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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D. 왓슨은 미국의 저명한 분자 생물학자이자 유전학자, 동물학자로,
* 1953년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DNA 이중 나선 구조를 공동 발견하여 과학계에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 이 업적으로 196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암 연구와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를 이끌었습니다.
* HGP 초대 소장으로서 연구의 윤리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논의를 선도했습니다.
* 인종과 지능의 연관성 등 여러 논쟁적인 발언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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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의 유전법칙이 발견되고 과학자들은 생명체 내의 어떤 물질이 유전에 관여하는지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세포를 구성하고 있는 거대 분자들 즉, 단백질, 지질, 탄수화물, 핵산이 있다고 알고 있지만 멘델의 유전 법칙이 처음 공개된 1865년 무렵에는 핵산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이 연대기를 통해 4개의 염기로만 구성되어 있는 DNA가 수 많은 정보를 담아 후세에 전달하는 유전의 기능을 담당하는 지를 밝히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발견을 이루어 가는 과학 탐구의 길을 배우게 될 것이다. 또한 위대한 과학자도 실수를 할 수 있고 DNA 이중나선을 밝히는 데 제일 큰 지분을 갖고 있는 과학자는 여성과학자인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란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1869
1869
[핵산의 최초발견:뉴클레인]
1869년 스위스 과학자 프리드리히 미셔(Friedrich Miescher)가 세포 내에서 단백질과 구별되는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병원의 붕대에서 풍부하게 얻을 수 있었던 백혈구(고름)를 연구 대상으로 선택했다. 그는 세포의 핵으로부터 인(Phosphorus)이 풍부하고 산성인 물질을 분리해냈으며, 이를 "뉴클레인(nuclein)"이라고 명명했다. 미셔는 이후 연어 정자와 같은 다른 유형의 세포에서도 뉴클레인을 발견하여, 이 물질이 생명체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임을 시사했다.
이 발견은 DNA를 세포 내의 독립적인 화학 물질로 확립했지만, 당시에는 그 생물학적 기능, 특히 유전 정보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00
1900
[핵산 구성 성분의 규명]
20세기 초, 유기 화학자 포부스 레빈(Phoebus Levene)은 핵산의 구성 성분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수행했다. 레빈은 핵산이 인산기(phosphate group), 디옥시리보스(deoxyribose) 당, 그리고 네 가지 질소 염기(아데닌, 구아닌, 티민, 시토신)로 구성되어 있음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DNA와 RNA라는 두 가지 형태의 핵산을 구별하는 데 기여했다.
1909
1909
[테트라뉴클레오티드 가설의 그림자]
그러나 레빈의 가장 잘 알려진 업적 중 하나는 동시에 과학적 이해를 수십 년간 지연시킨 원인이기도 했다. 레빈은 1909년경부터 시작하여 이후 30년 동안 이 네 개의 뉴클레오타이드가 단순하고 반복적인 A-G-C-T 패턴으로 연결된 구조를 가질 것이라는 '테트라뉴클레오티드 가설(Tetranucleotide Hypothesis)'을 확립하고 다듬었다. 이러한 구조적 단순화에 대한 주장은 DNA가 복잡한 생물학적 다양성을 암호화할 수 없다는 인식을 학계에 심어주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단백질이 20여 종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DNA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정보를 담을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레빈의 가설은 DNA가 단순한 지지대 역할만 수행하는 반면, 단백질이 유전 물질일 것이라는 편견을 강화하는 결정적인 역사적 장애물로 작용했으며, 이후 DNA의 기능적 중요성을 입증하는 연구 결과가 초기 학계에서 충분히 수용되지 못하는 배경을 제공했다.
1928
1928
[그리피스의 형질 전환 실험]
1928년 프레더릭 그리피스(Frederick Griffith)는 폐렴쌍구균(Pneumococci)을 이용한 실험을 통해 "형질 전환 원리(Transforming Principle)"의 존재를 처음으로 입증했다. 그리피스는 살아있는 비병원성 R형 박테리아가, 열처리로 죽은 병원성 S형 박테리아의 어떤 물질을 흡수하여 생존 가능한 병원성 S형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실험은 유전 정보가 세포 간에 안정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실체—비록 그 화학적 정체는 미상이었지만—가 있음을 명확히 증명했다.
열처리로 죽은 병원성 S형 박테리아의 어떤 물질을 흡수하여 생존 가능한 병원성 S형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실험을 통해 유전 물질이 최소한 단백질이 아님은 증명한 셈이다(단백질은 열에 의해 변성되기 때문이다).

