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역사 인물, 군인, 제독

242

임진왜란

전쟁, 동아시아 역사, 조선 시대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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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 군인, 제독

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불멸의 영웅. 탁월한 지략과 통솔력으로 수많은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원했다. 한산도 대첩과 명량 해전은 세계 해전사의 길이 빛나는 승리. 세계최초의 철갑선 거북선을 건조·활용하는 등 혁신가 면모도 겸비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며 나라를 지키는 데 혼을 바친 그의 삶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강렬한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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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동아시아 역사, 조선 시대

1592년 일본 도요토미 정권의 조선 침략으로 시작된 대규모 전쟁입니다. 조선 일본 명 여진족 등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과 강력한 화포 등 조선 수군의 압도적 무기와 전술이 빛을 발했습니다. 의병의 분투와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남겼으나 동아시아 역사 흐름을 바꾼 중요한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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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사건만
최신순

1545

[이순신 탄생]

한성 건천동에서 이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외가인 아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이름은 고대 중국 성인의 이름자를 따 희신, 요신, 순신, 우신으로 지어졌다.

조부 이백록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에 나가지 못했고, 아버지 이정 또한 관직이 넉넉지 않아 집안이 부유하지는 않았다.

1545

1565

[결혼과 무과 준비]

21세에 온양 방씨와 혼인하고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며 무과를 준비했다.

장인 방진의 뛰어난 활솜씨를 배우며 무예를 연마했다.

방씨 부인은 슬기롭고 내조에 능하여 이순신의 무술 연습을 위해 자신의 패물로 말을 사게 할 정도였다. 그녀는 이순신과의 사이에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1565

1572

[무과 시험 낙방]

28세에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시험 도중 말에서 낙마했다.

주변에서 기절한 줄 알았으나, 옆에 있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리를 동여매고 끝까지 시험을 치렀다.

하지만 결국 시험에서는 낙방하고 말았다.

이 일은 이순신의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정신을 보여주는 일화로 전해진다.

1572

1576

[무과 급제]

32세에 식년시 무과에 병과 제4인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훈련원 봉사 실습생)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당시 무과 합격자 중 비교적 높은 등수였다.

이후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을 거쳐 훈련원 봉사로 근무했으며, 사사로운 청탁을 단호히 거절하는 강직한 성품을 보였다.

1576

1580

[발포 수군만호 임명]

36세에 전라도 발포의 수군만호로 전근되었다.

그러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나라의 재산인 오동나무를 베기를 거부하여 전라좌수사 성박의 미움을 샀다.

성박의 후임 좌수사 이용 또한 이순신을 밉게 보아 근무성적을 최하로 매겼으나, 전라도사 조헌의 항의로 수정되었다. 나중에 이용은 이순신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그를 군관으로 추천했다.

1580

1586

[북방 국경 방어]

사복시 주부가 되었고, 이어 조산만호 겸 녹도 둔전사의가 되어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에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다.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려 했으나 거절했다.

이순신은 권세가의 집에 드나들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1586

1587

1587

[일본의 침략 야욕 드러남]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쓰시마 국주에게 조선 정벌 준비를 명령하며 침략 야욕을 드러냅니다.

이후 1591년에는 조선에 명나라 정벌에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를 요구하지만 조선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1587

[녹둔도 전투 승리]

녹둔도 둔전 관리 중 여진족의 기습 침입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잡혀갔으며, 15필의 말이 약탈당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북병사 이일이 도망치는 와중에도 이순신은 이경록과 남아 싸워 승리했고 조선인 백성 60여 명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순신은 사전에 추가 병력을 요청했으나 이일이 거절하여 피해가 커졌다. 이순신의 무예는 대단하여 수십 명의 병사로 1,000기의 여진족 기병을 상대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하여 무찔렀다.

1587

1587

[첫 백의종군]

녹둔도 전투의 책임을 북병사 이일이 이순신에게 덮어씌워 해임되고 투옥되었다.

선조는 사형이 과하다는 의견에 따라 장형 집행 후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선조는 이일의 모함을 눈치챘으나 당시 신립과의 정치적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처벌하되, 참수형이 아닌 백의종군으로 일단락시켰다. 이순신은 이후 북병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2차 녹둔도 정벌에서 공을 세워 복직되었다.

1587

1590

1590

[조선 통신사 일본 파견]

일본의 실정과 히데요시의 의도를 살피기 위해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됩니다.

