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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불멸의 영웅. 탁월한 지략과 통솔력으로 수많은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원했다. 한산도 대첩과 명량 해전은 세계 해전사의 길이 빛나는 승리. 세계최초의 철갑선 거북선을 건조·활용하는 등 혁신가 면모도 겸비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며 나라를 지키는 데 혼을 바친 그의 삶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강렬한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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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최고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7년간 직접 기록한 생생한 전쟁 일지. • 국보 제76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인류의 귀중한 기록유산. • 전쟁의 참혹함과 이순신의 고뇌 그리고 당시 시대상이 오롯이 담겨 있어 역사 연구에 필수적인 사료. • 전장 한복판에서 피어난 문학적 통찰과 감동이 대중의 흥미를 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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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
[이순신 탄생]
한성 건천동에서 이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외가인 아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이름은 고대 중국 성인의 이름자를 따 희신, 요신, 순신, 우신으로 지어졌다.
조부 이백록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에 나가지 못했고, 아버지 이정 또한 관직이 넉넉지 않아 집안이 부유하지는 않았다.
1545
1565
[결혼과 무과 준비]
21세에 온양 방씨와 혼인하고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며 무과를 준비했다.
장인 방진의 뛰어난 활솜씨를 배우며 무예를 연마했다.
방씨 부인은 슬기롭고 내조에 능하여 이순신의 무술 연습을 위해 자신의 패물로 말을 사게 할 정도였다. 그녀는 이순신과의 사이에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1565
1572
[무과 시험 낙방]
28세에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시험 도중 말에서 낙마했다.
주변에서 기절한 줄 알았으나, 옆에 있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리를 동여매고 끝까지 시험을 치렀다.
하지만 결국 시험에서는 낙방하고 말았다.
이 일은 이순신의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정신을 보여주는 일화로 전해진다.
1572
1576
[무과 급제]
32세에 식년시 무과에 병과 제4인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훈련원 봉사 실습생)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당시 무과 합격자 중 비교적 높은 등수였다.
이후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을 거쳐 훈련원 봉사로 근무했으며, 사사로운 청탁을 단호히 거절하는 강직한 성품을 보였다.
1576
1580
[발포 수군만호 임명]
36세에 전라도 발포의 수군만호로 전근되었다.
그러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나라의 재산인 오동나무를 베기를 거부하여 전라좌수사 성박의 미움을 샀다.
성박의 후임 좌수사 이용 또한 이순신을 밉게 보아 근무성적을 최하로 매겼으나, 전라도사 조헌의 항의로 수정되었다. 나중에 이용은 이순신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그를 군관으로 추천했다.
1580
1586
[북방 국경 방어]
사복시 주부가 되었고, 이어 조산만호 겸 녹도 둔전사의가 되어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에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다.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려 했으나 거절했다.
이순신은 권세가의 집에 드나들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1586
1587
[녹둔도 전투 승리]
녹둔도 둔전 관리 중 여진족의 기습 침입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잡혀갔으며, 15필의 말이 약탈당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북병사 이일이 도망치는 와중에도 이순신은 이경록과 남아 싸워 승리했고 조선인 백성 60여 명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순신은 사전에 추가 병력을 요청했으나 이일이 거절하여 피해가 커졌다. 이순신의 무예는 대단하여 수십 명의 병사로 1,000기의 여진족 기병을 상대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하여 무찔렀다.
1587
1587
[첫 백의종군]
녹둔도 전투의 책임을 북병사 이일이 이순신에게 덮어씌워 해임되고 투옥되었다.
선조는 사형이 과하다는 의견에 따라 장형 집행 후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선조는 이일의 모함을 눈치챘으나 당시 신립과의 정치적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처벌하되, 참수형이 아닌 백의종군으로 일단락시켰다. 이순신은 이후 북병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2차 녹둔도 정벌에서 공을 세워 복직되었다.
1587
1591
[전라좌수사 임명]
류성룡의 추천으로 정읍현감 재직 중, 선조의 강력한 신임으로 종6품 정읍현감에서 종4품 진도군수, 종3품 가리포첨절제사를 거쳐 정3품 전라좌수사로 초고속 승진하여 임명되었다.
선조는 대신들의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을 신임하여 파격적인 승진을 단행했다. 이순신은 부임 즉시 전쟁에 대비하여 휘하 부대의 실태를 파악하고, 무기와 군량미를 확충하며 거북선을 개발 및 건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했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일본 수군이 강할 것이라 예단하여 수군을 육지로 올리라는 조정의 명을 거부하며 수군력을 보존했다. 덕분에 전라좌수영은 20여 척의 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1591
1592
1592
[난중일기 집필 시작]
조선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의 시작과 함께 전장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꼼꼼히 기록하며 훗날 '난중일기'라 불리게 될 일지의 첫 장을 열었습니다.