1928
[출생]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제임스 듀이 왓슨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후 분자 생물학의 역사를 바꿀 주요 인물이 됩니다.
제임스 듀이 왓슨은 1928년 4월 6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살바도르 루리아의 작업을 통해 분자 생물학을 접하게 됩니다.
1928
1944
1944
[그리피스의 실험 완전 증명]
그리피스의 실험이 있은 지 16년 후, 오스왈드 에이버리(Oswald Avery), 콜린 맥클라우드(Colin MacLeod), 그리고 매클린 매카티(Maclyn McCarty)는 형질 전환 원리의 화학적 정체를 밝혀냈다. 이들은 효소 처리와 생화학적 정제 과정을 통해 형질 전환을 유도하는 물질이 단백질이 아닌 DNA라는 것을 증명했다. DNA 분해 효소(DNase)를 처리했을 때만 형질 전환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는 DNA가 유전자의 화학적 본질임을 명확히 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 실험은 당시 주류 과학계를 지배하던 단백질 중심의 유전학 가설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방법론적으로 매우 정교하고 중요한 증거를 제시했다.
1948
[박사 과정 시작 및 파지 그룹과의 만남]
인디애나 대학교 루리아의 실험실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고, 같은 해 막스 델브뤽을 처음 만났습니다.
1948년 초 왓슨은 인디애나 대학교의 루리아 실험실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그 해 봄, 그는 루리아의 아파트에서 막스 델브뤽을 처음 만났고, 여름에는 Cold Spring Harbor Laboratory로 첫 이동하여 델브뤽을 다시 만났습니다. 이 만남들은 왓슨이 파지 그룹에 속해 과학자로 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8
1949
[유전 물질에 대한 고민]
유전자가 단백질이라고 여기는 전통적 관념을 접했지만, 파지 그룹의 영향을 받아 DNA가 유전 물질이라는 에이버리-맥클라우드-맥카트 실험을 알게 됩니다.
1949년 왓슨은 당시의 전통적 관점인 유전자가 단백질이고 스스로 복제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강의를 펠릭스 하우로위즈와 같이 받았습니다. 염색체의 다른 중요한 분자 요소인 DNA는 '멍청한 테트라뉴클레오티드'라고 받아들여졌지만, 왓슨은 파지 그룹의 영향을 받아 DNA가 유전 물질이라고 제안한 에이버리-맥클라우드-맥카트 실험을 알고 있었습니다.
1949
1950
[동물학 박사 학위 취득]
22세의 나이로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의 연구 프로젝트는 엑스레이를 이용해 박테리아 바이러스를 불활성화 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1950년 왓슨은 22세의 나이로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의 연구 프로젝트는 엑스레이를 이용해 박테리아 바이러스를 불활성화 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1950
[샤가프의 등가 법칙]
구조 해명의 마지막 퍼즐 조각은 화학적인 분석에서 나왔다. 1950년 어윈 샤가프(Erwin Chargaff)는 DNA 염기 비율에 대한 중요한 관찰을 발표했다. 그는 DNA 이중 나선을 구성하는 아데닌(A), 시토신(C), 구아닌(G), 티민(T)의 양이 대칭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데닌의 수(A)는 티민의 수(T)와 같고, 시토신의 수(C)는 구아닌의 수(G)와 같다는 '샤가프의 제1법칙(Chargaff's first parity rule)'을 확립했다. 이 대칭성은 DNA 염기들이 무작위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특정 쌍을 이룬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했으며, 이는 이중 나선 구조 발견(1953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50
[박사 후 연구 시작]
박사 후 연구를 위해 코펜하겐 대학교의 생화학자 허번 칼크라 실험실로 향했지만, DNA 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칼크라와의 연구 방향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왓슨은 1950년 9월, 박사 후 연구를 위해 생화학자 코펜하겐 대학교의 허번 칼크라 실험실로 처음 향했습니다. 칼크라는 효소의 핵산 합성에 관심이 있었고 그는 파지를 실험적 제도로 이용하길 원했지만, 왓슨은 DNA 구조에 대해 알고 싶어 했기에 그의 관심은 칼크라의 것과는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1950
1951
[DNA 구조 규명에 대한 확신]
이탈리아에서 모리스 윌킨스가 자신의 DNA 엑스레이 회절 데이터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고 DNA 구조 규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같은 해 존 켄드루를 통해 잉글랜드에서 새로운 박사 후 연구 프로젝트를 마련하게 됩니다.
