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14- 12:32:20
루브르의 수난사는 문화유산 보존을 둘러싼 거대한 투쟁의 축소판이다. 국가 권력의 약탈로 태동하여 개인의 절도, 이념적 공격, 조직적 범죄의 표적이 되기까지, 루브르는 가해자이자 피해자였고, 견고한 요새인 동시에 끊임없이 공격받는 목표물이었다. 그 역사는 정적인 영광이 아닌, 위기를 통해 보안과 정체성을 재정립해 온 역동적 갈등의 기록이다. 이 영원한 대결의 상대는 단지 도둑이나 파괴자뿐만이 아니라, 안일함과 변화하는 시대의 가치관 그 자체다.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2- 23:31:23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붓 끝에서 탄생한 한 여성의 초상화는 500년의 세월을 거치며 단순한 그림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프랑스 왕실의 보물에서 혁명을 거쳐 만인의 예술품이 되었고, 세기의 도난 사건을 통해 전 지구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전쟁의 포화를 피하고 테러의 위협을 견뎌내며, 그 신비로운 미소는 시대의 욕망과 불안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이제 <모나리자>는 예술사를 넘어 인류의 문화사 그 자체가 되었으며, 그 가치는 캔버스가 아닌, 이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와 상징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1452
1452
[레오나르도 다빈치 탄생]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의 빈치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공증인 아버지 피에로와 농민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의 사생아였습니다.
이러한 출신 배경은 그의 삶과 예술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새벽 3시경,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마을 빈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조부가 공증인이었기에 중요한 일을 기록하는 습관 덕분에 이처럼 정확한 출생 시간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피에로는 법률가 집안 출신의 공증인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나는 가난한 농가의 딸이었기에,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하지 못했습니다.
사생아라는 신분은 레오나르도가 대학교에 진학하거나 법률가, 의사 등 당시 주류 직업을 갖는 것을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정규 교육 대신 자연과 사물을 직접 관찰하고 탐구하는 비정통적인 방식으로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그가 기존의 학문적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해부학, 광학, 지질학 등 다방면에 걸쳐 독창적인 탐구를 수행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훗날 <모나리자>에 구현된 인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연의 오묘한 표현은 바로 이 시기부터 시작된, 관습을 넘어선 그의 끊임없는 탐구 정신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503
1503
[모나리자 제작 착수]
피렌체의 부유한 비단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가 자신의 아내 리사 게라르디니의 초상화를 레오나르도에게 의뢰했습니다.
당시 24세였던 리사 부인은 둘째 아들을 출산한 직후였으며, 이것이 초상화 제작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의뢰를 수락하고, 르네상스 초상화의 역사를 바꿀 혁신적인 작품의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학설에 따르면, 이 작품은 피렌체의 비단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가 아내 리사 게라르디니(Lisa Gherardini)를 위해 주문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조콘도의 부인'이라는 뜻의 <라 조콘다(La Gioconda)>로 불립니다. 당시 레오나르도는 다른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음에도 이례적으로 초상화 의뢰를 수락했는데, 모델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었기에 예술적 자유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기법들을 집약시켰습니다. 인물을 정면이나 측면이 아닌 4분의 3 각도로 배치하고, 관람자와 시선을 맞추게 하여 심리적 교감을 유도했습니다. 또한, 인물의 배경을 더 낮게 배치하는 피라미드 구도를 통해 안정감과 장엄함을 부여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핵심은 레오나르도가 평생에 걸쳐 탐구한 과학과 예술의 총체적 결합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스푸마토(Sfumato) 기법: 그는 인물의 윤곽선을 명확하게 그리는 대신, 색채를 미묘하게 번지게 하여 경계를 흐리는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입가와 눈가에 신비로운 표정을 만들어냈으며, 대기와 빛에 대한 그의 광학 연구가 회화에 적용된 결과입니다.
해부학적 지식: 수많은 인체 해부를 통해 얻은 지식은 미소 짓는 순간의 미세한 근육 변화까지 포착하여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을 부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자연과의 조화: 배경의 기암괴석과 굽이치는 강물은 그의 지질학적 관찰이 반영된 것으로, 인물의 의상과 머리카락의 곡선과 조응하며 인간과 자연의 우주적 연결이라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정수를 시각적으로 구현합니다.
이처럼 <모나리자>는 한 개인의 초상화를 넘어,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거장의 예술 철학과 과학적 탐구가 집대성된 불멸의 걸작으로 탄생했습니다.
1516
1516
[프랑스로의 이주와 <모나리자>의 동행]
레오나르도는 로마에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신진 예술가들의 명성에 가려 입지가 좁아지자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프랑스 앙부아즈로 이주하면서, 완성되지 않은 <모나리자>를 포함한 주요 작품들을 직접 가지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습니다.