정사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부사 김성일은 이를 부인하며 조정 내 갈등을 빚었고, 결국 김성일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전쟁 대비가 미흡하게 됩니다.

1591

1591.02 1해당 사건의 피인용 횟수를 나타냅니다. 46세

[전라좌수사 임명]

류성룡의 추천으로 정읍현감 재직 중, 선조의 강력한 신임으로 종6품 정읍현감에서 종4품 진도군수, 종3품 가리포첨절제사를 거쳐 정3품 전라좌수사로 초고속 승진하여 임명되었다.

연관사건

선조는 대신들의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을 신임하여 파격적인 승진을 단행했다. 이순신은 부임 즉시 전쟁에 대비하여 휘하 부대의 실태를 파악하고, 무기와 군량미를 확충하며 거북선을 개발 및 건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했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일본 수군이 강할 것이라 예단하여 수군을 육지로 올리라는 조정의 명을 거부하며 수군력을 보존했다. 덕분에 전라좌수영은 20여 척의 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1591

1592

[임진왜란 발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일본군 함대 700척이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순신은 밤 10시경 원균의 파발을 통해 침략 소식을 접하고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으며, 비상 소집하여 방비를 갖추도록 했다.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을 참수하여 군기를 바로 잡았다. 당시 조선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평안도를 거쳐 의주까지 피난하는 상황이었다.

1592

[일본군 조선 침략 개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끄는 일본군 약 20만 명이 부산진에 상륙하며 임진왜란이 시작됩니다.

정발이 지키던 부산진성과 송상현이 지키던 동래성이 속수무책으로 함락되며 조선은 개전 초부터 큰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일본군의 파죽지세에 조선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집니다.

1592

1592

[의병, 전국 각지에서 봉기]

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혼란 속에서 조헌,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등 각지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여 일본군에 대항했습니다.

이들은 일본군의 보급로와 통신망을 끊으며 적을 괴롭혔고, 광해군의 분조 활동과 더불어 조선 관군이 재기할 시간을 벌어주며 전세를 뒤집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곽재우 (최초의 의병)

1592년 6월 1일 (음력 4월 22일)

전쟁 발발 9일 만에 경상도 의령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고경명

1592년 7월 9일경 (음력 6월 1일경)

전라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김천일

1592년 7월경 (음력 6월)

전라도 나주에서 봉기했습니다.


조헌

1592년 7월경 (음력 6월)

충청도 옥천에서 봉기했습니다.

1592

1592

[신립, 탄금대에서 전사]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 탄금대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전사하며 조선의 남부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집니다.

조선이 자랑하던 유일한 버팀목이 사라져 버린 셈으로, 이 패배로 일본군은 수도 한양으로 향하는 길을 완전히 열게 됩니다.

1592

1592

[선조, 한양(도성) 탈출]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후에 선조가 도성을 떠났습니다.  

1592

1592

[일본군 한양 점령]

일본군이 개전 단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점령하는 초고속 진격을 선보였습니다.

조선 왕실과 조정은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했으며, 백성들은 왕이 도망치자 분노하여 궁궐과 노비 문서를 보관하는 장례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습니다.

1592

[옥포 해전 대승]

이순신의 첫 승전으로, 옥포항에 정박하여 옥포를 침략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키고 잡혀있던 포로들을 구출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대선 4척, 소선 1척을 격파했으며, 다음날 적진포에서 13척을 침몰시켰다.

이 전투는 조선 수군이 임진왜란 발발 후 거둔 최초의 승리이며, 육전에서 연패하던 조선군에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순신은 적들이 육지로 도망간 후에는 더 이상 추격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였다.

1592

1592

[사천 해전 (거북선 첫 출전)]

노량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과 만난 후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총 적선 13척을 쳐부수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이순신의 두 번째 출동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투이자, **세계최초 철갑선**으로 알려진 거북선이 전투에 **최초로 출전**하여 실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해전이다. 조선 수군은 지자총통 등 우수한 화포의 화력을 바탕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1592

[이순신, 사천 해전 승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사천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며 해전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거북선이 처음 실전에 투입되어 그 위용을 떨쳤으며, 조선의 판옥선과 총통의 압도적인 화력을 보여주며 일본 수군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1592

1592

[이순신, 당포 해전 승리]

조선 수군이 당포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또다시 대파하며 연이은 승전보를 울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술과 거북선, 판옥선의 강력한 성능이 다시 한번 입증되며, 일본의 해상 보급로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1592

1592

[평양 함락, 선조 의주 파천]

파죽지세로 진격한 일본군에 의해 평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더 이상 머물 곳이 없어 압록강 근처 의주까지 피신하는 굴욕적인 몽진을 감행합니다.

