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 칸

군주, 정복자, 몽골 제국

324

알렉산드로스 대왕

마케도니아 왕, 군사 전략가, 정복자,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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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05- 11:5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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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교체
군주, 정복자, 몽골 제국

•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칸

•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이자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

• 몽골 부족 통합 후 능력주의 기반의 강력한 군대로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광대한 영토 정복

• 세계 최대 제국 건설의 기반을 마련했으나, 정복지에서는 학살과 파괴로 악명 높은 인물

최근 수정 시각 : 2025-11-11- 00:3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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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교체
마케도니아 왕, 군사 전략가, 정복자, 군주

고대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20세에 왕위를 계승함.

그리스부터 이집트,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 북서부까지 이르는 전례 없는 대제국을 건설함.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 중 하나로 평가받음.

그의 정복 활동은 동서양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시대의 개막을 이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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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C

BC 4C

[마케도니아 펠라에서 출생]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에서 필리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 왕비 사이에서 태어남.

그의 탄생일에는 아버지의 군대가 승리하고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불타는 등 여러 전설이 전해짐.

정확한 날짜에 논쟁이 있으나, 기원전 356년 7월 20일경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에서 태어났다고 추정됨. 아버지는 필리포스 2세, 어머니는 에피로스의 공주 올림피아스임.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난 날, 필리포스 2세는 파르메니온 장군의 승전보와 자신의 말이 올림픽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을 들었음. 또한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불탔는데, 이는 알렉산드로스의 출생을 목격하기 위해 여신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생겨남.

[말 '부케팔라스'를 길들이다]

열 살 되던 해, 테살리아 상인이 데려온 난폭한 말을 길들임.

말이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간파한 것임.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는 네게 너무 좁다"고 감탄함.

열 살 때, 테살리아 상인이 13달란트짜리 말을 가져왔으나 아무도 길들이지 못했음. 알렉산드로스는 말이 자신의 그림자를 무서워하는 것을 알아채고, 말의 방향을 돌려 진정시킨 뒤 올라타는 데 성공함. 이를 본 필리포스 2세는 "아들아! 너의 그릇에 맞는 왕국을 만들어라. 마케도니아는 네게 너무 좁다!"라고 말하며 기뻐함. 이 말은 '부케팔라스'라는 이름을 얻었고, 인도 원정까지 그와 함께함.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되다]

13살이 되자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스승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함.

미에자의 님프 신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헤파이스티온 등과 함께 학문을 배움.

특히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깊은 관심을 가짐.

필리포스 2세는 13살이 된 알렉산드로스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를 교사로 선택함. 미에자에 있는 님프의 신전을 교실로 제공받아, 프톨레마이오스, 헤파이스티온, 카산드로스 등 마케도니아 귀족 친구들과 함께 기숙학교처럼 교육받음.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여러 학문을 가르쳤으며, 이 시기 알렉산드로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큰 관심을 갖게 됨.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게 주석이 달린 사본을 주었고, 그는 전쟁터까지 이를 지니고 다님.

[첫 섭정 및 알렉산드로폴리스 건설]

16세가 되자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비잔티온 원정을 떠난 사이 섭정으로 임명됨.

트라키아의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함.

반란을 진압한 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로폴리스'를 건설함.

알렉산드로스가 16세가 되었을 때, 필리포스 2세는 비잔티온 제국과의 전쟁을 위해 떠나며 그를 섭정으로 남김. 왕의 부재 중 트라키아가 반란을 일으키자,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빠르게 대응해 진압하고 그들을 고향에서 쫓아냄. 그는 이 지역을 그리스인과 함께 식민지화하고 도시의 이름을 '알렉산드로폴리스'라고 명명함.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활약]

아테네와 테바이 연합군에 맞선 전투에서 좌익을 지휘함.

처음으로 테바이군의 대열을 돌파하며 승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함.

이 전투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함.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 남쪽으로 진격하자, 아테네와 테바이 연합군이 카이로네이아에서 그를 막아섬. 이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좌익을, 필리포스는 우익을 지휘함. 알렉산드로스가 처음으로 테바이군의 대열을 부수고, 마케도니아군은 연합군을 격파하며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 이 승리로 스파르타를 제외한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가 참여하는 '헬레네 동맹(코린토스 동맹)'이 창설됨.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추방]

필리포스 2세가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와 재혼하며 갈등이 빚어짐.

결혼식 연회에서 왕위 계승 문제로 다툰 후, 어머니 올림피아스와 함께 마케도니아를 떠남.

어머니를 에피로스에 맡기고 자신은 일리리아로 망명함.

필리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 귀족 아탈루스의 조카인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와 결혼하자, '순수 마케도니아인' 후계자 문제가 대두되며 알렉산드로스의 입지가 불안해짐. 결혼 연회에서 아탈루스가 '적법한 후계자'를 언급하자 알렉산드로스가 분노했고, 필리포스 2세가 아탈루스의 편을 들며 칼을 뽑아 알렉산드로스를 위협함.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어머니와 함께 마케도니아를 떠나, 어머니를 에피로스에 맡기고 일리리아로 망명함. 6개월 뒤 가문 친구의 중재로 복귀함.

[필리포스 2세 암살과 왕위 계승]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된 후, 20세의 나이로 마케도니아의 왕이 됨.

아버지의 부강한 왕국과 숙련된 군대를 물려받음.

즉위 직후, 반란을 일으킨 그리스 도시들을 진압하며 왕권을 강화함.

기원전 336년, 부왕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된 뒤 20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함. 그는 부강한 왕국과 숙련된 군대를 물려받았으며, 아버지에 이어 코린토스 동맹의 패자(헤게몬)로 추대됨. 즉위 직후 테바이 등 그리스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신속하게 진압하며 그리스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함.

[테바이의 반란 진압과 파괴]

알렉산드로스가 북방 원정 중 사망했다는 소문에 테바이가 반란을 일으킴.

그는 즉시 남하하여 테바이를 함락시키고 도시를 완전히 파괴함.

이 사건으로 그리스 전역은 공포에 질려 마케도니아에 굴복함.