이 여정은 <모나리자>가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에 자리 잡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6세기 초 로마에서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교황의 후원을 받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노장이었던 레오나르도는 설 자리를 잃어가던 중,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 매료된 젊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파격적인 제안을 받게 됩니다. 왕은 그에게 '왕의 수석 화가, 건축가, 기술자'라는 칭호와 함께 안정적인 연금, 그리고 거처로 클로 뤼세 성을 제공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제안을 수락하고 피렌체에서 밀라노, 로마를 거쳐 프랑스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오릅니다. 이때 그는 <세례자 요한>,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 그리고 <모나리자>를 가지고 갔습니다. 의뢰인인 조콘도 가문에게 작품을 인도하지 않고 10년 넘게 직접 소장하며 계속해서 붓질을 더했다는 사실은, 그가 이 그림을 단순한 주문 제작품이 아닌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실현하는 궁극의 매체로 여겼음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1518
1518
[프랑스 왕실 컬렉션 편입]
프랑수아 1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로부터 <모나리자>를 구매하여 프랑스 왕실 소장품 목록에 공식적으로 포함시켰습니다.
이 거래를 통해 <모나리자>는 이탈리아 화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으로 프랑스의 국유 재산이 되었습니다.
이는 훗날 제기될 소유권 논쟁의 향방을 결정지은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프랑수아 1세가 레오나르도로부터 그림을 직접 구매했는지, 혹은 선물로 받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1518년경, 작품이 왕실 컬렉션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명확합니다. 이 합법적인 소유권 이전은 <모나리자>의 운명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았습니다.
이 사건은 두 가지 중요한 오해를 바로잡는 핵심 근거가 됩니다. 첫째, 훗날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이 제기한 '나폴레옹 약탈설'은 사실이 아닙니다. <모나리자>는 전쟁 약탈품이 아니라, 작가와 후원자 사이의 정당한 거래를 통해 프랑스로 귀속되었습니다. 둘째, 이로 인해 이탈리아 정부나 시민 단체의 반환 요구는 법적 정당성을 갖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1518년의 소유권 이전은 <모나리자>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역사적, 법적 토대를 마련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었습니다.
1519
1519
[퐁텐블로 성에 보관되다]
프랑수아 1세는 <모나리자>를 자신의 주 거처이자 르네상스 양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퐁텐블로 성에 보관했습니다.
이 시기 그림은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채 왕의 개인적인 감상품으로 여겨졌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들 앙리 2세는 이 그림을 자신의 욕실에 걸어두기도 했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모나리자>를 비롯한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퐁텐블로 성에 소장하여 자신만의 컬렉션을 구축했습니다. 당시 예술 작품은 공공재가 아닌 군주의 권위와 부를 과시하는 사유재산이자 장식품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앙리 2세가 그림을 욕실에 걸었다는 일화는 이러한 시대적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모나리자>는 약 1세기 이상 퐁텐블로 성에 머물며 소수의 왕족과 귀족들만이 접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보물로 존재했습니다.
1519
1519
[레오나르도 다빈치 사망]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프랑스 앙부아즈 근처 클로 뤼세 성에서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예술에 온전히 헌신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그의 죽음으로 <모나리자>는 완전히 프랑스 왕실의 유산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말년에 오른손 마비로 인해 그림 작업에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르도는 죽기 직전까지 과학 연구와 스케치 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랑수아 1세의 극진한 총애 속에서 임종을 맞았으며, 그의 시신은 앙부아즈 성의 생 플로랑탱 교회에 안장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죽음 이후, <모나리자>는 한 예술가의 손을 떠나 프랑스 왕가의 보물로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1690
1690
[베르사유 궁전으로 이전]
'태양왕' 루이 14세가 프랑스의 정치, 문화 중심지를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기면서 왕실의 주요 예술품 컬렉션도 함께 이전했습니다.
이때 <모나리자>도 퐁텐블로를 떠나 베르사유 궁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프랑스 혁명이 발발할 때까지 베르사유 궁전에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의 권위를 상징하는 베르사유 궁전을 유럽 최고의 예술품으로 채우고자 했습니다. <모나리자>는 왕실 컬렉션의 일부로서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함을 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작품은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채, 왕의 절대 권력 아래 궁전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1796
[나폴레옹의 '위대한 박물관' 건립을 위한 약탈]
프랑스 혁명 정부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계 최고의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명분 아래, 이탈리아, 저지대 국가, 독일, 스페인 등 점령지에서 예술품을 체계적으로 약탈하여 루브르(당시 '나폴레옹 박물관')로 이송했다. 이는 루브르 컬렉션의 핵심을 형성했으나, 동시에 약탈 문화재라는 원죄를 남겼다. 이 사건은 국가 주도의 문화유산 탈취에 대한 국제적 논쟁을 촉발시켰다.
