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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대한민국이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하여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사건입니다. 외환보유액 급감으로 시작된 위기는 대규모 기업 도산, 대량 해고, 강도 높은 경제 구조조정을 초래했습니다. 전 국민 금모으기 운동으로 위기를 극복했으며, 2001년 IMF 관리체제를 조기 졸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권 교체 등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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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은 만 25세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9선 의원을 지낸 민주화 운동의 거목입니다. 32년 만에 문민정부 시대를 열고 금융실명제 조선총독부 철거 하나회 척결 전직 대통령 사법처리 등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임기 말 IMF 외환위기를 겪었으나 국민과 함께 극복하고자 노력했으며 대한민국 최초로 5일 국가장으로 영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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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1929
[경상남도 거제 출생]
경상남도 통영군 장목면 외포리(현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에서 1남 5녀 중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멸치어장을 소유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할아버지는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여 지역사회에 전파했으며, 김영삼도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태어날 당시 거제도는 통영군 소속이었습니다. 그의 선조들은 거제도에 딸린 큰달섬에 정착했고, 김영삼의 증조할아버지 대까지 독자로 이어졌습니다. 할아버지 김동옥 대에 어업으로 가계를 일으켰고, 아버지 김홍조는 10여 척의 어선을 보유한 부유한 집안의 독자였습니다. 유년기에는 할아버지를 따라 망망대해를 누비며 포부를 키웠으며,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접하고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8세에 장목소학교에 입학하여 하숙 생활을 시작했고, 소년 시절부터 일본의 식민 통치에 반발하며 일본인 학생들과 마찰을 빚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 창씨개명으로 '가네무라 고유(金村康右)'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1940
1940
[장목초등학교 졸업 및 통영중학교 입학]
거제장목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통영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중학교 시절 일본인 학생들과의 잦은 마찰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습니다.
통영중학교 재학 중 일본인 학생들과 계속 시비를 벌였습니다. 2학년 무렵 키타지마 교장의 전근 이삿짐 나르기에 동원되었을 때, 귀한 설탕 부대를 찢어 일부러 흘리는 행동으로 무기 정학을 받았으나 와타나베 교감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사천 비행장 강제노동에 끌려갔다가 일본인 학생들과 싸움이 붙어 다시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1945
1945
[경남중학교 전학 및 대통령의 꿈]
경남중학교로 전학한 후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씨를 책상에 써놓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입학을 결심했습니다.
안용백 교장의 영향으로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어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으며, 철학보다는 정치에 더 관심을 두고 이승만, 김구 등 거물 정치인들의 강연회를 찾아다녔습니다.
1947
1947
[서울대학교 철학과 입학]
경남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대학 시절 정치 관련 과목을 집중적으로 수강했으며, 1948년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서 2등을 차지하여 외무부 장관상을 수상했습니다.
김영삼의 서울대학교 학력에 대한 루머가 있었으나, 서울대학교는 그의 정식 입학과 졸업을 인정했습니다. 당시 청강생은 실력고사나 학업 성적이 우수하면 정식 학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장택상 외무부 장관과의 인연으로 2대 민의원 선거 운동을 도왔으며, 경상북도 칠곡에서 40여 일간 장택상과 함께 지내며 찬조연설을 하는 등 선거를 지원했습니다.
1950
1950
[한국전쟁 발발 후 학도의용군 입대]
한국 전쟁 발발 후 피난을 가지 못하다가 1.4 후퇴 무렵 남하하여 학도의용군에 입대했습니다.
국방부 정훈국 대북방송 담당원으로 배치되어 8개월간 활동했습니다.
군번은 E134였고, 학도병 신분이었습니다. 웅변대회 때 인연을 맺은 이선근 국방부 정훈국장의 추천으로 대북방송 담당원이 되었습니다. 매일 저녁 5~6시까지 1시간 동안 중앙방송을 통해 직접 원고를 쓰고 군가를 섞어 생방송을 진행했습니다. 이후 장택상의 부탁을 받고 국방부의 양해를 얻어 장택상 국회 부의장의 비서관이 되었습니다.
1950
1950
[장택상 국회의원 선거운동원 활동]
대학교 3학년 재학 중 장택상의 국회의원 총선거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며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51
1951
[서울대학교 졸업]
서울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의 생가에는 1947년 5월 서울대에 입학하여 1951년 2월 졸업했음을 보여주는 졸업증명서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51
1951
[손명순과 결혼]
국무총리실 비서관으로 근무 중 고향 지인의 소개로 손상호의 딸 손명순과 결혼했습니다.
이후 2남 3녀를 두었습니다.
비서관이 된 이후 고향에서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급전을 받고 고향에 내려갔으나, 사실은 결혼을 위한 거짓 급전이었습니다. 마산에서 아버지 친구의 소개로 세 명의 처녀와 맞선을 보았고, 그 중 손명순을 선택하여 마산문창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차남 김현철은 후에 정치인이 됩니다.
1951
1951
[장택상 총리실 인사담당 비서관 취임]
장택상이 국무총리에 취임하자 그의 비서관으로 국무총리실 인사담당 비서관이 되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54
1954
[제3대 국회의원 당선 (역대 최연소)]
만 25세의 나이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 거제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 대한민국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장인의 물심양면 후원을 받아 경쟁자를 누르고 압승을 거뒀습니다.
1953년 1월 1일 통영군에서 거제군이 새로 설치되며 신설된 지역구였습니다. 자유당 본부에서 이기붕을 만나 자유당 입당을 권유받아 선택했으며, 장인의 고무신 공장 운영 자금 후원 덕분에 서순영 후보를 14110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습니다.
1954
1954
[이승만 3선 개헌 반대 발언]
이기붕의 안내로 경무대를 방문, 이승만 대통령에게 3선 개헌에 반대하며 국부로 남아야 한다고 직언했습니다.
이 발언으로 이승만의 불쾌감을 샀으며, 이기붕으로부터 질책을 받았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54
1954
[사사오입 개헌 통과 후 자유당 탈당]
3선 개헌안이 '사사오입' 원칙으로 재가결되자 '이 당은 안 되겠다'고 결심하고 동지 10명과 함께 자유당을 탈당했습니다.
최순주 민의원 부의장이 '사사오입' 원칙을 내세워 개헌안을 다시 가결된 것으로 통과시키자 이에 반발했습니다. 이후 현석호, 한동석 등과 개헌 저지를 위한 동지 규합에 나섰습니다. 11월 27일에는 초대 대통령 연임 제한 철폐 개헌안 투표에서 현석호, 민관식 등 다른 자유당 의원들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1955
1955
[민주당 창당 참여 및 활동]
자유당 탈당 후 민주당 창당발기준비위원회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민주당에 입당했습니다.
