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역사 인물, 군인, 제독

243

류성룡

조선시대 문신, 학자, 재상,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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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 군인, 제독

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불멸의 영웅. 탁월한 지략과 통솔력으로 수많은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원했다. 한산도 대첩과 명량 해전은 세계 해전사의 길이 빛나는 승리. 세계최초의 철갑선 거북선을 건조·활용하는 등 혁신가 면모도 겸비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며 나라를 지키는 데 혼을 바친 그의 삶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강렬한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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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신, 학자, 재상, 저술가

-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 전란을 총지휘하며 나라를 재건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 이순신 장군을 천거한 주요 인물이며 그가 남긴 국보 징비록은 난중의 기록과 교훈을 담아 후세에 귀감이 되었습니다. - 청렴한 삶과 뛰어난 학문으로 조선의 5대 명재상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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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사건만
최신순

1542

1542

[신동의 탄생]

조선 중기 문신 류성룡이 경상도 의성 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3살 때부터 유교 경전인 '대학'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불리며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이는 훗날 그의 학문적 깊이와 정치적 역량의 기반이 됩니다.

1545

[이순신 탄생]

한성 건천동에서 이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외가인 아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이름은 고대 중국 성인의 이름자를 따 희신, 요신, 순신, 우신으로 지어졌다.

조부 이백록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에 나가지 못했고, 아버지 이정 또한 관직이 넉넉지 않아 집안이 부유하지는 않았다.

1545

1564

1564

[과거의 첫걸음]

명종 시대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며 관료 생활을 위한 첫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이 합격은 그가 본격적으로 조선의 관리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565

[결혼과 무과 준비]

21세에 온양 방씨와 혼인하고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며 무과를 준비했다.

장인 방진의 뛰어난 활솜씨를 배우며 무예를 연마했다.

방씨 부인은 슬기롭고 내조에 능하여 이순신의 무술 연습을 위해 자신의 패물로 말을 사게 할 정도였다. 그녀는 이순신과의 사이에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1565

1566

1566

[한원 입성과 관직 시작]

별시 문과에 급제하며 한원(翰苑)에 입성했고, 이후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첫 관직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역량과 능력을 국가적으로 인정받은 순간이자, 본격적인 관료의 길에 들어선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1569

1569

[명나라에서 인정받은 학자]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습니다.

이 방문에서 그는 명나라의 지식인들로부터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 불리며 깊은 존경을 받았는데, 이는 그의 학문적 명성이 조선을 넘어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1572

[무과 시험 낙방]

28세에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시험 도중 말에서 낙마했다.

주변에서 기절한 줄 알았으나, 옆에 있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리를 동여매고 끝까지 시험을 치렀다.

하지만 결국 시험에서는 낙방하고 말았다.

이 일은 이순신의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정신을 보여주는 일화로 전해진다.

1572

1575

1575

[붕당 정치의 소용돌이, 동인 합류]

조선 정치의 붕당 시대를 연 '을해당론'이 발생하며 동인과 서인으로 정치 세력이 분당되자, 그는 스승 이황의 제자였음에도 서인이 아닌 동인에 가담했습니다.

이 선택은 그의 정치적 노선과 신념을 확고히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1576

[무과 급제]

32세에 식년시 무과에 병과 제4인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훈련원 봉사 실습생)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당시 무과 합격자 중 비교적 높은 등수였다.

이후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을 거쳐 훈련원 봉사로 근무했으며, 사사로운 청탁을 단호히 거절하는 강직한 성품을 보였다.

1576

1580

[발포 수군만호 임명]

36세에 전라도 발포의 수군만호로 전근되었다.

그러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나라의 재산인 오동나무를 베기를 거부하여 전라좌수사 성박의 미움을 샀다.

성박의 후임 좌수사 이용 또한 이순신을 밉게 보아 근무성적을 최하로 매겼으나, 전라도사 조헌의 항의로 수정되었다. 나중에 이용은 이순신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그를 군관으로 추천했다.