나폴레옹 시대의 예술품 약탈은 단순한 전리품 획득을 넘어선, 국가적 자부심과 문화적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위한 고도로 조직된 프로젝트였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예술품을 독재자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 '자유의 고향'인 공화국 프랑스에서 만인이 향유하게 한다는 계몽주의적 명분을 내세웠다. 이러한 수사는 군사적 정복 행위에 문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기능했다.
이 과정은 매우 체계적이었다. 나폴레옹은 군대와 함께 예술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commissaires)를 파견하여 점령지에서 최고의 작품들을 선별하도록 했다.
특히 패전국에게 강요된 평화 조약에는 예술품 양도를 명시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는데, 1797년 교황청과 맺은 톨렌티노 조약이 대표적인 예다. 이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고대 로마의 걸작 조각상인 '아폴로 벨베데레', '라오콘 군상' 등을 합법적인 형태로 탈취할 수 있었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1802년 루브르(1803년 '나폴레옹 박물관'으로 개칭)의 관장으로 임명된 도미니크-비방 드농이 있었다. '나폴레옹의 눈'이라 불린 그는 직접 군대를 따라다니며 유럽 전역의 예술품을 선별했다. 그의 지휘 아래 루브르는 베네치아에서 가져온 파올로 베로네세의 '가나의 혼인 잔치', 안트베르펜에서 온 루벤스의 작품들, 그리고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약탈한 수천 점의 걸작들로 채워졌다.
1796
1797
1797
[루브르 박물관 영구 전시 시작]
프랑스 혁명은 예술품의 소유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혁명 정부는 베르사유 궁전에 있던 왕실 컬렉션을 모두 국유화하여 루브르 궁전을 대중을 위한 박물관으로 개관했습니다.
이때 <모나리자>도 루브르로 옮겨져, 왕의 소유물에서 모든 국민이 감상할 수 있는 공공재로 거듭났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왕의 것'은 '인민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따라 1793년 루브르 박물관이 대중에게 문을 열었고, 1797년부터 <모나리자>는 이곳에서 영구적으로 전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수 세기 동안 궁전에 갇혀 있던 <모나리자>는 비로소 대중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 그림은 수많은 걸작 중 하나로 여겨졌을 뿐, 오늘날과 같은 독보적인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1801
1801
[나폴레옹 침실에 걸리다]
당시 프랑스의 제1통령이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모나리자>의 매력에 빠져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 그림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약 4년 동안 튈르리 궁전에 있는 자신의 침실에 이 그림을 걸어두고 감상했습니다.
이 일화는 당대 최고 권력자가 인정한 <모나리자>의 예술적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나폴레옹은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루브르에 있던 <모나리자>를 자신의 개인 공간인 튈르리 궁전 침실로 옮겨와 약 4년간 소장했습니다. 황제가 된 후인 1804년, 그는 그림을 다시 루브르 박물관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 사건은 <모나리자>가 가진 독특한 아우라와 예술적 위상이 이미 19세기 초부터 최고 권력자들에게 인정받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일화로 남아있습니다.
1815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대패하자,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루브르로 보내졌던 많은 예술품들이 원래 고국으로 반환되었다.
이 시기에 박물관장이 일부 작품을 지하실에 빼돌려 돌아가지 못한 작품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1815
1907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과 도난 조각상]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비서였던 제리 피에레가 루브르에서 고대 이베리아 두상 여러 점을 훔쳤다. 이 조각상들은 당시 무명이었던 파블로 피카소에게 팔렸고, 피카소는 이 조각상의 원시적인 형태에서 영감을 받아 입체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을 제작했다. 이 사건은 당시 루브르의 허술한 보안 실태와 함께, 박물관의 유물이 어떻게 아방가르드 예술의 탄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기묘한 연결고리를 드러냈다.