왓슨은 칼크라와의 건설적인 상호교류는 없었으나, 이탈리아에서의 미팅에서 모리스 윌킨스가 자신의 DNA 엑스레이 회절 데이터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왓슨은 당시 DNA가 더 자세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 해 여름, 루리아는 존 켄드루를 만났고 그는 잉글랜드의 왓슨을 위해 새로운 박사 후 연구 프로젝트를 마련했습니다.
1951
1952
1952
[허시-체이스 실험: 논란 종결]
Avery 팀의 1944년 발견은 당시 학계에서 회의론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952년 알프레드 허시(Alfred Hershey)와 마사 체이스(Martha Chase)의 실험은 DNA가 유전 물질이라는 결론을 확고하게 재확인했다. 이들은 박테리아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인 T2 박테리오파지 를 사용하여 실험을 수행했다. 허시와 체이스는 파지가 단백질 껍질과 내부의 DNA로 구성되어 있으며, 감염 시 유전 물질을 숙주 박테리아로 전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단백질에만 존재하는 황(Sulfur) 원소와 DNA에 풍부하게 존재하는 인(Phosphorus) 원소의 화학적 차이를 활용했다.

실험1에서 방사성이 표지된 박테리오파이지의 단백질은 박테리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용액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단백질은 유전물질일 수가 없다.
실험2에서 방사성이 표지된 박테리오파아지의 DNA는 박테리아 안으로 들어가서 원심분리하면 침전물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유전물질은 DNA이다.
[Photo 51의 획득과 헬릭스 증거]
프랭클린은 DNA 섬유의 수화 정도를 정밀하게 제어하여, 건조한 A형(A-Form)과 습윤한 B형(B-Form)을 분리하여 분석했다. 1952년, 그녀는 DNA 섬유에 총 62시간 동안 X선을 노출한 끝에, B형 DNA의 선명하고 결정적인 회절 패턴을 얻어냈다. 이것이 바로 DNA 구조 해명의 상징이 된 "사진 51(Photo 51)"이다
Photo 51은 B형 DNA가 나선형 구조(helical structure)를 가지고 있다는 명확하고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했다. 이 사진의 가장자리에는 특징적인 X자형 또는 왜곡된 마름모 형태가 나타났는데, 이는 나선 구조의 시그니처였다.

By Raymond Gosling/King's College London, 공정 이용, https://ko.wikipedia.org/w/index.php?curid=1373985
1953
1953
[라이너스 폴링의 뼈아픈 구조 해석 실패]
DNA 구조를 둘러싼 경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당시 세계 최고의 화학자 중 한 명이자 이미 단백질의 alpha 나선 구조를 성공적으로 예측했던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이 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1953년 초, 폴링은 로버트 코리(Robert Corey)와 함께 DNA 구조 모델을 제안했지만, 이는 부정확한 3중 나선 구조로 판명되었다.
폴링의 실패 원인은 불충분한 데이터에 의존한 점과 문헌 검토를 소홀히 한 데 기인했다. 특히,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은 폴링이 유전자는 상보성으로 복제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이전 논문 내용조차 망각하고 있었다고 지적하며, 그가 구조 해명을 위한 기초적인 데이터 검토나 동료와의 대화를 소홀히 했음을 비판했다. 이 사건은 아무리 천재적인 과학자라도 기본적인 화학적 환경(용액 화학 및 이온화 상태)에 대한 지식과 필수적인 실험 데이터를 무시할 경우 중대한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 폴링의 이 뼈아픈 실수는 경쟁자였던 왓슨과 크릭(Watson and Crick)에게 구조 경쟁에서 승리할 시간과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나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당시 폴링은 반핵연설을 계속하였다. 그 때문에 FBI의 조사를 받기도 하고, 미 정부로부터 여권발급을 거절당하기도 하였다. 그의 여권은 1954년 그의 첫 노벨상 수상에 앞서 잠시 재발급되었다. 따라서 그가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면 그의 동료인 로베르트 코레이 대신 프랭클린의 연구소에 방문해서 그 유명한 그녀의 DNA의 X선 회절사진을 봤을 가능성이 있었고 DNA 구조를 제대로 풀어 세계 최초로 노벨상을 3개 받았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실수를 한 폴링 박사는 그래서 너무나 인간적이고 사랑스럽고 존경받아 마땅하다.
1953
[DNA 이중나선 구조 추정]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추정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삼중나선을 생각했으나, 여러 실험 결과를 종합하여 이중나선 구조를 확신하게 됩니다.