왕위 계승 직후, 알렉산드로스가 일리리아 원정 중 사망했다는 거짓 소문이 퍼지자 테바이가 반란을 일으킴. 알렉산드로스는 14일 만에 테바이에 도착하여 도시를 함락시킴. 그는 반란의 본보기로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수천 명을 학살, 수만 명을 노예로 팔아넘김. 이 충격적인 조치로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은 감히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함.

[페르시아 원정 시작]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유업을 이어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함.

코린토스 동맹의 맹주로서 헬레스폰토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로 진격함.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둠.

기원전 334년, 코린토스 동맹의 패자로서 팽창 정책을 시작함. 그는 소아시아에서 군림하던 아케메네스 제국(페르시아)을 침공하여 10년에 걸친 원정을 시작함.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지방 총독(사트라프) 군대를 격파하고 소아시아 서부를 장악함.

[고르디온의 매듭을 자르다]

프리기아의 수도 고르디온에서 '아시아의 왕이 될 자'만이 풀 수 있다는 전설의 매듭을 만남.

그는 매듭을 풀려다 칼로 매듭을 잘라버림.

이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상징적 사건이 됨.

소아시아를 행군하던 중 고르디온에 도착함. 이곳에는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왕이 된다'는 전설이 깃든 복잡한 매듭이 있었음. 알렉산드로스는 매듭을 풀기 위해 고심하는 대신, 칼을 뽑아 매듭을 단번에 잘라버림. 이 일화는 그의 대담하고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을 보여줌.

[이수스 전투에서 대승]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직접 이끈 대군과 맞붙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

이 전투로 다리우스 3세는 도주함.

다리우스 3세의 가족(어머니, 아내, 딸들)을 사로잡았으나, 그들을 정중하게 대우함.

다리우스 3세가 직접 지휘한 페르시아 대군과 이수스에서 격돌함. 알렉산드로스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군의 중앙을 돌파하여 다리우스 3세를 직접 노림. 다리우스 3세가 전장을 이탈해 도주하자 페르시아군은 와해됨. 알렉산드로스는 포로가 된 페르시아 왕족을 왕족으로 예우함.

[티레 공방전]

페니키아의 섬 도시 티레가 항복을 거부하자, 7개월간의 공방전을 벌임.

바다를 메워 둑길을 건설하는 집요함 끝에 도시를 함락시킴.

이 승리로 페르시아의 해군력을 무력화하고 지중해를 장악함.

지중해 연안의 강력한 해상 도시 티레는 알렉산드로스에게 항복을 거부함. 알렉산드로스는 섬이었던 티레를 정복하기 위해 본토에서 섬까지 약 800m에 달하는 둑길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림. 7개월간의 처절한 공방전 끝에 함락되었고, 주민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감. 이로써 페르시아의 해상 거점이 사라짐.

[이집트의 파라오로 즉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이집트에 입성하여 해방자로 환영받음.

이집트의 파라오로 즉위함.

시와 오아시스의 아몬 신전에서 '제우스(아몬)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음.

티레와 가자를 함락시킨 후 이집트로 향함. 페르시아의 압제에 시달리던 이집트인들은 그를 해방자로 환영함. 그는 이집트의 전통을 존중하여 파라오로 즉위함. 이후 리비아 사막의 시와 오아시스에 있는 아몬 신전을 방문하여, 자신이 제우스(이집트의 아몬 신과 동일시됨)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음.

[알렉산드리아 건설]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함.

이 도시는 훗날 헬레니즘 세계 최대의 도시이자 학문과 상업의 중심지로 번영함.

세계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도시 건설 중 하나임.

이집트를 통치하던 시기, 나일강 하구 지중해 연안에 새로운 도시 건설을 계획함. 그는 직접 도시의 구획을 설계했으며, 이 도시는 '알렉산드리아'로 명명됨. 알렉산드리아는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가 되었으며, 대도서관과 파로스 등대로 유명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가 됨.

BC 331.10.01 25세

[가우가멜라 전투, 페르시아 멸망]

다리우스 3세가 총동원한 페르시아의 마지막 대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둠.

이 전투의 패배로 다리우스 3세는 도주함.

사실상 페르시아 제국이 멸망한 결정적 전투임.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는 '아시아의 군주'로 칭해짐. 다리우스 3세는 제국 전역에서 군대를 긁어모아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함. 알렉산드로스는 불리한 지형과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헤타이로이 기병대를 이끌고 적진의 틈을 돌파해 승리함. 이 전투로 페르시아 제국은 사실상 멸망함.

[페르세폴리스 파괴]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에 입성하여 막대한 보물을 획득함.

그러나 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테네 파괴에 대한 보복으로 궁전을 불태움.

이는 그의 정복이 상징적으로 마무리되었음을 보여줌.

가우가멜라 전투 후 바빌론, 수사를 거쳐 페르세폴리스에 입성함. 그는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아크로폴리스를 불태운 것에 대한 보복으로, 페르세폴리스의 궁전을 의도적으로 불태워 파괴함.

[다리우스 3세의 죽음과 페르시아의 왕 등극]

도주하던 다리우스 3세가 부하인 베수스에게 암살당함.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의 장례를 성대히 치러주고 베수스를 처형함.

스스로 '페르시아의 샤한샤(왕중왕)'로 즉위함.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패배한 다리우스 3세는 도주했으나, 결국 박트리아 총독 베수스에게 살해당함.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의 시신을 수습해 왕의 장례를 치러주고, 자신을 '다리우스의 복수자'로 칭하며 베수스를 추격해 처형함. 이후 그는 '페르시아 국왕' (재위 기원전 330년 ~ 기원전 323년)을 겸임하게 됨.

[클레이토스 살해]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했던 클레이토스와 술자리에서 격렬한 언쟁을 벌임.

페르시아 관습을 채택한 자신을 비난하는 클레이토스에게 격분하여 그를 창으로 찔러 죽임.

이후 크게 후회함.

페르시아 정복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궁중 의례(엎드려 절하기 등)를 도입하려 했고 이는 마케도니아 장군들의 불만을 삼. 사마르칸트에서 열린 연회에서, 술에 취한 클레이토스가 필리포스 2세를 찬양하며 알렉산드로스의 업적을 깎아내리자, 격분한 알렉산드로스가 그를 창으로 찔러 살해함. 술이 깬 뒤 그는 자신의 행동에 크게 절망하고 슬퍼함.