20세기 초 루브르의 보안은 상상 이상으로 허술했다. 당시 많은 유물들은 별도의 잠금장치나 유리 진열장 없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고, 경보 시스템도 전무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비서였던 오노레-조제프 제리 피에레는 1907년 3월경, 외투 속에 작은 이베리아 석조 두상들을 숨겨 유유히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이 도난은 너무나 손쉬웠기에 한동안 아무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피에레는 훔친 두상 중 최소 두 점을 단돈 50프랑에 파블로 피카소에게 팔았다. 당시 피카소는 서구 고전주의의 전통에서 벗어날 새로운 조형 언어를 모색하고 있었고, 루브르 전시에서 보았던 이베리아 조각의 원시적이고 강렬한 형태에 매료된 상태였다. 그는 도난품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조각상들을 구매했으며, 그 형태를 자신의 혁신적인 작품에 직접적으로 차용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20세기 미술의 흐름을 바꾼 걸작 '아비뇽의 처녀들'(1907)이다. 이 작품 속 여성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각지고 단순화된 표현은 명백히 이베리아 두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이 기묘한 사건은 1911년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 발생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보상금을 노린 피에레가 신문사에 자신의 절도 행각을 제보했고, 이로 인해 경찰은 아폴리네르와 피카소를 '모나리자'를 훔칠 만한 고도의 예술품 절도단의 일원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체포된 두 사람은 극심한 공포에 휩싸였다. 그들은 증거인멸을 위해 조각상들을 센 강에 버리려 했으나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법정에서 피카소는 울면서 아폴리네르를 모른다고 부인하기까지 했다. 결국 판사는 이들의 증언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사건을 기각했지만, 이 경험은 두 예술가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1907
1911
[잡역부 페루자에 의한 모나리자 도난 사건]
루브르의 전직 잡역부였던 이탈리아인 빈첸초 페루자가 박물관 휴관일에 숨어들어가 모나리자를 훔쳐 달아났다. 다음 날 그림이 없어진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 아무도 도난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보안이 허술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모나리자는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2년간의 추적 끝에 페루자가 이탈리아에서 그림을 팔려다 검거되면서 사건은 종결되었다.
루브르 역사상 최악의 굴욕으로 기록된 이 사건의 범인은 박물관의 보안 시스템을 훤히 꿰뚫고 있던 전직 잡역부 빈첸초 페루자였다. 그는 이전에 '모나리자'의 보호 유리를 설치하는 작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페루자는 나폴레옹이 '모나리자'를 약탈해왔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그림을 조국 이탈리아로 되돌려 놓겠다는 애국심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 그림을 팔아 보상금을 챙기려 한 정황으로 보아 금전적 동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범행은 1911년 8월 21일 월요일, 박물관 휴관일에 이루어졌다. 페루자는 전날 밤 박물관의 작은 벽장에 숨어 있다가, 다음 날 아침 직원용 흰 작업복을 입고 나타나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는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살롱 카레가 비어 있는 틈을 타 그림을 벽에서 떼어낸 뒤, 비상계단에서 액자와 유리를 분리하고 그림만 외투 속에 숨겨 유유히 빠져나갔다. 당시 관장이 "'모나리자'를 훔치는 것은 노트르담 대성당의 탑을 훔치는 것과 같다"고 호언장담했을 정도로 , 박물관의 보안은 기술적 대비보다는 제도적 권위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림이 사라진 사실은 다음 날 한 화가가 모작을 위해 박물관을 찾았을 때 비로소 발견되었다.
1911
[루브르 박물관 도난 사건]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범인은 박물관에서 유리 설치 작업을 하던 이탈리아 출신 노동자 빈첸초 페루자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국보가 프랑스에 부당하게 있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애국심으로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범인 빈첸초 페루자는 루브르 박물관의 내부 구조와 보안 시스템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범행 전날 밤, 박물관 내의 작은 옷장에 숨어 있다가 다음날 아침 박물관이 문을 열기 전, 직원들이 없는 틈을 타 그림을 벽에서 떼어냈습니다. 그는 그림을 보호틀에서 분리한 뒤 자신의 작업복 외투 아래 숨겨 유유히 박물관을 빠져나왔습니다.
그의 범행 동기는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의 예술품을 약탈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위대한 유산인 <모나리자>를 조국으로 되찾아와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 도난 사건은 전 세계 언론의 1면을 장식하며 <모나리자>를 순식간에 국제적인 유명인사로 만들었습니다.
1913
1913
[2년 만의 극적인 회수]
페루자는 2년 넘게 그림을 파리의 자신의 아파트에 숨겨오다 결국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골동품상에게 팔려다 덜미를 잡혔습니다.
그림은 무사히 회수되었고, 이탈리아 전역에서 순회 전시된 후 1914년 1월 프랑스로 반환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모나리자>를 단순한 명작에서 전설적인 문화 아이콘으로 격상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2년 동안 그림을 숨기고 있던 페루자는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관장에게 접촉하여 그림을 판매하려 했습니다. 그의 제안을 수상하게 여긴 관장은 경찰에 신고했고, 페루자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 도난 사건은 <모나리자>의 위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1. 대중적 인지도 폭증: 사건 이전까지 미술계 외부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모나리자>는 , 2년간의 실종 기간 동안 연일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전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림이 걸려 있던 텅 빈 벽을 보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으로 몰려들었고, 이는 '작품의 부재'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볼거리가 된 역사적인 현상이었습니다.