1580

1586

[북방 국경 방어]

사복시 주부가 되었고, 이어 조산만호 겸 녹도 둔전사의가 되어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에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다.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려 했으나 거절했다.

이순신은 권세가의 집에 드나들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1586

1587

[녹둔도 전투 승리]

녹둔도 둔전 관리 중 여진족의 기습 침입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잡혀갔으며, 15필의 말이 약탈당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북병사 이일이 도망치는 와중에도 이순신은 이경록과 남아 싸워 승리했고 조선인 백성 60여 명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순신은 사전에 추가 병력을 요청했으나 이일이 거절하여 피해가 커졌다. 이순신의 무예는 대단하여 수십 명의 병사로 1,000기의 여진족 기병을 상대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하여 무찔렀다.

1587

1587

[첫 백의종군]

녹둔도 전투의 책임을 북병사 이일이 이순신에게 덮어씌워 해임되고 투옥되었다.

선조는 사형이 과하다는 의견에 따라 장형 집행 후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선조는 이일의 모함을 눈치챘으나 당시 신립과의 정치적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처벌하되, 참수형이 아닌 백의종군으로 일단락시켰다. 이순신은 이후 북병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2차 녹둔도 정벌에서 공을 세워 복직되었다.

1587

1589

1589

[정여립 사건과 남인의 형성]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가 발생하면서, 평소 정여립과 두터운 친분이 있던 류성룡의 이름이 죄인의 글에 나타나 탄핵 위기에 놓였습니다.

이는 동인 내부의 강경파(북인)와 온건파(남인)가 갈라서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그는 강경파와 결별하며 남인을 형성했습니다.

유생 정암수를 비롯한 50여 명이 그와 이산해 등을 정여립과 한몸이라며 죄를 줄 것을 상소했습니다. 하지만 선조는 크게 노하여 오히려 류성룡과 이산해를 위로하고 상소한 자들에게 벌을 내리려 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철의 처리 문제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격화되며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완전히 갈라지게 됩니다.

1590

1590

[고위 관직으로의 고속 승진]

예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차례로 거쳐 우의정에 올랐고, 조선 왕실의 계보 문제를 해결한 '종계변무'를 성공적으로 성사시킨 공로로 광국 공신 3등에 책록되며 풍원 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던 시기였습니다.

1591

1591

1591 1해당 사건의 피인용 횟수를 나타냅니다. 49세

[임진왜란 대비와 이순신 천거의 선견지명]

선조의 명장 천거 요청에 권율, 신충원과 함께 이순신을 천거했습니다.

이 결정은 훗날 임진왜란의 해상 전세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왜가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중국에 미리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왜란 발발 후 명나라가 조선을 의심하는 것을 막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연관사건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통신사가 파견되었을 때, 정사 황윤길은 왜의 침입을 경고했으나 부사 김성일은 반대했습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류성룡은 당파심에 김성일의 편을 들어 왜란 대비가 중단되는 아쉬운 판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1591

1591.02 1해당 사건의 피인용 횟수를 나타냅니다. 46세

[전라좌수사 임명]

류성룡의 추천으로 정읍현감 재직 중, 선조의 강력한 신임으로 종6품 정읍현감에서 종4품 진도군수, 종3품 가리포첨절제사를 거쳐 정3품 전라좌수사로 초고속 승진하여 임명되었다.

연관사건

선조는 대신들의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을 신임하여 파격적인 승진을 단행했다. 이순신은 부임 즉시 전쟁에 대비하여 휘하 부대의 실태를 파악하고, 무기와 군량미를 확충하며 거북선을 개발 및 건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했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일본 수군이 강할 것이라 예단하여 수군을 육지로 올리라는 조정의 명을 거부하며 수군력을 보존했다. 덕분에 전라좌수영은 20여 척의 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1591

1592

1592

[임진왜란 발발과 혼란 속 리더십]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몽진길에 올랐습니다.

영의정 이산해가 파직된 후 그 자리에 거론되기도 했으나, 김성일의 의견에 동조하여 왜란 대비를 소홀히 한 책임을 물어 좌의정에서도 철직당했습니다.