[박트리아의 록사나와 결혼]

중앙아시아(박트리아) 원정 중, 소그디아나의 귀족 옥시아르테스의 딸 록사나와 결혼함.

이는 마케도니아인과 페르시아인(이란계)의 융합을 꾀하는 동서 융합 정책의 일환이었음.

소그디아나의 바위를 점령한 후, 포로로 잡힌 록사나의 미모에 반해 결혼을 결정함. 이는 정복지의 유력가와 동맹을 맺어 저항을 잠재우고, 마케도니아인과 페르시아인의 통합을 도모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결혼이었음. 이 결혼은 마케도니아인들의 불만을 사기도 함.

[인도 원정 시작]

'세계의 끝'을 보겠다는 열망으로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더스강 유역을 침공함.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인도 북서부로 영토를 확장함.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는 "세계의 끝"을 보겠다는 열망으로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를 침공함. 그는 인더스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마지막 원정을 시작함.

[히다스페스 전투와 군사들의 반발]

인도 원정 중 가장 격렬했던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포로스 왕의 코끼리 부대를 격파함.

그러나 더 이상의 동진을 거부하는 군사들의 반발에 부딪혀 회군을 결정함.

이 전투에서 애마 부케팔라스가 죽음.

기원전 326년, 히다스페스 강(현재 젤룸 강)에서 포로스 왕의 군대와 격돌함. 코끼리 부대 때문에 고전했으나, 격전 끝에 승리함. 알렉산드로스는 갠지스 강까지 진격하려 했으나, 오랜 원정에 지친 병사들이 폭동 직전까지 반발하자 결국 회군을 결정함. 애마 부케팔라스가 이 전투 후 죽자, 그를 기려 '부케팔리아' 도시를 세움.

BC 323.06.10 33세

[바빌론에서 사망]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계획하던 중 바빌론에서 33세의 나이로 사망함.

사망 원인은 고열, 말라리아, 독살 등 여러 가설이 있음.

그의 죽음으로 대제국은 분열의 길로 들어섬.

바빌론을 제국의 수도로 삼기 위해 개발하던 중이었으며,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계획함. 그러나 원정을 시작하지 못한 채 기원전 323년 6월 10일(또는 11일) 바빌론에서 사망함.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독살설(플루타르코스 등), 장티푸스, 말라리아, 하얀 헬레보레 중독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됨.

[대제국의 분열 (디아도코이 전쟁)]

알렉산드로스가 명확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제국은 내전에 휩싸임.

부하 장군들과 참모들(디아도코이)이 후계자를 자처하며 제국을 분할 통치하기 시작함.

이는 헬레니즘 세계의 시작을 알림.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그가 죽자마자 일련의 내전으로 산산이 조각남. 조각난 각각의 지역은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군들과 참모들이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를 자칭하면서 각각 왕을 칭하고 할거함. 이들을 '디아도코이'라고 부르며, 이들의 전쟁으로 제국은 여러 왕국으로 분열됨.

1162

[칭기즈 칸 탄생 (테무친)]

훗날 칭기즈 칸으로 불릴 테무친이 오논강 인근 델리운 볼락에서 아버지 예수게이와 어머니 호엘룬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훗날 칭기즈 칸으로 불리는 테무친은 1160년경 오논강 인근 델리운 볼락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키야트 부족인 아버지 예수게이와 어머니 호엘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예수게이는 소치겔이라는 여성에게서 이복 형 벡테르와 벨구테이가 있었고, 메르키트족에게 시집가는 호엘룬을 약탈하여 결혼, 테무친이 태어났다. 친동생으로 주치 카사르, 일찍 요절한 카치운, 동방에 영지를 받은 테무게 옷치킨 등이 태어났다. 칭기즈칸의 출생년도는 1162년에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역사서마다 달라서 1155년, 1163년, 1167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현재 몽골에서 기념하는 칭기즈 칸의 탄신일은 1162년 11월 14일이다. 칭기즈 칸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 예수게이가 테무진 우게가 이끄는 타타르족과의 전투를 승리했는데. 예수게이는 이 테무진 우게의 이름을 따서 태어난 아이에게 테무친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손에 고대 동방 사람들에게 생명을 상징하는 피 한 움큼을 쥐고 있는 등 여러 가지 상서로운 징표들이 나타났다. 예수게이는 이를 길한 징조로 생각하여 패배한 타타르 군주, 테무진 우게의 이름을 따서 자식에게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칭기즈 칸의 이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으로는 ‘테무진’이 ‘대장장이’라는 뜻임을 근거로 당시 사대부 사회에서 쇠가 중요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1162

1171

[보르지긴 키야트의 수장 즉위]

아버지 예수게이 사망 후, 보르지긴 키야트의 수장이 되어 부족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예수게이 사망 후, 1171년부터 보르지긴 키야트의 수장 자리를 이어받아 부족을 이끌었다.

[아버지 예수게이 독살과 유년기의 불행]

테무친이 9세 되던 해, 아버지 예수게이가 오랜 불화 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테무친의 가문은 극심한 가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테무친이 9세 때 몽골 왕족 보르지긴족의 후예인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의 부족과 오랜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되었다. 예수게이는 아들 테무친의 배우자를 정하러 옹기라트부족의 족장을 만나 그의 딸 보르테를 테무진의 약혼자로 정하고 오던 길에 타타르족의 막사에서 며칠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몽골 부족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타타르족은 예수게이를 손님으로 받아들였다가 독살하였다. 예수게이가 죽자 부족 사람들은 예수게이와 경쟁자 관계였던 타이치우트 일가의 사주를 받아, 예수게이의 미망인 호엘룬과 그 자녀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이용하여 이들을 추방했다. 이로 인해 테무진의 영세한 가문은 유목민의 일상 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는 전혀 먹지 못하고 풀뿌리와 생선으로 연명하는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1171

1175

[이복형 벡테르 살해]

이복형 벡테르와의 갈등 끝에 그를 활로 쏴 살해했으며, 벡테르의 다른 이복 형 벨구테이는 테무친의 부하가 되는 조건으로 살려두었습니다.