선조는 명나라 망명까지 고려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1592

1592

[권율, 이치 전투 대승]

권율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이치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치며 호남 방어의 교두보를 마련했습니다.

이 승리는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지켜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는 조선군의 재정비와 반격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1592

[한산도 대첩 (학익진)]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이억기, 원균의 연합함대가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육전 전술인 **학익진을 해전에서 처음으로 펼쳐** 적함을 포위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군 연합함대는 거짓 후퇴로 적들을 큰 바다로 유인한 다음, 모든 군선들이 일제히 학익진 진형을 갖춰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 막강한 화력을 발포하여 적함선 59척을 침몰시켰다. 이 승리로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하고 전라도 곡창지대를 보전할 수 있었다.

1592

[한산도 대첩 압승]

이순신의 학익진 전술이 빛을 발하며 한산도 대첩에서 일본 수군을 궤멸시키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로, 조선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어 일본군의 육상 보급에 심각한 차질을 초래했습니다.

1592

[부산 해전]

전열을 정비한 이순신의 함대가 부산으로 출정하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했다.

부산 앞바다에서 400여 척의 적선 중 100여 척을 쳐부쉈으나, 상륙한 일본군이 도망갈 길을 남겨두기 위해 함대를 물렸다.

네 차례의 큰 해전을 통해 일본군은 수로를 통한 서해 해상권 장악 및 전라도 침략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 장수 정운이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1592

1592

1592

[김시민, 진주성 방어 성공]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에서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을 9일간 막아내며 대승을 거둡니다.

이는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로 손꼽히며, 일본군이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계획을 좌절시키고 호남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습니다.

1593

1593

[조명연합군 평양성 탈환]

명나라의 대규모 원군(이여송, 송응창 지휘)이 조선군과 합세하여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던 평양성을 성공적으로 탈환합니다.

이로써 명나라는 일본군의 목표가 자국임을 깨닫고 조선 전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고, 전세는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1593

[웅포 해전]

웅천현 웅포로 진격했으나, 일본군이 왜성을 깊숙이 유인하는 전술을 펼쳐 지루한 공방전으로 전개되었다.

이순신은 화포를 이용한 공격을 이어갔으며,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왜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 조선 수군의 부산성 방면 진출을 막으려 했고, 이로 인해 전라도 수군 약 4만 명이 해안선 방어에 투입되었다.

1593

1593

1593

[명군, 벽제관 전투 패배]

평양 탈환 이후 기세등등하던 명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일시 후퇴하며 전황이 소강상태에 접어듭니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한양에 집결, 대규모 반격을 준비합니다.

1593

1593

[권율, 행주대첩 대승]

권율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의 총공세를 막아내며 대승을 거둡니다.

화차의 활약과 승병, 병사들의 용맹이 빛을 발한 이 전투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로, 일본군의 한양 재점령 시도를 좌절시켰습니다.

1593

1593

[명-일 휴전협상 개시]

명나라의 심유경이 한양 일본군 본진에 파견되어 휴전협상을 추진하고, 일본군 또한 보급 문제와 악역 유행으로 화의에 응하며 전군을 남하시켜 성을 쌓고 협상 진행을 기다립니다.

3년에 걸친 지루한 휴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1593

1593

[일본군, 진주성 재함락]

일본군은 1차 진주성 전투에서 함락하지 못한 진주성을 다시 공격, 9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의병장 김천일 등 조선의 주요 인물들이 전사했지만, 일본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 전라도 진격에는 실패했습니다.

이는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이순신의 말처럼 전라도 보전의 중요성을 다시 보여주었습니다.

1593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을 겸직하도록 했다.

이순신은 진을 한산도로 옮겨 백성을 모아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며 든든한 진을 구축했다.

이순신의 통제사 임명 후 원균은 자신이 나이 많고 선배라며 불만을 품고 명령을 어기는 등 불화가 깊어졌으며, 이는 향후 이순신의 두 번째 백의종군에 영향을 미쳤다.

1593

1593

1593

[선조, 한양으로 환도]

의주까지 피신했던 선조가 여러 대신들의 간곡한 요청 끝에 마침내 한양으로 돌아옵니다.

굴욕적인 몽진이었으나, 백성들의 강한 저항과 의병, 수군의 활약으로 도성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1597

[두 번째 백의종군]

초기 승전 이후 소극적인 전술과 원균과의 불화가 문제가 되어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었다.

