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왕자는 신라를 삼키기로 했다 1화

📢 이 시리즈는 역사적 팩트를 웹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된 정사 기반)
📢 등장 인물: 김서현(김유신 아버지), 만명부인(김유신 어머니)



서라벌의 화려한 연회장에서도 김서현의 자리는 늘 구석이었다.
빛나는 금관과 비단옷을 두른 진골 귀족들 사이.
흙먼지 묻은 갑옷을 입은 김서현은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증손자.
그것이 김서현을 설명하는 유일한 수식어였다.
신라에 투항해 진골의 품계를 받았으나 귀족들이 그를 보는 눈빛은 늘 싸늘했다.

패망한 나라의 찌꺼기.

김서현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전장에서 피를 뒤집어쓰며 제 목숨값으로 충성을 증명하는 길뿐이었다.

그런 김서현에게 만명공주는 닿을 수 없는 빛이었다.
왕의 아우인 입종 갈문왕의 딸이자 당대 최고의 권력자 숙흘종의 여식.
감히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고귀한 별.



하지만 운명은 잔인하게도 두 사람을 옭아맸다.
김서현은 처음 길에서 만명과 시선이 얽힌 그날을 잊지 못한다.
망해버린 나라 금관가야의 왕손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던 자신에게 보여주던 따뜻한 눈빛.

"공주님, 저는 망국의 핏줄입니다. 그런 저와 엮이는 게 두렵지 않으십니까?"
"제 눈에는 망국의 왕자가 아니라 훗날 신라를 지킬 장군만이 보입니다."

그 한마디에 김서현의 세상은 무너지고 다시 세워졌다.
미친 사랑의 시작이었다.
가문도 신분도 뛰어넘은 위태로운 밀회.
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사랑을 용납할 만큼 너그럽지 않았다.

두 사람이 연애하고 있다는 게 발각된 날.
만명의 아버지 숙흘종은 노발대발하며 딸을 별채에 가뒀다.
그것도 모자라 무쇠 자물쇠를 채워 철저히 고립시켰다.

그리고 김서현에게는 변방 만노군으로 떠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사실상의 추방령.
그렇게 잔인한 이별의 밤이 찾아왔다.

***

"도망치십시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쏟아지는 밤이었다.
김서현은 굳게 닫힌 별채의 대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흙탕물이 갑옷을 적시고 차가운 빗방울이 뺨을 때려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문 너머 어둠 속에 홀로 갇혀 있을 만명을 생각하니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공주님…… 제 주제에 감히 하늘을 탐했습니다. 가야의 천한 핏줄이 신라의 고귀한 별을 품으려 했으니."

김서현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떨렸다.

"이 모든 것은 제 업보입니다."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빗소리에 묻혀 희미했다.

오늘 밤이 지나면 김서현은 떠나야 했다.
살아서는 다시 만명의 얼굴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김서현은 찢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바닥에 이마를 대고 마지막 절을 올렸다.

"부디 좋은 사내를 만나… 평안하십시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였다.



우르릉- 쾅!




찢어질 듯한 굉음이 터졌다.
동시에 푸른 뇌전이 별채 지붕 위로 내리꽂혔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섬광이 김서현의 시야를 하얗게 뒤덮었다.
대지를 뒤흔드는 진동에 김서현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공주님...!"

김서현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광경에 숨을 멈췄다.

매캐한 탄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굳게 닫혀 있던 별채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두 사람을 가로막던 단단한 무쇠 자물쇠는 벼락을 맞고 검게 타 끊어진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마치 하늘이 격노하여 두 사람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직접 부숴버린 것처럼.

"……서현 공."

타버린 문틀 사이로 만명이 걸어 나왔다.
하얀 소복은 비에 차츰 젖어 들어갔지만 김서현을 바라보는 만명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공포에 질려 주저앉은 문지기들은 감히 그녀를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만명은 빗속을 뚫고 걸어와 멍하니 서 있는 김서현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보셨습니까?"
"공주님, 지금 이게 무슨……."
"하늘이 문을 열어줬습니다. 신라의 법도가 우리를 막는다면 하늘이 그 법도를 부수겠다고 답한 겁니다."

만명의 손이 서현의 차가운 손을 꽉 잡았다.
성골 귀족의 안락한 삶, 부모의 인정, 공주라는 명예.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이 빗속에 버려둘 결심을 끝냈다.

"나를 데려가세요."
"안 됩니다! 저는 가진 게 없는 망국의 후예일 뿐입니다. 저와 함께 가시면 평생 손가락질을 받으며 사셔야 합니다."
"상관없어요."

만명은 서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의 나라는 망했지만 우리가 만들 나라는 이제 시작이니까요."

그녀가 김서현의 손을 자신의 배 위로 가져갔다.

"우리가 낳을 아이가 이 모순된 세상을 바꿀 겁니다."

김서현은 망설임 없이 만명의 손을 강하게 마주 잡았다.

망국의 왕자 김서현과 신라의 공주 만명부인.
그렇게 야반도주한 두 사람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훗날 삼국을 통일할 김유신이었다.


📜 팩트 체크
김서현과 만명부인이 사랑의 도피를 할 수 있도록 벼락이 쳤다는 건 전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된 정사입니다.
더 자세한 김유신의 일대기가 궁금하다면 여기서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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