민주당 중앙당 청년 부장 겸 경남도당 부위원장에 임명되어 조병옥, 유진산 등 민주당 구파와 함께 활동했습니다.
민주당 창당 초기에 장면을 찾아갔으나 권모술수에 반대하는 태도에 답답함을 느껴 조병옥, 유진산 등 구파 인사들을 찾아갔습니다. 이후 조병옥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민주당 구파로 정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56
1956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58
1958
[제4대 총선 낙선 및 개표 조작 제소]
제4대 총선에서 고향인 거제군을 떠나 부산시 서구 갑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습니다.
이후 개표 조작 의혹을 제기하며 법원에 제소했으나 무효 처리되었습니다.
자유당의 이상용 후보에게 패배했습니다. 23개 투표함 중 16개 함에서는 우세했으나, 나머지 함에서 자유당 표가 몰려 패했습니다.
1959
1959
['유석 청년 동지회' 조직 및 조병옥 추대]
조병옥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기 위해 당내 인사들로 '유석 청년 동지회'를 조직하여 조병옥의 후보 추대 운동을 성공시켰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60
1960
[제5대 총선 당선 (재기)]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에 재기했습니다.
이후 민주당 구파 정치인으로 활동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60
1960
[어머니 박부련, 무장간첩에 의해 피살]
거제군 외포리 자택에 침투한 무장 간첩에 의해 어머니 박부련 여사가 피살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간첩이 복부에 세 발의 총을 쏜 것이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60
1960
[신민당 창당 및 원내부총무 발탁]
민주당 내 구파가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자 신민당에 입당하여 야당 인사가 되었고, 곧 신민당의 원내부총무에 발탁되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61
1961
[중석불 사건 관련 결의안 제출]
중석불 사건과 관련하여 10명의 의원들과 함께 결의안을 제출, 국회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61
1961
[민족일보 폐간령 비판]
장면 정부가 민족일보에 인쇄중지를 명한 것에 대해 '이 정권에 의해서 경향신문이 폐간당하던 때를 상기하라'며 언론 탄압을 비판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61
1961
[5.16 군사정변 소식 접수]
거제도에서 군인들의 5.16 군사정변 소식을 접하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쿠데타 세력의 민주공화당 창당 참여 요청을 거부하며 군의 정치 참여를 비판했습니다.
당시 신민당 원내부총무였던 그는 다른 정치인들이 은신처를 찾았음에도 서울로 향했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내무위원장 조시형의 민주공화당 창당 참여 요청을 거절하며 군은 약속대로 원대복귀하고 군의 정치 참여는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후 부산시 지구당 위원장직과 서울신문사 사장직 제의도 거절했습니다.
1963
1963
[군정연장 반대 시위 참여 및 수감]
박정희의 군정연장 발표에 반대하여 윤보선, 허정 등과 함께 군정연장 반대 데모에 참여했습니다.
이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64
1964
[한일회담 반대투쟁 및 민중당 원내총무 피선]
한일회담 반대투쟁에 참여했으며, 민정당과 민주당이 민중당으로 통합된 후 김상돈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민중당 원내총무에 피선되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64
1964
[미국 국무성 초청 방미]
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출국하여 미국과 유럽 10여 개국을 시찰하고 돌아왔습니다.
귀국 직후 《우리가 기댈 언덕은 없다》를 출간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67
1967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67
1967
[이승만 사망 애도 성명서 발표]
미국 하와이에서 사망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시신이 김포공항으로 운구되자 애도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68
1968
[서석재 비서관 채용]
정치학도 서석재를 발탁하여 자신의 비서관으로 채용하며 정계에 입문시켰습니다.
서석재는 이후 김영삼의 최측근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서석재는 김영삼을 따랐고, 1994년에는 김영삼의 리더십에 반발하는 군사 정권 세력에 맞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을 폭로하며 군사 정권 세력을 몰락시키고 신한국당에서 군사정권 세력을 축출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968
1968
[향토예비군법 폐지안 대표발의]
박정희 대통령이 향토예비군을 설치하자 김영삼을 포함한 의원 41명은 향토예비군법 폐지안을 발표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69
1969
[김영삼 초산테러 사건 발생]
신민당 원내총무이던 김영삼이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습격당해 승용차 창문에 초산이 뿌려지는 테러를 겪었습니다.
김영삼 측은 이를 박정희 정권의 테러로 주장했습니다.
수류탄으로 생각했던 김영삼과 비서는 고개를 숙였으나 차량 일부와 아스팔트 바닥이 녹아내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김영삼은 박정희의 주요 정적으로 인식되며 가열찬 투쟁을 벌였습니다.
1969
1969
[40대 기수론 제창 및 대선 출마 선언]
신민당 당수 유진산이 쓰러져 야당의 상징적 인물이 없자,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신민당 외교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선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당 원로들의 반대에도 김대중, 이철승 등과 함께 40대 기수론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같은 날 신민당 원내총무직을 사퇴했습니다.
1970
1970
[김덕룡 발탁]
서울대학교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6·3 항쟁을 주도한 김덕룡을 발탁하여 자신의 정치 활동과 야당 활동을 지원하게 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70
1970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 김대중에게 패배]
신민당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에서 최고 득표를 얻었으나 과반수 미달로 결선 투표에 들어갔고, 2차 투표에서 김대중에게 역전패 당했습니다.
그러나 패배를 승복하고 김대중의 지지 유세를 도왔습니다.
유진산의 지명권 요구 등 박정희 정권의 공작이 있었으며, 김대중은 대의원 숙소를 돌며 유세를 벌였습니다. 1차 투표에서 421표로 김대중(382표)을 앞섰으나 과반수 미달로 2차 투표에서 이철승이 김대중을 지지하며 410표대 485표로 역전패했습니다. 김영삼은 “김대중 씨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곧 나의 승리이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김대중 씨를 앞세우고 전국을 누빌 것을 약속한다”고 밝혔습니다.
1971
1971
[진산 파동 발생]
신민당 당수 유진산이 총선 후보등록 마감일 갑자기 지역구 출마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 후보를 등록하면서 진산 파동이 발생했습니다.
김대중의 당권 장악 기도에 맞서 운영위원회를 소집하여 이를 저지했습니다.