그의 생생한 기록은 훗날 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귀중한 사료가 됩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선조 25년(1592년) 음력 1월 1일(양력 2월 13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선조 31년(1598년)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16일)까지 총 2,539일간의 군중 생활과 전란의 정세에 대한 기록입니다.
1592
1592
[유성룡의 병법서에 감탄하다]
이순신 장군은 오랜 친구 류성룡(당시 좌의정)으로부터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선물 받고 "수륙전과 화공법에 대한 전술이 낱낱이 설명되어 있는 만고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저술"이라며 극찬했습니다.
이는 전쟁을 앞둔 이순신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1592
[임진왜란 발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일본군 함대 700척이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순신은 밤 10시경 원균의 파발을 통해 침략 소식을 접하고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으며, 비상 소집하여 방비를 갖추도록 했다.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을 참수하여 군기를 바로 잡았다. 당시 조선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평안도를 거쳐 의주까지 피난하는 상황이었다.
1592
1592
[옥포 해전 대승]
이순신의 첫 승전으로, 옥포항에 정박하여 옥포를 침략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키고 잡혀있던 포로들을 구출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대선 4척, 소선 1척을 격파했으며, 다음날 적진포에서 13척을 침몰시켰다.
이 전투는 조선 수군이 임진왜란 발발 후 거둔 최초의 승리이며, 육전에서 연패하던 조선군에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순신은 적들이 육지로 도망간 후에는 더 이상 추격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였다.
1592
1592
[사천 해전 (거북선 첫 출전)]
노량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과 만난 후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총 적선 13척을 쳐부수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이순신의 두 번째 출동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투이자, **세계최초 철갑선**으로 알려진 거북선이 전투에 **최초로 출전**하여 실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해전이다. 조선 수군은 지자총통 등 우수한 화포의 화력을 바탕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1592
1592
[한산도 대첩 (학익진)]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이억기, 원균의 연합함대가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육전 전술인 **학익진을 해전에서 처음으로 펼쳐** 적함을 포위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군 연합함대는 거짓 후퇴로 적들을 큰 바다로 유인한 다음, 모든 군선들이 일제히 학익진 진형을 갖춰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 막강한 화력을 발포하여 적함선 59척을 침몰시켰다. 이 승리로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하고 전라도 곡창지대를 보전할 수 있었다.
1592
1592
[부산 해전]
전열을 정비한 이순신의 함대가 부산으로 출정하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했다.
부산 앞바다에서 400여 척의 적선 중 100여 척을 쳐부쉈으나, 상륙한 일본군이 도망갈 길을 남겨두기 위해 함대를 물렸다.
네 차례의 큰 해전을 통해 일본군은 수로를 통한 서해 해상권 장악 및 전라도 침략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 장수 정운이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1592
1593
[웅포 해전]
웅천현 웅포로 진격했으나, 일본군이 왜성을 깊숙이 유인하는 전술을 펼쳐 지루한 공방전으로 전개되었다.
이순신은 화포를 이용한 공격을 이어갔으며,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왜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 조선 수군의 부산성 방면 진출을 막으려 했고, 이로 인해 전라도 수군 약 4만 명이 해안선 방어에 투입되었다.
1593
1593
1593
[원균에 대한 비판 시작]
난중일기 곳곳에 등장하는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날카로운 비판이 시작됩니다.
진도 지휘선이 왜적에 포위된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한 경상수사 원균의 부하들을 비난하며, 원균에 대한 불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갈등은 훗날 조선 수군의 운명을 좌우하게 됩니다.
이순신은 원균에 대해 "음험하고 흉악한 품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의논에서 원 수사가 하는 말은 매번 모순이다. 참 가소롭다" 등의 비난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죽은 왜적의 수급을 거두려 적진을 드나드는 군관에 대한 원균의 태도, 거짓 장계를 올리거나 탈영병을 숨겨주는 행태, 명나라 불화살 독점 시도, 전투 약속을 어기는 무책임한 행동 등을 일일이 기록하며 원균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냈습니다.
1593
1593
[진주성 함락에 바다 위에서 통한의 밤을 보내다]
진주성 함락 소식에 이순신 장군은 큰 충격과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는 일기에 "이 날 밤은 바다의 달이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색을 이루었고,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었다.
홀로 뱃전에 앉아 있었고,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고 적어 처절한 고뇌를 드러냈습니다.
이는 역사 속 가장 비극적인 순간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7월 2일 김득룡으로부터 진주성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도 애써 부정했으나, 7월 6일 광양으로부터의 보고로 함락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후 7월 9일에는 광양과 순천까지 왜병에게 함락되었다는 비보가 이어졌습니다. '칼의 노래' 작가 김훈은 이 문장을 "죽이는 문장"이라 극찬하며 이순신의 객관적이면서도 강력한 문체에 감탄했습니다.
