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09- 23:45:15
1997년 대한민국이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하여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사건입니다. 외환보유액 급감으로 시작된 위기는 대규모 기업 도산, 대량 해고, 강도 높은 경제 구조조정을 초래했습니다. 전 국민 금모으기 운동으로 위기를 극복했으며, 2001년 IMF 관리체제를 조기 졸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권 교체 등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0:51:13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상징이자 세계 경영을 외친 기업인. 단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창립해 한때 재계 2위까지 성장시킨 입지전적인 인물.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로 수많은 젊은이에게 도전 정신을 심어줌. IMF 외환위기 속 대우그룹 해체와 법적 논란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음. 말년까지 해외 기업인 양성에 헌신하며 영원한 기업인으로 기억됨.
본 문서는 위키백과 김우중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1936
1936
[시대의 풍운아 탄생]
대구에서 명문가 자제로 태어났으나, 6.25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15세에 소년 가장이 되어 가족 생계를 책임지게 됩니다.
이는 그의 강인한 삶의 기반이 됩니다.
1956
1956
1960
1960
[첫 직장 입사]
연세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섬유 수출업체 한성실업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무역에 대한 실무 경험을 쌓습니다.
1967
1967
[대우실업 창립!]
32세의 나이에 단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설립합니다.
'크게(大) 도약하는 김우중(宇)'이라는 뜻을 담은 대우는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을 수출하며 58만 달러의 놀라운 실적을 올립니다.
1974
1974
[1억불 수출탑 달성]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전자, 대우조선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며 급성장, 마침내 1억 달러 수출탑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로써 대우는 신흥 재벌의 반열에 오릅니다.
1981
1981
[대우그룹 회장 등극]
대우그룹의 성장을 이끌며 1981년, 직접 그룹 회장 자리에 오릅니다.
이는 그의 리더십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1982
1982
[(주)대우 출범, 재계 4위!]
지주회사 격인 (주)대우를 출범시키며 재계 순위 4위로 껑충 뛰어오릅니다.
김우중의 대우그룹은 한국 경제의 핵심 축으로 자리매김합니다.
1983
1983
[한국기원 총재 취임]
바둑 3급 공인 실력을 갖춘 그는 한국기원 2대 총재로 취임하며 사업 외적인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칩니다.
1988
1988
[대한축구협 회장(1차)]
한국 축구 발전에도 힘쓰고자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취임합니다.
이는 그의 폭넓은 사회적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1989
1989
['세계는 넓고...' 출간]
그의 경영 철학을 담은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출간합니다.
이 책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세계 경영'의 꿈과 도전 정신을 심어줍니다.
1989
1989
1990
1990
[장남 비극적 사망]
미국에서 장남 김선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습니다.
이 개인적인 아픔은 그의 삶에 큰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1992
1992
[대선 불출마 선언]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선 출마설이 끊이지 않지만, 그는 "새한국당의 영입 교섭에도 응하지 않을 것"이라며 불출마를 선언합니다.
1993
1993
[세계 경영 선포!]
대우그룹은 '세계 경영'을 공식 선포하며 전 세계로 사업 확장을 가속화합니다.
이는 대우그룹의 정점이자, 김우중 회장 경영 철학의 집대성이었습니다.
1993
1993
1996
1996
1997
1997
[IMF 사태 발발]
대한민국이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며 한국 경제는 큰 혼란에 빠집니다.
이는 대우그룹 해체의 서막이 됩니다.
1997
[김영삼 대통령의 외환위기 심각성 인지 지연]
김영삼 대통령이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통화하기 전까지 외환 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내용입니다.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은 1997년 11월 10일 강경식 경제부총리와의 통화 이전까지 한국에 닥쳐올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위기 대응에 중요한 시기를 놓쳤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1997
1997
[대한민국, IMF 구제금융 요청 및 양해각서 체결]
대한민국이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하여 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자금 지원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습니다.
1997년 12월 3일, 대한민국은 심각한 외환 위기로 국가부도 위기에 처하자 국제 통화 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총 195억 달러 규모의 자금을 지원받기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 경제는 IMF의 관리체제 하에 놓이게 되었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되었습니다.
1997
1997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실시 및 정권 교체]
IMF 외환위기 직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 김대중이 당선되어 여야 간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1997년 12월 18일, IMF 구제금융 요청 직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외환 위기 및 국가부도 사태에 대한 책임론 속에서 여당인 한나라당 후보 이회창은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하며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여야 간 정권 교체가 발생했습니다.
1997
1998
[전 국민 금모으기 운동 전개]
IMF 구제금융 요청 후 외채 상환을 위해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금을 모아 기부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약 227톤의 금을 모았습니다.
IMF 외환 위기 극복을 위해 1997년 말부터 1998년 초까지 대한민국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소유한 금을 국가에 기부하는 '금모으기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약 350만 명이 참여하여 총 227톤에 달하는 금이 모금되었으며, 이는 외채 상환에 기여하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기 극복 의지를 보여주며 긍정적인 평가를 이끌어냈습니다.
1998
[재계 2위 대우의 영광]
IMF 위기 속에서도 무리한 확장 정책을 이어가며 대우그룹은 재계 2위라는 역대 최고 순위를 달성합니다.
이는 '세계 경영'의 집념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부실 확대의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1998
[김대중 정부 출범 및 구조조정 착수]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여 IMF의 요구를 전면 수용하고 본격적인 경제 구조조정에 착수했으며, IT 산업 육성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후, 김대중 대통령은 IMF의 요구 조건을 전면 수용하고 강도 높은 국가 경제 구조조정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함께 1999년 3월에는 '사이버 코리아 21' 계획을 발표하며 IT 산업 발전과 인프라 투자에 집중하는 등 경제 재건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998
1998
[5개 부실 은행 퇴출 및 통폐합 발표]
정부가 대동, 동남, 동화, 경기, 충청은행 등 5개 부실 은행의 퇴출을 발표하고 타 은행으로의 통폐합을 진행했습니다.