1953년 3월,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추정했습니다. 이들은 처음엔 DNA가 삼중나선일 것이라 생각했기에 3가닥 모형을 만들었지만, 염기들의 수소결합을 암시하는 노팅엄대학 매슨 걸랜드 연구팀의 DNA의 산성도에 따른 점성도의 변화 실험을 뒤늦게 알게 되어 이중나선구조를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폴링의 잘못된 가설 논문을 들고 윌킨스와 플랭클린에게 보여주려고 떠난 여행에서 윌킨스가 플랭클린이 최근에 찍은 X선 회절 사진을 왓슨에게 보여줘 DNA가 이중나선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953
1953
[DNA 이중나선 구조 논문 발표]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DNA의 이중나선 구조에 관한 역사적인 논문을 과학 저널 <네이처>에 발표하여, 20세기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 중 하나로 평가받았습니다.
왓슨과 크릭은 1953년 4월 25일 출간된 과학저널 <네이처>에 DNA의 이중나선 구조에 관한 논문을 제출했습니다. 캐번디시 실험실 감독 로렌스 브래그 경은 이보다 앞선 4월 8일 솔베이 컨퍼런스에서 단백질을 처음 발표했지만 인쇄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의 논문은 다른 생물학자들과 노벨상 수상자들로부터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으로 불리게 됩니다.
1953
[DNA 이중나선 구조 발표]
1953년 4월 25일,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J. D. Watson and F. H. C. Crick)은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디옥시리보 핵산의 구조(A Structure for Deoxyribose Nucleic Acid)"라는 제목의 간결한 논문을 발표하며 과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를 공식화했다.
이들의 모델은 샤가프의 법칙과 프랭클린의 결정학적 데이터를 완벽하게 통합했다. 왓슨과 크릭은 프랭클린의 데이터를 통해 인산-당 백본이 바깥쪽에 위치하며 역평행(antiparallel)을 이룬다는 것을 확정했고, 샤가프의 A=T, C=G 비율을 충족시키기 위해 염기들이 분자 내부에서 특정 쌍(A-T, G-C)을 형성하여 수소 결합으로 연결된다는 개념을 제시했다.
왓슨과 크릭이 제안한 이중 나선 구조는 단순한 분자 모델을 넘어섰다. 그들은 이 구조가 "상당한 생물학적 관심"을 갖는 "새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기술했으며, 염기들의 상보적인 쌍 결합은 유전 정보의 보관뿐만 아니라, 세포 분열 시 정보가 오류 없이 복제되는 메커니즘을 자연스럽게 설명해주었다. 구조 그 자체에 유전 정보의 전달 및 복제 원리가 내포되어 있었으며, 이는 분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탄생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1953
[DNA 이중나선 구조, 학생 신문에 보도]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 신문인 Varsity에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에 대한 짧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생 신문인 Varsity는 1953년 5월 30일,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에 대한 짧은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는 이 발견이 과학계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1953
1953
1953
[프랭클린 데이터의 결정적 역할과 논란]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실험적 성과는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의 최종 모델 구축에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했다. 그녀의 데이터는 다음 세 가지 핵심 정보를 제공하며 이론적 모델에 구조적 제약을 가했다.
1. DNA는 이중 나선 형태이다.
2. 설탕-인산 백본은 분자 외부에 놓여야 한다.
3. 두 백본은 역평행(antiparallel)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다.
그러나 왓슨과 크릭이 최종 구조를 발표할 당시, 프랭클린은 이 결정적인 결정학적 증거(Photo 51 포함)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동료 모리스 윌킨스(Maurice Wilkins)와 막스 페루츠(Max Perutz)를 통해 그들에게 전달되었다는 논란에 휩싸여 있다. 그녀의 실험적 공헌이 발견에 결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왓슨과 크릭의 논문에서는 그녀에게 "빈약한 인정(scant acknowledgment)"만이 주어졌다. 왓슨이 이후 저서 '이중 나선(The Double Helix)'에서 보인 그녀에 대한 태도는 당대 과학계에 만연했던 성별에 대한 차별적 관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비판받았으며, 이는 과학사에서 실험 데이터의 소유권과 공정한 인정을 둘러싼 가장 중요한 윤리적 쟁점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왓슨과 크릭의 1953년 《네이처》 논문("Molecular structure of nucleic acids; a structure for deoxyribose nucleic acid")에는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E. Franklin)은 저자로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포함되어야 마땅했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치졸함을 보였습니다.
