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왕자는 신라를 삼키기로 했다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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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리즈는 역사적 팩트를 웹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된 정사 기반)
📢 등장 인물: 각성한 김유신, 진골 귀족 석품, 수상한 낭도 백석
여명이 밝아오는 낭도들의 훈련장.
아침 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이었으나 거친 기합 소리와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가득했다.
김유신이 들어서자, 훈련장을 메우던 소리가 금세 조용해졌다.
수십 개의 시선이 유신에게 꽂혔다.
조롱과 호기심이 담긴 눈빛들이었다.
지난밤 천관녀의 집 앞에서 벌어진 말의 목을 벤 사건은 이미 서라벌 전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저기 보게. 제 짐승을 죽인 놈이 납시었군.”
“독한 놈. 여자 치마폭에 싸여 놀더니 이제 와서 정신 차린 척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속삭이지 않았다.
오히려 들으라고 크게 떠들어대고 있었따.
김유신은 그들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누군가 유신의 앞을 가로막았다.
석품이었다.
진골 귀족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가야계를 멸시하기로 유명한 자.
“어이. 김유신.”
석품이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유신의 어깨를 목검으로 툭툭 건드렸다.
“어젯밤에 아주 대단한 무용담을 썼더구나? 말 목을 단칼에 베었다지?”
“……비켜라.”
“성질하고는. 내 말은 네 칼 솜씨가 아깝다는 거야. 짐승이나 잡기에는 말이지.”
석품이 낄낄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추종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가야의 핏줄이라 그런가? 짐승 피비린내를 유독 좋아하나 봐.”
김유신이 서늘한 눈동자로 석품을 쳐다봤다.
어제 자신이 베어버린 말의 눈망울이.
그리고 눈물을 삼키던 천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해 붉게 충혈된 눈으로 김유신이 물었다.
“짐승이라 했나.”
“그래. 짐승 잡는 백정 놈이랑 네가 다를 게 뭐냐?”
김유신의 입매가 비틀리면서 짤막한 웃음이 튀어 나왔다.
그와 눈이 마주친 낭도들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유신이 바닥에 뒹구는 목검 하나를 발로 차올려 낚아챘다.
무심한 손길로.
“어제 짐승을 베어보니 알겠더구나. 짐승이나 썩은 뼈다귀를 자랑하는 놈들이나. 베는 맛은 매한가지일 거라는 걸.”
석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썩은 뼈다귀.
진골인 자신을 능멸하는 말임을 모를 리 없었다.
“이 미친 새끼가! 감히 누구 앞에서 주둥이를 놀려!”
우웅-!
석품이 들고 있던 목검이 허공을 가르며 다가왔다.
대련의 형식을 빌린 살수였다.
누가 봐도 유신의 머리통을 박살 낼 기세로 날아드는 검.
하지만 유신의 눈에는 그 검이 무척 느리게 보였다.
‘이런 것도 검이라고 흔드나.’
순간 유신의 의식이 1년 전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갔다.
***

열일곱의 여름.
유신은 홀로 단석산의 깊은 봉우리, 중악에 올랐다.
‘가야의 핏줄이라 안 된다.’
‘네 놈의 한계는 거기까지다.’
서라벌의 귀족들이, 심지어 아버지조차 내뱉던 그 말들이 유신의 뼈를 갉아먹고 있었다.
‘바위조차 베지 못하는 검으로 어찌 저 견고한 골품의 벽을 베겠는가.’
김유신은 식음을 전폐하고 사흘 밤낮 동안 수련을 했다.
목검이 부러지면 돌을 들었고, 돌이 깨지면 맨주먹으로 바위를 쳤다.
제 몸을 학대하듯 몰아붙인 끝에 남은 건 너덜너덜해진 주먹과 비웃듯 꿈쩍하지 않는 바위뿐이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밤.
한계에 다다른 유신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바위 위에 쓰러졌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보다 아무것도 베어내지 못했다는 패배감이 더 싫었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유신의 머리맡에 드리워졌다.
유신은 흐릿한 눈을 힘겹게 떠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난승.
이름 모를 도사가 물었다.
“신라를 삼키고 싶으냐?”
노인의 목소리가 죽어가던 유신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삼키고 싶다면 씹어 삼킬 힘을 길러라. 네놈의 그 얄팍한 분노로는 지푸라기 하나도 베지 못한다.”
노인이 유신의 눈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내가 그 힘을 주마.”
유신은 피 섞인 침을 뱉으며 물었다.
“……제게 힘을 주시는 대가로 무엇을 가져가실 겁니까.”