신민당 비주류인 김대중은 6인 수권위원회의 구성원들과 유진산을 제명하고 총선 기간 동안 자신이 당수 권한대행을 맡는 수습안을 발표했습니다. 김영삼은 이철승, 이중재 등과 비공식 의견 교환을 통해 김대중의 당수 권한대행직 장악을 저지하고, 당헌에 따라 운영위원회 부의장에게 당수 권한대행을 맡기기로 합의했습니다. 최종적으로 김홍일 전당대회 의장을 당수권한대행으로 하는 중재안을 통해 김대중의 당권 장악을 막았습니다.
1972
1972
[유신 선포 직후 귀국 및 투쟁 선언]
미국 방문 중 박정희의 10월 유신 선포 소식을 듣고 부인과 미국인 교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했습니다.
귀국 후 한동안 연금 상태에 있었으며, 담배와 술을 끊고 마스크를 착용하며 '정치는 갔다.
이런 판에 어떻게 국민들 앞에 얼굴을 들고 다니냐'고 반유신 투쟁 의지를 밝혔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73
1973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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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1974
[신민당 총재 당선 및 선명야당론 주장]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총재 경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취임 후 선명야당론을 주장하며 유신 체제에 대한 강력한 반대와 비판을 역설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74
1974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75
1975
[뉴욕 타임스 '금주의 인물' 선정 및 긴급조치 9호 위반 입건]
미국 뉴욕 타임스에 의해 '금주의 인물'로 선정되어 보도되었습니다.
이어 개헌 주장으로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75
1975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 회동]
청와대를 찾아 박정희 대통령과 회동했습니다.
이 회동 이후 그의 입장은 온건한 방향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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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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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1976
[동남아시아 순방]
동남아시아를 순방하고 귀국했습니다.
당시 어려운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김택수 선배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등 외교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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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1978
[박정희 장기집권 비판 국회 연설]
임시국회에서 민주공화당 박준규 의장서리와 대결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19년 장기집권과 유신체제의 모순, 인권 탄압을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국민은 장기집권을 싫어하며, 박 대통령은 나라의 장래를 위해 조속히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할 준비를 갖추라'고 발언했습니다. '정부는 이제 안보를 빙자해서 억압정치를 할 명분이 없으며, 오히려 안보를 위해서 민주회복을 해야 할 시점에 섰다'고 강조하며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구성을 제의했습니다.
1979
1979
[신민당 총재 재선출]
신민당 총재 경선에 출마하여 이철승을 누르고 당선되며 신민당 총재직에 복귀했습니다.
그의 당선은 유신체제 저항 진영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1차 투표에서 이철승에 이어 2위를 기록했으나,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의 이기택 지지 호소로 이기택의 표를 얻어 이철승을 근소한 차이로 역전승하며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습니다.
1979
1979
[김일성 면담 용의 발언 파문]
외신기자클럽에서 '야당 총재로서 통일을 위해 장소와 시기를 가리지 않고 책임 있는 사람(김일성 포함)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발표하여 정치적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북한이 김일의 이름으로 환영 담화를 발표하고 예비접촉을 제의하자, 정부 여당은 '반국가적 행위'라고 비판했습니다. 상이군경과 반공 청년들이 신민당 당사에 난입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김영삼 자택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정부는 그의 정계 축출을 기도했습니다.
1979
1979
[YH 무역 여공 농성 진두지휘]
YH무역 여성 노동자 172명이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에 돌입하자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주겠으니 걱정말라'고 안심시키고 원내 철야농성을 진두지휘했습니다.
김영삼과 신민당 의원들은 경찰 정보과 형사들을 발견하면 멱살을 잡고 폭행하며 경고했습니다. 이순구 서울시 경무국장의 전화도 받지 않았으며, 마포경찰서장에게는 '너희들이 저 여공을 다 죽이려 하냐'며 뺨을 때렸습니다. 8월 11일 새벽, 경찰 2천여 명이 투입되어 진압 작전이 완료되었고, YH무역 노동자 김경숙(당시 21세)이 시위 도중 신민당사 4층에서 추락하여 사망했습니다.
1979
1979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YH 사건을 계기로 법원은 김영삼에 대한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그에 대한 처리 기도였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79
1979
[국회의원직 제명 및 부마항쟁 촉발]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 지지 철회를 요구한 것이 문제시되어, 국회에서 여당 단독으로 의원직에서 제명되었습니다.
제명 9일 뒤 신민당 의원 66명과 민주통일당 의원들이 집단사퇴서를 제출하며 반발했고, 이는 부마항쟁을 촉발했습니다.
김영삼은 제명 당일 기자들에게 '영원히 살기 위해 일순간 죽는 길을 택하겠다'고 소감을 밝혔고, '나를 제명하면 박정희는 죽는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10월 15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0월 16일 대규모 독재타도 시위가 부산에서 시작되어 18일 마산 및 창원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의 제명은 유신 정권 종식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9
1979
[박정희 암살 후 빈소 조문]
박정희 대통령 암살 후 측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에 마련된 박정희의 빈소를 찾아 조문했습니다.
기독교 목사의 반대에도 '하나님도 원수를 용서하라 하셨다'며 조문을 강행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79
1979
[12.12 사태 발생 및 강원용 면담]
12.12 사태 발생 다음날 강원용 목사를 만나 김대중, 김종필과의 단일화를 권고받았으나 '대통령 후보든 당 총재든 전당대회에서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며 거절했습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도 김영삼과 김대중을 불러 화합과 단일화를 주문했으나 이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습니다. 윤보선이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김영삼은 민주당 구파 계열의 새로운 리더가 되었습니다.
1980
1980
[최규하 대통령의 정치인 복권 선언]
최규하 대통령이 윤보선, 김대중 등 687명의 정치인 복권을 선언했습니다.
이 시기 김영삼은 정국을 관망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80
1980
[김대중과 대권 경쟁 및 후보 단일화 실패]
김대중과 대권을 놓고 경쟁하며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김대중은 신민당 입당을 거부했으며, 윤보선의 중재 회동도 결렬되었습니다.
4월 7일 김대중은 신민당 입당을 거부했습니다. 4월 12일 윤보선과 함께 3자 회동을 가졌으나, 대권을 향한 두 사람의 꿈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4월 28일 김영삼이 신민당 당직자와 함께 현충사를 참배하자 김대중은 신민당 내 동교동 의원들을 데리고 윤봉길 생가를 방문하며 경쟁을 이어갔습니다. 양김이 협력하지 않자 윤보선은 단념하고 그해 8월 정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윤보선의 은퇴로 김영삼은 민주당 구파 계열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1980
1980
[5.17 쿠데타로 가택연금 당함]
오전 10시 신군부 군인들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했습니다.