테무진과 그의 형제는 사냥 노획물을 약탈하는 이복 형 벡테르와 갈등하다가 벡테르를 활로 쏴서 살해했으며 분노와 원한으로 인해 벡테르의 시체의 목을 기어이 베었다. 벡테르는 죽으면서 자신의 가계를 잇길 청하여 벡테르의 친동생이자 테무진의 다른 이복 형 벨구테이는 평생 테무진의 부하가 되는 조건으로 살려두었다.

1175

1178

[타이치우드 가문으로부터 탈출]

이복형을 죽였다는 빌미로 타이치우드 가문의 타루구타이 키릴토쿠에게 감금되었으나, 스루도스 부족의 소르칸 시라 등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타이치우드 가만의 타루구타이 키릴토쿠는 이복 형을 죽였다는 것을 빌미로 테무진을 감금하였다. 테무진은 나중에 스루도스 부족의 소르칸 시라 등의 도움을 얻어 탈출에 성공한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이때 우연한 기회로 테무진의 친구가 된 네 명, 아루라트씨족의 보오르추, 테무진의 집안 가신이었던 우리양카이 집안의 제드메, 테무진을 도와준 소르칸 시라의 아들 치라운, 친베 등 4명은 그의 최측근이 되며, 이 중 보오르추, 치라운은 무칼리 등과 함께 칭기즈칸의 사준사구 중 사준이었고, 칭기즈 칸의 동지이자 유력 공신들 중의 하나가 된다. 사준은 전쟁에서 칭기스 칸의 옆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고 호위하는 역할을한다. 이후의 행적은 사서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몽골 황금사(알탄톱치)와 몽골원류에 의하면 그는 솔롱고(고려)에 가서 수년 간 체류했다 하고, 남송 출신으로 몽골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조공(趙珙)의 책 『몽달비록 (蒙韃備錄)』에 의하면 금나라로 끌려가 10년 간 노예생활을 했다고 한다.

1178

1180

[토그릴 완 칸과의 협상 및 보르테 회복]

아버지의 의형제였던 케레이트부의 토그릴 완 칸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여, 메르키트족에게 납치당했던 아내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안다(의형제)를 맺었던, 예수게이에게 정치적 도움을 받은 적 있는 케레이트부의 한 부족장인 토그릴 완 칸을 찾아간다. 테무진과 그의 가족은 비록 보르지긴족들의 배척을 받긴 했지만 왕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대접을 받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기 전에 정혼해준 아내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 북방에 사는 메르키트족은 예수게이가 그들에게 빼앗은 여자인 호엘룬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테무진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메르키트족은 테무진의 아내인 보르테를 납치했다.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족의 왕인 토그릴 완 칸에게 사정을 말하여 보르테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당시 토그릴 완 칸은 몽골 지역 안에서 가장 강대한 통치자였다. 테무진은 결혼기념물로 받은 잘의 모피를 토그릴에게 선물했고 답례로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의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인 쟈무카도 설득시켜 병력을 제공하게 함으로써 그 약속을 지켰다. 테무진 일가의 궁핍과 이웃 부족의 왕이 제공한 대규모 병력은 상반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우나, 〈몽골 비사〉, (원조비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1180

1182

[옛 키야트 부족 부족장 선출]

토그릴 완 칸과 자무카의 지원 병력을 받아 옛 키야트 부족의 부족장으로 선출되며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토그릴 완 칸이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인 쟈무카도 설득시켜 병력을 제공하게 함으로써 그 약속을 지켰다. 1182년에 이렇게 모은 옛 키야트 부족의 부족장으로 선출되었다 한다.

1182

1189

[카마그 몽골의 칸으로 즉위]

몽골의 여러 부족 지도자들이 테무진을 몽골족의 칸(왕)으로 옹립하자는 제의를 하여, 카마그 몽골의 칸으로 즉위하였습니다.

부족의 지도자들은 테무진의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12세기말에 이르자 그들 지도자 가운데 일부는 테무진을 몽골족의 칸(왕)으로 옹립하자고 제의했다. 또한 그 지도자들은 전쟁과 수렵에서 테무진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1189년 카마그 몽골의 칸으로 즉위했다.

1189

1190

[자르하족과의 교전]

자르하부족의 수령 자무카 동생 차르파가 테무진 부하들을 살해하자, 테무친은 13익으로 군사를 편성해 자무카와 교전하며 키야트 부족의 세력을 강화했습니다.

1190년 테무진의 영도하에 키야트부족의 세력은 강해졌다. 자르하부족의 수령이기도 했던 자무카는 불만을 품었다. 자무하의 동생 차르파는 테무진의 부하들을 습격하여 죽였다. 테무진 휘하 13개 부락 3만여 명이 차르파에게 살해되었다. 테무친은 즉시 13익(13개 부락)으로 군사를 편성해 자무카와 교전하였다.

[자무카와의 열세 날개 전투]

메르키트족 정복 후, 자무카가 타이치우드 가문과 동맹하여 테무진과 바루주토 평원에서 교전한 '열세 날개 전투'가 발생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테무진은 패배한 것으로 보이며, 자무카는 포로를 팽형에 처해 인망을 잃었습니다.

메르키트족을 정복한 뒤, 자무카는 타이치우드 가문과 동맹하고 키야트가문을 규합한 테무진과 바루주토의 평원에서 교전하였다. 1190년의 열세 날개 전투라고 불리는 이 싸움에서 누가 승리했는지는 문헌마다 결론이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키야트가문과 동맹을 맺고 테무진의 아군이던 한 씨족의 포로가 자무카에게 사로잡힌 뒤, 사람을 삶아 죽이는 팽형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테무진의 동맹인 어느 씨족 포로를 자무카가 삶아서 죽인 것은 기록들마다 일치하고 있으며, 이때는 테무진이 패배 한 것으로 보인다. 자무카는 이 공개적 팽형으로 인망을 잃고, 몽골의 부족들은 테무진에게 귀부하는 일이 늘어났다.

1190

1200

[타타르족, 타이치우드-자무카 연합 격파]

케레이트 지원군을 받아 타이치우드 가문과 자무카 연합군을 격파하고, 대흥안령 방면의 타타르족을 후룬베이얼 일대에서 격파했습니다.