“네놈의 안식. 그래도 원하느냐.”
유신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안식?
패배자의 비굴한 잠자리 따위 줘버리면 그만이다.
지금 제게 필요한 건 편안한 잠이 아니라 저 거만한 진골들을 짓밟고 신라를 삼킬 힘이었다.
그걸 얻을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조차 남는 장사였다.
“네, 갖고 싶습니다.”
노인이 준다는 엄청난 힘은 물론.
신라, 아니 그 이상이 갖고 싶었다.
망설임 없는 김유신의 대답.
노인이 기괴하게 웃으며 유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버릴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리고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너는 천하를 발아래 두게 될 것이다. 허나 옥좌는 결코 네 자리가 아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었다.
저주처럼 들리기도 했고, 예언 같기도 했다.
“평생을 왕의 등 뒤에서 보내게 될 테다.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건 가질 수 있을 거다. 죽는 그 순간까지 단 하룻밤도 다리 뻗고 자지 못하는 삶. 그게 오늘부로 달라지게 될 네놈의 운명이다.”
***
노인의 서늘한 예언이 귓가에서 흩어지는 순간, 유신의 의식이 다시 돌아왔다.
빗소리 대신 낭도들의 야유 소리가.
축축한 동굴의 어둠 대신 흙먼지 날리는 훈련장이 시야를 채웠다.
석품의 목검이 정수리에 닿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열일곱의 그날 이후로 달라진 유신의 눈에는 이 일격이 마치 진흙탕 속을 허우적대는 몸짓처럼 느리게만 보였다.
어떻게 하겠다 생각하기도 전, 몸이 먼저 반응했다.
몸보다 욕망이 먼저 검을 휘둘렀다고 봐야할 정도로 빠른 반응.
콰직-!
둔탁한 파열음이 훈련장에 울려 퍼졌다.
“어……?”
석품이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손에 들려 있어야 할 목검이 반토막이 나 저 멀리 날아가 처박혀 있었다.
그리고 유신의 목검 끝은 석품의 목젖 바로 1촌 앞에서 멈춰 있었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갔다면?
목검이 아니라 진검이었다면?
석품의 목은 어젯밤 유신의 말이 그랬듯 바닥을 뒹굴었으리라.
“허… 허억…….”
석품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사타구니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유신은 그런 석품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유신은 싸늘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네놈 뼈다귀 말이다.”
유신이 발을 들어 바닥에 떨어진 석품의 목검 조각을 짓이겼다.
빠드득.
나무 부서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썩어 빠진 줄만 알았더니, 아주 부러지기도 쉬운 뼈였구나.”
유신은 목검을 미련 없이 바닥에 던져버리고 돌아섰다.
등 뒤로 꽂히는 시선들이 달라져 있었다.
경멸하던 눈동자는 공포로.
조롱하던 놈들의 눈에는 경외감으로.
‘이제 시작이다.’
말의 목을 베고 뼈다귀들의 기를 꺾었다.
사랑을 버리고 얻은 힘.
이 힘으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그때였다.
유신이 훈련장을 빠져나가려는데 누군가 박수를 치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짝짝짝-!
“실로 대단한 솜씨입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띤 사내.
선한 눈매와 달리 묘하게 음침한 기운을 풍기는 자.
“저는 백석이라고 합니다. 대형의 그 검술에 반해 제 목숨을 바쳐 모시고 싶어 이리 왔습니다.”
백석이라.
유신은 뱀처럼 번들거리는 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놈이다.’
유신이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그래? 목숨을 바치겠다?”
유신이 백석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백석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기억해두마. 그 목숨 언젠가 내가 요긴하게 쓸 날이 있을 테니.”
유신은 백석을 지나쳐 홀로 걸어갔다.
먹잇감이 제 발로 덫에 걸려들었다.
신라를 삼키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제물이.
📜 팩트 체크
-석품: 소설 속에서 유신을 괴롭히는 석품은 실제 역사 속 신라의 진골 귀족이자 훗날 상대등(총리)까지 오르는 실존 인물입니다. 김유신과는 평생의 정적 관계였습니다.
-난승: 유신에게 비법을 전수한 도사 난승 역시 『삼국사기』에 기록된 인물입니다.
-백석: 3화 마지막에 등장한 백석 역시 실제 인물이었습니다. 스포를 피하기 위해 이 인물에 대한 실제 이야기는 다음 화에 더 자세히 풀겠습니다.
더 자세한 김유신의 일대기가 궁금하다면 여기서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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