5월 20일 상도동 자택에서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이로 인해 신군부에 의해 5월 20일부터 다시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습니다.
가택연금 상태에서 장남 김은철의 약혼 소식을 접했지만 참석하지 못했으며, 강원용 목사가 주례를 맡아 약혼식을 진행했습니다.
1980
1980
[보안사 강요로 정계 은퇴 선언 (추후 철회)]
출범한 전두환의 제5공화국 정권에서 계속된 가택 연금과 정치적 탄압에 항의했으며,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의 강요로 정계 은퇴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81
1981
[연금 해제 및 민주산악회 조직]
가택 연금에서 해제된 후 이민우, 김동영, 최형우, 김덕룡 등 정치활동 규제에 묶여있는 재야 인사들과 함께 등산 모임을 조직하고 민주산악회를 출범시켰습니다.
민주산악회의 참가자가 증가하면서 1981년 6월 9일 공식 기구로 출범했습니다. 이민우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김영삼을 고문으로 추대했습니다. 민주산악회는 주요 정치적 사건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지방 조직을 확대하는 등 사실상의 정치 활동을 했으며, 김대중 계열 정치인들도 참여하여 야권 통합과 범국민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를 통해 재야 정치인들의 통합 조직을 준비하고 민주산악회를 모체로 하는 통합 협의체 구성에 합의했습니다.
1983
1983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83
1983
[23일간 단식 투쟁 돌입 (5.18 민주화 운동 3주기)]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아 전두환 정권의 야당 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23일간 단식 투쟁에 돌입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함석헌, 문익환 등이 상도동 자택을 찾아 위로했습니다.
5월 25일 단식으로 심신이 쇠약해져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5월 27일과 28일 민정당 사무총장 권익현이 전두환의 의사를 전달하며 단식 중단을 촉구했으나 김영삼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5월 29일 권익현의 재방문에는 '나를 시체로 만든 뒤에 해외로 부치면 된다'고 말해 돌려보냈습니다. 6월 10일 단식농성을 마쳤고, 이후 억압 체제는 완화되었습니다. 6월 30일까지 서울대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퇴원했습니다. 훗날 2003년 최병렬이 단식 투쟁을 했을 때 '굶으면 학실히(확실히) 죽는다'며 만류하기도 했습니다.
1984
1984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84
1984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85
1985
[제12대 총선 신한민주당 제1야당 등극]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이 제1 야당으로 올라서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김대중 등 재야인사 150여 명과 함께 고문저지 보고대회 후 민추협 사무실에서 철야농성에 가담했습니다.
1986
1986
[김대중 대선 불출마 선언 후 지지 의사 표명]
김대중 상임고문이 조건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자, 다음날 직선제 개헌만 된다면 김대중 고문을 지지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서독 헬무트 콜 수상을 만나서도 이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김대중이 사면 복권되면 출마하도록 권유하겠다는 의사도 밝혔습니다. 그해 말 신한민주당 내 일부에서 내각책임제 개헌론이 나오자 단호히 반대했습니다.
1987
1987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결성 참여]
서울 향린교회에서 열린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결성에 참여하고 고문에 선출되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87
1987
[전두환 호헌 선언 반대 및 학생 시위 동조]
전두환 대통령이 호헌을 선언하자 이를 정권 연장의 수단이라며 반대했습니다.
대학생들의 호헌철폐 시위에 동조하며 민주화 운동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신한민주당 내 일부에서 내각제 개헌안을 추진하려 하자 탈당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1987년 7월 6일 서울 신한민주당사에서 대한민국을 방문한 한스디트리히 겐셔 외 서독 외신과 면담했습니다.
1987
1987
[김대중과 통일민주당 입당 합의]
김대중과 만나 김대중의 통일민주당 입당 문제를 합의하고, 이틀 뒤 김대중의 통일민주당 재입당을 이끌어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87
1987
[김대중과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협상 결렬]
김대중과 회동하여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김영삼의 조기 후보 단일화 주장과 김대중의 개헌 협상 후 조정 주장이 맞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9월 14일 김대중은 36개 미창당 지구당 결성을 요청했으나, 김영삼은 '대선을 앞두고 총선 조직책 선정과 다름없어 적전 분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며 거절했습니다. 재야 인사들은 이를 '적전분열'이라며 강도 높게 질타했습니다.
1987
1987
[대통령 선거 출마 발표]
통일민주당을 장악한 후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했습니다.
김대중은 당내 경선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자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했습니다.
김대중은 이후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야권이 분열되었고, 결국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노태우에게 패배했습니다.
1987
1987
[제13대 대통령 선거 낙선]
대통령 직선제로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결과, 노태우에게 패배하여 28%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했습니다.
광주 유세 당시 성난 시민들이 던진 돌과 화염병에 곤욕을 치렀습니다. 당시 김대중이 평민당을 창당하며 학생 운동권 출신 인사를 대거 영입하자, 김영삼도 재야 및 운동권 계열 인사 영입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988
1988
[제13대 총선에서 제2야당으로 밀려남]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 경상남도 지역에서만 압승을 거뒀을 뿐 수도권 지역에서는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패배하면서 제2야당의 당수로 밀려났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88
1988
[김광일, 노무현 등 인권변호사 발탁]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김광일을 발탁했으며, 노무현 변호사도 정계에 입문시켜 전폭적으로 지원했습니다.
노무현은 1990년 3당 합당 과정에서 김영삼과 결별하게 됩니다.
노무현을 상도동 자택으로 수시로 불러 면담하고 용돈도 지원해 주었습니다.
1989
1989
[이경현 살인폭력사태 국민대책위 결성 참여]
《이경현 살인폭력사태 국민대책위》 결성에 참여하여 폭력사태 진상규명, 평화시위 보장, 공권력에 의한 폭력 중지, 공안합수부와 백골단 해체 요구에 동참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0
1990
[민주자유당 창당 (3당 합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전격적으로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했습니다.
김영삼은 이를 '구국적 결단'으로 주장하며 민주자유당 대표로 취임했습니다.
합당의 원인으로는 '분열된 야당으로는 집권 소망이 없었고, 3당 통합을 계기로 기득권 세력의 고정 지지표와 충분한 정치 자금 확보를 통해 차기 집권 가능성을 판단'했습니다. 민주자유당 대표 취임식에 군사 정권 관계자들이 반대하며 찾아왔으나 저지당했습니다. 김동영, 김덕룡, 최형우 등 30년 이상 보좌한 측근들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1990
1990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 선임]
새롭게 창당된 민주자유당의 대표최고위원에 선임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당내 영향력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0
1990
[소련 방문 및 고르바초프 면담]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자격으로 소련의 IMEMO 초청을 받아 출국하여, 소련 정치인들과 면담하고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과 면담했습니다.