1200년 초 테무진은 동부에 케레이트의 지원군을 호출, 친척이자 천적인 타이치우드 가문과 자이라트씨의 자무카 연합군을 깨고, 이어 대흥안령 방면의 타타르 족을 후룬베이얼 일대에서 격파했다.

1200

1201

[자무카, 고아 칸으로 추대]

타타르, 메르키트, 타이치우드 부족이 연합하여 자무카를 고아 칸으로 추대하며 테무진에게 대항하려 했습니다.

1201년 타타르족 잔존세력과 메르키트족, 그리고 테무친의 친척인 타이치우드 부족이 연합하여 자무카를 칸으로 추대, 고아 칸(古兒汗)이라 칭했다. 1201년 몽골의 동방 지파는 반 케레이트, 반 테무진 세력과 동맹을 맺고, 테무진의 천적 자무카를 맹주로 추대하고, 고아 칸이라 하였다. 그러나 테무진은 동맹에 참가한 옹기라트부에 속하는 아내 보르테의 친가에서 동맹 결성 소식을 비밀리에 접하고 반대로 공세, 동맹을 깨고 동방 지파를 복속시켰다.

1201

1202

[나이만-메르키트 연맹 격파]

서쪽 나이만, 북 메르키트 부족 연맹이 오이라트와 동방 동맹 잔당과 연합하여 케레이트를 공격했으나, 테무진과 옹 칸은 고전 끝에 이를 물리치고 고원 중앙부 패권을 장악했습니다.

1202년 서쪽 나이만, 북 메르키트부족 연맹이 북서쪽에 있던 오이라트와 동방 동맹의 잔당과 맺고, 케레이트 공격했지만, 테무진과 옹 칸은 고전 끝에 이를 물리 치고 고원 중앙부의 패권을 차지했다.

[타타르족 최종 정복 및 몰살]

테무친은 타타르족과 교전하여 수령 자린부카를 죽이고, 잔존 타타르인들을 몰살시켰습니다.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자들은 모두 죽이고 아이들만 살려두어 몽골에 충성하게 했습니다.

1202년 테무친은 타타르 족과 교전, 타타르족 수령 자린부카를 죽이고, 나머지 잔존 타타르인 백여명을 모조리 죽였다. 전투에서 타타르족을 패배시킨 뒤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자들은 곧 어른은 모두 죽이고, 단지 아이들만 살려두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커서 자신들의 신분을 잊고 몽골의 충실한 추종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202

1203

[케레이트부 괴멸 및 고원 중앙부 장악]

자무카의 모략으로 옹 칸에게 습격당했으나, 테무진은 군대를 재정비하여 옹 칸의 본대를 급습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로 케레이트부는 괴멸되고 테무진이 고원 중앙부를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뒤 옹 칸과 테무진 간의 결혼동맹을 체결하려 했으나 옹 칸의 장남 일카 셍굼의 반대로 무산됐다. 같은 해 자무카의 술수로 옹 칸의 장남 일카 센군과 테무진을 이간질을 하여, 1203년에 옹 칸은 셍굼의 진영에 망명 해 온 자무카의 모략으로 갑자기 테무진의 지역을 습격했다. 테무진은 오논강에서 북쪽으로 벗어나 바루쥬나 호수에서 군대를 재정비 했다. 그해 가을, 오논강을 거슬러 고원에 되돌아온 테무진은 병력을 결집하여 계략을 써서, 케레이트의 본영의 위치를 찾아 옹 칸의 본대를 급습해 대승했다. 이 패전으로 고원의 케레이트 부는 괴멸되고, 고원의 중앙부는 테무진의 손에 떨어졌다. 테무진은 토그릴을 패배시킨 뒤 케레이트족을 모두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1203

1205

[나이만, 메르키트 최종 격파 및 자무카 처형]

고원의 마지막 큰 세력이었던 서나이만부와 북메르키트부족을 격파하고, 오랜 라이벌이자 동지였던 자무카를 처형하며 모든 정적을 제거하고 스텝 지역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1205년 테무진은 고원에 남은 마지막 큰 세력인 서나이만부와 북메르키트부족을 격파하고, 동지에서 적이 된 자무카를 마침내 잡아 처형했다. 자무카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테무진에게 넘겨졌으나, 그는 배신한 자무카의 부하들을 처형하고 자무카는 피를 보지 않게 처형했다 한다.

1205

1206

[테무진, 칭기즈 칸으로 추대 및 몽골 제국 건국]

오논강변 쿠릴타이에서 테무진은 '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의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며 몽골 제국을 건국하고, 모든 스텝 지역을 통치하는 황제가 되었습니다.

1206년 테무진은 쿠릴타이를 소집했고, 그해 2월 오논강변에서 열린 족장대회의에서 테무진은 칭기즈 칸('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으로 추대되었다. 칭기스 라는 단어에 대해 일설에는 원래 몽골어가 아닌튀르크어에서 온 외래어였다는 설이 있다. 1206년 모든 스텝 지역을 통치하는 황제로 추대되었을 때 그는 수천 명에 달하는 피복속 부족의 사람들과 그 지역을 자신의 친·인척, 동료들에게 나누어 관리하게 했다. 그리하여 기존 부족·가문의 조직된 형태를 바꾸어 봉건제도와 유사한 조직을 만들어냈다. 1206년은 몽골 및 세계의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몽골족은 스텝 지역 밖으로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몽골 자체도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해 통일된 몽골족이 존재하게 되었고, 몽골족은 많은 변천과정(봉건적 분열, 부족간의 세력다툼 재연, 영토병합)을 거쳐 오늘날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1206

1207

[삼림 부족 정벌 및 복속]

칭기즈 칸은 아들 주치를 보내 삼림 부족을 정벌하고 복속시켰습니다.

1207년 아들 주치를 보내 삼림 부족을 정벌, 복속시켰다.

1207

1209

[위구르 왕국 복속]

톈산 위구르 왕국을 복속시키고, 경제 감각이 뛰어난 위구르인들의 협력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1209년에는 톈산 위구르 왕국를 복속시키고, 경제 감각이 뛰어난 위구르인의 협력을 얻는 데 성공한다.

[서하 복속 및 강화조약 체결]

서하가 칭기즈 칸에게 복속하고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강화조약을 체결했습니다.

