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왕자는 신라를 삼키기로 했다 2화

소현 +

📢 이 시리즈는 역사적 팩트를 웹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된 정사 기반)
📢 등장 인물: 김유신과 천관녀


  망국의 왕자는 신라를 삼키기로 했다 1화 보러가기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서라벌의 밤.
달빛조차 구름 뒤로 숨어버린 시각.
인적 드문 골목길에 거친 말발굽 소리만 울려 퍼졌다.

유신이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린 건 차가운 밤바람이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뺨을 스치고 지나간 직후였다.
익숙한 향 냄새.
그리고 서늘한 적막.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깨닫고는 깊은 침음을 흘렸다.
결코 와서는 안 될 곳이었다.

“오셨군요.”

천관의 또렷한 음성이 적막한 신당 앞을 울렸다.
마치 유신이 올 줄 알았다는 듯 그녀는 하얀 소복 차림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유독 창백하게 빛나는 얼굴로.
말 위에서 천관을 내려다보는 유신의 시선이 그녀의 발끝에 머물렀다가 천천히 다시 눈동자로 옮겨갔다.

‘내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귓가에 어머니 만명부인의 호통이 환청처럼 울렸다.

“패망한 가야의 핏줄이라 손가락질받는 것이 억울하지도 않으냐! 대업을 꿈꿔야 할 사내가 고작 계집의 치마폭에서 썩어가다니!”

어머니 만명부인.
신라 왕의 동생 숙흘종의 딸이자 당대 최고의 권력가였던 외조부의 뜻을 거스르고 사랑의 도피를 선택한 여인.

벼락 맞은 사랑.
하늘이 맺어준 인연.
사람들은 부모님의 사랑을 아름다운 전설이라 칭송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사랑의 결과물인 유신의 삶은 지옥이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진골 귀족들 사이에서 겉돌았고 어머니는 가문의 수치라며 외가에서 의절당했다.

‘근본 없는 놈’ ‘도망자들의 자식’.
그게 평생 유신을 따라다니는 꼬리표였다.

그래서 유신은 어머니 앞에서 맹세했다.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겠노라고.
허나 정신을 차려보니 제 몸은 또다시 이곳에 당도해 있었다.
스스로가 기가 막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말이 이끄는 대로 오셨겠지요. 장군님의 의지가 아니라.”

천관의 말이 정곡을 찌른 듯 유신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술에 취해 고삐를 놓아버린 유신을 태우고 온 건 그의 충직한 애마였다.

‘이 짐승 녀석이….’

말은 주인의 마음이 가장 기울어 있는 곳을 기억하고 있었다.
참으로 애석하고 잔인하게도.



유신은 말에서 내려 천관의 앞까지 걸어갔다.
철그럭.
투박한 갑옷 소리가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깼다.

천관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유신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평소에 쳐다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가장 높은 곳에 깃발을 꽂기 위해서라면.
제 발밑에 시체가 산을 이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의 눈이었다.

“다들 나를 보고 비웃더구나. 패망한 가야의 핏줄이라고.”

유신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술 냄새와 섞인 서늘한 살기가 천관을 덮쳤다.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면 나는 신라의 그 어떤 진골보다 더 잔인해져야 한다. 설령 내 심장을 도려내는 한이 있더라도.”

유신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의 거친 손이 검 자루를 움켜쥐는 모습에 천관의 숨이 턱 막혔다.



스르릉.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검이 천천히 칼집을 빠져나왔다.
달빛을 받은 칼날이 서슬 퍼런 빛을 뿜었다.

“천관은 보아라. 내 야망은 무디어진 칼로는 벨 수 없는 것들뿐이다.”
“…….”
“그러니 나를 원망해라. 시대를 벨 검이 되기 위해 나를 무디게 하는 너를… 오늘 베어낼 것이니.”

천관은 직감했다.
저 서늘한 칼끝이 자신의 목을 겨누지 않더라도 결국 오늘 밤 베이는 것은 두 사람의 인연일 것임을.
그녀는 담담히 운명을 받아들이듯 눈을 감았다.

“장군님.”
“내 앞길을 막는 것은 무엇이든 벤다. 설령…….”

차갑기만 하던 유신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거센 바람 앞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촛불처럼.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유신은 다시 숨을 삼키며 감정을 지워냈다.



‘어머니, 아버지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버리셨지만 저는 부모님과 다른 길을 가겠습니다.’

유신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사랑 때문에 비참해지느니 차라리 사랑을 죽여서라도 비범해지기로.

‘저는 모든 걸 얻기 위해 사랑을 버리겠습니다.’



서늘한 철가면을 뒤집어쓴 듯 아무런 온기도 읽을 수 없는 건조한 얼굴로 말을 뱉었다.

“그것이 내 마음이라 해도 예외는 없다.”


휘익-
섬광이 어둠을 갈랐다.




말은 비명조차 지를 새가 없었다.
툭-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붉은 선혈이 바닥을 적셨다.
유신이 자식처럼 아끼던 명마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자신을 천관에게 이끌었던 그 유일한 다리를 제 손으로 끊어낸 것이다.

뜨거운 피가 튀어 유신의 뺨을 적셨지만 그는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멍하니 서 있는 천관을 향해 낮게 읊조릴 뿐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이쯤 하자.”

유신은 피 묻은 검을 털지도 않고 칼집에 꽂아 넣었다.

“오늘 밤 너를 연모하던 김유신은 이 짐승과 함께 죽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너 또한 나를 죽은 사람이라 여겨라.”

그것은 유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고백이자 가장 잔인한 이별 통보였다.

더 큰 천하를 손에 쥐기 위해서는 유일하게 쉴 수 있었던 이 작은 품을 버려야만 했다.
유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등 뒤로 참았던 천관의 울음소리가 밤하늘에 흩어졌다.


📜팩트 체크: 김유신이 신녀(혹은 기생) 천관녀의 집으로 향한 말의 목을 벤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훗날 김유신이 천관녀를 위해 천관사라는 절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더 자세한 김유신의 일대기가 궁금하다면 여기서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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