2. 강력한 서사 부여: 절도, 미스터리, 애국심, 그리고 극적인 회수라는 한 편의 영화 같은 스토리는 <모나리자>에 '도난당한 보물', '되찾은 국가적 자존심'이라는 강력한 상징적 가치를 덧씌웠습니다.
3. 문화 아이콘으로의 등극: 이 사건을 통해 <모나리자>는 순수 예술의 영역을 넘어 대중문화의 한복판으로 진입했습니다. 작품의 예술적 가치에 더해 그를 둘러싼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독보적이고 신화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입니다.
1914
[모나리자 귀환]
'모나리자'는 이탈리아에서 잠시 순회 전시된 후, 1914년 1월 영웅처럼 루브르로 귀환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그림 한 점의 도난이 아니라, '부재'가 어떻게 하나의 대상을 신화로 만드는지를 보여준 극적인 사례였다.
1914
1939
1939
[제2차 세계대전 중 피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정부는 나치 독일의 예술품 약탈로부터 <모나리자>를 지키기 위해 비밀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그림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비밀리에 반출되어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 전역의 성과 수도원을 전전하며 숨겨졌습니다.
이는 <모나리자>가 프랑스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상징하는 대체 불가능한 문화유산임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939년 9월, 나치의 침공 위협이 고조되자 루브르 박물관은 가장 중요한 소장품들을 피신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모나리자>는 'MNLP No. 0' (루브르 국립 박물관 회화 0번)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상자에 담겨 샹보르 성, 루비니 성, 로크듀 수도원 등 10여 곳이 넘는 장소로 옮겨 다니며 전쟁의 포화를 피했습니다. 이러한 필사적인 보호 노력은 이 작품이 단순한 그림 한 점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내야 할 국가의 영혼과도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증명합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6월, <모나리자>는 마침내 루브르로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1939
[나치 약탈에 맞선 '예술품 구출' 대작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당시 프랑스 국립박물관장이었던 자크 조자르는 나치의 예술품 약탈을 예견하고 박물관을 폐쇄한 뒤, 3일 밤낮에 걸쳐 4,000여 점의 주요 소장품을 비밀리에 프랑스 전역의 성(城)과 안전가옥으로 대피시켰다. '모나리자'는 앰뷸런스에 실려 옮겨지는 등, 치밀한 계획과 헌신적인 직원들의 노력으로 인류의 문화유산을 지켜낸 이 작전은 루브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저항의 순간으로 기록되었다. 나치가 파리를 점령했을 때, 루브르는 텅 비어 있었다.
이 작전은 프랑스 국립박물관 총책임자였던 자크 조자르의 선견지명과 결단력 덕분에 가능했다. 그는 스페인 내전 당시 프라도 미술관의 소장품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경험을 바탕으로, 1938년부터 이미 루브르 소장품의 비밀 대피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1939년 8월 25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임박하자 조자르는 '수리'를 명목으로 루브르를 3일간 폐쇄했다. 그 후 3일 밤낮 동안 박물관 직원, 미술학도, 심지어 인근 백화점 직원까지 동원되어 약 4,000점의 예술품을 포장하는 대작전이 펼쳐졌다. 작품들은 중요도에 따라 색깔로 구분된 표식이 붙은 1,862개의 나무 상자에 담겼다. '모나리자'의 상자에는 가장 높은 등급을 의미하는 붉은 원 세 개가 그려졌다.
대피 과정은 첩보 작전을 방불케 했다. 총 203대의 트럭, 구급차, 개인 차량 등이 동원되었다. '모나리자'는 항온·항습 기능이 유지되는 구급차에 실려 이송되었고, '사모트라케의 니케'나 '메두사호의 뗏목'과 같은 거대한 작품들은 특수 장비와 치밀한 경로 계획을 통해 옮겨졌다. 작품들은 우선 루아르 계곡의 샹보르 성을 비롯한 프랑스 전역 70여 곳의 고성, 수도원 등 안전한 장소로 분산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조자르와 그의 팀은 나치와 비시 협력 정부의 눈을 피해 작품들을 여러 차례 다른 은신처로 옮기는 등 끈질긴 저항을 이어갔다. 심지어 연합군이 실수로 은신처를 폭격하지 않도록 비밀리에 좌표를 전달했고, BBC 방송은 "모나리자가 미소 짓고 있다(La Joconde a le sourire)"는 암호 방송으로 정보 수신을 확인해주기도 했다. 이처럼 관료적 시스템 내부에서 이루어진 조용한 저항은, 무력 항쟁만큼이나 효과적인 영웅적 행위였다. 약탈을 목적으로 파리를 점령한 나치군이 마주한 것은 텅 빈 액자들뿐이었고, 이 위대한 작전 덕분에 루브르의 핵심 소장품들은 단 하나도 잃지 않고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는 약탈로 시작된 루브르의 역사가 인류 보편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제도적 구원을 이룬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939
1956
[모나리자 물리적 공격 시작]
이 해에 '모나리자'는 두 차례의 심각한 물리적 손상을 입었다. 먼저 프랑스 남부 몽토방에서 전시되던 중 한 관람객이 던진 황산 용액에 그림 하단부가 훼손되었다. 같은 해 12월 30일, 루브르에서는 볼리비아 출신의 우고 운하가 비예가스가 던진 돌에 맞아 보호 유리가 깨지고 그림의 왼쪽 팔꿈치 부분 물감이 떨어져 나갔다. 이 두 사건은 '모나리자'를 보호하기 위한 영구적인 유리 케이스 설치를 촉발했으며, 이후 이는 방탄유리로 강화되었다.