1593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을 겸직하도록 했다.
이순신은 진을 한산도로 옮겨 백성을 모아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며 든든한 진을 구축했다.
이순신의 통제사 임명 후 원균은 자신이 나이 많고 선배라며 불만을 품고 명령을 어기는 등 불화가 깊어졌으며, 이는 향후 이순신의 두 번째 백의종군에 영향을 미쳤다.
1593
1594
1594
[권율에 대한 실망감 표출]
이순신 장군은 전윤으로부터 "수군을 거창으로 잡아왔는데 원수 권율이 방해한다"는 전언을 듣고 "예전부터 남의 공을 시기하는 것이 이랬으니 한탄해 뭐하겠는가"라고 적으며 권율에 대한 강한 비판과 실망감을 드러냈습니다.
1594년 6월에는 권율의 서출 처남이 사적인 감정으로 광양현감을 무고하고 문책하는 일에 대해 이순신은 "사사로이 행한 것이 이리 심하니 통탄을 비길 데 없다"고 평했습니다. 을미년(1595년) 일기에서도 권율의 초안을 보고 "근거도 없이 망령되게 고한 말이 몹시 많으니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라며, 원수의 임무를 맡아 행하는 게 괴이하다고 평했습니다.
1594
1594
[류몽인 비판과 진회 언급]
암행어사 류몽인이 탐관오리들을 비호하고 포상을 요청한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 장군은 "나라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도 않고 남쪽 지방의 억울하다는 변명만 믿고 있다"며, 중국 송나라의 간신 진회에 비유하는 등 강도 높게 비난했습니다.
정의를 중시했던 이순신의 면모가 드러납니다.
1595
1595
[김응서에 대한 격렬한 비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사사로이 교섭하여 탄핵받던 김응서에 대해 이순신 장군은 "김응서라는 자는 어떤 자인데 스스로 개선하고 힘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는가.
쓸개가 있는 자라면 자결이라도 할 것이다"라고 일기에 적으며 강한 불만을 표했습니다.
이는 훗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직을 내놓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1597
[두 번째 백의종군]
초기 승전 이후 소극적인 전술과 원균과의 불화가 문제가 되어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었다.
한성으로 압송되어 투옥되었으나, 우의정 정탁의 상소로 사형을 모면하고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순신은 백의종군 길에 어머니의 임종을 볼 수 없다는 슬픈 소식을 접하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당시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은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며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했으나,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 작전에 걸려들 위험을 경고하며 신중한 입장을 고수했다.
1597
1597
1597
[칠천량 해전의 비극과 조선 수군의 궤멸]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이 거제 앞바다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 기습을 받아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 장군에게 청천벽력 같았을 것입니다.
이는 조선 수군 역사상 가장 뼈아픈 패배로 기록됩니다.
1597
[칠천량 패배와 복직]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며 판옥선 대부분을 잃었다.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으나, 남은 함선은 겨우 12척뿐이었다.
조선 정부가 수군 폐지를 명했음에도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며 수군을 재정비,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1597
1597
1597
[명량해전의 압도적 승리와 적장 마다시의 최후]
단 12척의 배로 울돌목에서 300여 척의 일본 함대와 맞서 31척을 격파하며 압도적인 대승을 거둔 명량해전의 감격적인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항왜 준사의 증언으로 적장 마다시(구루시마 미치후사 추정)의 시신을 확인하고, 사기를 꺾기 위해 그 시신을 토막 내어 적 앞에 보인 섬뜩한 전술까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날의 일기는 난중일기 중 가장 긴 분량을 자랑합니다.
1597
[명량 해전 (기적의 승리)]
13척의 전선으로 수백 척의 일본 함대와 울돌목(명량 해협)에서 대적하여 **세계 해전사상 유례없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명량 해협의 좁은 폭과 급류를 활용, 최소 130척 이상의 적선을 격파하여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난중일기에는 약 30척 격침으로 기록되었으나, 해남 명량대첩비에는 500척 격파로 기록되어 실제 전과는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이순신의 승리 이후 화의를 꾀했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며 철저한 응징을 주장했다.
1597
1598
1598
[난중일기 마지막 기록]
조국의 운명을 건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하기 이틀 전,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으로 난중일기를 채워 넣었습니다.
7년에 걸친 그의 피와 땀, 고뇌와 승리가 담긴 기록은 여기서 끝이 나지만, 그의 불멸의 정신은 영원히 역사에 남게 됩니다.