1209년에 서하(西夏)에서 칭기즈 칸에게 복속,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하고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몽골의 총공격이 감행된 3차 침략 때 서하군은 전차 부대와 장창 부대를 앞세워 한순간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기동력의 부족으로 몽골군의 산개 작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고, 결국 총사령관 외명령공이 포로로 잡혀 처형당하며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졌다. 몽골군은 수도인 영하를 포위했으나 공성전의 경험이 없던 몽골군은 이를 함락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황하의 물줄기를 바꾸어 영하를 공격하려는 시도도 하였으나 댐 건설의 경험이 없던 그들에게는 댐 건설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고, 오히려 사고로 수십명이 익사하는 피해를 보기도 했다(몽골군은 수영을 할 줄 몰랐기에 특히 피해가 심했다). 물자 부족에도 시달리다가 결국 1207년 양종 이안전은 몽골에의 복속을 약속하고 자신의 딸을 보내 칭기즈 칸과 혼인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서하는 몽골의 명령을 받아 금나라와 오랜 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양국의 국력을 쇠퇴하게 하였다.

1209

1210

[금나라에 조공 관계 중단 통고]

무능한 금나라 영제의 조공 증대 요구를 거부하고, 금나라에 대한 조공 관계를 중단한다고 통고하며 정복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마달갈이 죽자 그의 후계자 영제(위소왕)은 칭기즈 칸이 군신의 예를 갖추고 조공을 늘릴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의 사람됨을 알고 있던 칭기즈 칸은 무능한 통치자인 영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정복의 기회로 이용하였다. 1210년 칭기즈 칸은 금나라에 조공관계를 중단한다고 통고하였다.

[카를루크족 정벌 및 투항]

쿠빌라이를 보내 투르크계 유목민 카를루크족을 정벌했으며, 부족장 아라사란 칸이 투항해 왔습니다.

1210년에는 그의 손자와 동명이인이자 사준사구의 한사람인 쿠빌라이를 보내 투르크계 유목민 카를루크족을 정벌, 카를루크족의 부족장 아라사란 칸(阿兒思蘭汗)이 부락을 이끌고 투항해왔다.

1210

1211

[웅구트족의 협력으로 만리장성 통과]

투르크계 웅구트인들의 협력을 얻어 만리장성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고, 금나라 공격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던 투르크계 웅구트인들이 몽골에서 만리장성으로 가는 산서성 북부의 길을 금을 위해 방어하고 있었다. 1211년 웅구트의 알라쿠쉬 티긴은 금의 정복을 위해 칭기즈 칸에게 이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북경의 옛 주인이었으나 금에 의해 쫓겨난 거란인들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공격하였다. 이로써 금나라 서북의 웅구트와 동북의 거란은 몽골과 연합하게 되었다.

1211

1211

[금나라 침공 및 야고령 회전 승리]

금나라 국경을 침입하여 야고령 회전에서 40만 금나라 군을 격파하고 만리장성 이남의 영토를 정복하며 금나라 공략을 시작했습니다.

칭기즈 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금을 향해 진격했다. 1211년 2월 칭기즈 칸은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 국경을 침입, 야고령 회전(野狐嶺會戰)에서 40만 명의 금나라 군을 격파했다. 1213년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를 공략, 만리장성 이남의 금나라의 영토를 정복, 병합했다. 1212년과 1213년에는 금나라의 하북을 상륙, 침공하여 격파하고 하동북로와 산둥 일대의 각 주와 현을 침공, 파괴하였다.

1211

1212

[야율유가의 요하 반란 (요나라 건국)]

만주 서남부 요하에서 야율유가가 반란을 일으켜 몽골의 도움으로 요양을 빼앗고 요나라를 세웠으며, 몽골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었습니다.

1212년에는 거란의 옛 영토인 만주 서남부의 요하에서 야율유가가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인들은 몽골계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퉁구스계 언어를 사용하는 금의 여진족보다는 몽골과 더 친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야율유가는 몽골의 도움으로 요양을 빼앗고 요나라를 세웠으며 1220년 죽을 때까지 몽골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몽골과 함께 하였다.

1212

1214

[금나라와의 화약과 배신]

금나라로부터 막대한 보상금을 받고 일시 철수했으나, 금나라가 수도를 개봉으로 옮긴 것을 배신으로 간주하고 다시 금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1213년에는 쉬안화현 선화를 정복하고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타이위안시 태원과 린펀 평양을 빼앗았다. 이 후 남으로 기수를 돌려 하북과 산둥 평원을 가로질러 하간과 제남을 함락시켰다. 칭기즈 칸이 북경을 봉쇄작전으로 공격하려고 했을 때, 금 조정에는 궁정분란이 일어나 금 위소왕 폐제가 호사호에게 암살을 당하였고, 호사호는 폐제의 조카인 오도보(금 선종)을 제위에 앉혔다. 당시 북경을 공격하고 있었으나 잇따른 실패에다 물자 부족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칭기즈 칸은 오도보의 화의를 받아들이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 1214년 칭기즈 칸은 금나라와 화약을 맺고 일단 군사를 후퇴시켰지만, 화약의 직후에 금나라가 몽골의 공세를 두려워해서 황하 강의 남쪽으로 옛 북송의 도읍인 개봉으로 수도를 옮기자 칭기즈 칸은 이를 배신 행위로 규정하고 다시 금을 공격했다.

1214

1215

[금나라 수도 연경 함락 및 약탈]

금나라의 수도 연경(베이징)을 포위하고 함락시킨 뒤, 한 달 동안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으며 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이후 무칼리에게 화북 경영을 맡겼습니다.