1956
[염산 및 돌 투척 테러]
1956년 한 해 동안 <모나리자>는 두 차례의 심각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상반기에는 한 남성이 그림 하단에 염산을 뿌렸고, 12월 30일에는 볼리비아인 우고 운하가 비예가스가 던진 돌에 맞아 일부가 훼손되었습니다.
이 사건들을 계기로 <모나리자>는 영구적으로 보호 유리 뒤에 전시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공격은 프랑스 몽토방의 한 박물관에 대여 전시 중일 때 발생했으며, 신원 미상의 남성이 뿌린 염산으로 인해 그림 하단부가 손상되었습니다. 이후 복원 작업을 거쳤지만, 이 사건은 작품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공격은 같은 해 12월 30일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어났습니다. 볼리비아 출신의 우고 운하가 비예가스(Ugo Ungaza Villegas)가 던진 돌에 그림의 왼쪽 팔꿈치 부분 유약층이 미세하게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 연이은 공격은 <모나리자>의 관람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박물관 측은 추가적인 훼손을 막기 위해 작품 전면에 보호 유리를 설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보호 유리는 작품을 물리적으로 지키는 안전장치인 동시에, 관람객과 작품 사이에 영원한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관람객은 더 이상 작품과 직접적으로 교감할 수 없게 되었고, 이는 작품의 신비로운 아우라를 더욱 강화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또한, 이 안전장치는 훗날 작품 훼손의 우려 없이 자신의 메시지를 극적으로 표출하려는 시위자들에게 <모나리자>를 '안전한 무대'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되었습니다.
1963
1963
[미국 순회 전시]
<모나리자>가 역사상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과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합의 하에, 이 그림은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전시되었습니다.
이 순회 전시는 냉전 시대에 예술을 통한 양국 간의 우호를 다지는 중요한 문화 외교 행사였습니다.
1962년 12월 14일부터 1963년 3월 12일까지 진행된 미국 전시는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작품의 안전을 위해 최고 수준의 보안 조치를 취했으며, <모나리자>는 '문화 대사'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수많은 미국 시민들이 이 신비로운 미소를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섰고, 이는 <모나리자>의 명성을 북미 대륙에 확고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4
1974
[도쿄, 모스크바 순회 전시]
<모나리자>의 두 번째 해외 순회 전시가 일본 도쿄와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열렸습니다.
이 전시는 동서 양 진영에 걸쳐 <모나리자>의 세계적인 명성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도쿄 전시 중에는 박물관의 장애인 관람 정책에 항의하는 여성이 붉은 페인트를 뿌리는 사건이 있었으나, 보호 유리에 막혀 작품은 무사했습니다.
도쿄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는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전시 첫날, 박물관의 장애인 차별적 관람 정책에 항의하던 25세 여성 토모코 요네즈가 붉은색 페인트를 뿌리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1956년 사건 이후 설치된 보호 유리 덕분에 작품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모나리자>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을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표출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였습니다.
1998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의 '세브르의 길' 도난]
19세기 프랑스 화가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의 작은 풍경화 '세브르의 길(Le Chemin de Sèvres)'이 액자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범인은 그림만 도려내어 달아났으며, 2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회수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모나리자' 외에도 루브르의 다른 작품들이 여전히 도난 위협에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박물관 보안의 지속적인 과제를 상기시킨다.
'모나리자'의 드라마틱한 역사에 가려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98년의 도난 사건은 루브르 보안의 또 다른 취약점을 드러냈다. 도난당한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바르비종파의 대표 화가인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의 작은 풍경화 '세브르의 길'이었다.