이후 한-소 수교 노선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0
1990
[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건 폭로]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었음이 밝혀져 노태우 정부로부터 감시당했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윤석양은 탈영 후 '양심선언'을 통해 보안사에서 갖고 나온 동향파악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과 컴퓨터 디스켓을 공개했습니다. 김영삼은 민자당사에서 이상훈 국방부장관을 면담하여 항의했으며, 사찰 파장으로 국방부장관은 경질되었습니다.
1990
1990
[내각제 폐기 및 지방자치제 실시 약속]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내각제 폐기, 지방자치제 실시'를 내걸고 단식 투쟁을 시작하자, 김대중 총재를 찾아 내각제를 폐기하고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도록 힘써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3인이 서명한 '내각제 합의문'이 폭로되자 김영삼은 '자신을 음해하기 위한 정치공작'이라 비난하며 당무를 거부하고 마산으로 낙향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내각제 포기와 당 대표 권한 보장을 약속하며 사태는 김영삼의 의도대로 수습되었습니다.
1991
1991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방문]
한국여성단체협의회를 방문하여, 여성단체협의회로부터 지자제 선거법 개정 건의문을 전달받았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2
1992
[제14대 총선 민자당 과반수 실패 및 민정계의 견제]
실시된 제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내 계파간 치열한 공천 경합 후유증으로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습니다.
민정계는 김영삼에게 총선 패배 책임을 씌워 대표직에서 끌어내리려 했습니다.
그가 이끌던 민주계는 부산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참패했습니다. 민정계는 3당 통합 당시 3인의 총재들이 서명한 '합의각서 사본'을 언론에 유출시키며 견제했습니다. 김영삼은 '내각제를 백지화하라. 그렇지 않으면 탈당하겠다. 나 아니면 누가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겠느냐?'고 저항하며 노태우와 박철언의 후계자 영입 시도를 무산시켰습니다.
1992
1992
[민자당 대통령 후보 선출]
노태우와의 내각제 이면 합의를 백지화하고, 민정계와 공화계 의원들의 반발을 누르고 드디어 민주자유당의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었습니다.
5월 18일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에 재취임했습니다. 김윤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쳤고, 노태우가 박철언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강하게 반발하여 무산시켰습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것'이라며 조롱했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1992
1992
[국회의원직 사퇴 (14대 대선 출마)]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국회의원직에서 사퇴했습니다.
이는 대선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2
1992
[제14대 대통령 당선 (최초 서울대 출신 대통령)]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193만 표차로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서울대학교 출신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후보의 3파전으로 격돌했습니다. 선거 당시 '초원복집 사건'이 터져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는 지역 감정 조장 발언이 문제가 되었으나, 오히려 영남 표를 결집시키는 역풍을 일으켰습니다. 정호용 등 군부 인사의 지지 호소와 군사정권 세력 및 반공주의 세력의 표 분산(김종필 지지)으로 부산, 경남 표심을 장악하여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 고향에서는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렸고, 그는 당선 통지서를 들고 아버지 김홍조에게 알리고 어머니 박부련의 묘소에도 참배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1993
1993
[제14대 대통령 취임 (32년 만의 군사정권 종식)]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32년 만에 군사 정권의 마침표를 찍고 문민 정부 시대를 열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3
1993
[자신과 가족 재산 전격 공개]
대통령 취임 직후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을 전격 공개했으며, 총액은 17억 7,822만 원이었습니다.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며 공직자들의 재산 공개를 종용하여 삼부요인과 고위 공무원들이 연이어 재산을 공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3
1993
[1차 북핵 위기 및 클린턴과의 관계 갈등]
북한의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로 1차 북핵 위기를 맞았습니다.
대북 포용정책을 주장한 클린턴 행정부와 김영삼 정부의 강경론이 충돌하며 한미 관계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미국이 남한을 배제한 채 북한과 직접 핵 협상을 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1994년 10월 북미 간 제네바 합의가 이뤄졌을 때, 미국이 이를 한국에 알리지 않아 김영삼 대통령이 크게 분노했습니다. 1996년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 처리 과정에서 갈등이 더욱 커졌고, 이는 임기 말 외환위기 시 미국의 신속한 도움을 받지 못한 원인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1993
1993
[위안부 문제 일본에 물질적 보상 요구 않음]
언론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측에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히고, 보상은 내년부터 정부 예산으로 추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일본 측의 진실 규명을 중요하게 강조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3
1993
[5.18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 선언]
5·13 특별 담화를 통해 자신의 문민정부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여 정부의 정통성을 확립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3
1993
[“5.16 군사 정변은 쿠데타” 발언]
“5.16 군사 정변은 쿠데타”라고 발언하며 보수 세력의 반발을 샀습니다.
각 교과서에 군사혁명으로 기술된 내용을 쿠데타나 정변으로 고치게 지시했습니다.
이 발언으로 김종필 등 보수 세력의 지지를 잃었고, 김종필은 자민련을 창당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3
1993
[율곡비리 사건 조사 및 관련자 처벌]
율곡비리 사건을 조사하여 비리 관련자들을 처벌했습니다.
이는 집권 초반 개혁 드라이브의 일환이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3
1993
[중화인민공화국 임정 요인 유해 환국 사업 추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에서 찾고자, 중화인민공화국에 있는 임정 요인들의 유해를 환국하는 사업을 지시하고 추진했습니다.
1993년 8월 5일 국립묘지에 임정요인 묘소를 신설하게 했습니다.
1993
1993
[조선총독부 청사 해체 지시]
민족 정기 회복을 위해 조선총독부 청사를 해체하여 경복궁을 복원하고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을 건립하라고 내각에 지시했습니다.
1994년에 총독부 청사 철거 문제가 본격화되면서 철거와 보존 논쟁이 있었으나, '완전철거론'을 주장하며 강행했습니다. 일부 학생 운동권의 '친일파' 공세와 극우 진영의 반발, 시의원들의 철거 보류 동의안 제출, 시민단체들의 가처분 신청 등 반대가 있었지만 무시하고 철거를 추진했습니다.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경축식에서 중앙돔 랜턴의 해체를 시작으로 철거에 들어갔고, 1996년 11월 13일 지상 부분 철거가 완료되었으며, 1996년 12월 완전 철거되었습니다.
1993
1993
[금융실명제 전격 도입]
긴급명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통해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으로 해야 하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했습니다.