혼란 속에서도 그는 이일 장군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철릭을 입혀주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1592

[임진왜란 발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일본군 함대 700척이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순신은 밤 10시경 원균의 파발을 통해 침략 소식을 접하고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으며, 비상 소집하여 방비를 갖추도록 했다.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을 참수하여 군기를 바로 잡았다. 당시 조선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평안도를 거쳐 의주까지 피난하는 상황이었다.

1592

1592

[옥포 해전 대승]

이순신의 첫 승전으로, 옥포항에 정박하여 옥포를 침략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키고 잡혀있던 포로들을 구출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대선 4척, 소선 1척을 격파했으며, 다음날 적진포에서 13척을 침몰시켰다.

이 전투는 조선 수군이 임진왜란 발발 후 거둔 최초의 승리이며, 육전에서 연패하던 조선군에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순신은 적들이 육지로 도망간 후에는 더 이상 추격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였다.

1592

1592

[사천 해전 (거북선 첫 출전)]

노량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과 만난 후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총 적선 13척을 쳐부수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이순신의 두 번째 출동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투이자, **세계최초 철갑선**으로 알려진 거북선이 전투에 **최초로 출전**하여 실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해전이다. 조선 수군은 지자총통 등 우수한 화포의 화력을 바탕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1592

1592

[한산도 대첩 (학익진)]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이억기, 원균의 연합함대가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육전 전술인 **학익진을 해전에서 처음으로 펼쳐** 적함을 포위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군 연합함대는 거짓 후퇴로 적들을 큰 바다로 유인한 다음, 모든 군선들이 일제히 학익진 진형을 갖춰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 막강한 화력을 발포하여 적함선 59척을 침몰시켰다. 이 승리로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하고 전라도 곡창지대를 보전할 수 있었다.

1592

1592

[부산 해전]

전열을 정비한 이순신의 함대가 부산으로 출정하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했다.

부산 앞바다에서 400여 척의 적선 중 100여 척을 쳐부쉈으나, 상륙한 일본군이 도망갈 길을 남겨두기 위해 함대를 물렸다.

네 차례의 큰 해전을 통해 일본군은 수로를 통한 서해 해상권 장악 및 전라도 침략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 장수 정운이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1592

1593

1593

[전란 극복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

관서 도체찰사(關西都體察使)가 되어 안주에 주둔하며 백성들을 보살피고 군량을 준비하는 등 전란 수습에 힘썼습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에게 평양 지도를 제공하며 전투의 편의를 돕는 등 조선의 전황 극복에 적극적으로 기여했습니다.

1593

[웅포 해전]

웅천현 웅포로 진격했으나, 일본군이 왜성을 깊숙이 유인하는 전술을 펼쳐 지루한 공방전으로 전개되었다.

이순신은 화포를 이용한 공격을 이어갔으며,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왜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 조선 수군의 부산성 방면 진출을 막으려 했고, 이로 인해 전라도 수군 약 4만 명이 해안선 방어에 투입되었다.

1593

1593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을 겸직하도록 했다.

이순신은 진을 한산도로 옮겨 백성을 모아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며 든든한 진을 구축했다.

이순신의 통제사 임명 후 원균은 자신이 나이 많고 선배라며 불만을 품고 명령을 어기는 등 불화가 깊어졌으며, 이는 향후 이순신의 두 번째 백의종군에 영향을 미쳤다.

1593

1597

1597

[이순신 탄핵, 엇갈린 기록]

이순신 장군이 역모로 탄핵당했을 때, 류성룡은 자신이 저술한 '징비록'에는 이순신을 변호했다고 기록했지만, '선조실록'에는 그가 이순신 탄핵에 동조했음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적 논란을 남깁니다.

당시 이순신을 옹호한 것은 이원익과 정탁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자신이 선조 앞에서 이순신을 직접 변호하고 사직 상소를 10여 차례 올렸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선조실록의 기록은 그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상황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여지를 보여줍니다. 살아남은 이순신은 복직 후 명량해전에서 대활약을 펼치며 조선을 다시 구원하게 됩니다.