왓슨과 크릭 논문의 감사(Acknowledgement) 문구
왓슨과 크릭은 논문의 마지막 문단에서 모리스 윌킨스 박사(Dr. M. H. F. Wilkins)와 로절린드 프랭클린 박사(Dr. H. E. Franklin)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We have also been stimulated by a knowledge of the general nature of the unpublished experimental results and ideas of Dr. M. H. F. Wilkins, Dr. H. E. Franklin and their co-workers at King's College, London."
(번역) "우리는 또한 런던 킹스 칼리지의 M. H. F. 윌킨스 박사, H. E. 프랭클린 박사 및 그들의 공동 연구자들의 미발표 실험 결과와 아이디어의 일반적인 성격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자극을 받았습니다."
이 문구는 그들의 연구가 왓슨과 크릭의 DNA 모델 제시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아닌 '미발표 결과를 제공한 연구자'로서 감사의 말에 포함되었습니다.
현재 우리 연구 윤리 잣대로 판결을 내리자면 저 위대한 논문은 철회되고 다시 저자가 보강되고 바뀌어서 재출간되어야 마땅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힌 왓슨 박사는 불명예스럽게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만 로잘린드 프랭클린 박사의 이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왓슨박사의 이름 대신에.....
1953
[Cold Spring Harbor Symposium 발표]
제18회 Cold Spring Harbor Symposium on Viruses에서 DNA 이중나선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여, 아직 이 발견을 듣지 못한 많은 과학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왓슨은 1953년 6월 초 제18회 Cold Spring Harbor Symposium on Viruses에서 DNA 이중나선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왓슨과 크릭이 <네이처>에 논문을 실은지 6주 후였는데, 그 모임의 많은 사람들은 아직 그 발견에 대해 듣지 못했었습니다. 이 심포지엄은 많은 사람들이 DNA 이중나선 모델을 처음으로 볼 기회였습니다.
1953
1953
1953
[DNA 구조 해명의 역사적 유산]
DNA가 유전 물질이라는 사실과 그 구조가 밝혀진 과정은 1869년 뉴클레인의 단순한 화학적 분리에서 시작하여 1953년 이중 나선 모델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약 84년간 지속된 과학적 대장정이었다.
프리드리히 미셔의 DNA 분리, 포부스 레빈의 구성 성분 규명과 테트라뉴클레오티드 가설이라는 구조적 오해, 그리고 그리피스, 에이버리-맥클라우드-매카티, 허시-체이스로 이어지는 일련의 획기적인 실험들을 통해 DNA는 비로소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적 핵심 물질로 확립되었다.
이후 어윈 샤가프의 화학적 제약과 당대 최고의 석학 라이너스 폴링의 구조적 실패라는 경쟁적 배경 속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업적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가 획득한 "사진 51"은 이중 헬릭스의 형태, 정확한 치수, 그리고 인산기의 외부 위치를 제공하여, 폴링의 오류를 배제하고 왓슨과 크릭이 정확한 이중 나선 모델을 구축할 수 있는 필수적인 실험적 토대를 제공했다. 프랭클린의 실험적 통찰력 없이는 이중 나선 구조의 해명이 지연되거나 불가능했을 것이다.
DNA 이중 나선 구조의 발견은 유전학, 의학, 생명공학 분야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구조는 유전 암호의 작동 방식과 유전병의 분자적 근거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었으며, 생명과학 전체를 분자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중대한 기여와 그에 대한 지연된 인정은 과학적 공로의 평가 및 과학적 윤리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후대에 남겼다.
1956
[하버드 대학교 교수 부임]
하버드 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로 연속 승진을 달성하며 분자생물학 연구를 이끌었습니다.
왓슨은 1956년에 하버드 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조교수로부터 부교수, 정교수로 연속 승진을 달성했습니다. 그는 하버드대에서 고전 생물학에서 분자 생물학으로의 전환을 옹호하며 학문적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1956
1962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DNA의 핵산 구조 연구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왓슨, 크릭, 그리고 윌킨스는 1962년 그들의 핵산의 구조에 대한 연구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이는 1953년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은 것입니다.
1962
1965
[저서 'The Molecular Biology of the Gene' 출판]
교과서인 'The Molecular Biology of the Gene'를 출판하며 분자생물학 지식의 대중화에 기여했습니다.
왓슨은 1965년에 교과서인 'The Molecular Biology of the Gene'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분자생물학 분야의 중요한 저서로 인정받았습니다.