이는 비리와 부패의 온상이었던 금융 차명 계좌와 재산 은닉을 방지하기 위한 과감한 조치였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3
1993
[금리 제2단계 자유화 조치 발표]
경제 개혁의 일환으로 금리의 제2단계 자유화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자유시장경제 정착을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4
1994
[정치범 석방 및 활동 보장]
군사정권에 의해 수감되었던 시인 김남주와 노동 시인 박노해를 석방했으며, 음란죄로 기소된 마광수 교수에게 무죄 판결을 내려 활동을 보장했습니다.
예술가와 작가들의 반정부적 작품과 사회 비판을 전면 허용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4
1994
[시민운동가 및 노동운동가 영입]
김문수, 이재오, 안상수 등 시민사회운동가와 노동운동가들을 민주자유당에 영입했습니다.
군사 정권과 관련 없는 홍준표, 오세훈 등 신진 관료 출신과 법관 출신들도 등용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4
1994
[3대 정치개혁 법안 서명]
3대 정치개혁 법안(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정치자금법 개정안, 지방자치법 개정안)에 서명하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한 제도 구축의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4
1994
[북한 남북정상회담 제의 수락]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자 즉각 수락했습니다.
이는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94년 6월 15일부터 18일까지 북한에 머무르며 김일성 주석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카터와 김일성의 회담으로 미국은 북한에 대한 대북 제재를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1994
1994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및 과거사 수사 지시]
대법원과 감사원 등에 전직 대통령 비자금 수수설에 대한 공개 수사를 지시했습니다.
또한 검찰 등에 12·12 군사 반란,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수사를 지시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4
1994
[김일성 사망으로 남북정상회담 무산]
남북정상회담을 불과 한 달 앞두고 김일성 주석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역사적인 정상회담이 무산되었습니다.
김영삼은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조문을 공식적으로 거부하여 남북 관계가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미국은 북미 협상을 진행하던 로버트 갈루치를 제네바의 북한 대표부에 보내 조문했으나, 김영삼은 정반대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로 인해 남북 관계는 불신만 커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김영삼은 '남북의 체제 경쟁은 끝났다. 언제 갑자기 통일이 눈앞에 닥쳐올지 모른다'고 말하며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습니다.
1995
1995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34년 만의 부활)]
1991년 이후 실시되던 지방자치제도를 확대시켜, 1995년부터 특별시·광역시장, 도지사 및 시장, 군수 등을 주민이 직접 선출하게끔 제도를 개정했습니다.
1995년 6월 27일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며 34년 만에 지방자치제가 부활했습니다.
자치단체장이 민선으로 직접 선출되면서 차관급이던 서울특별시장 등 주요 직위가 정무직으로 개편되고, 관련 직급들이 상향 조정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1995년 5월부터 민선 시도지사 후보와 시장, 군수 후보자의 선거 유세가 시작되었습니다.
1995
1995
[전직 대통령 비자금 의혹 제기 및 수사]
측근이던 총무처 장관 서석재가 전임 대통령 중 1인이 4,000억원 이상의 비자금과 가명 계좌를 보유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이후 민주당 박계동 의원에 의해 4,000억원 비자금설이 폭로되면서 제5공화국 인사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수사를 명했습니다.
1994년 7월 김영삼은 대법원과 감사원 등에 전직 대통령 비자금 수수설에 대한 공개 수사를 지시했습니다. 같은 해 7월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신군부 인사를 불기소 처분했으나, 1995년 12월 헌법재판소가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 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재수사가 가능해졌습니다.
1995
1995
[5.18 특별법 제정 지시]
대통령 명령으로 5.18 관련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습니다.
이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밝히고 관련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1995년 12월 21일 5.18 특별법이 국회에서 제정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신군부 인사들의 새로운 혐의가 밝혀지자 검찰은 1995년 12월 12.12 및 5.18 사건 재수사에 착수했습니다.
1995
1995
[민주자유당 해산 및 신한국당 창당]
전두환(송준원)과의 관계를 끊고자 민주자유당을 해산하고 신한국당을 창당했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적 기반을 새롭게 재편하는 시도였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6
1996
[노태우와 전두환 구속 기소]
5.18 사건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 검찰은 노태우와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 기소했습니다.
이는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의 핵심 성과였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6
1996
[6.25 전쟁 '만주 폭격' 발언 논란]
전방 부대를 시찰한 자리에서 "6.25 당시에 만주를 폭격했으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발언하여 여야 간 극한 언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96
1996
[연세대 한총련 사태]
연세대에서 발생한 한총련 사태로 1,200여 명의 전경과 학생들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김영삼은 여학생을 성추행한 경찰관에 대한 추미애 의원의 지적에 따라 엄벌을 지시하여 대대적인 파면, 해임 조치를 내렸습니다.
동시에 일부 언론의 연세대 사건 당시 혼숙, 혼음에 대한 선정적인 보도에 대해 학생들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며 이를 지적하고 정정보도하게 했습니다.
1996
1996
[북한 무장 간첩단 강릉 침투]
북한 무장 간첩단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에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상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국방부의 수색 끝에 2개월 만에 무장공비들은 자살하거나 도주하며 사건은 종결되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6
1996
[OECD 가입 (아시아 2번째)]
'선진국 클럽'이라 불리는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아시아 국가 중 일본에 이어 2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OECD 본부에서 가입이 이루어졌습니다.
1997
1997
[노동법 개정 강행 성명 발표]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노동법 개정은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고 발표하여 노동계와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후 전국적으로 노동법 개정 반대 총파업이 벌어졌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7
1997
[한보철강 부도 및 김현철 비리 연루]
한보철강이 부도로 도산했고, 한보그룹 회장 정태수는 구속되었습니다.
한보그룹 사태 수사 중 아들 김현철 씨가 한보 비리에 연루되어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1997년 1월부터 한보철강, 기아자동차 등 도미노식 부도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김영삼은 아들 김현철을 차기 정치인으로 염두에 두었으나, 신한국당 신임 총재 이회창이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김영삼과 이회창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1997
1997
[차남 김현철 체포 및 대국민 사과]
뇌물수수 의혹을 받아온 차남 김현철이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이에 김영삼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7
[김영삼 대통령의 외환위기 심각성 인지 지연]
김영삼 대통령이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통화하기 전까지 외환 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내용입니다.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은 1997년 11월 10일 강경식 경제부총리와의 통화 이전까지 한국에 닥쳐올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위기 대응에 중요한 시기를 놓쳤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1997
1997
1997
[IMF 구제금융 요청]
임기 후반 외환위기가 심화되어 국제 통화 기금(IMF)에 금융 지원을 신청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지지율이 8.4%까지 급락했습니다.