1215년 몽골군은 금나라의 기존 수도 연경(현재의 베이징)을 포위, 함락시켰다. 후에 후계자 우구데이 칸의 시대에 중국의 행정에 활약하게 되는 야율초재는 이때 칭기즈 칸에 나타나고 그의 측근이 되었다. 연경을 함락시킨 칭기즈 칸은 장군 무칼리를 연경에 잔류시키고 그 후의 화북의 경영과 금나라와의 전쟁 준비 계획으르 맡겼으며, 그는 고원으로 되돌아갔다. 초원의 거주자들은 아무런 과도기적 단계도 없이 도시문명을 가진 고대국가를 소유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더 나은 방법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난감함에 의하여 방화와 살육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약탈은 몽골군의 규범인 야삭에서 금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북경에 들어가서 한달 동안이나 약탈을 계속 하였다. 이것은 10세기의 거란이나 12세기의 여진 사람들이 기존 중국인에 대한 살육을 최소화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지 않음으로써 이전 왕조를 계승하여 차지한 것과 비교해 볼 때 퇴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215

1218

[호라즘 제국과의 1차 충돌]

메르키트족 진압 후 호라즘 국경에서 무함마드 샤의 군대와 마주쳐 첫 전투를 벌였습니다. 몽골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호라즘군 절반을 죽이고 승리했으며, 이후 이슬람 상인 야라와치를 호라즘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금나라 정복 기간 중 칭기즈 칸은 중앙아시아에서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던 호라즘 제국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몽골과 호라즘의 1차 충돌은 1218년에 있었는데, 칭기즈칸은 아들 차가타이, 오고타이 등을 대동하고 호라즘 원정에 나섰다. 1218년 당시 호라즘은 알라 웃딘 무함마드 샤(황제)의 통치 하에 쇠퇴하고 있던 아바스 왕조를 몰아내고 서요를 속국으로 삼으며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몽골에서는 명맥만 유지하던 메르키트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한 몽골군은 남은 메르키트 병사들을 서요 국경지대까지 쫓아가 전멸시켰다. 이 때 칭기즈 칸은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서요를 방문한 무함마드 샤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고, 이를 우습게 본 샤가 몽골군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몽골군은 호라즘군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으나 치밀한 전략과 기마술로 호라즘군 절반을 죽이고 샤의 본진을 습격해 왕실 물품을 소수 탈취했다. 호라즘 정벌 당시 투항한 이슬람 상인 야라와치와 그의 아들 마수우드베이 부자가 투항했다. 이들은 후일 그의 아들 오고타이의 측근이 된다. 몽골군이 퇴각하면서, 마수우드베이는 호라즘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주재시켰다.

[서요 정복 및 서쪽 영토 확장]

나이만 부족장 아들 쿠츨루크가 서요의 왕위를 찬탈하자, 칭기즈 칸은 제베 장군을 보내 쿠츨루크를 처형하고 서요를 몽골에 병합하며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나이만 부족 연합의 부족장의 아들 쿠츨루크는 나이만족 멸망 후 망명, 서요로 가서 야율직로고의 보호를 받고, 그의 사위가 되었다. 그러나 쿠츨루크는 야율직로고를 배신, 왕위를 찬탈했다. 서요의 혼란을 접한 칭기즈 칸은 쿠츨루크 토벌을 선언, 추격하였으나 몽골군의 주력은 서하에 대한 계속적인 10년 간의 원정으로 피폐해졌고, 첫 서요 원정은 실패하였다. 칭기즈 칸은 장군 제베에게 2만 군을 주고 선봉대로 보냈으며 쿠츨루크를 맡도록 했다. 쿠츨루크는 불교로 개종하고 현지의 무슬림을 억압하고 있었으므로, 몽골이 보낸 밀정이 이를 칭기즈 칸에게 보고하였다. 곧 몽골 밀정이 내란을 선동하자 바로 서요 왕국은 분열되고 지에베는 바로 군사를 이끌고 가 적국을 크게 격파했다. 쿠츨루크는 카슈가르 서쪽으로 도주하였으나 이윽고 몽골에게 붙들려 처형되고, 서요의 영지는 몽골에 병합되었다. 이 원정의 성공으로 1218년까지 몽골 제국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발하슈 호까지 확대되고, 남쪽으로 페르시아 만, 서쪽으로 카스피해와 호라즘 샤 왕조를 접하게 되었다.

1218

1219

[호라즘 제국 전면 침공 개시]

호라즘 샤가 몽골 대상단을 몰살시키고 사신단까지 처형하자, 칭기즈 칸은 이를 선전 포고로 간주하고 20만 병력을 이끌고 호라즘 제국 전면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칭기즈 칸은 나이만전 당시 도망쳤던 나이만 족장 타양 칸의 아들 쿠츨루크가 서요의 국왕이 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장수 제베를 시켜 서요를 공격해 쿠츨루크를 죽이고 서요를 점령함으로써 호라즘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러나 금나라와의 전쟁 중에 호라즘과 같은 강국과 전쟁을 치를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칭기즈 칸은 이후 호라즘과 통상을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샤는 편지에 쓰여진 '그대를 사랑하는 내 아들처럼 대할 것'이라는, 자신을 비하하는 글귀에 분노했다. 그는 통상에 응하였으나 통상을 위해 방문한 450명의 상단을 오트라르 성의 성주 이날축을 시켜 붙잡아 처형했고, 항의하러 온 사신단마저 처형했다.(일각에는 칭기즈 칸의 전쟁을 위한 계략이 숨어있었다고도 한다). 이는 사실상 선전 포고나 다름이 없었으니 칭기즈 칸은 이에 선전 포고를 하고, 1219년 20만의 병력으로 호라즘 침공을 개시했다. 호라즘 정벌에는 그의 아들 오고타이와 차가타이 등이 동행 출전하였다.

1219

1220

[호라즘 샤 알라 웃딘 무함마드의 사망]

몽골군에게 쫓기던 호라즘 샤 알라 웃딘 무함마드가 카스피해의 작은 섬으로 피신했다가 지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결국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샤는 카스피해의 작은 섬으로 피신했다가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후 샤의 아들 잘랄 웃딘이 몽골군에 항전했으나 그가 지키던 우르겐치 성은 끝내 몽골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아내와 아들을 포함한 일가족을 잃었고, 군대를 모아 파르완에서 시기 쿠투쿠가 이끄는 몽골군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패배 소식을 접한 칭기즈 칸이 직접 토벌에 나서자 끝내 당해내지 못하고 패배한 뒤 인더스강을 건너 도망쳤다가 1년 뒤 쿠르드 산지에서 그곳 주민에게 살해당했다.

[호라즘 주요 도시 함락 및 샤 알라 웃딘 추격]

몽골군은 오트라르 성을 시작으로 호라즘의 수도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를 잇달아 함락시켰습니다. 샤 알라 웃딘은 도망쳤고, 칭기즈 칸은 제베와 수부데이에게 샤를 추격하도록 명했습니다.