범인은 일요일 관람 시간 중에 액자에서 캔버스만 예리하게 도려내는 대담한 수법을 사용했다. 사건 발생 후 박물관 측은 즉시 출구를 봉쇄하고 3시간에 걸쳐 관람객들을 수색했으나, 범인은 이미 그림을 숨겨 빠져나간 뒤였다. 작품의 크기가 작아 숨기기 용이했던 점이 범행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 사건은 2025년 보석 도난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루브르에서 일어난 마지막 절도 사건이었다. 당시 루브르 관장이었던 피에르 로젠버그는 박물관의 보안이 "취약하다"고 인정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보안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와 강화 조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25년이 넘도록 이 그림은 회수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박물관 보안의 딜레마를 명확히 보여준다. 세계적인 슈퍼스타 작품인 '모나리자'에 보안 역량이 집중되는 동안,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여전히 높은 가치를 지닌 수많은 다른 작품들이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대중의 관심과 기억 역시 선택적이어서, 회수되지 않은 코로의 작품은 잊혀진 사건으로 남은 반면, 극적으로 회수된 '모나리자'는 신화가 되었다. 이는 박물관의 서사가 소수의 상징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되면서 다른 중요한 손실들이 어떻게 소외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1998
2005
2005
[루브르 박물관 전용 전시실 개편]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엄청난 인파를 감당하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은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습니다.
박물관에서 가장 넓은 공간인 '살 데 제타(Salle des États)'를 <모나리자>만을 위한 전용 전시실로 꾸몄습니다.
이는 <모나리자>가 박물관 내에서도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조치입니다.
매년 루브르를 찾는 수백만 명의 관람객 중 상당수가 오직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방문합니다. 이로 인한 극심한 혼잡을 해소하기 위해, 박물관 측은 4년간의 공사 끝에 2005년 4월, 새로운 모나리자 룸을 공개했습니다. 이 공간에서 <모나리자>는 방 중앙에 단독으로 배치되었으며,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온도 및 습도 조절 기능과 무반사 방탄유리가 장착된 특수 보호 케이스 안에 전시되었습니다. 이는 작품의 보존과 관람객의 안전, 그리고 원활한 관람 동선을 모두 고려한 결과였습니다.
2009
2009
[찻잔 투척 사건]
프랑스 시민권을 얻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은 한 러시아 여성이 <모나리자>를 향해 찻잔(머그컵)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찻잔은 방탄유리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지만, 작품에는 아무런 손상도 입히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개인적인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세계적인 명작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은 사례입니다.
이 여성은 루브르 박물관 기념품 가게에서 구입한 찻잔을 소지하고 있다가 작품을 향해 던졌습니다. 방탄유리의 견고함 덕분에 작품은 완벽하게 보호되었습니다. 범인은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으며, 정신 감정을 받은 후 풀려났습니다. 이 사건은 <모나리자>의 강화된 보안 시스템의 효율성을 입증하는 동시에, 작품이 다양한 이유로 공격의 표적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습니다.
2022
2022
[케이크 투척 사건]
노파로 위장한 한 남성 환경운동가가 휠체어를 타고 <모나리자>에 접근한 뒤, 방탄유리에 케이크를 문지르는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그는 "지구를 생각하라"고 외치며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촉구했습니다.
이는 작품 훼손이 아닌, 작품의 상징성을 이용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새로운 형태의 시위였습니다.
이 남성은 보안 요원들에게 끌려 나가면서도 "지구를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예술가들은 지구를 생각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이 사건은 21세기 <모나리자>를 향한 공격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범인의 목적은 작품의 물리적 파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방탄유리의 존재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의 행위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라는 상징 자본을 활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전 세계 미디어에 노출시키려는 계산된 '퍼포먼스'였습니다. <모나리자>가 현대 사회의 첨예한 이슈를 둘러싼 상징적 투쟁의 장이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2024
2024
[수프 투척 사건]
프랑스 농업 정책과 식량 안보 문제에 항의하는 두 명의 여성 환경운동가가 <모나리자>의 방탄유리에 수프를 끼얹었습니다.
그들은 "예술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식량에 대한 권리가 더 중요한가?"라고 외쳤습니다.
이 사건은 <모나리자>가 예술 작품을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증폭시키는 강력한 확성기로 이용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식량 반격(Riposte Alimentaire)'이라는 단체가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힌 이 시위는 당시 프랑스 전역에서 벌어지던 농민 시위와 연계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작품 훼손이 아니라, <모나리자>라는 세계적인 아이콘을 배경으로 한 충격적인 이미지를 생산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메시지를 전 세계에 타전하는 것이었습니다.
2022년 케이크 사건과 2024년 수프 사건은 공통적으로 <모나리자>가 현대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의 정점에 있음을 증명합니다. 즉, 수많은 정보와 메시지가 범람하는 사회에서, 가장 확실하게 대중의 주목을 끌 수 있는 상징적 대상으로 <모나리자>가 선택된 것입니다. 작품의 예술적 아우라가 이제는 사회적, 정치적 주장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무대가 되고 있는 현상을 보여줍니다.