1997년 1월부터 한보철강, 기아자동차 등의 도미노식 부도 사태가 발생하며 경제 시장이 악화되었습니다. 구한말 국채보상운동과 비슷하게 금모으기 운동이 1998년 1월에 일어났습니다. 대대적인 자본 시장 개방과 군부 독재 잔재 청산이 당면 과제였으며, 대우그룹의 해외 사업체 매각, LG반도체의 현대그룹 강제 매각, 프로스펙스의 이랜드 매각 등 기업 구조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1997
[대한민국, IMF 구제금융 요청 및 양해각서 체결]
대한민국이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하여 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자금 지원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습니다.
1997년 12월 3일, 대한민국은 심각한 외환 위기로 국가부도 위기에 처하자 국제 통화 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총 195억 달러 규모의 자금을 지원받기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 경제는 IMF의 관리체제 하에 놓이게 되었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되었습니다.
1997
1997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실시 및 정권 교체]
IMF 외환위기 직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 김대중이 당선되어 여야 간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1997년 12월 18일, IMF 구제금융 요청 직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외환 위기 및 국가부도 사태에 대한 책임론 속에서 여당인 한나라당 후보 이회창은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하며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여야 간 정권 교체가 발생했습니다.
1997
1997
1997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 사면 복권]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의 협의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특별 사면 복권시켰습니다.
이는 국민 대통합을 위한 조치로 평가되었습니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세 후보 모두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제안에 김대중 당선자가 수용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김대중 당선자는 '이제는 국민 통합이 중요하다'며 사면을 지지했습니다. 외국 언론들은 이를 '용기 있는 결정'이라 평가했습니다.
1998
[전 국민 금모으기 운동 전개]
IMF 구제금융 요청 후 외채 상환을 위해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금을 모아 기부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약 227톤의 금을 모았습니다.
IMF 외환 위기 극복을 위해 1997년 말부터 1998년 초까지 대한민국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소유한 금을 국가에 기부하는 '금모으기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약 350만 명이 참여하여 총 227톤에 달하는 금이 모금되었으며, 이는 외채 상환에 기여하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기 극복 의지를 보여주며 긍정적인 평가를 이끌어냈습니다.
1998
1998
1998
[대통령직 퇴임 및 상도동 자택 귀향]
김대중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상도동 자택으로 퇴임했습니다.
퇴임사에서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퇴임 직후 아들 김현철과 측근 홍인길 등의 비리 사건이 불거져 나오며 매끄럽지 못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퇴임 후에도 꾸준히 정치활동을 하며 민주당계 정당에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이승만과 이명박에게는 긍정적 평가를,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 노무현에게는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1998
[김대중 정부 출범 및 구조조정 착수]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여 IMF의 요구를 전면 수용하고 본격적인 경제 구조조정에 착수했으며, IT 산업 육성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후, 김대중 대통령은 IMF의 요구 조건을 전면 수용하고 강도 높은 국가 경제 구조조정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함께 1999년 3월에는 '사이버 코리아 21' 계획을 발표하며 IT 산업 발전과 인프라 투자에 집중하는 등 경제 재건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998
1998
[5개 부실 은행 퇴출 및 통폐합 발표]
정부가 대동, 동남, 동화, 경기, 충청은행 등 5개 부실 은행의 퇴출을 발표하고 타 은행으로의 통폐합을 진행했습니다.
1998년 6월 29일, 금융감독위원회는 이헌재 위원장 주재 하에 대동, 동남, 동화, 경기, 충청은행 등 5개 부실 은행을 퇴출시키고, 이들의 업무를 국민, 주택, 신한, 한미, 하나은행 등으로 이관하는 대규모 은행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IMF가 요구한 금융권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국내 은행들의 부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1998
1998
[정부, 공기업 민영화 방안 발표 및 추진]
정부가 공기업 민영화 방안을 발표하고, 남해화학, 포항제철, 한국통신공사 등 9개 공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했습니다.
1998년 7월 1일, 김대중 정부는 IMF 관리체제 하의 경제 구조조정 일환으로 공기업 민영화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남해화학, 대한교과서, 한국종합기술금융, 대한송유관공사, 포항제철, 한국종합화학, 한국중공업, 한국통신공사, 한국담배인삼공사 등 총 9개 공기업이 민영화 절차를 밟게 되었습니다.
1998
1998
1998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 개원]
독립기념관에 조선총독부 중앙돔 랜턴과 건축 부재를 활용한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을 개원하여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이는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의 일환입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8
[4개 생명보험사 영업정지 및 인수 발표]
고려, 국제, 태양, BYC 등 4개 부실 생명보험사가 영업정지를 발표하고 타 보험사로 인수되었습니다.
1998년 8월 11일, 금융당국은 고려, 국제, 태양, BYC 등 4개의 부실 생명보험사에 대해 영업정지 조치를 내리고, 각각 알리안츠생명, 삼성생명, 대한생명, 교보생명으로 인수되는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금융권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부실 보험사 정리를 통해 금융 시스템의 건전성을 확보하려는 조치였습니다.
1998
1998
[IMF 긴급 보관 금융 18억 달러 상환]
IMF 긴급 보관 금융 18억 달러를 상환하며 금융 위기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1998년 12월, 대한민국은 국제 통화 기금(IMF)의 긴급 보관 금융 중 18억 달러를 상환하며 금융 위기로부터 점진적으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한국 경제의 회복 가능성을 보여주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1998
1999
1999
[김포공항 '페인트 달걀' 피습]
일본 출국을 위해 김포공항 귀빈실로 향하던 중 재미 교포 노인으로부터 얼굴에 '페인트 달걀'을 맞는 피습을 당했습니다.
가해자는 김영삼이 IMF를 초래해 나라를 망쳤다고 주장했습니다.
페인트 달걀을 던진 노인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김영삼은 '살인적 페인트'가 자신을 봉사로 만들어 죽은 사람과 똑같게 하려는 목표였다며 고통을 토로했습니다.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 고문 추대]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로부터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민족 의식과 독립 정신 존중의 일환입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1999
[대우그룹 해체 결정]
과도한 차입에 의한 무리한 확장으로 부채가 65조 원에 달했던 대우그룹이 IMF 구제금융 이후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1999년, 무리한 차입을 통한 확장 경영으로 인해 막대한 부채(약 65조 원)를 감당하지 못한 대우그룹은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정부의 대규모 국고 지원에도 불구하고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재벌 해체의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1999
2000
2000
[팬클럽 《YS사사모》 출범]
그의 팬클럽인 《YS사사모》가 공식 출범했습니다.