1598
[노량 해전 및 전사]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조선 수군 70여 척과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해협에 모인 일본군을 공격했다.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던 왜군 선단 500여 척 중 200여 척을 격파, 150여 척을 파손시켰다.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고,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격하던 이순신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죽기 전에 그는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이 해전을 끝으로 7년간의 임진왜란이 종식되었다.
1598
1604
[선무공신/좌의정 추증]
선조는 이순신을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 1등 공신 및 덕풍부원군으로 추봉하고, 그해 7월에 의정부 좌의정을 가증했다.
그의 충성심과 희생을 기리기 위한 국가적 조치가 계속되었다.
1604
1643
[충무 시호 하사]
인조는 이순신에게 '충무(忠武)'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충무' 시호를 받은 인물은 이순신을 포함해 10명에 불과하며, 그의 공적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다.
시호 '충무'는 '자기 몸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든 것'을 '충(忠)', '적의 창 끝을 꺾어 외침을 막은 것'을 '무(武)'라 하여 그의 공적을 기렸다. 효종은 그를 악비와 같은 훌륭한 장수로 평가했다.
1643
1788
1788
[정조대왕, 이충무공전서 편찬 명하다]
정조대왕은 "우리 나라를 재건하게 한 큰 은혜를 길이 생각하고 충무공 이순신의 공업을 표창하고자 한다"며, 이순신의 사적을 모아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고 활자로 인쇄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 작업으로 난중일기는 초서에서 정자체로 정리됩니다.
1793
[영의정 가증]
정조는 이순신에게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이는 조선 최고위 관직으로, 그의 공적에 대한 국가의 최종적인 존경을 표한 것이다.
정조는 그를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선정'으로 일컬으며 문묘에 위패가 모셔진 인물에 준하는 대우를 했다. 이로써 이순신의 최종 직함은 '유명 수군도독 조선국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덕풍부원군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삼도통제사 시 충무공 이순신'이 되었다.
1793
1795
1795
['난중일기' 공식 명칭 탄생]
조선 정조 19년에 왕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서 이순신의 전쟁 일지에 '난중일기'라는 제목이 처음으로 붙여졌습니다.
이전에는 연도별로 '임진일기', '계사일기' 등으로 불렸습니다.
이 명칭은 오늘날까지 이순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35
1935
['난중일기초' 최초 간행]
경성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이순신 친필 원본과 정조대에 정리된 전서본의 내용을 합쳐 '난중일기초'를 간행했습니다.
이는 후대 연구자들이 '난중일기'를 연구하는 데 가장 대표적인 전범으로 평가받는 완벽에 가까운 편집본으로, 그 가치가 높습니다.
1953
1953
[최초의 한국어 번역본 공개]
동아일보 기자 출신 언론인 설의식이 수도문화사에서 '이순신 수록 난중일기'를 간행하며, '난중일기'의 가장 오래된 한국어 번역본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는 일반 대중이 이순신의 기록을 접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1962
1962
[난중일기,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다]
이순신의 전쟁 기록 '난중일기'는 서간첩, 임진장초와 함께 대한민국 국보 제76호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그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은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1967
1967
[난중일기 도난 사건 발생]
현충사에 보관 중이던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도난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국가적 보물인 난중일기의 도난은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빠른 회수를 위한 노력이 집중되었습니다.
1968
1968
[도난 난중일기 10일 만에 극적 회수]
1967년 12월 31일 도난당했던 난중일기가 사건 발생 10일 만에 부산에서 극적으로 회수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난중일기 원본의 열람이 금지되고 영인본이 제작되어 전국에 배포되는 등 보존 대책이 강화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영인본 5백 부가 제작되어 전국 공공도서관 및 박물관으로 보내졌으며, 원본은 열람 자체가 금지되었습니다.
2004
2004
[난중일기, 디지털 시대에 재탄생하다]
문화재에 대한 디지털 정보화 사업의 일환으로 '난중일기' 원문과 원본 사진이 국가기록유산에 게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일반 대중이 보다 쉽게 '난중일기' 원본을 접하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2005
2005
['난중일기 완역본',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다]
난중일기 원문 해독을 맡았던 노승석 연구자가 기존 번역본의 오류 10여 곳을 수정하고, 자신이 발견한 오류를 반영한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을 출간했습니다.
이는 '난중일기' 연구의 정확성을 높이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2010
2010
[국보 명칭, 이순신 난중일기로 변경]
대한민국 국보 제76호의 명칭이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에서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로 공식 변경되었습니다.
이는 문화재 명칭의 현대적이고 명확한 표현을 위한 조치였습니다.
2013
2013
[난중일기, 세계기록유산 등재 쾌거]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광주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는 '난중일기'가 한국을 넘어 인류 전체의 소중한 기록유산임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