1965
1968
[베스트셀러 'The Double Helix' 출판]
DNA 구조 발견에 대한 베스트셀러 'The Double Helix'를 출판하여 과학적 발견의 과정을 대중에게 흥미롭게 전달했습니다.
왓슨은 1968년에 DNA 구조 발견에 대한 베스트셀러인 'The Double Helix'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당시 과학계의 치열한 경쟁과 연구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1968
1968
[Cold Spring Harbor 연구소 감독 취임]
하버드 대학교 교수직을 정리하고 Cold Spring Harbor 연구소의 감독이 되어 연구소를 세계적인 분자생물학 연구센터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1968년, 왓슨은 Cold Spring Harbor 연구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시간제로 하버드와 콜드 스프링 하버를 오가며 근무하다가, 1968년 끝내 하버드의 교수직을 정리하고 콜드 스프링 하버의 연구소장직에 전념했습니다. 소장으로서 그의 청사진은 연구소를 세계적 분자생물학 연구센터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었으며, 유전자 치료와 암 정복을 연구소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1968
1968
1968년 3월 28일 왓슨은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고의 라홀라 해변 교회에서 엘리자베스 루이스와 결혼했습니다.
1968
1971
1971년 12월 닉슨 미국 대통령은 국가암퇴치법을 통과시켜 역사상 최대의 암 정복 운동을 벌였습니다. 법안의 요지는 연방정부가 국립암연구소를 통해 암 정복의 기초 연구에 엄청난 규모의 연구기금을 10여 년에 걸쳐 지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71
1972
[암 연구 기금 유치]
Cold Spring Harbor 연구소가 국립암연구소로부터 5년 동안의 암 연구 기금을 유치하며 연구 역량을 강화했습니다.
1972년, Cold Spring Harbor 연구소는 5년 동안의 암 연구기금을 국립암연구소로부터 유치하면서 최고 수준의 젊은 종양바이러스학자들을 연구소로 끌어들여 연구 역량을 한층 강화했습니다. 이는 의학계와 정치권의 암 정복이라는 국가적 과제에 대한 관심에 힘입은 것이었습니다.
1972
1974
1970년과 1972년 사이에 왓슨은 두 아들을 갖게 되었고, 1974년 그의 가족은 Cold Spring Harbor에 그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었습니다.
1974
1976
왓슨은 하버드 대학교에서의 교수 생활 대신 뉴욕주 롱아일랜드 북부 해변에 위치한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를 이끌어나가는 연구관리자 일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는 심지어 학생들이 그들의 연구가 방해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1976년에 학교를 떠났습니다.
1976
1977
[RNA 접합절단 발견]
Cold Spring Harbor 연구소의 리처드 로버츠가 RNA 접합절단(분할유전자)을 발견하는 중요한 연구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77년,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의 리처드 로버츠가 RNA 접합절단 또는 분할유전자를 발견하는 중요한 연구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mRNA가 핵 안의 DNA로부터 유전정보를 읽어 단백질 합성이 일어나는 세포질에 유전정보를 전달하기 전, 불필요한 염기 서열인 인트론을 제거하고 유용한 염기인 엑손을 연결하는 과정인 접합절단이 일어난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1977
1980
[제한효소 기술 개발 주도]
Cold Spring Harbor 연구소의 리처드 로버츠가 수많은 미생물로부터 새로운 제한효소를 정제하는 기술을 개발했고, 이는 DNA 재조합 연구에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습니다.
1972년경 로버츠는 수많은 미생물로부터 새로운 제한효소를 정제하는 기술을 개발했고, 1980년경이 되어 세상에 알려진 제한효소의 절반 이상이 그의 실험실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이러한 효소들이 DNA 재조합 관련 업체에 의해 상업적으로 활용될 기미가 보이자, 로버츠는 새롭게 발견된 효소를 무료로 전 세계 학계 연구자들에게 제공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콜드 스프링 하버는 종양 바이러스 연구자들을 위한 메카가 되었으며, 이 연구소의 소장으로서 암과의 전쟁에 선봉에 선 왓슨은 다시 한 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1980
1988
1988년, 60세의 왓슨은 NIH 산하 인간게놈 연구 기획에 합류했고, 그 이듬해에는 인간게놈연구센터의 초대 소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인류의 유전 정보 해독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게 됩니다.
1988
1990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 공식 시작]
NIH와 DOE 공동으로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왓슨은 이 프로젝트의 초대 소장으로서 연구를 주도했습니다.