한성으로 압송되어 투옥되었으나, 우의정 정탁의 상소로 사형을 모면하고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순신은 백의종군 길에 어머니의 임종을 볼 수 없다는 슬픈 소식을 접하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당시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은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며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했으나,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 작전에 걸려들 위험을 경고하며 신중한 입장을 고수했다.

1597

1597

[칠천량 패배와 복직]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며 판옥선 대부분을 잃었다.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으나, 남은 함선은 겨우 12척뿐이었다.

조선 정부가 수군 폐지를 명했음에도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며 수군을 재정비,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1597

1597

1597

[정유재란, 남원성 함락]

휴전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제2차 침략인 정유재란을 일으켜 남원성을 공격, 조명연합군을 대파하고 함락시켰습니다.

일본군은 임진년과 달리 보급로 확보를 위해 전라도 점령에 집중했습니다.

1597

[명량 해전 (기적의 승리)]

13척의 전선으로 수백 척의 일본 함대와 울돌목(명량 해협)에서 대적하여 **세계 해전사상 유례없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명량 해협의 좁은 폭과 급류를 활용, 최소 130척 이상의 적선을 격파하여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난중일기에는 약 30척 격침으로 기록되었으나, 해남 명량대첩비에는 500척 격파로 기록되어 실제 전과는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이순신의 승리 이후 화의를 꾀했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며 철저한 응징을 주장했다.

1597

[이순신, 명량해전 기적적 승리]

이순신이 단 12척의 배로 압도적인 일본 수군을 격파하며 명량해전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직후의 승리라 더욱 극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일본 육군의 전라도 점령 및 충청도 진격이 좌절되고 보급선이 끊길 우려에 휩싸였습니다.

1597

1597

[울산왜성 공격 실패]

조명연합군이 울산왜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며 일본군의 요새 방어력에 고전합니다.

이는 전쟁이 장기화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전투였습니다.

1598

1598

[조명연합군 공세 실패]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직후, 조명연합군이 서쪽 순천왜성, 사천왜성, 울산왜성을 동시에 공격하는 '사로 병진 작전'을 개시하지만, 각지에서 일본군의 저항에 부딪혀 결국 실패로 돌아갑니다.

1598

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임진왜란의 원흉이자 일본의 최고 권력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합니다.

일본군은 이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철수를 시작했으며, 이는 7년간 이어진 전쟁의 최종 종결을 알리는 결정적인 사건이 됩니다.

1598

[노량 해전 및 전사]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조선 수군 70여 척과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해협에 모인 일본군을 공격했다.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던 왜군 선단 500여 척 중 200여 척을 격파, 150여 척을 파손시켰다.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고,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격하던 이순신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죽기 전에 그는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이 해전을 끝으로 7년간의 임진왜란이 종식되었다.

1598

[노량 해전, 이순신 전사]

철수하는 일본군을 추격한 조명연합군이 노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하며 전쟁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며 영웅의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일본군의 완전한 패퇴를 이끌어내며 7년간의 전쟁은 마침내 끝을 고했습니다.

1604

1604.07.21 사후 6년

[선무공신/좌의정 추증]

선조는 이순신을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 1등 공신 및 덕풍부원군으로 추봉하고, 그해 7월에 의정부 좌의정을 가증했다.

그의 충성심과 희생을 기리기 위한 국가적 조치가 계속되었다.

1604

1643

1643.03 사후 45년

[충무 시호 하사]

인조는 이순신에게 '충무(忠武)'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충무' 시호를 받은 인물은 이순신을 포함해 10명에 불과하며, 그의 공적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다.

시호 '충무'는 '자기 몸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든 것'을 '충(忠)', '적의 창 끝을 꺾어 외침을 막은 것'을 '무(武)'라 하여 그의 공적을 기렸다. 효종은 그를 악비와 같은 훌륭한 장수로 평가했다.

1643

1793

1793.07 사후 195년

[영의정 가증]

정조는 이순신에게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이는 조선 최고위 관직으로, 그의 공적에 대한 국가의 최종적인 존경을 표한 것이다.

정조는 그를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선정'으로 일컬으며 문묘에 위패가 모셔진 인물에 준하는 대우를 했다. 이로써 이순신의 최종 직함은 '유명 수군도독 조선국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덕풍부원군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삼도통제사 시 충무공 이순신'이 되었다.

1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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