2025
[아폴론 갤러리 보석 도난]
4인조 전문 절도단이 건설 노동자로 위장하고 가구 운반용 리프트(사다리차)를 이용해 박물관 2층 아폴론 갤러리 창문을 뚫고 침입했다. 이들은 경비원을 위협하고 단 4분 만에 나폴레옹 시대의 왕실 보석 8점을 훔쳐 오토바이를 타고 도주했다. 1911년 '모나리자' 도난 이후 루브르가 겪은 최악의 도난 사건으로, 노후화된 CCTV와 보안 시스템의 허점이 드러나며 관장이 사임하는 등 큰 파장을 일으켰다.
2025년 10월 19일 일요일 오전 9시 30분, 4인조 절도단은 고도로 조직된 계획에 따라 대담한 범행을 실행했다. 건설 노동자 복장을 한 이들은 파리에서 흔히 사용되는 가구 운반용 외부 리프트(monte-meuble)를 이용해 아폴론 갤러리의 1층 발코니로 접근했다.
절단기로 창문을 뚫고 갤러리 내부로 진입한 이들은 전동 공구로 경비원을 위협하며 두 개의 유리 진열장을 부수었다. 침입부터 탈출까지 걸린 시간은 총 8분이 채 되지 않았으며, 실제 박물관 내부에 머문 시간은 4분에 불과했다. 이들은 나폴레옹의 황후 마리 루이즈에게 선물된 에메랄드 목걸이와 오르탕스 왕비의 사파이어 세트 등 프랑스 왕실 보석 8점을 훔쳐 대기하던 스쿠터를 타고 도주했다. 도주 과정에서 외제니 황후의 왕관을 떨어뜨려 손상된 채로 회수되었다. 피해액은 약 8,800만 유로로 추산되었으나, 그 역사적 가치는 헤아릴 수 없다.
이 사건은 루브르 보안 시스템의 총체적 실패를 드러냈다. 로랑스 데 카르 관장은 프랑스 상원 청문회에서 "끔찍한 실패"를 인정하며 사임했다. 구체적인 보안 허점으로는 침입 지점을 촬영하지 못한 노후화된 CCTV, 그리고 최근 보안 감사에서 권고된 사항들이 완전히 이행되지 않은 점 등이 지적되었다. 노동조합은 지속적인 보안 인력 감축이 이번 사태의 한 원인이라고 비판했다.
1911년의 '모나리자' 도난이 내부인의 허술한 범행이었다면, 2025년의 보석 도난은 외부 전문 조직에 의한 기술적, 기반 시설적 허점의 공략이었다. 이는 박물관 보안 위협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며, 과거의 교훈이 새로운 형태의 취약점에 의해 무력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훔친 보석들은 원형 그대로 시장에 내놓을 수 없기 때문에, 범인들이 보석을 해체하여 원석과 귀금속 형태로 처분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예술품 절도가 단순한 재판매 목적을 넘어, 문화유산의 영구적인 파괴를 초래할 수 있는 현대적 범죄의 위험성을 시사한다.
2025
2025
[루브르 관장, 보안 실패 인정 및 대책 발표]
프랑스 왕실 보석 도난 사건 이후, 로랑스 데 카르 루브르 관장은 상원에 출석해 박물관 내 경찰서 설치를 요청했다. 그는 노후화된 CCTV 등 보안 시스템의 실패를 인정하며 만성적인 투자 부족 문제를 지적했다.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문화부 장관과 대통령이 이를 반려하며 보안 강화를 촉구했다.
사건 발생 3일 후인 10월 22일, 로랑스 데 카르 관장은 상원 현안 질의에 출석하여 "끔찍한 실패"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다. 그는 경보 시스템은 정상 작동했고 직원들도 신속히 대응했으나, "도둑들의 침입을 충분히 미리 포착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보안 허점으로 일부에만 설치된 노후화된 CCTV와, 침입이 발생한 아폴론 갤러리 발코니를 촬영하지 못한 카메라 문제를 거론하며 "장비와 인프라에 대한 만성적인 투자 부족"을 지적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데 카르 관장은 내무부에 박물관 내 경찰서 설치 검토를 요청하고, 단기적으로는 건물 근처 차량 주차를 막는 제한 장치 설치 등을 제안했다. 그는 사건 당일 라시다 다티 문화부 장관에게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반려되었으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역시 "견디시라"며 개보수 추진을 독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물관 노조 또한 관장의 사퇴보다는 예산 확보를 통한 재발 방지를 요구했으며, 마크롱 대통령도 국무회의에서 보안 강화 조치 가속화를 지시했다.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