1990년 8월, NIH와 DOE 공동으로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가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연방정부가 산하 기관을 통해 지원하는 이 프로젝트는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청사진인 모든 유전 정보를 완전히 해독하고, 아울러 게놈 지도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작성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왓슨은 이 프로젝트의 초대 소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90
1990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윤리적 측면 강조]
HGP 예산의 일부를 프로젝트가 일으킬 수 있는 과학적, 윤리적 문제에 대한 연구에 투입하도록 주도하며 '윤리, 법, 사회관계(ELSI)'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왓슨은 HGP 예산의 일부를 이 프로젝트가 일으킬 수 있는 과학적, 윤리적 문제에 대한 연구에 투입하도록 주도했습니다. 그의 선언에 힘입어 HGP가 본격화된 1990년부터 게놈 연구의 윤리적, 법적, 사회적 의미를 연구하는 프로젝트 '윤리, 법, 사회관계'에 연간 예산의 5%가 투입되었습니다. 이는 HGP로부터 예상되는 문제점 도출과 그에 대한 실제적인 제도적 대안 마련,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 등 다양한 활동을 폈으며, 이후 ELSI 연구는 생명공학 프로젝트 등에서 필수적인 세부 과제로 점차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990
1992
1992년을 기점으로 HGP는 국제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프로젝트를 미국이 주도하고 분석 작업 역시 절반 이상이 미국에서 이루어졌지만,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을 비롯한 쟁쟁한 국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추가로 동참했습니다. HGP는 전 세계 18개국의 연구진이 참여하는 국제 컨소시엄으로 발전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 이외에도 세균에서 꼬마선충에 이르기까지 몇 가지 생물의 염기 서열 분석이 완료되는 등 그 범위와 속도를 더하게 되었습니다.
1992
1992
1992년 HGP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 왓슨은 NIH의 소장으로 부임한 버너딘 힐리와 충돌을 빚으면서 HGP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두 사람의 분쟁 원인은 DNA의 특허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왓슨은 NIH 연구자들이 분석한 DNA 서열에 정부 특허 취득을 주장한 힐리의 결정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불확실한 유전자에 특허를 내줄 경우 장기적으로 의학 연구와 발전이 지체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1992
1998
[HGP 경쟁 구도 형성 및 가속화]
미국의 민간 생명공학회사 셀레라 지노믹스 사가 인간 유전체 연구에 뛰어들면서 HGP와 경쟁 구도를 형성, 유전자 해독 작업이 급류를 타게 되었습니다.
1998년 미국의 민간 생명공학회사인 셀레라 지노믹스 사가 인간 유전체 연구에 뛰어들면서 HGP와 경쟁 구도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유전자 해독 작업은 급류를 타기 시작하여 2005년까지 끝내기로 한 것을 2003년으로 앞당겨 끝냈습니다.
1998
1999
[United Biomedical 이사회 은퇴]
Chang Yi Wang이 설립한 United Biomedical의 이사회 멤버로 6년간 일하고 은퇴했습니다.
왓슨은 Chang Yi Wang이 설립한 Board of Directors of United Biomedical의 이전 멤버였습니다. 그는 6년간 일하고 1999년 은퇴했었습니다.
1999
2000
[저서 'Passion for DNA' 출판]
저서 'Passion for DNA'를 출판하며 자신의 과학적 열정과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왓슨은 2000년에 저서 'Passion for DNA'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그의 DNA 연구에 대한 깊은 열정과 과학적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2000년 컨퍼런스에서 왓슨은 피부 색깔과 성욕 사이의 관계에 대해 발표하며 비키니를 입은 여자의 사진을 슬라이드에 띄우고, 피부의 멜라닌이 성 충동을 향상시킨다며 “이것이 당신에게 라틴계 연인이 있는 이유입니다.”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습니다.
2000
2000
[인간게놈지도 초안 완성 발표]
HGP 컨소시엄과 셀레라 지노믹스 사가 공동으로 인간게놈지도 초안을 완성하여 발표하며 인류 유전체 해독의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2000년 6월, HGP 컨소시엄과 셀레라 지노믹스 사가 공동으로 인간게놈지도 초안을 완성하여 발표했습니다. 이는 인간 유전체 해독 작업의 놀라운 진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성과였습니다.
2000
2001
[전체 인간게놈지도 완성 공식 발표]
HGP 컨소시엄과 셀레라 지노믹스 사가 공동으로 전체 인간게놈지도를 완성했다고 공식 발표하여 의학과 인류 복지에 혁명적 진전을 예고했습니다.