호라즘을 침공한 몽골군은 오트라르 성을 함락하고 샤의 명에 따라 몽골 대상단을 처형한 성주 이날축의 눈과 귀에 끓는 은물을 부어 처형했다. 이후 몽골군은 호라즘의 전 수도 부하라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내고, 샤 알라 웃딘 무함마드가 숨어있던 사마르칸트까지 포위해 5일만에 함락했다. 침공 전 칭기즈 칸은 호라즘 제국 내의 불화와 반목을 이용하는 계락을 펼쳤다. 호라즘은 알라 웃딘의 통치기간 동안 넓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내정을 안정시킬 기간이 없어 나라 안 민중과 귀족, 왕족들 간의 파벌 갈등이 심했다. 칭기즈 칸은 호라즘 내의 여러 장수나 귀족들이 몽골과 내통하고 있는 것처럼 한 편지를 샤에게 들어가도록 했고, 몇몇 귀족이나 왕족에게 복속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불안해진 샤는 수도를 사마르칸트로 옮기고, 몽골군의 몇 배가 넘던 대군을 이리저리 갈라 배치하는 실책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는 몽골군의 호라즘 정복을 쉽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아바스 왕조에서는 호라즘을 중앙아시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몽골군에게 호라즘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1220

1223

[호라즘 원정 철수 및 휴식기]

호라즘 정복 후 칭기즈 칸은 몽골군을 철수시키고, 1226년까지 새로운 대규모 전쟁을 벌이지 않고 휴식하며 재정비하는 기간을 가졌습니다.

이 전쟁에서 몽골족은 끔찍한 야만적 행동을 자행하여 이그만족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몽골족은 가는 곳마다 도시를 불태웠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동족이라도 자신들보다 높은 신분이라면 모두 몰살시키는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칭기즈 칸이 호라즘 샤를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었고 관개시설은 파괴되었다. 이 광경을 본 칭기즈 칸은 1223년 철수했고 1226~1227년 서하를 상대로 마지막 전역(戰役)에 나설 때까지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1223

1224

[몽골고원으로 귀환]

서하의 반란 소식을 듣고 페샤와르를 떠나 몽골고원으로 귀환하여 내정을 다지고 서하 재정벌을 준비했습니다.

1224년, 칭기스 칸은 서하의 반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서둘러 페샤와르를 떠나 몽골고원으로 귀환했다. 1225년 봄에 그는 몽골고원에 도착했고, 여름에는 내정을 다지고, 가을에는 카라 툰의 행궁에서 묵었다. 칭기즈 칸이 이란에 있는 동안 서하는 몽골에 반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1224

1226

[서하 재정벌 시작 및 항복 거부]

호라즘 원정 불참을 이유로 서하에 대한 징벌 원정을 결의하고 침공했으나, 서하의 항복 제의를 거부당하며 전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란에서 돌아온 칭기즈 칸은 이를 알고 서하에 대한 징벌 원정을 결의했다. 1년의 휴식과 군대의 재편성 후, 칭기즈 칸은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1226년 초 몽골군은 서하를 침공하면서 서하의 변경을 공략했다. 칭기스 칸은 사고로 말에서 낙마한 뒤에 열병을 겪었고, 이에 아들들은 원정을 만류했다. 하지만 칭기스 칸은 원정을 강행했다. 칭기스 칸은 우선 서하에 사신을 파견해 서정에 동반하지 않고 그 자신을 모욕한 것을 책망하며 항복을 제의했으나, 서하는 이를 거부했다.

[서하 수도 싱칭 포위 및 군대 궤멸]

몽골군은 겨울에 얼어붙은 황하를 넘어 서하 수도 싱칭을 포위하고, 황하 기슭에서 서하 군대를 궤멸시켰습니다.

겨울에 얼어붙은 황하를 넘어 수도 싱칭(현재의 인촨시 인촨) 이남 지역을 포위했다. 서하 군대는 황하 기슭에서 몽골군을 요격했지만, 서하군은 30만 이상이었음에도 패배, 궤멸당했다. 칭기즈 칸은 대대적인 민족 학살을 명령하고 죽었는데, 이는 서하의 호라즘전 참가 거부가 칭기즈 칸을 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며, 2차 침략에 대한 저항이 끈질겼기 때문에 칭기즈 칸의 섬태멸진 방식의 정복 전쟁에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중국 국영 중국중앙방송 보도에 의하면, 몽골군은 서하 사람을 매우 철저하게 살육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서하인 유전자를 가진 서하인 후손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 다만 이들 가운데 살아남은 서하인은 원나라가 세워졌을 때 지배계급인 색목인으로 편성되었다.

1226

1227

[칭기즈 칸 사망 및 서하 멸망 유언]

서하 원정 중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서하 황제와 백성들을 몰살시키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그의 유언대로 서하의 수도 흥경은 함락되고 주민들은 학살당했습니다.

육반산 남쪽에 머무르던 칭기즈 칸은 서하에 사람을 보냈고, 서하에서는 곧 항복을 약속했다. 그때 서하는 칭기스 칸에게 사신을 보내 한 달 뒤 주민들을 이끌고 도시 밖으로 나와 항복하겠다고 제의했고, 칭기즈 칸은 이를 허락했다. 하지만 그해 8월 초 칭기즈 칸은 갑자기 중태에 빠졌다가 깨어났다. 죽음을 앞둔 칭기스 칸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적이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절대로 곡을 하거나 애도하지 말라. 탕구트의 군주와 백성들이 기간에 맞추어 밖으로 나오면 그들을 모두 없애 버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1227년 8월 18일 또는 8월 25일, 칭기스 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서하의 수도 흥경은 함락되고 그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그의 사망 일자는 사서마다 설이 다른데 원사에는 8월 25일, 라시드 앗딘의 집사에는 1227년 8월이라 한다. 한편 알탄 톱치 몽골 황금사에 의하면 칭기즈 칸은 7월 12일에 사망했다 한다. 그는 죽음이 임박해서 부하들에게 서하 황제를 잡아 죽이라 명했고, 또 막내아들 툴루이를 불러들여 서하를 완전히 멸망시킬 계획을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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