11월 13일에는 YS사사모 회원들이 상도동을 방문하여 면담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2000
2000
[김대중 노벨 평화상 수상 비판]
노르웨이 노벨 평화상 위원회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하자, 김영삼은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며 고려대 강연이 취소되는 해프닝을 겪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2000
[김대중 대통령, IMF 위기 극복 공식 선언]
김대중 대통령이 IMF 차관 전액 상환 및 IMF 위기 극복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2000년 12월 4일, 김대중 대통령은 국제 통화 기금(IMF)의 모든 차관을 상환했음을 공식 발표하며 대한민국이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위기 극복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2000
2001
[대한민국, IMF 관리체제 공식 종료]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 통화 기금(IMF)의 구제금융 관리체제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2001년 8월 23일, 대한민국은 국제 통화 기금(IMF)으로부터 받은 19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조기 상환 완료하며 공식적으로 IMF 관리체제를 졸업했습니다. 이는 1997년 구제금융 요청 이후 약 3년 8개월 만의 일로, 국가 경제의 완전한 회복을 상징했습니다.
2001
2002
2002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지지]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 이회창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보수 진영에 힘을 실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2002
2002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2003
2003
[자유북한방송 방송위원회 명예위원장 선임]
전 조선노동당 비서 황장엽의 천거로 자유북한방송 방송위원회 명예위원장에 선임되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2004
2004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냉정한 반응]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될 때, 노무현을 정계에 입문시켰지만 그동안의 충고를 소홀히 한 채 일방적으로 국정을 운영한 결과라며 냉정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2004
2004
[황장엽과 회담 및 북한민주화운동 지원 약속]
황장엽을 만나 '북한민주화운동을 위해 전력을 다해 돕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황장엽이 대표로 있는 북한민주화동맹의 명예위원장에 피선되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2005
2005
[3당 합당 전후 노태우로부터 정치자금 수수 의혹 제기]
박철언에 의해 1990년 3당 합당 전후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40억 원 이상의 정치 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김영삼 측은 이를 강력히 부인했습니다.
박철언은 1989년 6월 김영삼 총재의 소련 방문 전 20억 원과 여비 2만 달러를 전달한 것을 시작으로, 그해 연말 10억 원, 90년 3당 합당 직후 설을 앞두고 10억 원 등 총 3차례에 걸쳐 40억 원 이상을 직접 전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1989년 3월 노태우 대통령의 중간평가 유보 결정 과정에도 김영삼이 적극 개입했다고 주장했습니다.
2006
2006
[노무현 정부 외교 비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민주주의 이념연구회' 발족식에 참석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를 비난하며 '일본이 바보로 본다'는 등의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일본의 독도 수역 측량 계획에 우려를 표하며 '일본이 노무현을 같잖게 보니 그렇게 하는 것', '내가 대통령 때는 하시모토(일본 전 총리)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과거 자신의 독도 인근 해상 시위 지시를 언급하며 노무현 정부의 외교 활동을 비난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 계획에 대해서도 '누가 오라는 사람도 있는 것도 아니고…. 김정일에게 아무것도 갖다줄 게 없는데 누가 오라고 하겠나'라며 비판했습니다.
2007
2007
[국립 5.18 민주묘지 첫 참배 (11년 만)]
11년 만에 처음으로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했습니다.
5.18 특별법을 제정한 공로로 시민단체로부터 감사패를 받았으며, '5.18은 자유와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습니다.
묘지 입구에서는 김영삼의 참배에 반대하는 일부 대학생들의 시위가 있었으나 충돌은 없었습니다. 그의 참배로 5.18은 화해와 용서의 역사로 승화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2007
2007
[역대 대통령 및 정치인 평가]
성균관대학교 김일영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국부로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김구는 현실성 없는 지도자로, 박정희는 민주화를 후퇴시킨 역적으로 혹평했습니다.
장면은 무능력자로, 전두환과 노태우는 반역자로 규정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2008
2008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2008
2008
[김종필과 이명박 대통령 비판 회동]
김종필 전 총재와 서울 강남에서 회동을 갖고 한나라당 공천 결과가 편파적으로 진행됐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강력히 성토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2008
2008
[3.15 의거 국가기념일 제정 촉구]
“3·15 의거는 국가기념일로 반드시 제정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3·15 의거가 국민적 민주화 투쟁의 효시임을 강조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2009
2009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 기공]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에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이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공간입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2009
2009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참석]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자살하자 《노무현국민장 장의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었고, 5월 29일 서울 경복궁 흥례문 앞에서 열린 노무현 영결식에 참석했습니다.
일본 잡지 《애플타운》 9월호 인터뷰에서 노무현 국민장에 대해 '국민장이 아니라 가족장으로도 충분했다'는 발언을 해 논란을 일으켰으나, 김영삼 측은 정식 인터뷰가 아니었다고 해명했습니다.
2009
2009
[김대중 전 대통령 병문안 및 화해]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을 방문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며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관계',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라고 회고했습니다.
사실상 양김의 극적인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김대중 여사에게 '세상에는 기적도 있다'며 위로의 말을 전했습니다. 김영삼은 김대중의 국장에 직접 참석하여 조문했고, 이후 동교동계 인사들을 상도동으로 초청하여 위로 만찬을 개최하는 등 관계 회복에 힘썼습니다.
2010
2010
[전 재산 사회 환원 의사 표명]
서울 상도동 자택과 거제도 땅을 포함해 50억 원에 이르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뜻을 나타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2010
2010
[친자 확인 소송 패소 (혼외자 인정)]
친자 확인 소송에서 패소하여 또 다른 아들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사생활에 대한 논란을 재점화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2011
2011
[김영삼 민주센터 건립]
상도동 자택 근처에 김영삼 민주센터가 건립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민주화 업적을 기리고 보존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2012
2012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지지]
다가오는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박근혜 당선인으로부터 전화로 지지에 대한 감사를 받았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2013
2013
[박근혜 제18대 대통령 취임식 참석]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박근혜 제18대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연속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건내용에 모두 포함됩니다.
2015
2015
[향년 86세로 서거 (대한민국 최초 5일 국가장)]
고열과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 후, 11월 21일 증세 악화로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11월 22일 오전 0시 21분 32초 혈액 감염 의심으로 치료를 받던 중 향년 86세로 서거했습니다.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로 5일간 국가장으로 치러졌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허약한 전신 상태에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이 겹쳐 일어난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그의 묘소는 제3장군묘역 우측능선에 단독 묘역으로 위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