수정된 목표보다 2년여가 더 빠른 2001년 2월, HGP 컨소시엄과 셀레라 지노믹스 사 두 조직은 전체 인간게놈지도를 완성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생명 현상에 대한 좀 더 확실한 접근이 가능해지고, 인류가 시달려왔던 많은 유전병 치료와 의약용으로 쓰일 각종 생체물질의 연구와 생산이 가능하게 됐습니다. 이는 암과 심장병 같은 복잡한 유전병에 대한 생물학적 통찰력은 물론 의학적 혜택 또한 엄청나 의학 분야에 혁명을 가져올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됩니다.
2001
2003
[인본주의자 선언문 서명]
인본주의자 선언문에 서명한 22명의 노벨상 수상자 중 한 명으로서, 그의 무신론적 관점을 공개적으로 표명했습니다.
무신론자인 왓슨은 2003년의 인본주의자 선언문에 서명한 22명의 노벨상 수상자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저서 'DNA: The Secret of Life' 출판]
저서 'DNA: The Secret of Life'를 출판하며 DNA와 생명의 비밀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높였습니다.
왓슨은 2003년에 저서 'DNA: The Secret of Life'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DNA와 생명 현상에 대한 그의 깊은 통찰을 대중에게 전달합니다.
2003
2007
[Champalimaud Foundation 심의회 장 취임]
Champalimaud Foundation의 레너 블레자의 권유를 받아 재단의 고문 역할을 하는 과학적 심의회의 장이 되었습니다.
2007년 1월, 왓슨은 Champalimaud Foundation의 장인 레너 블레자의 권유를 받아들여 재단의 고문을 하는 기관인 과학적 심의회의 장이 되었습니다.
2007
2007
[인종주의적 발언 파문]
영국 선데이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인종과 지능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논란의 발언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2007년 10월, 왓슨은 영국 선데이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흑인들이 백인과 동일한 지적 능력을 갖췄다는 전제 하에 이뤄지고 있는 서구 국가들의 아프리카 관련 정책들은 잘못됐다'며 '인종간 지능의 우열을 가리는 유전자가 앞으로 10년 안에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그는 문제가 커지자 공식 사과했지만 영국에서는 왓슨 박사의 발언을 놓고 논란이 계속됐습니다.
2007
2007
[Cold Spring Harbor 연구소 은퇴]
인종주의적 발언 논란이 커지자, 79세의 나이로 40년 가까이 봉사했던 Cold Spring Harbor 연구소에서 은퇴했습니다.
2007년 10월, 언론에 그의 인종주의적 발언이 노출되어 큰 논란을 일으키자, 결국 왓슨은 인종과 지능에 관한 비판적 관점을 철회했고, 1주 후인 25일에 79세의 나이로 '40년 가까이 고귀한 봉사를 했던' Cold Spring Harbor 연구소에서 은퇴했습니다. 왓슨은 성명서에서 그의 은퇴 이유를 그의 나이와 주변 환경으로 설명했습니다.
2007
2008
[저서 'Avoid Boring People' 출판]
저서 'Avoid Boring People(And Other Lessons from a Life in Science)'을 출판하며 과학 연구와 삶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담았습니다.
왓슨은 2008년에 저서 'Avoid Boring People(And Other Lessons from a Life in Science)'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과학자로서의 삶과 연구에 대한 그의 통찰을 보여줍니다.
2008
2019
[인종차별적 견해 재확인 및 연구소와 인연 단절]
미국 PBS 다큐멘터리에서 2007년에 했던 인종차별적 견해가 변하지 않았다고 답변하여 파장이 커졌고, 결국 연구소는 왓슨과의 모든 인연을 끊기로 결정했습니다.
2019년 1월 2일에 방송된 미국 PBS 다큐멘터리에서 왓슨은 2007년에 했던 인종차별적 견해가 바뀌었냐는 질문에 '전혀 아니다'라고 답해 파장이 커졌습니다. 이로 인해 Cold Spring Harbor 연구소는 '과학적 근거가 없고 입증되지 않은 개인적인 의견'이라며 왓슨과의 모든 명예 직함과 지원을 철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그의 오랜 과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논란의 발언으로 인해 과학계와의 관계가 단절된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2019
2025
[별세]
제임스 D. 왓슨 박사가 9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워싱턴포스트 등은 왓슨 박사가 미국 뉴욕 이스트 노스포트의 한 호스피스 시설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왓슨 박사는 지난 2018년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후 요양 중이었다.
정확한 사인은 유족 측에서 공개하지 않았다.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