1597

[두 번째 백의종군]

초기 승전 이후 소극적인 전술과 원균과의 불화가 문제가 되어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었다.

한성으로 압송되어 투옥되었으나, 우의정 정탁의 상소로 사형을 모면하고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순신은 백의종군 길에 어머니의 임종을 볼 수 없다는 슬픈 소식을 접하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당시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은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며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했으나,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 작전에 걸려들 위험을 경고하며 신중한 입장을 고수했다.

1597

1597

[칠천량 패배와 복직]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며 판옥선 대부분을 잃었다.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으나, 남은 함선은 겨우 12척뿐이었다.

조선 정부가 수군 폐지를 명했음에도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며 수군을 재정비,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1597

1597

[명량 해전 (기적의 승리)]

13척의 전선으로 수백 척의 일본 함대와 울돌목(명량 해협)에서 대적하여 **세계 해전사상 유례없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명량 해협의 좁은 폭과 급류를 활용, 최소 130척 이상의 적선을 격파하여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난중일기에는 약 30척 격침으로 기록되었으나, 해남 명량대첩비에는 500척 격파로 기록되어 실제 전과는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이순신의 승리 이후 화의를 꾀했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며 철저한 응징을 주장했다.

1597

1598

1598

[영의정 재임과 비극적 퇴장]

다시 영의정에 보직되었으나, 명나라 장수 정응태가 조선이 왜와 공모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는 데 소극적이라는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결국 관직을 삭탈당하며 그의 정치 생명이 막을 내렸습니다.

1598

[노량 해전 및 전사]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조선 수군 70여 척과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해협에 모인 일본군을 공격했다.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던 왜군 선단 500여 척 중 200여 척을 격파, 150여 척을 파손시켰다.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고,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격하던 이순신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죽기 전에 그는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이 해전을 끝으로 7년간의 임진왜란이 종식되었다.

1598

1600

1600

[낙향과 국보 '징비록' 집필]

관직 삭탈 후 고향인 안동에 낙향하여 임진왜란의 경험과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한 저서인 국보 '징비록'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2년 만에 복권되어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친형과 모친, 아들 등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으며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겪으면서 류성룡이 느낀 후회와 교훈을 담은 기록으로, 당시 조선의 상황과 그의 고뇌가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본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가치가 높습니다.

1604

1604.07.21 사후 6년

[선무공신/좌의정 추증]

선조는 이순신을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 1등 공신 및 덕풍부원군으로 추봉하고, 그해 7월에 의정부 좌의정을 가증했다.

그의 충성심과 희생을 기리기 위한 국가적 조치가 계속되었다.

1604

1607

1607

[위대한 생애의 마무리]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류성룡이 66세(만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당은 병산서원 뒤에 세워졌고, 퇴계 이황의 묘에 함께 모셔져 후세에 영원히 추모되고 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았던 '청백리'로 기억됩니다.

1643

1643.03 사후 45년

[충무 시호 하사]

인조는 이순신에게 '충무(忠武)'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충무' 시호를 받은 인물은 이순신을 포함해 10명에 불과하며, 그의 공적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다.

시호 '충무'는 '자기 몸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든 것'을 '충(忠)', '적의 창 끝을 꺾어 외침을 막은 것'을 '무(武)'라 하여 그의 공적을 기렸다. 효종은 그를 악비와 같은 훌륭한 장수로 평가했다.

1643

1793

1793.07 사후 195년

[영의정 가증]

정조는 이순신에게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이는 조선 최고위 관직으로, 그의 공적에 대한 국가의 최종적인 존경을 표한 것이다.

정조는 그를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선정'으로 일컬으며 문묘에 위패가 모셔진 인물에 준하는 대우를 했다. 이로써 이순신의 최종 직함은 '유명 수군도독 조선국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덕풍부원군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삼도통제사 시 충무공 이순신'이 되었다.

1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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