문적 자유 연설]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가득 찬 청중 앞에서 학문적 자유의 중요성에 대해 연설하며, 독일의 유대인 대우를 비난했다.

1933

1933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미국으로 돌아와 나치 독일을 탈출한 과학자들의 피난처가 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상주 학자가 되었다.

1933

1935

[미국 영구 거주 및 웜홀]

미국에 영구적으로 남아 시민권을 신청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나단 로젠과 협력하여 '아인슈타인-로젠 다리'(웜홀)의 모형을 만들었다.

1935

1936

[아내 엘사 사망]

심장 및 신장 문제로 진단받았던 아내 엘사가 사망했다.

1936

1936

1936

[두 번째 아내 엘자의 죽음]

보호자의 상실

나치를 피해 미국 프린스턴으로 이주한 지 3년 만에, 아내 엘자가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깊이 슬퍼했다고 전해집니다. 

엘자는 아인슈타인의 명성을 관리하고 그가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헌신적인 보호자
역할을 했습니다. 1933년 나치의 위협을 피해 함께 미국으로 망명한 후, 그녀는 1936년
짧은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그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비통해했습니다.

1939

[핵무기 개발 편지 서명]

망명한 물리학자 실라르드 레오의 설득으로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독일의 잠재적인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해 경고하고 미국이 유사한 연구를 시작할 것을 권고하는 편지에 서명했다.

1939

1940

[미국 시민권 취득]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며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1940

1946

[인종차별 비판]

역사적으로 흑인 대학이었던 펜실베니아 링컨 대학교를 방문하여 명예 학위를 받았고, 미국의 인종차별을 '최악의 질병'으로 간주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1946

1948

[이스라엘 건국 반대]

독립된 유대 국가인 이스라엘의 창설에 반대하며,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기존 아랍인들과 함께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48

1948

1948

[밀레바 마리치의 고된 삶과 죽음]
이혼 후 마리치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둘째 아들 에두아르트가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으면서, 그녀는 평생을 아들의 병간호와 엄청난 치료비 부담에 시달리다 1948년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1930년, 총명했던 둘째 아들 에두아르트가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으면서 마리치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습니다. 그녀는 노벨상 상금으로 마련했던 부동산 두 채를 아들의 치료비를 위해 매각해야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아들의 병이 마리치 집안의 유전 탓이라며 비난했고, 경제적 지원에도 인색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말년에 마리치는 마지막 남은 집마저 아인슈타인에게 팔고 그 집에 세 들어 사는 처지가 되었는데, 아인슈타인이 퇴거 통보를 했다는 충격적인 기록도 있습니다. 수십 년간 이어진 고통과 싸우다 지친 그녀는 1948년 72세의 나이로 취리히의 한 병원에서 뇌졸중으로 홀로 눈을 감았습니다.


1951

[NAACP 활동]

전미 유색인종 발전 협회(NAACP)에 가입하여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시민권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고, 인권 운동가 W.

E.

B.

듀보이스의 재판에서 증언할 준비를 했다.

['메롱' 사진 촬영]

기자가 차에 탑승한 아인슈타인을 촬영하자 장난스럽게 '메롱' 표정을 지었다.

이 사진은 훗날 경매에서 7만 4324달러에 낙찰되며 그의 재미있는 성격을 상징하게 되었다.

1951

1952

[이스라엘 대통령직 거절]

이스라엘 대통령 하임 바이츠만 사망 후,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으로부터 이스라엘 대통령직을 제안받았으나, 자신이 그 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1952

1954

[종교적 견해 표명]

철학자 에릭 거트킨드에게 보낸 독일어 편지에서 '신이란 단어는 인간의 나약함의 표현이자 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성경은 유치한 원시적인 전설의 모음집'이라고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밝혔다.

1954

1954

[채식주의 시작]

삶의 마지막 시기에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편지에서 '지방도, 고기도, 생선도 없이 살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꽤 기분이 좋다'고 언급했다.

1954

1955

[아인슈타인 산 명명]

알래스카의 추가치 산맥에 있는 아인슈타인 산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55

1955

[동맥류 파열]

1948년 외과적으로 보강되었던 복부대동맥류의 파열로 인한 내출혈을 경험했다.

1955

1955

[아인슈타인 사망]

수술을 거부하고 '원할 때 가고 싶다.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무미건조하다'며 다음 날 아침 펜 메디신 프린스턴 병원에서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뇌 적출 및 화장]

부검 중 토머스 스톨츠 하비 병리학자가 가족의 허락 없이 지능 연구를 위해 아인슈타인의 뇌를 적출했다.

그의 유해는 트렌턴에서 화장되었고 유골은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 뿌려졌다.

1955

[아인슈타인의 죽음과 남겨진 가족들]

한 시대의 종언, 그리고 가족의 반응

아인슈타인은 76세의 나이로 심부전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전 세계적인 애도를 불러일으켰지만, 가족들의 반응은 그의 복잡했던 사생활을 반영하듯 엇갈렸습니다.

아인슈타인은 1955년 4월 18일 프린스턴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가족의
요청에 따라 비공개로 엄격하게 치러졌으며, 시신은 화장되어 유골은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 뿌려졌습니다. 장남 한스 알베르트는 평생 자신과 어머니, 동생을 버린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채 신문에 짤막한 애도 성명을 내는 것으로
도리를 다했습니다. 의붓딸 마고는 아버지가 사망했을 당시 좌골 신경 질환으로 입원
중이었으며,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개인적인 위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아인슈타인의 사후에도 프린스턴 자택에 남아 그의 유산을 지켰습니다.

1965

1965

[아버지의 그늘 아래 남겨진 아들들]

아인슈타인의 두 아들은 평생 아버지의 부재와 무관심으로 인한 상처를 안고 살았습니다.

장남 한스는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고, 차남 에두아르트는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천재의 아들들이 겪은 삶은 아인슈타인의 개인적 유산이 남긴 깊은 상흔을 보여줍니다.
차남 에두아르트는 정신병원에서 30년 이상을 보내다 1965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장남 한스 알베르트는 미국 버클리 대학의 수력공학 교수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지만, 어머니와 동생을 버린 아버지를 평생 증오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신문에 짤막한 애도 성명을 내는 것으로 도리를 다했을 뿐입니다. 이는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과학적 업적 이면에 그의 가족이 감당해야 했던 인간적인 비극과 고통이 있었음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2016

2016.02.11 사후 61년

[중력파 최초 관측 발표]

아인슈타인이 약 100년 전 예측했던 중력파가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LIGO)에 의해 최초로 직접 관측되었음이 발표되었다.

이는 일반 상대성이론의 핵심 예측을 입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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