1998년 6월 29일, 금융감독위원회는 이헌재 위원장 주재 하에 대동, 동남, 동화, 경기, 충청은행 등 5개 부실 은행을 퇴출시키고, 이들의 업무를 국민, 주택, 신한, 한미, 하나은행 등으로 이관하는 대규모 은행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IMF가 요구한 금융권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국내 은행들의 부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1998
1998
[정부, 공기업 민영화 방안 발표 및 추진]
정부가 공기업 민영화 방안을 발표하고, 남해화학, 포항제철, 한국통신공사 등 9개 공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했습니다.
1998년 7월 1일, 김대중 정부는 IMF 관리체제 하의 경제 구조조정 일환으로 공기업 민영화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남해화학, 대한교과서, 한국종합기술금융, 대한송유관공사, 포항제철, 한국종합화학, 한국중공업, 한국통신공사, 한국담배인삼공사 등 총 9개 공기업이 민영화 절차를 밟게 되었습니다.
1998
1998
[4개 생명보험사 영업정지 및 인수 발표]
고려, 국제, 태양, BYC 등 4개 부실 생명보험사가 영업정지를 발표하고 타 보험사로 인수되었습니다.
1998년 8월 11일, 금융당국은 고려, 국제, 태양, BYC 등 4개의 부실 생명보험사에 대해 영업정지 조치를 내리고, 각각 알리안츠생명, 삼성생명, 대한생명, 교보생명으로 인수되는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금융권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부실 보험사 정리를 통해 금융 시스템의 건전성을 확보하려는 조치였습니다.
1998
1998
1998
[노무라 보고서 충격]
일본 노무라 증권이 '대우에 비상벨이 울린다'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발표하며, 사실상 대우그룹의 위기가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당시 대우의 부채비율은 400% 이상이었습니다.
1998
[IMF 긴급 보관 금융 18억 달러 상환]
IMF 긴급 보관 금융 18억 달러를 상환하며 금융 위기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1998년 12월, 대한민국은 국제 통화 기금(IMF)의 긴급 보관 금융 중 18억 달러를 상환하며 금융 위기로부터 점진적으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한국 경제의 회복 가능성을 보여주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1998
1999
[대우그룹 해체 결정]
과도한 차입에 의한 무리한 확장으로 부채가 65조 원에 달했던 대우그룹이 IMF 구제금융 이후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1999년, 무리한 차입을 통한 확장 경영으로 인해 막대한 부채(약 65조 원)를 감당하지 못한 대우그룹은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정부의 대규모 국고 지원에도 불구하고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재벌 해체의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1999
[대우그룹 해체 수순]
41개 계열사 중 16개가 매각되고, 남은 25개 중 12개가 워크아웃을 신청하며 대우그룹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게 됩니다.
당시 부채는 무려 500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재계 2위까지 올랐던 대우그룹은 금융 부문 중심의 사업 확장으로 내부 부채가 쌓여갔습니다. IMF 사태 이후 부채비율이 400%를 넘어서자, 쌍용자동차 인수, 계열사 구조조정, 삼성그룹과의 빅딜 등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결국 1999년 8월 26일, 대규모 워크아웃 신청으로 그룹 해체가 임박했음을 알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정부의 정치적 탄압설과 단순한 구조조정 실패설 등 다양한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1999
1999
[회장직 사퇴 및 도피]
김우중 회장은 13명의 사장단과 함께 경영 포기 및 회장직 사퇴를 발표하고 해외로 출국, 5년 8개월간의 도피 생활을 시작합니다.
도피 생활 동안 중국에서 호화롭게 지냈다는 주장과 유럽에서 어렵게 생활했다는 주장이 엇갈리며 논란이 되었습니다.
2000
[김대중 대통령, IMF 위기 극복 공식 선언]
김대중 대통령이 IMF 차관 전액 상환 및 IMF 위기 극복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2000년 12월 4일, 김대중 대통령은 국제 통화 기금(IMF)의 모든 차관을 상환했음을 공식 발표하며 대한민국이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위기 극복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2000
2001
[대한민국, IMF 관리체제 공식 종료]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 통화 기금(IMF)의 구제금융 관리체제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2001년 8월 23일, 대한민국은 국제 통화 기금(IMF)으로부터 받은 19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조기 상환 완료하며 공식적으로 IMF 관리체제를 졸업했습니다. 이는 1997년 구제금융 요청 이후 약 3년 8개월 만의 일로, 국가 경제의 완전한 회복을 상징했습니다.
2001
2005
2005
2006
2006
[징역 8년 6개월 확정]
분식회계, 사기대출, 횡령, 국외 재산도피 혐의로 징역 8년 6개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 9천253억원의 형이 확정됩니다.
그는 항소를 포기했습니다.
2007
2007
[대통령 특별 사면]
대통령 특사로 사면됩니다.
그러나 17조 8천억 원에 달하는 추징금은 여전히 미납 상태로 남아 논란이 됩니다.
2014
2014
[새 회고록 출간]
대우그룹 해체 15주기를 맞아 회고록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를 출간하며 못다 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2019
2019
[세계 경영의 별 지다]
베트남 등지에서 해외 기업인 양성에 힘쓰다 82세의 나이로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합니다.
그의 삶은 대한민국 경제사에 영광과 그림자를 동시에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